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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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28대 보장왕 고보장29대(?) 안승왕 고안승30대(?) 덕무왕 고덕무
왕호보덕왕(報德王) / 안승왕(安勝王)
고(高) / 연(淵)
안승(安勝)
생몰년도? ~ ?
재위기간670년 ~ 684년

1 개요

고구려의 왕족이자 부흥운동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가인 검모잠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고.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군대가 대대적인 토벌전을 시작하자 결국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 남쪽 신라로 달아나서 고구려계 유민들로 이뤄진 괴뢰 국가 보덕국의 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라의 귀족이 되어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었다.

2 생애

2.1 출생

안승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말이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서는 보장왕의 서자라 되어있지만, 신라 본기에서는 안승이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래서 풀네임도 연안승(보장왕의 외손이라는 추정)과 고안승(보장왕의 서자라는 추정)으로 여러 서적에서 뒤섞여서 쓰인다. 임기환은 보장왕의 외손자로써 연정토의 아들, 즉 둘 다 맞다라고 보고 있다.[1] 안승이 고구려 멸망 후 부흥세력의 왕으로 추대된 점 등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이 보기에도 당나라에 끌려간 보장왕 대신 왕위를 이을 만한 지위를 가진 인물, 즉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좀 더 우세하다.[2] 안승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이래저래 산만한 점이 많아서 한 가지만 믿기는 힘들지만,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했다는 점에서 왕위계승권이 분명히 있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가계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2.2 부흥운동기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안승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3]에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에 670년,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당나라 관리를 살해하고 남쪽으로 이동해온 검모잠이 안승을 발견하여 한성(漢城)[4]에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후에 소형(小兄) 벼슬을 지내던 다식을 신라로 보내서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조건으로[5] 구원을 청하였는데, 이에 신라문무왕은 안 그래도 당나라의 야욕에 한창 부담을 안고 나당전쟁 준비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670년 당고종이 대장군 고간이 지휘하는 대군을 보내자 이에 대한 대응을 두고 안승과 검모잠이 의견 대립이 격화되면서 고구려 부흥군은 분열되었고, 안승은 검모잠을 죽인 후 지지세력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했다.

이듬해인 671년, 고구려의 옛 땅에 잔존해있던 고구려 부흥세력은 고간이 이끄는 당군에 의하여 완전히 토벌되었고, 여전히 신라와 당의 나당전쟁은 벌어지고 있었지만 결국 고구려 부흥운동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3 보덕국왕이 되다

문무왕신라로 투항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 땅인 서쪽 금마저(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머물게 하였으며, 674년에는 안승을 일종의 속국 또는 괴뢰 국가보덕국(報德國)의 왕 '보덕왕(報德王)'에 봉하였다.[6]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수도로 옮기려고 시도한 적도 있는 만큼 익산은 무왕-의자왕에게 충성하는 세력, 즉 신라에는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므로, 보덕국을 익산에 세운 것은 신라가 직접 백제 유민들을 제어하지 않고 제3자인 고구려 유민의 힘으로 백제 유민을 제압하려는 문무왕의 이이제이 전략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서 680년에는 문무왕으로부터 으로 만든 그릇과 비단 1백 단을 예물로 받고 문무왕의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7] 교서를 받았다.

2.4 이후

683년, 신문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소판(蘇判, 신라17관등 3번째 잡찬과 동일) 벼슬을 얻었으며,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 귀족이 되었다. 받은 소판직 자체가 6두품 이하는 오를 수 없는 진골의 관등이다.[8] 이로써 신라의 중앙귀족이 되어 경주의 큰 저택에서 머물게 되었고 보덕국과는 격리되어 버렸다. 아마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기 위해 만들었던 보덕국을 이 시점에서 서서히 없애버릴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듬해인 684년, 보덕국에서 안승의 조카였던 장군 대문(大文)이 안승이 신라 귀족으로 편입된 데에 불만을 품고 신라 조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반굴의 아들 김영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아 토벌군으로 보냈다. 그런데 황금서당은 옛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즉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한 셈. 김영윤은 전사했지만 이후 계속된 토벌로 대문은 곧 죽었고,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은 대문이 죽은 이후로도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성을 점거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이로써 보덕국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신라는 보덕국이 있었던 지역에 금마군을 설치하여 신라의 행정구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보덕국과 싸울 때 경주에 있었던 안승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후 역사에서 안승의 후손으로 보이는 진골이 안 나온다는 점, 관계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상식적으로 우두머리인 안승에게도 모종의 페널티가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추정해 안승이 6두품으로 강등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냥 후손을 못 남기고 죽어서 대가 끊어진 것일지도 모르고, 삼국사기에는 성씨를 생략하고 이름만 나오는 경우도 많고, 성도 김 씨를 하사받았다고 하니까 누가 안승계인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횡성 고씨 족보에 따르면 안승의 형 고인승이 횡성에 살기 시작하면서 횡성 고씨 시조가 되었다고 서술하고있다.

3 평가

안승에 대한 평가는 좀 애매한 편이다. 결과적으로는 당나라군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않고 신라로 달아나려고 했던 점과 함께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검모잠을 살해했던 일 등으로 인하여 조금 까이는 편(...). 심지어 고구려 유민들의 편입을 위하여 신라 조정에 의해 이용만 당했다면서 박하게 평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미 일부 고구려 부흥군의 힘으로는 당나라 군대에 맞설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니 당나라에 투항하기보단 신라에 의탁하고자 하였던 안승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평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고구려 왕족인 안승이 신라 편을 든 덕에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협조했다면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이기는 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안승을 따라 신라로 투항한 고구려계 귀족들이 신라로부터 6두품을 하사받고 신라 귀족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갔다는 점을 상기해보자면 안승의 외교적인 안목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고구려계 귀족들은 나중에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 출처: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2.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도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한 글에서 "선왕(보장왕)의 정당한 후사(正嗣)는 오직 그대 뿐이니 제사 맡을 자 또한 그대 말고 누가 있겠는가"라고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외손자라면 정당한 후사라느니 하는 말을 쓸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고 안승을 보장왕의 서자로 보았다.
  3. 현재 인천의 소야도
  4. 한강변의 서울이 아니라 오늘날의 황해도 재령 부근의 지명이다.
  5. 즉 신라의 변경 방어를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6. 보덕국이라는 이름이 어떤 뜻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금마저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이다. 전북익산!!.
  7. 혹은 잡찬(迊湌) 김의관(金義官)의 딸과 결혼하였다고도 한다.
  8. 폐쇄적인 골품제를 시행했던 신라 천 년 역사상 외부 인사를 진골 취급해 준 것은 김유신을 비롯한 금관국 왕족과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그리고 안승 이렇게 세 번 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신라 왕족도 진골이기 때문에 외부인인 안승을 진골 대우한 것은 굉장히 높은 지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