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

骨品制
내 뼈는 명품

신라의 신분계급
왕족
성골진골
귀족
6두품5두품4두품
평민
3두품2두품1두품

1 개요

신라신분제도. 다단계의 신분제도로 넓은 의미의 왕족성골(聖骨)과 진골(眞骨), 그 아래로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이어지는 제도이다. 그 밑으로 3두품, 2두품, 1두품의 평민이나 0두품에 상당하는 노비 등이 있다. 이 중 성골은 신라 중대가 되면서 대가 끊겨 사라지며, 1~3두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류의 의미가 없어져 평민이나 마찬가지가 됐기 때문에 처음에는 8등급 구분 → 나중에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기타(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됐다.

이런 강력한 신분제가 발생한 배경은 신라가 경주시 일대를 지배하던 정도의 소국에서 차츰 커지는 과정에서 변한진한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게 됐고, 이런 흡수한 소국들의 옛 지배층을 등급화하기 위한 기준으로 시작된 것이다.

신라의 경직된 신분제도로 까이는 경우가 많지만, 신라에서 '골품제'라는 이름만 붙었다 뿐이지, 사실 유사한 신분 차등 제도는 고구려백제도 있었고 애초에 고대 국가에는 특별하다고 할 것은 없는 제도이다.

신라가 상대적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 뿐이다. 고려 등 후대의 귀족제와 차이가 있다면, 귀족제는 보통 지배층과 피지배층 정도의 이원화 큰 틀 아래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수준이지만, 골품제는 같은 지배층 끼리도 선을 그어 우열과 귀천을 명확히 했다는 정도.

골품의 고저(高低)는 벼슬진급 상한선은 물론이고, 입을 수 있는 의복, 수레의 크기와 끄는 동물의 필수, 의 크기 등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규정한다. 얼마나 소소한 부분까지 통제하냐면 하다못해 여자들이 사용하는 장식용 빗의 재료까지도 엄중히 제한했다. 이는 의관과 주거 등의 생활양식을 및 과시를 신분의 상징에 대입하는 전근대 봉건사회에서는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다.

순기능을 찾자면, 과소비를 방지해서 생산력이 미약한 농업경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은 있다. 일부 최상위 진골은 아예 집에 금을 씌우는 금입택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하위 골품의 사치는 억제되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Bone rank system이라고 쓴다. 성골은 Holy Bone, 진골은 True Bone.

1.1 성골과 진골

특히 왕위 계승권은 성골만이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1], 이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어 논란이 많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성골은 부모가 모두 성골(왕족)이고, 진골은 부모 중 한 쪽이 성골(왕족)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아직 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유력한 설 중 하나는 법흥왕부터, 혹은 진흥왕의 장자 김동륜계의 자손들(진평왕과 그 자식들) 때부터 이들을 특히 높이기 위해 성골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그 설에 따르면 애초에 진골과 성골의 구분은 역사가 길지 않은 편이고, 둘의 차이는 거의 없는 셈이다. 혹은 왕의 직계만이 성골, 나머지 왕족은 다 진골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단 그나마 밝혀진 것은 성골끼리[2] 결혼해 낳은 자식만이 성골이 되고 성골-진골의 자식은 진골이 된다는 것이다. 이하의 신분간의 통혼에서도 마찬가지.

다만 이 경우, 아버지가 진지왕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진평왕의 딸인 태종 무열왕이 진골인게 말이 안 된다. 일단 진지왕이 모종의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해 퇴위당했기 때문에, 그 토위 사유 때문에 진지왕의 두 아들도 진골로 격하된 탓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실제로 격하되는 경우는 신라 역사에 꽤 보인다.

신라 하대에 내물왕계가 왕위를 독점한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된다. 일부에서는 성골을 궁정 내에 거주할 자격을 가진 왕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진지왕이 폐출되면서 진지왕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진골이 된다는 것. 소수설로는 비형랑과 관련해서,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비형랑으로 본다. 이 해석에 따르면, 진지왕이 폐위 된 이후에 과부가 된 도화녀와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비형랑, 김용춘이라는 것. 이 경우에는 비형랑 전설의 도화녀가 성골이 아니기 때문에 성골+진골의 조합으로 자연스럽게 진골이 된다.

1.2 관직

애초에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진급 상한선이 존재했다.

