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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芬皇寺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이다. 좀 많이 작아지긴 했어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절로, 분황사지가 아니니까 주의.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의 말사다.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1]였던 것을 보면 한 때는 명맥이 끊겼었지만 말이다.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탑인 모전석탑으로 유명하다. 이쪽도 석탑이지 전탑이 아니니 주의. 한 때 천마도와 더불어 수능 단골 함정이었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졌다.[2]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 분황사는 6세기에 먼저 지어진 황룡사의 바로 북쪽에 건설되어 담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사찰은 황룡사가 더 먼저 세워졌으나 황룡사의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세운 이후에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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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넓은 터가 황룡사지고 위의 작은 숲이 분황사다. 가깝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승려 원효자장이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회고상)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데.. 또한 황룡사처럼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이 분황사에도 있었다.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지어진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허' 즉 일곱 곳의 빈 절터 중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이후의 시대에 절이 다시 복구가 된 것 같다.

그러나 또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75) 구리 30만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녹았거나, 뺏겼거나...

이후로는 아주 작은 사찰이 되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랜 기간동안 가람의 배치는 계속 변해왔으며, 리즈시절 면적은 황룡사의 2/3정도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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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은 1탑 3금당식으로 추정되는데, 모전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를 금당이 둘러싼 고구려식에 더 가까운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서쪽의 금당이 탑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고구려식 가람배치와의 가장 큰 차이다.

가운데 중금당터는 절에 들어가서 탑 뒤로 현재 대웅전으로 쓰이는 보광전(普光殿) 앞마당에 돌을 낮게 둘러쌓고 지면에 살짝 솟아난 듯한 평평한 부지로,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난다. 분황사에서는 장기적으로 이 금당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 금당 복원을 위한 기와 불사(佛事)[3]를 벌이고는 있지만 2016년 현재로써는 언제 복원될지도 모르고 고증 등의 문제를 봤을 때도 된다고 한들 문화재 복원으로써의 가치보다는 종교적 기념물 재건으로써의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을 듯.그리고 옆에 분황사는 쌈싸먹어버릴 네임드 절터가 있다 보니 참고로 중금당터는 지금의 보광전 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규모다. 중금당터 한 모퉁이에 보광전이 올려져 있는 모양새.

2.1 분황사 모전석탑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이름정식명칭경주역사유적지구[4]
영어Gyeongju Historic Areas
프랑스어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

등재유형문화유산등재연도2000년지정번호976
등재기준(ii)[5], (iii)[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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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이었을 때를 상상하여 제작한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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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한자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영어
분류번호국보 30호
소재지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분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설1기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통일신라, 634년(추정)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이 정식 명칭이며, 국보 제30호다. 전돌(塼塔)을 모방하였으므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도 부른다. 분황사 창건 때 같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탑의 비율이나 다른 전탑들의 형태를 봐서는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략 7~9층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탑은 돌을 네모나게 깎아 쌓은 전탑을 흉내만 낸 석탑이다. 생긴 것과 다르게 벽돌로 쌓은 전탑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임진왜란 때의 기록으로 봐서는 신라시대에 쌓은 형태는 지금과는 좀 다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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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전의 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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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후.

구한말을 거치면서 나무들이 자라는 등 탑의 상태가 더욱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이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그 과정에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함 안에는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되었다. 이 때 무너진 탑을 수습하면서 3층에 지붕 형상을 만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2.2 돌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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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있는 우물이다. 화강암을 통채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져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는 높이 70cm로 윗부분은 8각형이며, 내부는 원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불교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경주에 들렀다 떠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님, 저희들은 서라벌 동북(東北)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에 있는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주문을 외워 우리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호국용을 구해주십시오." 라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이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사신을 뒤쫓아 그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게 되었다. 왕은 친히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사신과 주술사를 꾸짖어 "너희들은 어이하여 나의 용 3마리를 잡아가지고 이 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했더니, 그제서야 고기 3마리를 내어 바쳤다. 그 고기 3마리를 들고 와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 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당의 황제에게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팔각정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2.3 보광전

금당 세 개가 모두 소실되고 없는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 외관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낡았다. 1998년 해체 수리 당시 분황사의 창건과 소실 경위 등이 담긴 상량문이 나왔는데, 보광전이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3.45m짜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구리 5,360근이 들었으며 18세기 후반의 작품이라고.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돌로 되어있는데 원래 부지에 있던 것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쪽에 원효 대사의 초상화도 같이 모셔져 있다. 안에 불상이나 대좌, 갖가지 불화에 작은 보살과 위패가 벽에 가득하고 천장에는 연등까지 달려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보면 좁게 느껴진다.

3 기타

3.1 향가

도천수대비가는 신라 경덕왕시절 눈이 먼 아이가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의 그림 앞에서 기도하며 불렀던 노래다. 결국 눈을 떴다는 전설이 있다.

3.2 사자상 보수

분황사 석탑 주위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는데, 2006년 발이 없는 불쌍한 놈에게 다리를 다시 달아주었다. 추가바람.

3.3 수정화주

임진왜란 이후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나왔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이 진짜였는지는 알기 힘들다.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1915년에 분황사 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함 안에 진짜 수정화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7 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돋보기 혹은 불씨를 얻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안경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 중 하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4 홍수

홍수피해를 유난히 많이 받은 절이기도 하다는 듯. 사진에서 보듯 물길이 여기서 커브를 트는데, 상류에서 물이 넘치면 이것이 곧장 절로 직행한다. 애초에 법력으로 홍수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경렬 선생이 쓴 신라 이야기 1권에 보면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두고 분황사 부처님과 헌덕왕릉이 서로 자기 쪽으로 안오게 하려고 기싸움을 벌였는데(...) 그 싸움의 흔적으로 헌덕왕릉에 현재 석물이 별로 남아난 것이 없게 되었다고. 헌덕왕릉은 실제로 북천 강변에 바짝 닿아 있다.

하지만 결국 보문호와 덕동댐 건설 이후에야 홍수는 잦아들었다. 헌덕왕, 분황사 부처님 曰 "우리 왜 싸웠던 거지"

  1.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허'라고 하였다. 7곳의 빈 절터라는 뜻.
  2. 재미있는 것은 분황사가 세워진 해에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새로 바꿨다.
  3. 기왓장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하고 그 사람의 소원 적고 얼마씩 내는 식으로.
  4.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
  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