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

(안압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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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자 : 東宮과 月池
  • 영문 :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1 개요

신라의 궁궐
월성임해전
경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궁궐.

2 역사

문무왕(文武王) 14년(674)에 궁전 경주 월성의 동쪽에 별궁으로 지어졌다.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임해전에 붙어있는 일종의 유원지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경주 월성지, 황룡사지, 국립경주박물관 근처에 있다.[1] 월성의 북동쪽 매우 인접한 곳에 있으며, 황룡사의 가까운 남서쪽에 있다. 대표적인 고대 한국 건축물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시대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월지 호수 서쪽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웠고, 여기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931년 왕건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이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사찰 가람 양식이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과 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다.

월지의 형태는 곡선과 직선이 섞인 형상의 연못과 그 연못 속에 3개의 다양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섬을 설치[2] 섬 안에는 각종 진귀한 식물과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창경원? 섬의 곡선이 교묘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절대 한 곳에서는 그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보니 별 달리 지루한 것이 없다. 월지 등장 이후 이런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연못 형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 나라 쪽 연못에서도 유사점이 보이는데, 아마 이걸 본 일본 관료들이 일본에 있는 백제계 조경가들을 이용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한말에는 호수 정도면 덩그러니 남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임해정이라는 전각을 새로 지은 적이 있으며, 결국 이는 복원을 위해 1977년에 북쪽에 있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 임해정의 현재 이름은 호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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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월지와 임해정

월지는 경주 시내의 유일한 호수로, 원래는 발굴할 계획이 없었다. 다만 폐허가 되어 탁한 물만 고여있는 월지를 좀 더 깔끔하게 <임해전지>로 정리하려고 준설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수많은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1975년부터 2년 동안 발굴을 하게 되었다. 이 때 3만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그 전 무덤 등의 부장품과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이 많이 나왔다. 하단의 출토된 유물 단락 참조. 이 때 발굴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내부 월지관(구 안압지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신라시대의 연못과 석축, 그리고 세 동의 전각 정도를 복원해 놓은 상태. 입장료는 2015년 성인 기준 2천원.

월지에는 연꽃을 식재했지만 무차별적인 번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물 정자형 귀틀 안에다가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이걸 고려하지 않아 연꽃이 만발해졌다.

3 명칭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등에 기록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1980년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명칭은 반월성(半月城)(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고 각종 안내문에서도 변경된 명칭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워낙 안압지로 알려졌었던 기간이 길어서 아직도 안압지라고 부르고 표기되어있기도 하다. 이 문서는 안압지로 쳐도 들어올 수 있다.

다만 임해전이라는 명칭을 신라 시기에 아예 안 썼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에는 동궁을 임해전(臨海殿)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바다에 가까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얼핏보면 안압지를 상징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해당 건물군들 주변 연못가에서 금동판불 등이 발견되면서 여기에서 일종의 의식도 했을 가능성[3]도 있다.

4 복원 계획

경주시는 장기적으로 안압지와 임해전을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근처의 유적지(경주 월성, 황룡사, 경주 최씨 고택, 월정교 등)를 하나로 묶어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봐서는 언젠가는 복원할 기세다. 사실 경주에서 가장 원형대로 복원하기 쉬운 곳이 안압지이기도 하다. 유물이 많이 나와서 상대적으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변이 허허벌판이였으며 여기까지 도심이 확장되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거기에다가 근처 인공호수의 진흙 속에 묻혀있던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 직전까지 거의 천년을 버텨준 덕분에 그동안 발견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희귀한 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었다.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아 보존된 운 좋은 경우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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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와 임해전의 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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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전 모형 세부

5 복원 비판점

안압지의 두 전각이 우선 복원되었는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결론이 안 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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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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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의 조감도틀린그림찾기

경주시는 신라왕경조성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비 630억원(국비 441, 도비 57, 시비 132)을 들여 동궁(東宮)내 정전(正殿) 및 회랑 복원, 선착장 발굴 및 구조물 정비, 미조사 지역 확대 발굴 및 경역 정비 등의 복원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며, 올해부터 실시설계에 들어가 2015년 7월에 복원 공사를 발주할 예정이다.

