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학살

경고! 이 문서는 충격을 유발하는 내용 혹은 표현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사용자에 따라 불쾌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이미지, 외부 링크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열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여 발생한 피해는 바다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즉시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파일:3cHSWrQ.jpg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광주살육'으로 확대 재생산된 이 명령은 '5.18 광주살육'의 신호탄이자 전두환 폭력정권의 창출을 예고하는 폭탄선언이었다. [2]

-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

1 개요

이 항목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계엄군이 벌인 무차별 공격과 학살만을 중점으로 다룬 항목이다. 이것을 중점으로 정의한 명칭을 '광주학살'이라 한다. '광주학살'이 이 항목의 리다이렉트 항목이다.

1.1 '광주학살' 명칭 사용여부

광주학살 이란 명칭은 나무위키나 일부 인터넷에서만 쓰는 단어가 아닌, 옛날부터 지금까지 썼던 단어이다.
파일:Nt7J6sL.jpg
사진출저

2 배경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5.18 민주화운동항목 참고

3 전조

18 일 새벽, 전남대에 공수7여단 33대대가 진주했다. 그후 공수부대원들은 정문을 장악했다. 도서관에 공부하려 모인 학생들과 5.17내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당황해서 모인 대학생들은 공수부대한테 막혀 학내에 구속됐다. 진주한 33대는 교내를 수색해 학생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연행해갔다. 이 때 학생들 중엔 농성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멀쩡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대학교도 상황은 비슷했다.

광주교육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영남 씨는 평소처럼 테니스를 치기 위해 대학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왔는데 공수부대원 중 한 군인이 임영남 씨를 불러놓고 다짜고짜 발을걸고 넘어트리고는 군홧발과 몽둥이로 온몸을 구타했다.[3]

전남대 정문에선 몇몇 학생들이 돌을 던졌고, 한 장교가 그 중 한 학생을 잡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 후에도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33대는 진압을 위해 2개 지대를 동원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도망가자 인근이나 집까지 찾아다녔다. 근처에서 지나가던 버스에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생들까지 7여단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계엄군은 신분을 밝히고 다가간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한다. [4]

18 일 오전 11시쯤 계엄군은 독서실에 올라가 가만히 입시 준비하던 고교생들을 구타했다. 이유없이 매를 맞아서 학생들은 독서실에서 울고 있었다. [5] 학생들은 시내로 몰려들고 시내에서 파출소에 돌을 던지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들의 진압에 따라 무너지거나 흩어졌다.

18일 14시 30분,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10~20명 단위로 시내에서 배회하는 수준이 된다. [6] 공수부대 시내 투입은 전혀 필요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한테 지시를 했고, 정웅 31사단장은 지시를 따라 7공수여단 시내 투입을 명령한다. 7공수여단이 아직 시내 출동하기전일 때, 계엄사는 동국대 주둔 중인 11공수특전여단 증파를 결정한다. [7] 현지의 전남북계엄분소는 요청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유동 삼거리쪽에 1개 중대 공수부대 병력이 나타났고 시민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 때만 해도 시민들은 '시위진압'이 아닌 '무차별 살육' 혹은 '폭동적 진압'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8]

4 도청 발포 이전 살육

4.1 무차별 무경고

18일

오후 4시 쯤 얼룩무늬를 입은 군인들이 유동 삼거리에 나타났다. 세겹으로 횡렬을 지어 도청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지휘자가 '제자리 서, 정렬'이라 하자 군인들은 횡단보도에서 일제히 멈춰서 대오를 가다듬으며 대기했다. 유동 삼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였고, 북동 180번지와 루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9]

그러다 정확히 오후4시 정각이 되었다. - 당시 김영택 기자는 이 시간을 자신의 메모장에 정확히 기록했다. [10]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탑챠량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이었다.[11] 이 때 시민들은 당시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방송에 있은지 1분정도 지났을까 말까하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명령이 군인들한테 떨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이 딱 한마디가 다였다.[12] 이 명령 이외 세세한 행동지침 따윈 없었다. 시위해산이나 시위자 체포같은 말도 덧붙이지않았다.

시위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유동 삼거리쪽에 다가왔을 때 부터 이미 대부분 잽싸게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 박사학위 논문에선 이 명령을 광주민중항쟁을 일어나게 한 폭탄선언이라 평가한다.[13]

거리에는 지옥이 열렸다. 〈전교사 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 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돼 있다.

군인들은 진압봉과 착검한 소총을 겨누어 잡고 '인간사냥'에 나섰다.

파일:ZulUq6j.jpg
파일:7oPPIm3.jpg

2007년 국방부의 진상규명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을 위해 폭력을 쓴게 아니라 체포를 위해 폭력을 썼다. 공수부대는 시위를 안 한 시민들까지 포함해 무차별 진압봉 공격과 대검 공격을 벌였다. 시민들이 공포를 떨고 공수부대에게 걸린 시민은 여러곳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다 11대의 군용트럭이 횡단보도에서 50m 떨어진 서석병원 앞길에 정차하고 군인들을 쏟아냈다. 그 군인들 역시 무차별로 시민들을 공격했다.[14]

7여단의 행위에는 이유나 원칙도 안 보였다고 박사학위 논문에선 평한다.[15]

「기동대원들은 갑작스런 공수부대의 출현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반면 의아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의 인상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또한 그들은 진압에 나오면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나왔을 것이며 명령에 의해서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훈련 속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공수부대의 모습을 본 시위대는 무서움에 한 순간 모두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방관자나 구경꾼들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도 같은 군인의 입장이었지만 무섭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시민들 역시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공수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압자세를 취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지휘자는 '시민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하고 핸드 마이크로 외쳐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대원들은 3-5명씩 무리를 지어 시위대를 향해 쫓아가 불문곡직하고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차는 등 터무니없는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기동대는 중앙극장 앞에서 방패를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공수대원들의 진압과정을 지켜보면서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기동대는 목격자가 되어 다소 안정감 속에서 공수부대에게 적의를 느끼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시위를 자극할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무작정 두들겨팬 뒤 기진맥진한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어다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는 더 이상 실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댔고, 공수대원 2명은 트럭 위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차 바닥에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공수대원은 총을 들고 서서 마치 짐승 다루듯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사람들은 차 바닥에 엎드려 신음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등까지 살이 벗겨졌다.

트럭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트럭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상무대나 31사단으로 옮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가 나타난 이후 기동대는 진압은 하지 않고 쉬면서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임무 수행하듯 지켜보았다.

8시경 공수부대가 장악한 거리를 뒤로 하고 기동대는 부대로 복귀했다. 통금시간이 당겨진 이유로 9시경 점호를 마치고 바로 잠을 잤다.

이날의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한 나는 대원들 2명과 함께 죽음의 도시, 칠흑같은 화정동 잿등을 지켜보며 소주를 마셨다. 대원 중 몇명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 잠을 못 이루며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들 역시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공수대원의 강렬한 인상과 참혹했던 진압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


- 박시훈(당시 의무전경) , 의무전경으로 시위진압에 나서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척,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쫒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기온 16.3도로 아침을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 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2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부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이 무차별 폭력에는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는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214」
「 11대 군용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처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그녀를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여성한테 옷을 입혀주는 행위조차 막아섰다.

