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창궐했던 14세기의 흑사병과 함께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범유행전염병.
제1차 세계대전 최후반부터 종전 직후인 1918년 ~ 1919년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에 의해 유행한 독감이다. 전시 보도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스페인 언론이 깊이 다루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지어졌다.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도 감염되기도 했었고.
기원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3일 열병"이란 이름처럼 짧은 증상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없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한 보고는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가 최초. 3월 8일 캔자스 퍽스톤 기지와 3월 11일 미군 각 부대에서도 발병자가 발생했으니 출처를 따지면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 독감이나 다름없는 셈.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은 같은 해 8월, 영국령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에서 발견된 것을 최초로 여긴다.
이 질병이 특히 무서운 것은 고대의 유행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질병과 싸웠던 시대의 인류는 질병이란 신의 재앙/죄악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 미신에 물든 무지한 광신도가 아니었다. 이미 세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었고 공중보건(상수도, 하수도, 위생 등)에 대한 체제가 어느정도 되어있던 근대적인 인류였다. 그런데도 피해규모가 가히 어마어마하다.
당시 인구가 약 16억 명이었는데, 감염자는 약 6억 명에 사망자는 최소 2,500만에서 최대 1억(총 감염자의 4~16%, 전체 인구의 2~6%)에 달한다고 추정된다.[1] 이는 1차대전 사망자수 900만명의 3배~5배가 넘는 수치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는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1차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사모아는 90%가 감염되어 30%가 사망했고, 에스키모 마을 몇개도 몰살의 운명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서는 당시 인구 1,700만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명(43%)이 감염되어 14만명(전체 감염자의 1.89%, 전체인구의 0.8%) 가까이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2].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고,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서산시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예산군과 홍성군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 상대적으로 경성부에서는 268명이 죽었고, 그중 조선인은 119명이었으니 과연 조선인의 사망률이 낮긴 낮았던 듯. 다 김치 파워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끔찍한 수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그 수가 전체 감염자의 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약 감염된 환자가 주변에 감염을 시키기도 전에 단시간내 바로 죽는다면 (치사율은 강하지만) 도리어 감염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감염의 메커니즘을 생각해보자. 더구나 이러한 독감이 독성이 더 심해진 돌연변이로 출현한다면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이후 2005년 미군 병리학 연구소의 타우펜버그 박사의 연구를 통해서 스페인 독감의 정체는 조류독감임이 밝혀졌다.[3] 병사들이 머물던 캠프에서 기르던 식용 조류에서 발병했으며, 역시 식용 돼지(신체적 특성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를 통해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에게 쉽게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조류독감이 만약 같은 방식으로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사람간에 전파가 가능한 형태로 변한다면, 제2의 세계적 유행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플루엔자 A가 이 스페인 독감의 변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는데 스페인 독감에 비해서 독성은 약해졌다.
그리고, 의외로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인데, 유일한 창업주가 유한양행을 의약품을 생산하는 제약회사로서의 성격을 중점화둔 배경에는 이 질환을 체험했을 미중부에서 지냈다는 점이 무시되고 있다. 당장 연대 의대에서 유일한과 인연이 교수로 초빙했다는 기록만이 많이 알려진 한반도 근대 방역 전문가인 애비슨 박사 이름이 같은 건물에 지정된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히 여긴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서재필이 재혼한 아내에서 둔 조각사인 둘째딸한테 주문한 버드나무 조각을 선물로 주어, 그것이 유한양행 상징이 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당장 세균학에 대해 전공한 서재필이 온갖 부정적 관계가 되었을 조선과 미국이 서로 이러한 부분에서는 똑같다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 사망자수가 이렇게 들쭉날쭉한 이유는 진단할 겨를도 없이 사망한 전병사(戰病死)자나 합병증 사망자(사실 이 독감 자체보다는 허약해진 몸에 합병증으로 세균성 폐렴이 발병해 폐에 물이 차 숨을 못쉬어 익사한 사람이 대다수이다)를 포함하지 않거나 당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사망자를 추정할 수도 없는 인도, 중화민국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 ↑ 다만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는 128만이 감염되고 4만(감염자 중 3.12%, 전체 인구의 0.2%)이 사망했다는 통계를 냈다. 이게 사실이라면 발병국 중 최소감염, 최소사망률을 기록하는 셈이다.
그냥 통계가 날림인거지그런데 사망률이 낮다는건 특기할만 하다. 참고로 일본은 5,500만 중 2,500만(45%)이 감염되어 48만명(감염자의 1.92%, 전체 인구의 0.87%)이 사망했다고 한다. - ↑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었는데 동토가 냉동고 역할을 해서 바이러스가 보존되어 있었다. 1951년 첫 바이러스 추출 시도는 실패했지만 1998년 다시 발굴, 그걸 연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