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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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람. 왼쪽은 이승엽.

kt wiz No.
김용국(金用國 / Yong-Gook Kim)
생년월일1962년 6월 21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대구광역시
학력대구수창초-경상중-대구상고-한양대
포지션내야수(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5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소속팀삼성 라이온즈 (1985~1993)
태평양 돌핀스 (1994~1996)
지도자현대 피닉스 수비코치 (199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산하 싱글A 수비코치 (1997)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A 수비코치 (1998)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트리플A 수비코치 (1999)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 (2000~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06~2009)
넥센 히어로즈 1군 수비·작전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11~2016)
kt wiz 1군 수비코치 (2017~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천보성(1982 ~ 1984)김용국(1985 ~ 1993)이정훈(1995)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번
정문언(1991 ~ 1992)김용국(1994 ~ 1995)김인호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8번
김용국(2006 ~ 2009, 2011 ~ 2016)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박승호
(1989~1990)
김용국
(1991~1992)
강기웅
(1993~1994)

1 소개

삼성 라이온즈태평양 돌핀스에서 활동했던 야구 선수. 등번호는 7번(삼성) - 8번(태평양) - 94번(LG 코치) - 78번(삼성 코치) - 75번(넥센 코치)

2 선수 시절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4 LA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였으며, 한양대학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1985 시즌부터 1986년까지 꾸준히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류중일에게 유격수 자리를 넘겨준 오대석과 1987년 3루 자리를 번갈아 맡았으나 류중일이 1988년 팔꿈치 수술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어 오대석이 유격수 자리로 가면서 1988년부터 3루 자리를 지켰다.

1990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홈런 2개를 친 것이 커리어 중 백미였던 장면. 이 시리즈에서 선동열에게만 홈런 2개를 쳤다고 알고 있는 팬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1차전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 1개 포함해서 9회에 2타점 적시타까지 기록하며 맹활약한 것이 와전된 것이다. [1](1990년 정규 시즌 홈런은 2개) . 참고로 선동열은 2차전에서 삼성 김용철(야구)에게 또다른 홈런을 허용했다.

또한 1991~1992년, 2년간 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 삼성 1루수 신경식(야구),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김용국으로 이어지는 철벽 내야 수비진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그 당시에는 맨손으로 공을 바로 잡아던지는 이른바 'bare-handed catch'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3루수였지만, 이러한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2] 아쉽게도 매번 해태 타이거즈한대화에게 밀려 3루수 골든 글러브는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1993 시즌이 끝나고 태평양 돌핀스트레이드되면서 삼성의 3루수 자리는 후배 김한수에게 물려 주었다. 1994~1995 시즌 태평양 돌핀스 선수로 뛴 다음 야구단을 새로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기존의 선수단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1996년 그는 세대교체의 명분 아래 김성갑과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1996년 실업 야구 팀 현대 피닉스의 코치로 활동하며 현대 유니콘스에서 불러 주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가족들을 데리고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1997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산하 싱글A, 1998년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A팀에서 수비, 주루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양 팀 모두 무보수 방문코치 자격으로 있었다. 마침내 1998년 말 3만 달러의 연봉을 받게 되며 한국인 최초로 유급 코치가 됨과 동시에 트리플A 코치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장래에 미국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하려면 영어에 더 능숙해야 했지만, 결국 귀국을 결정했다.

2000년 LG 트윈스를 시작으로 2006년 삼성 라이온즈를 거쳐 2010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다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선동열 감독의 용퇴와 류중일 작전코치의 감독 승격으로 인해 삼성의 수비코치 자리가 비었고, 아직 넥센과 재계약하지 않았던 김용국 코치를 류중일 감독이 다시 불러들여서 영입한 것. 그리고 이 선택은 본인에게 있어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V5)이라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도 했다.그리고 이어지는 4 ㅎㄷㄷ

수비코치로서의 평은 무난한 편. 삼성이 원체 수비 조직력은 좋은 팀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능하다고 마구 씹히는 어느 모 투수코치에 비하면야 확실히 별 언급이 없는 자체가 이미 수비코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다만, 2009 시즌에 1군 수비코치를 맡아 팀 실책 1위를 기록한 적이 있었고, 이는 해임으로 이어졌다. 갈수록 능력이 발전한다고 이해하면 편할 듯.

찬바람이 몰아친 2016 시즌 후 삼성이 코치진까지 새대교체를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삼성은 그와 재계약하지 않고, kt 2군에서 수비코치를 맡고 있었던 박재현을 새로운 수비코치로 영입했다. 그 후 새로 부임한 김진욱 kt wiz 감독의 부름을 받아 강성우 배터리코치와 함께 kt wiz에 합류했다.

4 기타

  • 2010 시즌 7월, 올스타전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뤄지면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김용국이 레전드 3루수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의 고전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둘 다 프로 야구 선수였지만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하고 폭풍같이 방출당했다. 장남 김동영은 김용국 코치와 같은 팀인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는데 2013년 시즌 중 방출되었고, 차남 김동빈은 한화 이글스 소속이었으나 2012년 방출되었다.
  • 2002년 LG 트윈스의 KS 준우승에 어느정도 지분이 있다고 한다(...)
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LG가 8회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마,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ㅡ 한 강연에서 김성근이 2002년 비화를 이야기하며.

이 때 번트 사인을 놓친 서드 코치(3루코치)가 바로 김용국. LG 팬 지못미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올림픽 야구 사상 최초의 퇴장 선수다. 야구가 시범 종목이던 1984 LA 올림픽에서 미국과의 4강전에서 퇴장당했다.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팀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 자신뿐이어서 항의할 사람이 자기뿐이었다고 한다.[3] 2루 태그가 되기도 전에 아웃콜을 부르는 2루심을 보고 2루까지 가서 항의했는데 이것이 묵살당하며 2루심이 무시하며 뒤돌아서자, 돌아보라면서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바로 퇴장 크리. 결국 경기는 2:2로 팽팽하던 승부에서 5:2로 역전패당하고 만다.이 때도 미국은 작심을 했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85삼성 라이온즈99306.2397314173746336.359.319
1986108278.2166010203120620.266.261
198775182.264486142718617.374.319
1988101333.2859511134240835.351.349
198998333.2889615194453833.420.348
199091255.2205611042929214.310.256
1991126403.29511921175855456.404.380
1992121311.2648214163539443.373.353
199390202.208425021322329.262.306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4태평양 돌핀스121280.1895312043426348.275.302
199562135.21529410811313.259.282
통산10923018.25075312394635835950344.342.323
  1. 이 경기 전날 선동열과 밤새 술을 마셨다는 전설과 같은 후문이 전해진다. 자신은 조금 먹고 선동열은 많이 먹였다고...
  2. 타격에선 주로 9번으로 출장하였다.
  3. 팀 통역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뭐 그 당시에 영어 실력이 얼마나 됐겠나만 야구 선수들 중에서는 좋은 편이었던 듯. 이후 미국 유학에서도 이런 점이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