「이 때 한 40대가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을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재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입 저입에서 튀어나왔다.
...한마디, 두마디가 모여 군인들의 귀에도 들렸음인지 그들은 병원 사무장이 던져 주려 했던 가운을 홱 던지며 "입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 해 비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채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빠져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제일고등학교까지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일본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일본 경찰들은 적어도 교장실에 들러 사전 양해는 구하고 연행해갔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군화를 신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받던 학생들을 두들겨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10대 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어른 학생들이다. 이들도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학자금이 없어 정규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 직장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복을 입고 있던 한 육군 간부도 뚜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재빨리 뛰쳐나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다. 눈물이 난 건지 눈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16]

그날 고등학교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쫒겼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17]

「공수부대원들의 몽둥이와 군홧발길은 이곳에서 100m도 안 떨어진 광주제일고등학교에도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일본 경찰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던 교실.

그들도 학생들을 연행할 때는 교장실에 들러 교장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 후 교실로 들어가 이른바 '불량선인'을 연행해 갔었다.
그러나 우리의 국군은 군화를 신은 채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이날 교실에서는 정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젊은이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도 시위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2쪽」
「1980. 5. 18.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 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0~771」

그 무차별 폭력속에서 결국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청각장애인이었다. 김경철 씨이다.

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다방에선 청년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서 포승으로 묶은 뒤 트럭에 내던졌다. 청년의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여자 하나가 '학생이 아니다'라고 울부짖자 공수부대원들은 땅에 내동댕이쳤다.[18]


당시에 기록된 5.18 사태일지에 따르면, 조선대 입구 철로변을 지나가던 학생 11명을 공수부대원들이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다한다.[19]

4.2 대검살육

파일:VMKojiJ.jpg
파일:IF98Y2i.jpg
파일:UOhter8.jpg
파일:E7WV0pv.jpg
파일:KdH9wot.jpg
[KBS, 푸른 눈의 목격자]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1950. 5.18'을 따르면 대처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 '7空輸隊 銃劍鎭壓'라고 적혀있고 안기부가 1985년 작성했던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써져있다.[20]

3공수여단은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막아선 시위대에게 대검을 썼다. 광주역앞에서 죽어있던 허봉 씨는 좌측 전두부가 대검에 찔린 상태였다.[21]

검찰조사결과에 따르면 하언남, 최승기, 김인윤, 이인선, 최미자 등이 대검에 찔렸고 사망자 손옥례, 권근립, 윤개원, 김평용, 박종길, 민병렬, 허봉, 김경환 등 시체에서 대검 흔적이 있다.[22]

5월 22일 전교사 연병장에선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연행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몇시간 뒤 결국 죽었다고한다.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 현장에서 있던 계엄군이 직접 목격하고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다 증언한 사실이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했는데 자신한테 대들고(!) 술냄새가 났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군기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보니 전재서 씨는 22일에 국군통합병원에 도착하고 23일 새벽 5시 20분에 죽었는데 '우측 두부'(귀 뒷부분)에 찔린 상처가 있다고 한다.

「5. 22.경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이 목격했다고 우리 위원회 면담과정에서 증언했다. 김순현 전투발전부장에 의하면 그 부상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 으로 후송되었으며,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우리 위원회는 김순현 전투발전부장 등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는 총 15명이었다. 검시후 이중 1명은 가족들에게 양도됐고, 14명은 전교사 내에 있는 101사격장에 가매장됐다.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들 중 자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송정교, 전재서가 있다. 송정교는 24일 송암동에서 사망했다. 전재서는 검시참여 결과 보고 에 5. 22. 21:30에 앰뷸런스로 통합병원에 도착한 후 5.23. 05:20에 사망했다고 기록됐다. 그의 사인은 우측 두부(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 같이 적혀 있다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4」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원이 칼을 던진 것을 중앙일보 취재팀이 목격하기도 했다.[23]
링크영상 9:14초부터. 땅바닥에서 대검을 주워 장착하는 모습이 보인다.

4.3 19일 이후 "인간 사냥"

파일:GHi6QkB.jpg
파일:OeMKq4w.jpg
파일:QSsr4Uv.jpg
파일:6499X4g.jpg

아침부터 학생들이 공부중인 학원 강의 강의실에 난입해 마구 때려패기도 했다. -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시민들이 보는데서 학원생을 옷 벗겨[24] 구타까지 했다.[25]

오전 11시엔 소위 한 사람이 시민들 돌에 부상을 입자, 시민들은 보이기만 무차별로 구타를 했다. 11시 25분엔 공수부대원들이 동구청 민원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2명을 잡았고 구청 변소 앞에서 8명이 진압봉과 전투환로 때렸다. 11시 34분엔 동구청 앞 도로에서머리가 길고 젊기만 한 사람은 무조건 잡아서 허리띠를 빼앗아 차창 옆에 던진 뒤, 엎드리게 해서 진압봉으로 무차별로 갈겨댔다. 일부 시민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 윗옷이 빨갛게 됐다.[26]

시위대가 안 보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때려팰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아무 시민을 뒤져서 패고 끌고갔다.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젋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무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는 것이었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구든 것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 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취침, 앞으로취침, 좌로굴러, 우로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키는 것이었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타는 것이었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숙여" "고개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 1980년 5월 19일, 11공수여단의 행위에 대한 11공수여단원 하사의 증언(본인은 5월 18일로 잘못 알고 있음), ))」

금남로 3가 미도장여관 1층에는 종업원인 김영대(32), 김병렬(17), 손병섭(26), 박필호(21)와 40대 투숙객 2두명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데모하다 쫒겨 온 놈들을 내 놓아라'하면서 개머리판과 진압봉과 군홧발로 그 사람들을 뚜들겨 패고 옷을 벗겨 팬티차림으로 만들고는 조선대학교 체육관을 끌고가 구타를 하였다.[27]

신경진(35) 씨는 광주관광호텔 앞에 서있다가 '와' 하는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제일은행 광주지점 옆길로 뛰어들다 넘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은 뒤쫒아가서 진압봉으로 치고 대검으로 오른쪽 무릎을 찌르고 군용트럭에 실어갔다.[28]


파일:SLJmvFZ.jpg
어떤 젊은 부부는 멀쩡히 길을 지나가다가 공수부대원들한테 얼굴에서 피를 흘릴만큼 두들겨 맞았다.#

학원이 많아 학원가 거리라고도 불렸던 금남로 1가 YWCA 건물 옆길에서 두 여인이 걸어갔다. 공수부대원들은 그중 20대로 보이는 여자를 갑자기 진압봉으로 때렸다. 다른 여자가 항의하자 마찬가지로 진압븡으로 때렸다. 고시학원에서 나오던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학생들을 두들겨팼다. 학원 안에 있던 학생들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조경숙(20)씨를 비롯한 수강생 50명을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뚜들겨패고 최용범(20) 등 10명은 밖으로 끌고와서 밖에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뚜들겨팼다.[29] #

이 현장엔 신복진 이라는 사진 기자가 있었다. 신복진 기자는 이 현장을 카메라로 여러번 찍었고 그 사진들은 신복진, 광주는 말한다, 2006 에서 볼 수 있다.

