1985년 통합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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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KBO 한국시리즈
1984년
롯데 자이언츠
1985년 통합우승
삼성 라이온즈
1986년
해태 타이거즈
500px
전무후무, 한국시리즈 최초의 통합우승
파일:Attachment/samsunglionsks1985.png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

1 개요

1985년 프로야구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전년도보다 10경기 늘어난 55경기씩 총 110경기를 치렀다. 때문에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뤘다.

그런데 1984년 한국시리즈 때 최동원에게 털려서 빡친 삼성 라이온즈가 1985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휩쓸게 되자 한국시리즈는 자연히 소멸됐다. 이 사례는 김시진김일융 2명이 나란히 25승씩 50승을 합작했던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완전 우승을 달성했던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따라서 1985년은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이런 연유에서 농담삼아 1985년 한국시리즈는 삼성 구단을 둘로 쪼개 청백전을 했다는 식의 유머도 존재한다.

몇몇 사람들이 1985년에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던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물이다. 여담으로 이 때 삼성 라이온즈는 시즌 최고 승률인 0.706을 기록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시즌 전 스프링캠프를 당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훈련지였던 베로비치에서 가졌다. 물론 여기서 다저스와 경기도 가졌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에 나온 파란색, 흰색 유니폼이 미묘하게 청백전같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85년도 당시의 원정경기, 홈경기 유니폼이다.

사실 1982년 당시 OB 베어스가 이렇게 우승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농간(?)으로 통합우승에 실패하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시리즈를 치뤄야만 했는데 어쨌든 우승했다. 그리고 1984년 삼성도 전기리그를 우승한 뒤 후기리그까지 제패해 한국시리즈를 없애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상대 고르기로 선회했는데 그 대가는......

2 한국시리즈 규정 변경

1985년에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아 낭패를 보게된 KBO는 결국 다음해 한국시리즈에서 규칙을 바꾸게 된다. 왜 이시기를 기점으로 바꿨냐면, 선술했듯 KBO가 82년 OB에게 부조리스러운 본보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기에 우승한 팀은 후기에는 선수들의 체력안배를 염두하는 쪽으로 선회를 했는데 삼성이 이 불문율을 깬 것.

이 때 삼성은 한국시리즈 규정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제안을 내놓는데 다름아닌 플레이오프 4강으로 치르는 것을 내놓았다. 사실 당시의 전력으로 볼때에 삼성은 4강에는 들수 있는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3 부당한 대우

하지만 삼성 구단 프론트가 직접 한국시리즈 우승이 진정한 우승이라며 이 우승을 정식 우승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충수를 두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일각에서 한국시리즈가 없었던 1985년 통합우승을 실수로든 고의로든 기록에서 빼는 경우가 있는데 통합우승도 엄연히 KBO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우승이다. 여기에 준우승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해 준우승은 통합 및 후기 2위를 달성했던 롯데 자이언츠로 기록되었다. 의문의 콩 이 때가 롯데의 첫 준우승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이전까지는 타 팀팬들로부터 우승 한번도 못한 팀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단순히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다는 근거에서였다면 모를까, 애당초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구단 측에서 그렇게 선언을 해버렸으니...

이후 삼성은 2001년까지 해태에 3번이나 호구잡히고[1]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실점[2]의 피해자가 되는 등 전형적인 콩라인이 되었다. 그렇게 17년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루어냈지만, 삼성 구단은 시원스레 1985년 우승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3] 결국 2005년에야 캐치프레이즈에서 'V3'를 언급하면서 정식으로 우승을 인정했다.

4 기타

만화가 최훈이 기억하는 1985년의 삼성. 아래에 달린 코멘트는 각 선수들의 이미지를 4글자에 맞춘것이다. 원본은 김형준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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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뛰어 이해창 : 언제나 어디론가 뛰고 있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이번특화 허규옥 : 희한하게도 내야수 배대웅 천보성과 세트로 기억하고 있다.
타격머신 장효조 : 장효조는 항상 1루에 있다.
난교타자 이만수 : 공갈포라고 생각했었다.[4] 난교 타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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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전문 박승호 : 장효조 이만수 잘 넘기고 박승호에게 맞는 일이 꽤 있었다.
류수타법 김성래 : 삼성 최고의 타자는 김성래라고 생각했다.
사이클링 이종두 : 무조건 3할 치는 줄 알았다.
삼루의빛 김용국 : 헬멧이 벗겨졌을 때의 임팩트는 무덤까지 가져갈 것 같다.
꽃남유격 정진호 : 얼마전 정진호 코치가 현역 시절엔 꽃남이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정진호 코치의 현역 시절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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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노예 김시진 : 선동렬, 최동원 보다 더 멋있었다.
삼색커브 김일융 : 김일륭[5] : 공이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가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타자는 다 휘두르더라)
불굴의지 황규봉 : 이선희와 언제나 세트.[6]

초대소방 권영호 : 눈이 나빠도 야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1. 준우승 횟수는 1986년부터 이때까지 5회
  2.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 VS 두산 3회 12실점
  3. 이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여서 양준혁은 2002년에 와서야 삼성이 진정으로 우승을 맛봤다는 논지의 말을 남긴적도 있었다.
  4. 최훈이 과거 마구마구의 요청으로 특별 카툰을 그릴 당시 이만수의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이미지와 달리 교타자인데다 볼넷당 삼진갯수도 그 양준혁, 장효조 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내용의 포스트를 블로그에 올린적이 있었다. 아마 이만수에게 "난 교타자"라는 설명을 붙힌것은 이러한 감상에서 비롯된듯 하다. 포스팅 주소
  5. 당시에 김일륭이라 불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6. 아마 최훈이 언급하는건 원년인 1982년의 이선희를 뜻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82년 이후 이선희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유동에게 결승 만루홈런을 맞은 심리적 충격 때문이었는지 이듬해인 1983년부터 급격한 하향세를 탔으며 1985년에는 아예 MBC 청룡에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