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에서 넘어옴)

1 개요

부흥은 쇠퇴했던 것을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국사에서 이미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을 부흥운동이라 칭한다.

2 목록

2.1 고구려부흥운동

고구려가 멸망하고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영주(융저우)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동모산으로 도망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동모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다. 이러한 배경때문에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검모잠이 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결국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살게하고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안승서라벌로 불러 경주시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반굴의 아들 김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보덕국인(보덕국에 살던 고구려 유민)+말갈인), 적금서당(보덕국인)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다. 그 중 고구려의 왕족 안승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 대우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1]

이와 별개로 고구려의 고토 요동에선 별도의 고구려 부흥 노력이 있었다.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2]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그러다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다.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도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소고구려가 또 존재하는 것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건국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제의 제도가 고구려, 발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저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왕건의 쿠데타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도 국명에서부터 엿보이듯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경우 통일신라의 영역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지만, 고려는 예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직접 지배를 제대로 하질 못했던 황해도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면서 평양 이북으로도 약간 올라간 영역에서 시작했고, 후백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전라도, 충청도 상당 부분, 경상도 상당 부분은 영토가 아니었다.

때문에 영역을 처음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견해며, 왕족과 옛 신라 지배층이 깊이 유착되었다지만 신라 지배층은 적지 않은 수가 상당한 권력을 빼앗기고 향리 신세로 떨어져야만 했다.[3]

고려 무인 집권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고구려 부흥 운동이 벌어졌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후삼국 시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해졌다지만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잔존해 있었고,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 사건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하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비슷한 시기의 신라 부흥 운동, 백제 부흥 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나도 강렬히 드러나 있는데다,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관 별개로 고려(=고구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1217년에 최광수가 서경성을 빼앗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가 암살로 끝났다.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이 문단의 내용 중 일부는 고구려 문서의 521번째 버전에서 가져왔습니다.

2.2 백제부흥운동

삼국통일전쟁 문서의 백제부흥운동 단락 참조. 그리고 결국 백제는 부흥에 성공한다. 후백제 참조. 백제가 주도하는 삼한일통은 또 다시 좌절되지만, 적어도 신라의 굴레를 벗을 수는 있었다.

2.3 신라부흥운동

신라부흥운동 문서 참조.

2.4 발해부흥운동

발해부흥운동 문서 참조.

2.5 고려부흥운동

조선 건국 초기 왕씨 몰살을 통해 무자비하게 싹을 잘라냈는데, 사찬읍지인 고령지에 따르면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고려의 안동장군 이미숭, 진서장군 최신 등이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니산, 덕대산, 운라산성 등에서 패하고 상원산에 성을 지어 항거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군사를 해산했다.

2.6 조선부흥운동

1910년에 독립의군부라는 단체에서 고종의 복위를 내세웠다.

2.7 대한제국황실복원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 참조.

2.8 한국독립운동

외세에 항거하여 계승하는 국가를 세우게 되는 한국독립운동 역시 부흥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1. 이 점은 진평왕~무열왕까지 신라를 가장 크게 위협한게 고구려가 아닌 백베인탓이 큰듯하다.
  2. 당연히 고조선에서 유래.
  3. 신라 왕가와 혼인 정책을 폈다지만 그건 유화 정책을 쓰는 정복국이면 어디나 하는 제스쳐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도한 서경파가 주류 개경파가 대립했다는 것도 상당히 잘못 알려진 설이다. 서경 자체가 왕건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세력이었고, 개경의 정치 세력 자체가 신라계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설이다. 그나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내세웠다는 것도 결국은 "신라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삼한 계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