군인들은 오후에 더욱 잔인해졌다.

11공수여단 63대대 부대원들의 증언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씨의 증언,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07~208」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 연행 구타 등을 하니 참 무고하게 길을 가다가 많은 젊은이가 피해를 보았죠. 또한 조직적으로 시위를 했던 시위대는 별로 연행자가 없었으리가 나는 생각하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8」

오후 7시 30분쯤 최미자(19)씨는 학동 남광주역 부근에 있는 친구집에 가고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장갑차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골목길로 달아났고 최미자씨도 같이 달아났다. 장갑차를 타고 온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질과 함께 발길질을 했고 그 중 최미자 씨는 오른쪽 겨드랑이와 젖가슴사이 오른편을 대검에 찔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30]

금남로를 뺀 도로에는 시내버스와 택시들이 운행을 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차들을 세워 운전자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일을 벌였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운반해준다는게 그 이유였다. 이런 기사들 구타사건들은 운전기사들을 흥분하게 있다.[31]

동구청 건물 1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국 작전과장 안수택 총경은 시민을 몇명을 방면해줬다가 공수부대 장교한테 '왜 폭도들을 빼돌리느냐;면서 두들겨 맞았다. 같은 경찰까지 두들겨 팼던 것이다.[32]

1989년 국회청문회를 대비해 보안사에서 작성한 문건에도, 계엄군이 무차별로 구타하고 무혐의 가게 종업원 및 배회자는 연행했으며 버스와 택시를 검문해서 학생들은 모두 연행했다고 나온다.[33]

시민들은 그 순간들을 자기 집에서 쳐다봤다. 군인들은 마이크로 말하며 '문을 닫아라' '커튼을 쳐라' '내려다 보면 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고 베레모를 쓴 지휘관이 지휘봉을 들고 금남로 2가와 3가 사이에 나타나 길 양쪽을 올려다보며 문을 닫고 내려보지말라며 소리를 질렀다.[34]

19일 오후 5시쯤에 광주시 서구 월산동 32으 22 4통 1반에 사는 김안부(36)씨는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공수부대원들한테 맞아죽었다. 시체는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부인인 김만복씨는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해 시민들은 사망자가 나왔다는걸 알게됐다.[35]

중앙일보 취재기자인 김충근 기자는 피곤해서 방공호에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군인들에게 짓이겨진 시체 2구를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36]

참고로 사건당시 국내기자들은 시위대들한테 혐오를 받고 공격까지 당했다. 예로 ‘인간 사냥’이란 표현을 쓴 김충근 기자만 해도, 차를 타고 있는데 시위대한테 화염병 공격을 받아 차가 불에 휩싸인 적도 있다. [37] 그런데도 저런 증언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공수부대원 조차도 그런 증언을 한다. 위에 본 이경남 씨 경우가 그렇다.

‘공수부대원에 대한 이야기는 한쪽편만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자체가 5.18 공부를 안 했다는 인증이며 사학계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당시 현장 취재 기자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학생과 젊은 층들의 일부 시위가 있었지만 광주 시민들 대부분 일상 생활을 하고 있었고,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에 시위가 흔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번 시국엔 데모가 좀 심하겠네 라는 정도의 일반적인 인식이 있었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데모를 했지만 전투경찰 정도였고,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을 위해 광주에 온건 처음이라서 군인들이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지나 살면서 데모를 항상 보고 살았던 시민들에게 이 정도는 약간 심할 정도일 뿐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전쟁터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수부대원들의 초기 진압작전은 인간사냥이라는 표현이 무색했다.

진압작전 당시 화염방사기 사용 논란도 있었는데
불에 탄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추가바람

5 도청 발포 이후 살육

#

5.1 개시

21일 오후 1시가 되기 직전, 시위진압을 위해 지원 나왔던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 한대가 시위대에게 화염병을 맞아 불이 붙었다. 장갑차가 뒤로 가자 시위대 장갑차가 계엄군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 돌진에 한명이 쓰러지고, 다른 한명[38]은 깔려 사망했다. 장갑차가 지나간 뒤 시위대중 한명이 쓰러진 계엄군의 총인 M16을 들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그냥 버렸다.[39] 계엄군은 도청 분수대 뒤와 도로 주변으로 피신했다. 계엄군은 장갑차를 향해 총을 쏘았고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서 장소밖으로 나갔다. 그 뒤 버스 두대가 계엄군쪽으로 돌진해서 분수대를 돌았고, 계엄군은 버스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버스에 탔던 운전사 한명이 사망했고 버스는 분수대를 들이받고 멈췄다. 그 뒤 시위대중 일부는 차량과 함께 도청쪽으로 몰려들었다. 그 때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일부는 그대로 돌진했고 일부는 애국가를 불렀다.[40]

5.2 도청집단발포

#
#

「나는 오른쪽으로 도청 앞 광장, 왼쪽으로는 금남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의 3층에 서 있었다.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체를 취했다. 바로 그 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꼬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 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두 열의 총격이 끝나면 무릎쏴 자세의 대열이 후미로 빠져 트럭을 타고 빠져나가는 그런 교대형태로 광주의 공식적인 집단 발포명령을 집행되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금남로 거리에 가로 걸린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석탄일 축하 아치와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살육이 빚어내는 극과 극 사이의 대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23」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 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16」

5.3 무차별 사격

1시 10분 경 시민들은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양쪽 보도에 집결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쪽으로 돌려놓고 사수 10명은 금남로쪽 큰길을 향해 앉아사 자세를 하고 있었다.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지하사강가 공사장 위에 있는 큰 길에 모여있던 젊은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연행자를 석방하라'같은 구호들을 외쳤다. 그리고 애국가를 불렀다. 그 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몇명이 다시 구호를 외쳤고 젊은이 5, 6명이 큰 길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다. 도청광장에서 400m쯤 떨어진 금남로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부대원들은 앉아쏴 자세로 조준해서 쏴버렸다. 젊은이들 머리와 가슴과 다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몇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시체와 부상자들을 데려갔다. 또 다시 5, 6명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면서 구호를 외쳤고, 공수부대원들은 다시 쏴버렸다. [41]

「1천여 명의 민중들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 지점과 금남로 3가 양쪽 보도에 집결했다. 공수부대가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쪽으로 돌려놓고 사격자세를 갖춘 상태 인 채 10여 명의 사격수들은 금남로쪽 큰길을 향해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때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지하상가 공사장 위의 큰 길에 묘여 있던 젊은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갖가지 구호를 외쳐댔다. '계엄령 해체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최 돼지 물러가라' '끝까지 광주를 사수하자' '연행자를 석방하라' 등 그 동안 외쳐온 구호는 모두 쏟아져 나왓다. 그뿐만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차분하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도의 많은 시민들은 물론 이들과 대치하여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계엄군도 이 애국가를 듣고 있었다. 어떤 행사의 전주곡인 듯 노래 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애국가이기나 했다. 잠시 숙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명 사람이 다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5,6 명의 젊은이들이 큰 길 복판으로 뛰쳐나갔다. 그 중 한명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도청광장으로부터 3, 4백m 떨어진 금남로 한 복판에서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쳐대던 5,6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와 가슴과 다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공부수대 저격수와 미리 주변 옥상에 배치되어 은신하고 있던 저격수들이 정 조준하여 사격한 것이다. 시위민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가해진 정조준 발사였다. 땅에 떨어진 태극기에도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아스팔트길은 시체와 신음소리와 태극기와 피로 덮여 있었다. 몇 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시체와 부상자들을 들어냈다. 더욱 놀라운 일이 그 다음 벌어졌다. 또 다른 5,6 명이 역시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면서 구호를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사격이 일제히 가해졌다.