서열관직명진골6두품5두품4두품중시령시랑,경도독사신군태수현령
1이벌찬
2이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사지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각 골품별로 색이 칠해져 있는 관직에만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란은 해당 골품이 임명되는것이 불가능한 관직을 의미하고, 칠해져 있는 색상은 실제 해당 관직에 종사하는 관리의 관복 색상이다. 각각 자색(紫色)/비색(緋色)/청색(靑色)/황색(黃色)이다.

6두품 출신으로 제일 많이 올라간 6등급 아찬이, 관직상 꼴찌이지만 골품이 더 높은 진골 출신 17등급 조위에게 존칭을 했다. 참고로 헷갈리기 쉬운 점은 낮은 골품이 높은 관등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높은 골품이 낮은 관등에 있는 것은 가능, 즉 진골이라고 대아찬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골품이라도 낮은 관등부터 공직생활을 하게 된다.

아찬이 대아찬으로 승진할 수 없기 때문에 아찬 다음에 편의상 중아찬, 2중아찬, 3중아찬, 4중아찬이 있었는데 6두품들 사이에서의 구분일 뿐 그래봐야 진골들의 대아찬보다는 낮았다. 5두품 역시 대나마가 끝이기 때문에 대나마 안에서 중대나마(重大奈麻)에서 구중대나마(九重大奈麻)까지 9등급 체계였다.

삼국사기 등 기록에서는 관등을 보고 이 사람이 진골인지 6두품인지 추적을 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왕족 안승이나 발해왕 대조영을 신라 측에서 진골 취급해 줬다는 건 하사한 관등(소판, 대아찬)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2 변화

결국 이같은 폐쇄적 신분제도 탓에 선덕여왕 대에는 성골 남자의 씨가 말라 여왕이 즉위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결국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 이후는 최초로 진골 출신 김춘추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다. 그 후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300여년간 진골들이 왕위를 차지한다.

한국사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알 수 있겠지만, 신라의 역사가 오래되면서 왕족이 많아지다보니 이 진골은 다른 왕조의 일반적인 왕족이라는 개념보다는 일반 귀족 중 최상위 클래스 개념에 가까웠다. 단적인 예가 신라 후대 왕위를 장악하는 내물왕 계 진골이다.

무열왕계가 대권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왕권이 강화되고 진골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수 등의 6두품 출신들이 적극적으로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르고 무열왕계가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6두품으로 강등되고 왕권이 약해지면서 이런 노력들이 무산된 측면이 있다. 그 결과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진골 귀족층끼리의 왕위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3 문제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넘을 수가 없다. - <삼국사기> 열전 제7 설계두전.[3]

사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관등은 외위제[4]에 근거해 옛 고구려의 지배층에는 7등급, 백제의 지배층에는 11등급 이상의 벼슬을 제한하는 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한 것도 문제이다. 골품의 경우 고구려계는 6두품, 백제계는 5두품으로 골품을 제한하였다. 실제로 망국의 옛 지배층들이 벼슬한 기록이 없고 중앙 경주의 진골이나 6두품만이 중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지경인데 어느 누가 신라와 협력하고 싶었겠는가?

외부 인사로 신라에서 최상급인 진골을 받은 것은 딱 3가지 경우 뿐이었다. 금관가야의 왕실이 구형왕의 항복 이후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이것이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이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조영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써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다만 마지막은 명목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안승 가문은 이후에 반란 일으켰다가 아작났다. 안승 본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금관가야 왕족의 경우에도 김유신이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우는 무열왕 등극 이전까지는 비주류로 따돌림을 받았다. 애초에 골품제도는 신라의 왕경인 서라벌 즉, 지금의 경주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철저한 수도 중심편제가 된다.

이쯤 되면 신라 망국기에 왜 그리 지방호족세력들이 신라를 그렇게 쉽게 버렸고 망한지 200년이 넘은 옛 고구려와 백제지역 백성들이 왜 후고구려후백제의 기치 하에 모여들었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참고로 6두품 이하부터는 정복당한 호족층이며 6 ~ 4두품을 가르는 것은 세력 순으로 결정되었다 하는데, 즉 투항한 고구려의 지배층은 깡촌 소읍의 두령 수준, 백제쪽은 그만도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나마 고구려계의 중심 지역인 패서 지역은 신라 중앙의 통제를 받는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지만 백제는 웅진도호부가 축출된 이후론 계속 이런 차별을 견뎌야 했다.

골품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으며, 골품에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한계가 있었고 6두품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6두품의 최고직인 아찬에는 중위제를 두었는데, 이는 관직은 그대로고 명목상의 직위만 높이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니가 아찬 중에 1등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대아찬보다는 밑이였다.