6 출토된 유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이 삼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호수 안쪽의 진흙이 유물이 썩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건축물에 대한 정보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건물 자재와 장식들이 나왔으며, 이런저런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이두로 써 있는 목간도 다수 출토되었다. 가령 '문호목간(門號)'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출퇴근 카드. 왕궁의 궁문별로 배치한 경비 인원을 목간에 기록한 다음, 그날그날 근무자의 실재 여부를 감독자가 직접 검사해서 경비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는 뜻의 '재(在)' 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목간은 나중에 경비원이 지급받을 식량을 청구하는 데 썼다. 이런 기록으로 동궁의 구조나 운영 방식까지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식해 같은 발효음식의 제조일자를 꼬리표로 달아놓은 목간, 의약처방 기록 목간 등 여러가지 일상생활에 쓰였을법한 목간들이 다수 나왔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물건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신라의 주사위 같은 이색적인 물건도 있으며, 나무로 된 남근 조각상 같은 것도 있어서 후손들의 불순한 마음(............)을 자극하고 있다. 타락하신 우리 조상님

다만 남근상은 종교적 목적으로 많이 사용된 물건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60년대 이전까지 한국 무속에서도 많이 사용했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북유럽 등등 거의 세계 전부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광범위한 문화권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 게 발견된다. ... 는 견해도 있는데, 여기에서 발굴된 남근상을 보면 실제로 많이 사용한 듯 손때가 타 있고, 결정적으로 종교적 목적의 남근상이라면 굳이 추가할 필요가 없지만 자위용 섹스토이라면 자극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가할 수 있는 돌기가 귀두 끝에 붙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발굴된 남근상은 실제 섹스토이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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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에서 출토된 서양 할버드와 비슷한 쇠창.출처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

6.1 목제 주령구(酒令具)


서브컬처를 지향하는 나무위키에서 천년 전의 놀이란 것은 더없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기에 주사위의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해야 할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14면의 주사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 삼잔일거(三盞一去): 세 잔을 한 번에 마시기
  • 음진대소(飮盡大笑):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임의청가(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 자창자음(自唱自飮):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마시기
  • 금성작무(禁聲作舞): 노래 없이 춤추기
  • 유범공과(有犯空過): 덤벼도(장난쳐도) 그대로 있기
  •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사람 코 때리기
  • 곡비즉진(曲臂則盡): 팔뚝 구부린 채 다 마시기[4]
  • 농면공과(弄面孔過): 얼굴 간질러도 가만 있기
  • 월경일곡(月鏡一曲): 월경(月鏡: 노래이름) 한 곡 부르기
  •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5]으로 부르기
  • 공영시과(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 추물막방(醜物莫放):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뭘 넣는거냐
  • 양잔즉방(兩盞則放): 두 잔 쏟아버리기(마시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술 게임(...).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똑같다 이 때문에 이 주사위에는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마 포석정에서도 비슷한 놀이를 했을 것이다. 다만 이 주사위 유물 원본은 보존을 위해 건조를 하던 중 기기의 작동 이상으로 건조 온도가 너무 높아져 그만 재가 되어 버렸다.장비를 정지합니다. 안 되잖아? 어, 정, 정지가 안 돼. 정지시킬 수가 없어, 앙대! 다행히 건조기에 넣기 전에 기록이 되어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 현재 국립경주박물관#s-4.2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기념품으로 판매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상품들도 구할 수 있으며 아예 몇 배 이상 뻥튀기한 대형 사이즈의 주령구도 설치되어 있다.

  1. 1974년 박물관 건설 당시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지금의 박물관이 있는 쪽까지 왕궁 구역의 일부였다고도 보기도 한다.
  2. 3개의 섬때문에 조선시대에 나온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서는 이 연못이 만들어진 게 '상무산십이봉' 즉,무산 십이봉을 본따 만들었다고 했고 그때문에 1999년 이전까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서 신선사상 등에 의한 게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었다.정작 비슷한 시점에서 작성한 삼국사기일본서기 등에서는 월지에 대해서 귀한 식물, 동물을 풀어놓았고 관상용으로 즐겼다는 것 이외의 별다른 묘사를 하지 않았고 무산 십이봉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오기 전에 이것이 만들어졌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해당 책의 저자가 조선시대 사람이니 당연히 당시 사고방식으로 집어넣은 게 이런 오류를 범한 셈이다.
  3. 그 이유는 이걸 만든 시기가 나당대전 당시에다가 김유신이 사망한 뒤 지진이나 호랑이가 궁궐에서 나오거나 반란도 있는 등 흉흉한 시절이다보니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국난 극복용으로 해당 시설을 이용해서 의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4. 후세 사람들중에선 이것을 러브 샷(...)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오 신라의 기상!
  5. 밤 늦게 곤드레 되어 들어오는 모양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