- 김영택 기자의 증언,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75~176에서 재인용」
「일단 동시다발적인 총소리는 조준사격이 아니라 공포였다. 공중을 향해서 쏘니까 실탄이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도청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한 것이 보였다. 실탄은 별로 많이 지급이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포를 쏘고 난 다음 장갑차 한 대가 노동청을 향해 서 있었는데 내가 서 있는 곳과는 직선거리 10미터도 못 되어 장갑차 안에서 한창이 꼽혀진 띠를 공수들에게 던져주고 또 탄박스를 내려주는 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공수들은 탄박스를 받아 탄창에 실탄을 기웠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공수들을 보고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계급장을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수들은 실지 장교인지 사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공수들은 그때부터 도청 앞에 돌로 난간을 만들어놓은 곳에 길어 조준사격을 하기시작했다. '무릎앉아쏴,서서쏴' 자세를 취하고 총을 쏘는 공수들도 있었다. 만약 시민들이 총을 들었다면 어떻게 광장에서 공수들이 산개를 해서 총을 쏠 수 있었겠는가. 장갑차에서도 사격을 했다.

우리 전경들은 그 총을 사용해 보지 못했는데 캐리버 50이었을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 같은 것을 당겼다. 장갑차 위에 총이 달려 있었는데 시위군중들이 있는 노동청과의 거리는 1백미터도 채 못 되었다. 다연발 총으로 쏘아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불과 몇분 만에 다시 모여 시체을 떼메고 가고 나면 또 모이고 그러면 또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그러한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그곳으로 다시 오면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모여들고 또 모여들고 하는 것이 꼭 불을 찾는 불나방들 같았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


- 곽형렬( 당시 의무전경), 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저격수 요원들은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나 시민에게 무차별로 총을 쏘기로 하였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공수부대원들 만나 면담해서 알아낸 것을 따르면, 실탄받은 공수부대원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시위 군중에 대한 계엄군의 공격양상을 살펴보면, 몇몇은 위협사격을 했으나 몇몇은 조준 사격했다.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은 뒤 공수부대원 일부에게 실탄이 지급됐다. 그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장 박○○ 소령도 검찰진술에서 도청 앞 사격이있은 뒤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하였다고 진술했다. 우리 위원회의 조사에서 11여단 62대대 소속 한○○ 일병은 광주관광호텔 옥상에 4명이 1조가 되어 올라갔으며 사수의 지시에 따라 조준경이 달린 총으로 주동자나 총기를휴대한 시위대를 조준사격했다고 고백했다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89」
「저격수 요원들이 금남로 쪽으로 향해 아스팔트에 '엎드려 쏴' 자세로 저격준비를 갖추고 주요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했읍니다. 그 때 전일빌딩 옆 건물에서 젊은 청년이 "이 개새끼들아 나 죽여라"하면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저격수들 바로 앞 20~30m 거리의 도로중앙에 나와서 앉는 것입니다. 저격수들이 몇 발의 사격을 가하자 옆으로 쓰러지는 것입니다. 골목에 있던 시위대가 시체를 가지러 나오자 또 사격이 실시되자 그 시위대 역시 쓰러진 것입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1」
- 오후 2시쯤 금남로에서 벽에 몸울 숨기고 잇던 한 시민이 목에 총을 맞고 숨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조준사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 건물 위에서 조준사격을 하는 모양입니다. 오후 2시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 도청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장재열 ( 중앙일보 기자 ), 아직도 굳지 않은 핏자욱, 5.18 특파원 184~185」
「도청 앞 공수대원들이 발포했다, 주변 건물에서 매복조가 저격했다는 등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금남로 2가 상업은행 부근에서 시위대 물결 속에 휩쓸려 있을 때였다. 오후 2시 10분께 총성이 울리는가 했더니 옆에 있던 한 시민이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스러졌다. 가슴이 멎는 느낌이었다. (총맞은 사람은 확인 결과 김후식이라고 하는 39세의 산수2동 주민이었다.)

- 조성호 (한국일보 기자), 오월 고아주의 회상, 5.18 특파원 198」

나이먹은 시민들의 증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사건 당시 도심지 내에 저격병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거나 경험했다는게 증언들의 공통분모이다.

전남대생 김광석(21) 씨는 점심을 먹고 금남로로 나왔다가 친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걸 보았다. 김광석 씨는 친구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일으켜 세우다가 뒤이어 날아온 총탄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42][43]

13 시 30분엔 시민들이 노획한 장갑차 1대가 쏜갈같이 달려왔다. 장갑차 위에는 윗옷을 벗고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태극기 휘두르며 '광주만세'를 외치던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공수부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때 충장로 입구 도심빌딩 5층에선 어린 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보려했다. 황호정(62) 씨는 이를 막고 창문을 닫으려했다. 그러다 총탄 세례를 받고 사망했다.[44]

5.4 전남대학교 발포

전남대학교 앞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정문에는 10명, 후문에는 1만명이나 되는 학생과 시민, 시민군이 모여서 3공수여단과 공방전을 벌였다. 전남대에 연행당한 사람들을 보러오거나 사람들을 가둔걸 항의하러 온 사람들이었고 이 사람들은 가족들의 생존여부를 알아보려고 전남대로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3공수여단이 완강하게 저지했다. 오후 1시 30분쯤 학생과 시민군은 아세아자동차[45]회사에 탈취한 차들로 그걸 뚫으려했고, 그걸 위해 경찰이 쓰는 시위진압용 가스차까지 동원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총격을 가했다. 운전기사들은 물론 시위와는 상관없이 골목길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까지 희생됐다.[46]

최미애 씨는 오후 전남대 앞 평화시장 입구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공수부대원들은 총을 쐈고 최미애 씨는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최미애씨는 임신 8개월이였고, 8개월된 뱃속 아기도 마찬가지로 죽었다.[47] [48]

5.5 자위권 발동

성난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태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쿠데타를 벌인 내란세력 수괴였던 전두환은 자위권 발동을 주장[49]했다. [50] 오후 16시 30분엔 국방장관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류병현 합동참모의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 백석주 연합사부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를에 따라 신군부 반란세력이 부리던 계엄군의 소위 말하는 자위권 발동이 공식으로 결정됐다. [51]