집의 크기, 쓸 수 있는 색 등등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제한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당나라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온 최치원조차도 6두품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최치원이 쓴 시무 10조는 왕은 눈여겨봤지만 결국 진골귀족들에 의해 산뜻하게 무시당했고 그 일로 완전히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에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 사실 시무 10조 중에 진골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포함된 것을 생각하면 강제로 '은거당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치원에게 6두품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만으로 최치원의 말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린 것은 진성여왕 시절로 이후 최치원은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벼슬을 물러난 것은 효공왕 시절로 이 와중에도 신라국왕의 명칭으로 보낸 국서를 작성하는 등 할건 다 했다. 자세한 것은 최치원 항목 참조.

어느 정도 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실력도 있었지만 승진이 제한되던 6두품 층에서 항의를 많이 했으며, 나라 망치는 제도라고 없애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진골 귀족들이 그렇게 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신라 하대부터 중앙의 통제가 미치는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진골들에게 차별받던 신진 지식층인 6두품들이 호족과 군벌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들어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신라가 망하고 나서야 없어졌다. 왕족-호족-양민-노비의 4원 체제는 딱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제한적으로 신분의 유동은 가능했다. 반면 골품제의 경우에는 집권층끼리 싸우다보니 내려갈 일은 있었을지언정 아예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었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신분인 왕족(성골)의 단절만 놓고 봐도 신분 상승을 극도로 꺼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골 여자가 진골 남자보다 국왕감으로 낫다고 볼 정도인데 남성 중심적 문화가 당연시되던 전근대시대에는 이례적이다.

비담의 난도 표면상의 이유는 남자 아닌 여왕의 통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지만 골품제의 모순이 근저에 자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골품제는 신라의 왕권강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귀족 세력의 힘을 충분히 억제하여 나름의 중앙집권화에 이바지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쨌건 신라 초기에는 소수 귀족층의 강한 결집을 통해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순기능을 발휘했으며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특색이기도 하나, 외부의 직면한 적이 사라진 통일신라시대 이후 사회의 역동성을 잃고 본격적으로 모순이 드러나 망국으로의 길을 재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가의 내재된 능력으로 체제를 바꿀 수 있었다면 900년을 넘는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역사가 더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 어쨌든 이렇게 골품제도에 집착해온 신라는 결국 후삼국시대에 가서는 나라 전체가 견훤 단 한 사람에게 쩔쩔매고, 경애왕은 전장도 아닌 수도 경주의 포석정에서 살해당하고, 후백제 멸망 이후 경순왕은 더이상 나라를 유지할수가 없어 결국 신라를 통째로 바치고 경주의 사심관[5]자리를 얻어 신라 천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때까지도 왕 이외에[6] 정신 못 차리고 골품제를 고수하던 진골 귀족들 같은 경우, 고려시대에 일단 경상도 일대의 향리로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은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시류를 약간 잘 타서 조금 일찍 고려의 관리가 된 6두품들 앞에서 대단히 입장이 깎이는 수모는 참아야 했다. 그들이 당시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선 남은 자료가 없어서 추측해볼수밖에 없으나,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물론 고려 사회는 신분 이동의 폐쇄성이 신라보다는 낮았기에 비록 신라 진골이라도 노력을 열심히 하면 고려의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는 있었으나, 누구나 김부식처럼 능력이 뛰어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진골 출신들은 적지 않은 수가 지방 향리로 전락하여 6두품 혹은 6두품도 아니었으나 어쩌다가 고려 관계에 일찍 진출한 이들의 후손들에게 지휘-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불만은 결국 신라부흥운동으로 표출되지만, 반대급부로 철저한 탄압을 받아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그냥 참살당하고 말았다.단, 모든 신라 진골이 이런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신라 진골들도 시대가 가면 계층이 분화되어 상당수는 고려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진입하고, 그러지 못했던 가문이 지방 향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후자의 경우가 많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관련해서 좀더 복잡한 사정이 나오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키 바란다. 필사본 화랑세기라는 물건 자체가 위서 의혹이 있어 주류학계에서는 배제된 상태다. 화랑세기를 참조한 드라마인 선덕여왕에서도 이 골품제 관련 묘사가 나오는데 천하의 미실조차도 성골 신분을 내세운 즉위전 선덕여왕에게 어디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느냐는 일갈을 당하고도 아무 말 못하는 수모를 당한다.

