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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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4대 탈해 이사금 석탈해5대 파사 이사금 박파사6대 지마 이사금 박지마
시호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 / 파사왕(婆娑王)
박(朴)
파사(婆娑)
생몰년도음력? ~ 112년 10월
재위기간음력80년 ~ 112년 10월 (33년)

1 개요

신라의 제5대 왕. 칭호는 이사금. 아직 진한의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초기 신라진한의 맹주급으로 끌어올린 정복군주이다. 기록상 파사이사금 시대에 신라가 본격적으로 경주 바깥 '영토'를 얻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실질적인 고대 국가 신라의 시초를 파사이사금 재위기로 보기도 한다.

2 역사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는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이다.

앞서 유리 이사금은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보다도 남해 차차웅사위석탈해가 더 재능이 있다고 해서 왕위는 일단 탈해 이사금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탈해는 석씨라도 일단 박씨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1] 탈해 다음은 다시 원래대로 박씨가 즉위할 차례였는데, 유리 이사금의 장남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차남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는 걸로 보아, 파사와 일성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일성은 먼 훗날에 제7대 일성 이사금이 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일본서기 등에 언급되는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일성 이사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또한 파사 이사금의 부인의 성씨로 김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김알지의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사 이사금의 정치력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서기 8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낸 뒤 국내를 순행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사형수가 아닌 죄수들은 모두 용서해주는 대대적인 사면을 실행했다. 이듬해 82년에는 각지의 관리들에게 농사와 양잠(누에를 길러 비단을 생산하는 일)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87년에 재차 성과 보루를 수비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고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새로 지었는데 이 기록은 경주 지역을 벗어난 첫 축성기록이다. 90년에는 10인을 파견해 주군의 관리를 감독하게 하고, 93년에는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직접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노동력 확충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증강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파사 이사금은 다음의 군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85년 백제의 침입과 94년 가야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한다. 그러나 신라의 세력은 고대 국가라고 하기에는 아직 모자라, 84년 고타야국의 조공 기록이 남아 있는데, 세금이 아니라 조공이라는 점에서 이는 주변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주변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강했던지 96년에 가야가 침입해 들어왔을 때는 오히려 역관광시켜 97년에 화친을 받아냈다. 이후 지역 맹주로서 각 국의 분쟁의 해결을 주선하거나 말 안 듣는 국가를 패거나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가야 가락국(김해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나온다. 음즙벌국(지금의 경주시 안강읍)과 실직국(삼척시)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두 나라는 먼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중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일단 파사 이사금은 나이가 많고 지식도 많은 김해 수로왕에게 묻자고 떠넘겼다. 수로왕은 파사 이사금이 맡은 영토 문제를 대신 지혜롭게 해결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열린 연회에서 신라 6부 중 한기부의 대접이 시원치 않자 수로왕은 자객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이 자객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음즙벌국에 숨었고 왕 타추간(陀鄒干)이 그를 보호했다. 이에 파사왕이 102년 음즙벌국에 침공해 왕 타추간이 항복했고, 신라의 실력 행사에 지레 겁을 먹은 삼척시(혹은 울진군, 태백시, 동해시)의 실직곡국경산시압독국도 따라 항복했다. 거리 차가 넘사벽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작 주범인 가야는 아직 공격하지 못하고 화풀이나 했다고 볼 수 있다.[2]

또 6년 뒤에는 경상북도 내륙으로 진출해 다벌국(대구광역시), 비지국(창녕군), 초팔국(합천군) 까지 공격해 병합하였다. 북으로는 반로국(후의 대가야), 남으로는 안야국(후의 아라가야) 등이 있는 요충지인 이 지역은 이후 신라가 가야 계열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힘싸움을 위해 교두보로써 점령한 듯 하다. 105년에는 백제와 화친하고, 106년에 가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다.

아들로 지마 이사금이 있다. 그리고 5대를 내려가면 박제상이 등장.

2.1 일본서기 신공기 관련 기록

여담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할 때 신라의 왕이 파사왕이다. 정확히는 파사매금(波沙寐錦).[3][4] 이사금도 아니고 마립간이다(...) 물론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의 세세한 내용들은 지금에 와서는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한일 양국 모두 판단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록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을 걷어내고 본다면 100% 허구로 비판할 수만은 없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기 이상으로 기년조차 믿을 수 없는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다.[5]일본서기 한반도 관계 기사는 모두 백제삼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 일본서기 편찬 당시 일본의 번국사상을 걷어내고 본다면 오히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보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하을 하는게 일본서기이다.