6 연행자 학살

검찰조사결과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은 날씨가 더운데도 사람들을 한트럭에다 과다할정도로 쑤셔넣었고 안에다 최루탄까지 터트렸으며 차가 교도소에 도착 했을 때까지는 6명이 죽었다. [52] 또한 철수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체 12구를 암매장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53] 어떤 인간들은 ‘시민군이 묻은 걸 수도 있다’고 우겨댄다. 그런데 그 암매장 사람들중에선 공수부대원들한테 연행당한 사실이 분명히 밝혀진 사람들도 있다. 안두환(남, 46세), 장방환(남, 57세)은 공수부대원들한테 연행당했는데 광주교도소 지역에서 죽은채로 발견됐다.[54]

「포승줄로 손이 묶이고 굴비처럼 엮어진 채 서 있는 자세로 병기수송 차량도 같은 밀폐된 트럭에 실려갔다. 한 트럭당 삼십 명쯤 탔는데 작은 유리창이 양쪽으로 두 개가 있었고 유리창 바깥쪽은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차는 전남대 후문쪽으로 빠져나갔다. 유리창 틈으로 내다보니(나는 팔이 부러져서 뒤로 손을 묶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을 움직이가 편해 간신히 유리창으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전남대 정구장 쪽 비탈에 두 명의 아가씨가 가슴에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고 씌어진 천을 두른 채 움직이지 않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이송되는 도중 그 밀폐된 차 안에다 최루탄을 쏘았다. 순식간에 생지옥이 되었다. 전원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쌌다. ...
목적지(광주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내가 탄 트럭에서만도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살아 있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최루탄 때문에 얼굴 피부가 벗겨져 지도를 그려놓은 듯 빨갛게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소는 교도소 면회실 근방이었는데, 우리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원산폭격' 기합을 받았다....구타당하던 중 매에 못 이긴 한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돈으로 안 될 게 뭐 있느냐. 돈 먹어라!" 라고 소리치면서 자기 옷 속에서 만 원짜리 묶음 4뭉치를 꺼내어 확 뿌렸다. 지폐들이 원산폭격 자세로 있는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공수대 여섯 명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들어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기자 그 사람은 이내 쭉 뻗어버렸다. 그리고 원산폭격 자세에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총성과 함께 총알이 핑핑 지나갔는데,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시체처리 장면을 못 보게 하기 위한 위협사격인 듯하였다.

갈증으로 오줌을 마시는 사람도...

그런 후 우리들은 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사형집행자 대기실)에 수용되었다. 며칠째 물 한모금 입에 대보지 못했으므로 탈진상태에 빠진 우리가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자 공수 한 명이 "야, 오줌 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수 한 명이 즉석에서 물컵에다가 오줌을 싸서 주었다. 한 사람이 그걸 덥썩 받아 마치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그 때 느꼈던 치욕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창고에 수용된 후에도 무릎을 꿇은 채 대검, 곤봉, 총 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매일 수백대씩 구타당했다. 이러한 살인적인 구타는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은 잡혀왔던 예비역 해병 중사(본인이 그렇게 신분을 밝혔음)가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나 죽여라."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오냐, 죽여주마." 하면서 5, 6명이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또한 그들은 작전 나갔다가 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시체를 갖다놓고, "너희 같은 놈들이 죽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죽어봐라." 하면서 짐승을 잡듯이 두들겨패서 한 명씩 한 명씩 죽였다. ...무릎꿇은 자세에서 발가락을 바짝 곧추 세우고 있게 하다가 견디다 못해 발가락이 펴지면 대검으로 발가락을 짓이겨 버렸다. 일명 '닭발요리'라고 하는 기합이었는데, 말 그대로 닭발을 쪼듯이 탁탁 두들기며 짓이겼다.


- 증언자료)살인적인 고문에 죽어나가는 사람들/강길조

7 광주시 외곽봉쇄 작전

7.1 개시

19시 30분에 계엄사는 전교사한테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하라'(작전지시 80-5호)는 지시를 내렸다.(보안사, 광주사태일일속보철, 383-1980-89 ,236쪽) 이 명령에 따라 3공수여단 265/1261 병력은 광주교도소를 경계하며 남부 고속도를 차단했고, 7공수여단 82/604 병력과 11공수여단 163/1056 병력은 광주-화순 도로를 차단했고, 20사단은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했다.[55]

7.2 교도소 지역 학살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한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3공수여단의 임무는 광주교도소 경계뿐만 아니라 남부 고속도로를 차단하는 것도 있었다. 당연히 많은 민간인들은 광주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지나가지못하게 그 부근을 차단하고 민간인 학살을 여러번 벌였다. [56]

김성수 씨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사건 당시 고향인 진도로 가려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시내를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막았고 다시 북쪽에 있는 담양쪽을 나가려했으나 계엄군(3공수여단)이 막았다. 아내 김춘화씨는 울면서 보내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했다. 계엄군은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총으로 위협까지했다. 김성수 씨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딸을 차에 태웠고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차를 향해 계엄군은 무차별로 싸댔다. 돌아가라 시켜서 돌아간건데 오히려 그 사람들을 무차별로 쏴댄것이다. 김성수 씨는 의식은 있었지만 아내와 딸은 혼수상태였다.

아내인 김춘화씨는 뇌수술을 세번이나 받고 정신이상증세까지 걸렸다. 나중에 차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딸 내향(당시 5살) 씨는 하반신 마비가 됐다. [57][58]

그 외 교도소 주변은 민간인 학살이 여럿있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94~95」

합수부는 이걸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이라 날조했다. 그 내용을 따르면,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동생 류영선과 처 신애덕이 시위에 가담했고, 그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해서 류덕진을 구출하게 선동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류영선은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 1차: 광주교도소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2차: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18쪽]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은 이 사건을 조사를 해봤는데 이게 조작이라는 밝혀냈다.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한테 예비검속 당한 딸 류소영을 찾고 있었다. 류영선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대 머리를 총에 관통당해 사망했다. 합수부는 '도청앞에서 죽은 시민이 교도소 습격했다'는 왜곡을 벌인 것이다.

----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18쪽

이렇게 이미 진상규명이 완료됐는데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아직까지 시민들이 교도소 습격했다고 날조(혹은 아무런 증거도 없고 정황증거도 성립하지않는 유사학을 주장)한다. 이 세력들은 이러면서 ‘광주교도소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이라는 것’,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일까지 맡았다는 것’은 절대 설명하지않는다.

7.3 너릿재 터널 입구

7공수여단은 5월 22일 13시 16경 너릿재 터널 입구에서 화순에서 광주로 오던 1/4톤 트럭에 총을 쏴 1명을 연행하고 1명을 쏴죽였다. [59]

3_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
지원동에서 미니버스가 총격을 당했다.

김춘례는 23일에 할아버지 제사를 가려고 기숙사 동료인 고영자와 함께 시민군들한테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백대환은 데려다주기로했고 17명과 함께 도청에서 출발해서 화순으로 향했다.[60] 그 때 군인 한 명이 도로변에 나와 차를 멈춰라 그랬다. 버스는 그걸 무시하고 세게 달렸다. 그렇게 무시하고 달리니 산쪽에서 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 차 안에 있던 젊은이 2~3명은 산에다 총을 쐈다. 남학생들은 머리에다가 총을 들고 항복했고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래도 총알이 계속 날라왔고 사람들은 엎드렸다.[61] 총알은 계속 날라왔고 15명이 사망했다. 3명이 살아남았다.