4 기타

학교에서 배우는 신분제 관련 용어인데다가 상당히 자세하므로, 신분제처럼 차별을 할 때 골품제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일이 많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로 구성원들의 순혈 여부를 따지는 폐쇄적 집단에는 반드시 이런 구분이 존재한다. 스포츠 구단 중 이런 성향이 있는 팀이 존재한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요미우리에서 20년을 뛰고 선수생활 막판에 1~2년 정도 다른 팀에서 뛰어도 인정을 못 받고 선수생활 내내 요미우리에서만 뛰다 은퇴를 했더라도 코치생활을 다른 팀에서 한 경우도 순혈로 인정 못받는다. 그리고 단 한 차례의 예외를 제외하고 순혈만이 감독을 맡고 있다[7]. 다만 마쓰이 히데키에 대한 입장을 보아 메이저리그 진출은 예외로 보는 듯 하다.
  • FC 바르셀로나 :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팀으로서의 자존심이 높은 데다가 유스가 워낙 발달해서 유스출신이 아니면 푸대접 받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팀에서 뛰는 유스출신이 잘 하면 DNA 드립을 치기도 한다. 메시, 차비 등은 성골, 파브레가스는 진골, 즐라탄, 앙리는 6두품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다. 괜히 즐라탄이 1시즌만에 대놓고 과르디올라를 폭풍디스하면서 뛰쳐나간 게 아니다. 하지만 네이마르하비에르 마스체라노처럼 외부유입선수가 바르셀로나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실제로 푸대접 받는 경향이 있냐고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다. 바르셀로나에는 수많은 정상급 선수들이 영입되었으며 이 중 실력에서 앞섰는데도 유스에게 밀렸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기껏해야 야야 투레정도고, 야야투레를 밀어넨 세르히오 부스케츠는 결국 자기 포지션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다.[8] 즐라탄은 메시 때문에 중앙에서 밀려난 것이지 외부인이라 밀려난 것이 아니며, 앙리 역시 노쇠화 때문에 페드로와 로테이션을 거치며 서서히 입지를 잠식당한 것이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 것처럼 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바르셀로나 유스들이 스쿼드의 대부분을 점하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기간 내에도 다니 알베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에릭 아비달, 다비드 비야, 세이두 케이타, 알렉시스 산체스같은 외부 선수들이 계속 영입되었으며 이들은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펩이 물러난 이후로는 유스 출신 선수들의 노쇠화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네이마르, 루이스 수아레스, 이반 라키티치같은 선수들이 영입되어 팀의 중심선수로 입지를 다졌다.
  • 아틀레틱 빌바오 : 이 팀은 진짜로 아예 바스크 혈통이 아니면 쓰질 않는다. 오직 바스크 혈통만 순혈로 인정받는다. 팀에 들어오는 자격 자체가 순혈이다.[9]
  • KIA 타이거즈 : 광주일고를 순혈로 우대하는 관행이 있었고 성골이라 칭했다. 진흥고, 동성고 출신들은 진골이라 했다. 해태 시절에는 군산상고도 높게 쳐줬지만 지금은 예전보단 약해졌다[12].
  • 삼성 라이온즈 : 딱히 팀 자체가 특정 학교를 우대하는건 아니지만, 팬들은 대게 경북고를 성골이라고 농담삼아 말한다. 진골로는 보통 상원고와 대구고가 꼽힌다.
  • 대다수 K리그 구단들 : U-18팀이 고등학교 축구부일 경우, 그 학교가 성골이 된다. 같은 지역 타학교가 진골.

4.1 대학내에서

서울대에서 지역균형선발 출신을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 되었다. 기사1 기사2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 전체에서 그런게 아니라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서 지역균형을 차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연세대 내부에서도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되었다. #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연세대 커뮤니티인 세연넷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쪽은 더 심해서 아예 본교인 국제캠퍼스와 신촌캠퍼스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막아놔버렸다. 분교인 원주캠퍼스 학생들은 이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대나 연세대의 커뮤니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서울대와 연세대의 전체적 분위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대학(특히 어느정도 입학 성적이 되는 대학들)치고 그런 분위기가 없는 곳이 없다. 수시생에 대한 정시생의 우월감과 차별은 물론이고 지역균형선발, 사회적배려대상자 등 여러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에 대한 '구별짓기'가 성행하는 판국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학벌주의가 같은 학교 내에서조차 선을 그으려 하는 식으로 심화되는 것으로 신라의 골품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현상.