신공기 기록도 백제와 신라의 대결, 백제의 가야평정과 마한지역 평정에 더불어 일본의 신라 정토 사상(신라본기에 나오는 수많은 왜병 침입 기사를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비도 왜의 신라 원정은 사실임을 웅변하고 있다)이 결합된 것이 신공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때 파사 이사금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신라사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신라가 금관가야를 누르고 진한 지역의 패자가 된 것은 신공기의 이주갑인상으로 보정한 연대에 따르면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 이후로 낙동강 이동지역에는 신라토기라 할 수 있는 '이동양식토기' 양식이 분화되어 낙동강 이서의 함안 아라가야야식, 김해 금관가야 양식과 구분된다. 이렇듯 파사이사금과 석우로는 모두 4세기 이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공기에서는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므로 동시대 사람으로 보아야 하며, 이렇게 해석하면 도저히 1세기나 3세기 신라가 할 수 없는 활동 범위에서의 파사이사금과 석우로의 활동이 모두 이해된다. 이는 아까 말했다시피 신라토기의 성립과 분포양상과 완벽하게 일치는 점에서도 최신 고고학 성과 조차 일본서기의 수정기년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해석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파사 이사금의 활동과 치적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빨라도 4세기 중엽에나 실현됐던 것들로, 이는 일본서기의 파사 이사금의 생존연대에 대한 수정기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진구황후조에 파사이사금이 등장하고 삼국사기 기록과 시기가 안 맞게 실려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빙성을 무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수정기년이 삼국사기 초기기록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다. 물론 백제의 시각에서 쓰인 원 사료에-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많을 수 밖에 없음- 8세기 일본의 지독한 번국사상을 걷어내고 봐야 하는건 맞다. 사실 이렇게 일본서기가 더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른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무령왕의 생몰연대라던가 관산성 전투의 진행양상 등이 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훨씬 먼저 쓴 책이므로 일본서기 쪽이 좀 더 당시 기록(특히 백제 측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이렇게 된 데에는 7세기 경 1계의 왕통이 확립되면서 기존의 이사금과 마립간들의 계통을 1원화 시키면서 빚어진 촌극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지에서는 6세기 초반까지도 지증왕법흥왕이 신라 6부 중 탁부의 대표로 나올 뿐이며 나머지 7명의 왕[6]이 존재한다. 갈수록 김씨 집단이 마립간을 장악하여 더 큰 권력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6세기 중엽 이전 신라는 그래도 6부의 여러왕이 병존하고 동시에 판결을 내리거나, 어느 한 왕이 결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1원화되면서 여러 계통의 왕의 순서가 뒤섞이면서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파사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진휼을 베풀고 사면을 단행하다
三年春一月 농사를 권장하고 군사를 단련시키다
五年春二月 명선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을 파진찬으로 삼다
五年夏五月 풍년이 크게 들다
六年春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다
六年春二月 길원을 아찬으로 삼다
六年夏四月 객성이 자미에 들어가다
八年秋七月 성루를 수리하고,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다
十一年秋七月 공적인 일과 전야 개척에 힘쓰지 않는 주주·군주를 내치다
十四年春一月 윤량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다
十四年春二月 고소부리군에 순행하다
十四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二月 마두성에서 가야군을 격퇴하다
十五年秋八月 알천에서 열병을 하다
十七年秋七月 금성 남쪽의 나무가 바람에 뽑히다
十七年秋九月 가야의 습격을 격퇴하다
十八年春一月 가야를 정벌하려다가 중지하다
十九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十一年秋七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二年春二月 월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七月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二十三年秋八月 실직곡국과 압독국이 항복해 오다
二十三年冬十月 겨울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다
二十五年春一月 운석이 비처럼 쏟아지다
二十五年秋七月 실직의 반란을 평정하다
二十六年春一月 백제가 화해를 청하다
二十六年春二月 눈이 3척이나 내리다
二十七年春一月 압독에 행차해 진휼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이 압독으로부터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마두성주가 가야를 정벌하다
二十九年夏五月 각 지를 진휼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다
三十年秋七月 메뚜기 피해를 막기 위해 제사지내다
三十二年夏四月 성문이 저절로 무너지다
三十二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다
三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38 항목으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의 백제 왕들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4 참고 항목

위키백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왕의 성씨가 바뀌는 사례로 나중에 나올 미추 이사금, 신덕왕도 일단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2. 다만 이 때 그냥 항복한 실직국과 압독국은 완전하게 합병된 건 아니고 그냥 신라에 종속된 명목상 속국 정도로만 된 듯 하며, 싸워보지도 않고 허무하게 항복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나중에 각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 그러나 둘 다 패했고 주민들은 모두 경주에 가까운 지역으로 강제이주되어 이 때 제대로 망한다.
  3.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 초기 인명/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
  4. 매금은 광개토왕릉비통일신라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며 마립간과 같은 말로 추정된다.
  5. 이걸 기록한 김부식 시대 기준으로도 천 년도 더 전 이야기들이므로 참고한 기록들도 부정확한 내용이 매우 많았다. 김부식 본인도 너무 앞뒤 아귀가 안 맞는 내용에는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 둔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6. 다만 갈문왕이나 다른 여러 인명에서 보이듯 초기 신라는 진짜 국왕이 아닌 사람에게도 王이 붙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