홍금숙과 부상자 2명은 주남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됐다. 간호봉사원들은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거부했다. 11공수여단 작전보좌간인 김 소령은 부상자들을 데려온 것을 책망까지했다. 군인들은 부상자 2명(채수길, 양민석)을 인근 야산으로 데려간 뒤 쏴죽였다. 당시 현장 부근에는 11공수여단 간부들이 있었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 중사는 사실을 알고도 제재조치를 하지 않았다.[62]

7.4 아이들을 상대로 발동한 자위권(?)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트럭에 탄 채로 진월동 원제부락 저수지 옆길을 통화갈 때 10대 남자아이들 15명이 저수지에서 놀고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자위권(?)이 발동됐다.[63]

원제마을 저수지 옆길을 지나던 공수부대는 무장 시위대를 발견했다. 이 때도 수하를 한 뒤에 거부시에 발포해야했으나 수하 없이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또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330)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 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 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있고 난 뒤 2 군사령부에서는 16:00에 군부대 상호간의 충돌방지를 지시했다"

-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02쪽

뒤따르던 군인들은 주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일부 군인들은 저수지를 향해 발포했다. 방광범(13)은 피하지못하고 총알에 맞아 죽었다. 진제마을 뒷동산이 청주한씨 선산에도 몇명 아이들이 놀았다는데 그 아이들을 향해서 발포가 일어났다. 이 때 전재수(10)가 사망했다.[64]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 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격을 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두 발씩 들리던 총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16-217」

7.5 아군끼리 죽여놓고 무고한 민간인들한테 화풀이

송하동일대를 지나갈 때 11공수여단 62대대는 아군인 전교사 병력한테 오인사격을 당해 9명이 사망했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수하 없는 발포였다.[65] 아군한테 총격을 받은 11공수여단은 민간인들한테 화풀이를 했다. 군인들은 김금순 씨 집안 들어와서는 방이고 화장실이고 다 쥐며 모두 나오라고 소리쳤고 집 안에 있던 권근립 씨와 김승후씨와 임병철 씨가 밖으로 나갔다. 11공수여단을 그 세 사람을 총살했다. 김승후 씨는 오인사격 현장 근처에 데려가서 쏴죽였다. 권근립 씨는 고랑에 데려가서 쏴죽였다. 권급립 씨는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 거렸다. 그걸 목격한 사람은 권근립 씨의 어머니인 김근순 씨였다. 권근립 씨 옆에는 임병철 씨도 쓰러져 죽어있었다.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군인들이 집으로 쑥 들어와서 방이고 화장실까지 다 뒤지고 이불까지 다 내려서 깔아놓고 난리를 치더니 큰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서 담배하고 라이터하고 시계 같은 것을 가져가 버리고 모두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손을 들고 아들하고 김승후, 임병철이가 밖으로 나갔지요.

군인들은 젊은 사람 셋만 데리고 나가 말 좀 들어본다고 했대요. 지하실에 있던 나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밖에 나가보니까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노인들 보고 '우리 아들 어디로 갔소' 했더니 밖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디다. 우리 영감은 저기 경상대학 입구에 가서 농사를 짓는데 영감도 안 돌아오고 아들도 없지, 그래서 이 계단에 앉아서 영감도 죽고 아들도 죽고 어찌해야 좋을까 하고 울고 있으니까 영감이 들어 오대요. 영감하고 나하고 둘이서 아들을 찾으러 나갔는데 군인들 차 두 대가 불에 타고 있고 철뚝 너머 바로 근처에 김승후란 사람이 쭉 뻗어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은 죽었는데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허둥지둥 신작로 길을 걸어 나가보니까 고랑에서 우리 아들은 여기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하고 등을 맞았는지 피를 흥건히 흘리고 병철이와 함께 똑 같이 엎어져 있대요.


- 국회 5.18 광주특위 현장검증소위원회에서 행한 권근립의 어머니 김금순의 증언내용,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235쪽에서 재인용」
「엄청난 차량행렬이 나타나자 시위대로 오인…… 계속 해서 1번, 3번, 5번, 7번 차량에 대해 정확하게 한 대씩을 빼고 사격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저휘 차량도 앞부분에 로켓탄을 맞아 차량 앞부분은 오간 데 없고 앞쪽에 탑승했던 4~5명이 부상으로 살려달라는 고함소리, 수천 발의 총성, 수류탄 소리등..."지옥, 그것이 지옥이다"는 표현밖에 없었읍니다... 그때까지 저는 광주를 지키던 시위대와의 격전인 줄 알았습니다. ……야산에서 젊은이 2명을 시위대라고 잡아왔읍니다. 양손을 뒤로 꽁꽁 묶이고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구타를 당해서 오는 시위대에게 너도나도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옆에 흐르는 물에 "엎드려"하고 시켰읍니다.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읍니다. 자신들은 절대 시위대가 아니라고 주장했읍니다. 근처의 모 연탄공장에 다닌다고 했읍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읍니다. 하지만 변명이 통하지 않았읍니다....헬기가 계속해서 사상자와 20~30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거의 다 나르고 있을 즈음, 뒤쪽으로부터 리어카에 실은 농부 한 사람을 딸이 끌고 왔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총에 맞아 놀라고, 그 딸은 겁에 질려 울지도 않았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차량이 거의 다 불에 타버리고 다시 뒤쪽 저희 소속대쪽으로 가니 철군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까 잡혀왔던 젊은 사내 2명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때 모모 장교가 '◯◯◯ 사살시키라'라고 말하자 '예' 하면서 M16 자물쇠를 풀더니 앞의 젊은이에게 3발을 탕, 탕, 탕 하고 쏘고 다시 뒤의 젊은이에게 3발을 쏘자 파르르 물 속에서 떠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비참했읍니다. 다시 모 하사관은 확인사살을 한다고 죽은 젊은이에게 사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꿈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7」

시민군과 교전하다 오인사격 한 것이 아니였다. 시민군에게 피해를 입어 시민군을 잡으려다 총살을 죽인 것도 아니였다. 같은 아군한테 총격을 받아 피해를 입어놓고는 화풀이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조갑제 기자는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말했다.[66]

김문수 그럼 그 영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입니까?

조갑제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공수부대가 굉장히 난폭하게 진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간인 집단 학살은 없었습니다. 서로 총을 들었으니까 서로 살기 위해 싸운 겁니다. 이것은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수사보고서를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는 민간인이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은 총 193명이고 광주 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입니다. 이 사건이 만약에 학살이라고 한다면 숫자가 이럴 수 있겠습니다.
(생략)

김문수 그렇게 된 겁니까?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영화를 이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예 전부가 거짓말이면 반박이 쉬운데, <화려한 휴가>처럼 일부는 진실을 놓고 결정적인 부분은 왜곡하면 기술적으로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박해도 사람들이 이미 기억된 내용을 수정하려 들지 않겠지요.