특히 입시 성적에 따른 문화적 권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대입 성적은 중요한 차별의 기제가 된다. 같은 학교 내에서도 이러한데 지방 캠퍼스에 대해서나, 다른 학교들에 대해서는 오죽하겠는가.

4.2 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 사이에서 나도는 농담으로 아버지가 목사이면 성골, 장로이면 진골, 집사이면 백골, 이도저도 아니면 해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4.2.1 교회에서

한국 교회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할 때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목사님이면 왕족,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이면 양반, (서리)집사님이면 중인, 불신자면 상민, 어머니마저 불신자면 천민처럼 그들을 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어느 곳보다 사랑과 평등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의 직분에 따라 아이들을 줄세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있는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등의 직분은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의 차이이지, 절대로 군대에서의 계급, 직장에서의 직위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4.3 군대에서

심지어는 군대장교사이에서도 이같은 인식이 있다. 육군 기준으로 성골은 당연히 육사, 진골은 3사, 6두품은 ROTC, 천민은 학사장교 등으로 묘사하는 식. 실제로 각 출신별 진급 TO가 이런식이다. 이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교육과정을 보면 육사가 4년 풀타임으로 제일 길고 3사의 경우 2년 풀타임이고 ROTC의 경우 2년 파트타임이고 학사장교는 16주로 각 소속간 교육기간에 차이가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 해군의 경우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육군과 달리 수가 적은 ROTC보다 위관급 장교의 다수를 차지하는 OCS 출신들이 두 번째로 힘이 세다.

물론 이게 고착화되고 교조화되어 파벌로 발전하면 안 된다. 초급장교의 경우 군경력이 짧고 교육기간 차이도 최대 2년이므로 출신에 따라 능력을 보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개인의 자질이 더 큰 영향을 미칠 뿐이다.

4.4 노스페이스 골품제

중고딩 사이에서 한창 노스페이스가 인기일 때, 일진&학교폭력&왕따 문제와 노스페이스가 연관되면서 노스페이스 골품제라는 말까지 생겼었다. 노스페이스의 가격과 학교 내에서의 계급을 연결한 것. 농담으로 골품제 체험학습이라는 드립도 있었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해당항목 참고.

4.5 그 밖에

하이킥3에서 안종석이 국사 시간에 이걸 몰라서 골룸제도라고 답했다.

현존하는 성씨로 따지면 김씨, 박씨, 석씨가 진골 또는 성골에 해당되며 설씨, 최씨 등이 6두품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 최치원이 6두품 출신이다. 다만 삼국사기 등 기록에 따르면 김씨 중에서도 6두품이 있는 등,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이유로 골품이 떨어지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성씨와 골품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5 관련 항목

  1. 진덕여왕 이후 성골의 대가 끊기자 진골에게로 넘어가면서 사라진다.
  2. 예를 들어 경주 김씨 + 경주 박씨.
  3. 이 말을 남기고 설계두는 621년에 당으로 건너가서 20여년 후 고구려-당 전쟁 때 당군에 종군하여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4. 중앙의 골품과 지방의 골품을 차별하는 제도.
  5. 사심관제도를 보면 알겠지만 말이 관리이지 실상은 현지의 폭동을 막기위한 볼모내지 인질의 의미에 가깝다. 후한의 관내후와 동일했는데 실제로도 조조마초의 반란을 막으려고 마등에게 관내후 자리를 주게 하여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6. 고려시대에 옛 신라 왕가 본가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왕가의 중시조현종(고려)부터가 신라 왕가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다.
  7. 다른 팀에서 선수나 코치로 근무하다 감독에 취임한 OB는 1981~83년, 1989~92년 두 차례 감독을 역임한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
  8. 더구나 야야투레도 펩을 깠으면 깠지 말년에는 바르셀로나에 돌아가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는 등 바르셀로나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9. 그렇다고 외국인 선수가 전혀 없는 건 아니고... 프랑스에도 바스크족이 산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10. 재단의 소유주가 한화그룹이다. 유니폼도 한화 이글스와 흡사하다.
  11. 송진우, 정민철, 장종훈 등 주요 레전드 배출.
  12. 군산시는 전라북도에 있고, 쌍방울 레이더스가 전라북도를 연고로 탄생하면서 군산상고는 해태에서 분리된다.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되고 SK 와이번스는 쌍방울과의 연결고리를 부정하면서 다시 기아에 붙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전라북도 연고구단 창설활동 시기를 보면, 김봉연을 포함한 군산상고 출신 해태인사 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