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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
경주군 (慶州郡, 1914) | → | 경주시 (1955) 월성군 (月城郡, 1955) | → | 경주시 경주군 (1989) | → | 경주시 (1995) |
1 신라의 천년과 함께한 경주
알다시피 경주는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다.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의 호수는 17만 8936호[1]로, 최대한으로 추산해보면 대략 90만의 인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양대 도시인 장안과 바그다드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은 숫자인데[2], 그래서 오늘날의 수도권처럼 도시를 넘어선 근교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설, 골품제의 신분 유지를 이유로 호적만 경주에 두고 지방으로 이주한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설, 호가 아닌 구(口)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35여만명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설, 당대 농업 개간 능력 고평가하는 관점에서 수도 경주의 면적을 다르게 계산해서 그 정도가 나온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을 감안하면 90만 인구는 경주와 경주 일대의 인구를 포함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같이 적힌 고구려 전성기 인구 105만과 백제 전성기 인구 76만도 실제로는 대성산성과 평양성 지역의 인구와 한성(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 일대의 인구만을 파악한 규모라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수십만 이상의 인구 규모는 그 당시로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치임이 틀림없다. 당시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에 25만 인구가 살았고 일본 헤이안 시대 수도 헤이안쿄에누 20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시대에도 한동안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신라시대의 경주시가지와는 지리적으로 좀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의 경주 시가지 중심은 현대 경주 시가지의 남동쪽인데, 주로 논 밭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황룡사 등의 유적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민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에 땅을 파헤치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의 모형. 도로와 주택들은 도시계획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앞 부분에 경주 월성이 보인다. 단, 월성 안의 건물 배치는 상상일 뿐이다. 월성 북쪽에는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그 동쪽에 황룡사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가 분황사다. 임해전에 붙어있는 안압지 등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통일신라시대가 기준인 것 같다. 또, 월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남북쪽으로는 너비 23m의 주작대로가 있고, 그 북쪽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인 전랑지(대궁지)다. 다만 이 곳은 현대 경주의 시가지에 포함되어버렸고, 발굴과 연구가 미흡해서 정확한 이름은 불명이다.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월성의 서남쪽과 월정교와 남쪽에는 일성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왜 안 만들었지?
2 시대별 역사
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신라 시대에는 왕경 일대가 서라벌, 금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안강읍 일대는 신라 때 음즙벌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가 파사 이사금에 의해 정복되어 비화현이 되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일대는 모혜현, 북구 신광면 일대는 동잉음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비화현, 모혜현, 동잉음현은 각각 안강현, 기계현, 신광현으로 개편되었다.
2.2 고려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이후 태조 왕건에 의해 동경이라고 불렸다. 이후 서경(평양직할시), 개경(개성시)과 함께 고려 3경을 이루고 왕이 가끔 행궁에도 방문했지만 무신정권기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 쓰이는 명칭인 경주로 강등되었다. 이후 한양(서울특별시)이 고려 숙종 때 행궁이 지어지면서[3] 남경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새로운 3경으로 지정되었다.
2.3 조선
경주부(府)로 승격되어 감영(도청과 유사한 기관)을 이 곳에 두었지만 곧 상주로 이전했다. 1895년에 경주군이 되었다.
1906년 기계면과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양남면과 양북면이 장기군으로, 외남면(현 울주군 두동면, 두서면)이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2.4 일제강점기
1914년 양남면과 양북면이 환원되었다. 1931년 경주면이 경주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양북면 일부가 감포읍으로 승격되었다.
2.5 대한민국
1949년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일대가 경주시로 승격되었으며, 경주군의 잔여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였다.[4] 1973년 월성군 서면 일부를 건천읍으로, 1980년 외동면을 외동읍으로 승격하였다. 1987년 월성군 현곡면 금장2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어 석장동이 되었다. 1989년 월성군은 경주군으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1995년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월성'이란 명칭은 '월성 원자력 발전소' 등의 이름에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삼국유사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
- ↑ 학계는 통일신라의 전체 인구를 최대 400만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400만명 중 90만명에 가까운 숫자가 경주와 그 근처에서 거주했다는 것은 역시 전근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치이다. 일단 한곳에 집중적으로 밀집된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살릴려면 그만한 엄청난 규모의 인근 곡창지대와 도로, 각종 시설 등의 인프라가 필요한 터인데, 경주와 그 일대에서 이러한 인프라에 관련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라는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굶주리지 않고 살았는지 의문이다. 비슷한 대규모 도시인 고대 로마 등지에서 아직도 무수한 수도시설과 도로 등의 거주편의시설이 남아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문이 가시지 않는 사실.
- ↑ 실은 천도를 계획하다가 실패한 것이었다.
- ↑ 신라의 도성 이름인 '월성'에서 따온 것이다. 대구-달성, 수원-화성과 비슷한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