조갑제 맑은 물에 빨간 물감을 5%만 타면 물 전체가 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5%의 거짓과 95%의 진실로 만든 칵테일이 되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안고 가는 거지요.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피해를 봅니다

김문수 그런데 조 선생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제가 아는 광주사태와는 완전히 다른겁니다. 저만이 아니고 제 주위의 운동하던 사람들은 거의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처럼 알고 있습니다.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아군끼리 죽여넣고 민간인을 끌고와 화풀이로 죽이는 행위'는 민간인 학살이 아니란 말인가? 일부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을 가장 신뢰있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광주를 직접 겪었기에 가장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갑제 기자는 5월 20일부터 광주를 목격했으며 18~19일부터 광주를 목격한 기자는 한 두명도 아니다. 또한 군인들 사이에서도 학살 증언이 나온다. 유일한 기자의 증언도 아니고 가장 객관적인 건 더더욱 아니나 일부 사람들은 여러 기자들과 군인들의 증언을 무시한다. 거기다 조갑제의 주장에 반박을 하려 하면 유일한 권위인 것처럼 내세워 묵살하려한다. 예로 리그베다 위키라는 곳에서 한 유저가 조갑제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기적의 역사학자'들이 몰려와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8 증언들

일부 세력은 일방적으로 한쪽편만 들고 5.18을 평가한다, 좌편향이라고 주장한다. 이건 마치 사학계보고 '식민사관'라거나 '노론사관'이라하는 환단고기 추종자, 이덕일 추종자들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렇게 편향하지 않다.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공격했다는 사실은 시위대의 편향된 주장이 아니라 제 3자들도 똑같이 증언하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도 자세히 실려있다. 중앙일보 장재열[67]기자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증언을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차에서 내려서 자기 근처를 지나던 젊은이들을 ‘불문 곡직하고’ 마구 때려팼다고 한다. 그중 한 젊은이는 무등경기장 부근에 있는 광주교에서 다리 난간에 떨어질 때 까지 뚜들겨 맞았다. 당시 취재팀이 취재한 내용에는 ‘대검으로 찔러’, ‘여자, 팬티만 남기고 마구 때리고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져’같은 것들이 써있었다. [68] 같은 중앙일보 기자인 김충근 기자[69]도 마찬가지 증언을 한다. 김충근 기자는 7공수여단이 벌이는 짓들을 보고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따위 표현들을 쓰려했으나 이같은 행위들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못해 성이 차지 못했다. 그러다 떠올린 단어가 ‘인간 사냥’이다. 당시 7공수여단이 벌인 행위를 나타날 때 널리 퍼진 표현이 ‘인간 사냥’인데 보다시피 시위대가 말한 표현도 아니고, 파시스트들이 너무 좋아하는 홍어하고도 관련이 없다. 또한 여자들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여자들을 때리는 부위를 보고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이란 표현을 생각했다한다. [70]

참고로 당시 한국기자들은 시위대들한테 혐오를 받고 공격까지 당했다. 예로 ‘인간 사냥’이란 표현을 쓴 김충근 기자만 해도, 차를 타고 있는데 시위대한테 화염병 공격을 받아 차가 불에 휩싸인 적도 있다. [71] 그런데도 저런 증언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공수부대원 조차도 그런 증언을 한다. 위에 본 이경남 씨 경우가 그렇다.

공수부대원에 대한 이야기는 한쪽편만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자체가 왜곡의 일종이다. 이덕일 추종자와 똑같은 세력인 것이다.

9 공수부대가 학살을 하게 된 원인들

9.1 충정훈련

충정훈련은 훈련자체 강도도 대단히 높았는데 그 훈련을 하는 시간도 1980 초반 이전보다 많아졌다. 훈련을 위해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못하게 했다. 80년 2월부터는 다른 교육훈련은 포기하고 오직 충정훈련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러라고 있는 공수부대가 아닐텐데? 한 지역대는 폭도 역을 맡고, 다른 지역대는 방어하는 부대원을 맡아서 강도높은 훈련을 수없이 하였다. [72]

9.2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

당시 공수부대들의 진압목적은 해산이 아니라 체포였다고 11공수여단 하사는 증언했고 실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에서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73]

9.3 시위자들을 불순분자라 판단

당시 상층부는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인식했고, 현장에서 진압을 하던 공수부대원들 역시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74]

9.4 개판인 지휘와 군기

5월 19일 광주고 앞에서 발포가 이뤄졌는데도 전교사나 31사단은 상황보고를 받지못하고 사실조차 파악못했다. 20일엔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이 총을 쐈고, 2군사령부는 실탄통제를 지시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에는 전달되지않았고, 이 지시가 내려간 뒤에도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됐다. 공수여단은 5월 20일 밤과 21일 아침에 중대장급은 간부들한테 실탄을 분배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실탄분배나 발포같은 사실을 도청발포전까지 상급부대한테 허가를 받지 않았다. [75] 그리고 5월 24일 하루에만 계엄군끼리 벌인 아군사격이 두번이나 일어났다. [76] 5월 24일 원제마을 인근에서 발생한 아군간 사격에 대한 분풀이를 하겠다면서, 가까운 원제마을, 진월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이 때 도로변에 있는 주택들을 일일이 찾아가 주민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또한 인근 저수지에선 물놀이하던 초등학생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화풀이 학살 이후엔 도로에 머무르면서 해당 도로를 지나가던 모든 차량들에게 무차별로 총알을 난사했다.

전교사의 전투상보에선, 연락장교 능력이 부족하고 임무가 미숙해서 정확한 상황전파를 실시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전교사는 18:49에 확인사격 지시를 내렸는데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수하자체가 없는 학살이 여러번 일어났다. [77]

또한 공수부대원들이 술을 마시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것은 시민들은 물론 군인들까지 증언하는 내용이다.[78] 공수부대 장병들이 술을 마신 이유에 대해선 증언이 엇갈리는데, 일시적으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막걸리 등을 대신 마셨다는 주장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술을 배급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9.5 지역차별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위에 같은 잔인한 공격을 하면서 '전라도놈들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외쳤다. 시민들은 자극을 받고 공포에 떨었다.
이러한 지역차별적인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의 모습이 담긴 영상도 남아있다. 링크영상 2:55초 부터 "전라도놈 30만명 죽여버린다고 했다."며 "어디 그런소릴 하냐"고 항의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건 당시 계엄군 내부 보고
파일:GSPDXbH.png
[79]

당시 현장에 있던 공수부대원, 11 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씨의 증언
파일:9jj1Ziq.png
[80]
유언비어가 레알인 것이 반전

여기서 주어를 보라. '11공수단', '어떤 군인들'이라고 지칭한다. 한, 두명이 외친 것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곳이 호남지방이었다. 예로 71년 대선 당시 중앙정보부영남지방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흑색선전물을 뿌려대는 등 지역감정을 조장한바 있다.[81] 그리고 지역 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군대 였다. 당장 하나회가 대부분 영남 출신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알수 있듯이[82], 장교들의 진급에서부터 사병들의 내무반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히 호남차별이 이루어졌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호남의 심장부인 광주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결과 위에서 언급한 다른 요인들과 맞물려 공수부대의 진압이 '충정작전의 교범'을 벗어나는 만행의 심리적 원인중 하나라고 할수 있다.[83]

하지만 이는 일부 지휘관들의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이 분명했음을 알려주는 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무차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거나 적어도 이민족 개념을 가졌으니 저렇게 할거라고 보았고 거기에 경상도 군인만 왔다는 소문이 당연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써 악한 감정을 갖지 않고서 광주 시민들에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적어도 광주에 온 공수부대원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9.6 결론

신군부가 광주학살을 일부러 일으켰는지 예상하지못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난건지, 혹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학살이 일어나게 방조한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수부대원들한테 힘겨운 충정훈련을 주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해 공수부대원들을 미치게 만들고 시위와 학생들한테 혐오를 갖게 만들면서, 군기도 엉망이였다. 그런 상태에서 해산이 아닌 체포위주로 진압을 하게함으로서 최소한의 제한조차 사라진 상태였기에 이런 학살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김영택 씨처럼 '신군부가 일부 광주를 노리고 했다'는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정해구씨를 비롯해 [84] 보통은 신군부 세력의 과잉대응으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 국장 안병하 씨는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와중에도 진압 경찰들에게 무력진압을 하지 말아달라고 명령했다가 5.18 직후에 신군부에 의해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후 '자진사직' 조건으로 풀려났는데 이를 보면 그때 경찰 라인도 신군부에 의한 과잉 진압 지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신군부는 치안력보다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시국을 수습하려고 했다고 보면 하급 지휘관들의 충성심의 발로와 무관하게 신군부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써 이승만 부정선거, 박정희 유신 처럼, 전두환 정권은 이어지는 노태우 정권까지 5.18 민주화운동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예가 되었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강한 정치적 성향의 투사 혹은 폭도로 구분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내포된 것일 뿐이고 바로 옆에서 같은 시민이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 울분을 느낀 평범한 인간으로써 상식을 벗어난 폭력집단에게 내 가족 내 이웃을 지키자는 가장 기본적이고 정의에 충실한 보편적인 국민들이었다.

10 참고문헌

10.1 참고책

  •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 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절판)
  • 5.18 특파원리포트 (풀빛신서 153) (절판 )
  • 80년 5월 광주 (절판)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 정상용․조홍규․이해찬․송선태․서대석․이강술․유시민․차영귀․송상규 함께 지음, 기억하는 자의 광주, 프레스바이플 (1990년에 나온 광주민중항쟁 개정판이다)

10.2 참고 보고서

  • 1995년 검찰 보고서
  • 2007년 국방부 보고서

위 보고서 자료들은 여기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10.3 참고 학위논문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학위논문 박사, 국민대학교 대학원)[85]

10.4 인터넷 문헌

  • 신군부가 정권탈취과정에서 벌인 광주학살 정리 [1]
  • 5·18민주화운동(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의 진실 [2]
  1. 물론 그 주체는 전두환이다.
  2. 출처: [3]
  3. 현사연, 1990,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번호 6001, 1023쪽
  4.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2쪽
  5.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6. 육군 제2군 사령부, 상황일지, 1980년 5월 18일자, 마지막 부분
  7.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쪽
  8.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3쪽
  9.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6쪽
  10.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7쪽
  11.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4쪽
  12.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5쪽
  13.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9쪽
  14.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9쪽
  15.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00쪽
  16.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03쪽
  17.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71쪽
  18.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19.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2
  20.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3쪽
  21.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80쪽
  22.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 211쪽
  23.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24. 흘러내리는 바지로 인해 도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
  25.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4
  26.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2
  27. 정상용․조홍규․이해찬․송선태․서대석․이강술․유시민․차영귀․송상규 함께 지음, 광주민중항쟁, 181 189
  28. 김영택, 52~54
  29.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20쪽
  30. 정상용․조홍규․이해찬․송선태․서대석․이강술․유시민․차영귀․송상규 함께 지음, 광주민중항쟁, 1990, 188쪽
  31.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26쪽
  32.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38~39쪽
  33. 1차출처: 보안사3처2과, 광주사태전말보고, 1989, 383-1989-8 ,54쪽 2차출처: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7쪽
  34.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19
  35. 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63
  36. 5 18 특파원 리포트, 220
  37. 5 18 특파원 리포트, 219쪽
  38. 11공수여단 63대대 8지역대 소속 무전병 권용운 일병
  39.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씨는 권용운 일병이 계엄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경남 씨는 당시 복잡한 현장 안에 있던 터라 착각할 수 있다. 안정하게 취재가 가능했던 도청안에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것에 따르면 그 장갑차는 시위대 것이 맞다. 다른 계엄군들도 시위대측 장갑차라 증언하고 있다.
  40.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86쪽
  41. 동아일보 기자인 김영택 기자가 취재가 한 내용. 출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111~112
  42.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이준기가 이런식으로 죽는데 아무래도 죽는 모습은 이분을 모티브로 한것 같다
  43. 5.18 광주민중항쟁 유족회, 광주민중항쟁비망록, 남풍, 1989, 192쪽. 2차: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76쪽
  44. 출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113
  45. 현 기아자동차 공장
  46.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77~178쪽
  47.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18~119
  48.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273쪽
  49. "哨兵 에 대해 亂動時에 군인복무규율에 依據자위권 발동强調"
  50. 1차: 2군사령부, 광주 권충정작전간 군지시 및 조치사항(보안사, 383-1980-95,149쪽인용) 2차: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83쪽
  51. 1차:서울지검, 이희성피의자신문조서(4회), 12 12,5 18수사기록 16권, 25732쪽. 2차: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84쪽
  52.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 213쪽
  53.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 214쪽
  54.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 97쪽
  55. 계엄사, 충정일일주요업무상황(1980.5.23)(보안사, 383-1980-92 ,76쪽인용)) -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93쪽
  56.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95쪽
  57.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517005004
  58. 출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205002092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2-05&officeId=00020&pageNo=2&printNo=20413&publishType=00020
  59.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95쪽
  60.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265쪽
  61. 144회 국회 518 청문회 회의록, 제26호, 1989년 1월 27일
  62.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98쪽
  63.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233쪽
  64. 광주민중항쟁비망록, 남풍, 1989, 269~270
  65. 1995년 7월 20일 동아일보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72000209131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7-20&officeId=00020&pageNo=31&printNo=22915&publishType=00010
  66. 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
  67. 1952년 서울출생이다.
  68. 5 18 특파원 리포트, 180~181
  69. 이분은 1951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이다.
  70. 5 18 특파원 리포트, 213~214
  71. 5 18 특파원 리포트, 219쪽
  72.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4
  73.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5
  74.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7~68, 111
  75.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01
  76.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01
  77.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02
  78.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4쪽
  79.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80. 11 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씨의 증언. 20년만의 고백: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당대비평 09 209쪽)
  81. 한국일보
  82. 예외적으로 장세동은 전라도 출신이다.
  83. 출처: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p.114~118
  84.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85. 학위논문 박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이 논문은 국회전자도서관에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