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건국 후 1394(태조 3년) 무렵에 일어났던, 전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전대 왕조 일족 대학살 사건.[1][2] 유학과 도덕에 근거해 구축된 조선이 그 유학과 도덕을 저버린 흑역사.
2 배경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가 결국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 왕조는 고려의 옛 충신들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된다. 특히 위험분자로 고려된 이들이 바로 전대 왕조의 왕성인 개성 왕씨들이었는데, 이성계의 무력 찬탈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고려 건국의 경우 단일된 국가 하에서 왕조가 교체된 고려-조선의 교체 과정으로 건국된 조선과는 달리 당시 이전 왕조였던 신라가 후삼국시대라는 분열기를 거쳐 후백제와 태봉등으로 갈라지고 지방 각지에 호족이라는 군벌 세력들이 할거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데다 후삼국시대 때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몰아내면서 태봉을 갈아엎고 고려로 왕조를 교체하는 등 오히려 태봉 내부에서 일어난 역성혁명으로 건국되어졌다.
외려 고려 내부에서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 과정처럼 신라 내부에서 다른 성씨 가문이 김씨나 박씨등 기존의 신라 왕실 가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로 교체하는 등 신라에서 새 왕조로 멸망, 교체되는 기존 역성 혁명의 방식으로 국가가 건국되지 않았고, 당시 신라 왕실의 위상이 민심과 국가의 분열, 정부 통치력의 상실, 후백제의 공격으로 회생불능 상태로 떨어져 있었고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이후 모든 한반도 역내의 주도권이 고려에게 많이 몰리게 되자 신라 측에서 먼저 왕건에게 귀순해 고려로 흡수 합병하면서 왕조가 소멸되었다.[3]
삼국 통일 이후에도 모든 특권을 중앙이 독점해 구 백제, 고구려 유민을 동화시키는데 실패했던 신라와 달리 지방세력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했던 고려왕조는 대대로 경주 김씨 일족을 우대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경순왕)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지역의 민심을 보살피게 하는 등 일정한 권한을 보장해주었기에 큰 반발없이 신라를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쿠데타로 세운 왕조이기에 반감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무안군 이방번이 공양왕의 형 정양군(定陽君) 왕우의 딸과 결혼하는 등 조선 왕가에도 왕씨의 피가 섞여 있어서 더욱 복잡해졌다. 중국 한나라의 후한 광무제처럼 나라가 한 번 멸망한 후 전대 왕조의 왕족이 다시 찬탈자를 물리치고 국가를 재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4]
태조 1년 무렵에 왕우를 봉해 개성의 고려 종묘에서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초기에 이성계가 왕씨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왕우는 이성계와 사돈지간[5]이었기에 화를 면한 것이었다.
3 학살의 동기
지방의 전승이나 정황증거를 배제하고 실록에 남아 있는 정사만을 신뢰한다면, 실제로 왕씨가 조선을 들어 엎으려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실록에서 왕씨의 역적모의라는 사건들이 대체로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6] 왕씨의 몰살은 왕씨 세력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조정에서 억지 구실을 갖다 붙여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 왕씨를 몰살시킨 것에 가깝다.
단, 기존에는 유교사상에 근거해 과거 멸망시킨 왕실의 명맥은 보전해 주던 고사를 본받아[7] 고려 왕실의 명맥은 보전하게 하자는 방침이던 조선 조정이 태조 3년에 갑작스럽게 전원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침으로 급선회한 것은 다소 여러모로 의아스러운 사항으로, 관련된 실록의 내용도 곡필이 심한 왕조 초기의 기술이니만치 보다 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성계가 치밀하게 왕씨 몰살을 계획했을 가능성이다.[8]
4 진행
몇몇 왕씨의 모반에 대한 제보가 있었고, 이를 구실로 정도전, 이방원 등 개국공신들도 왕씨들에 대한 숙청을 주청했다.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등으로 유배을 보내는 식으로 왕씨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으며, 태조 3년에는 결국 거제도나 강화 등지에 모여 있던 왕씨들을 바다에 빠뜨리는 식으로 일대 학살이 벌어졌다.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돼 있던 공양왕과 아들들도 이 때 살해되었다.[9]
섬에 살게 해 주겠다며 왕씨들을 모아 배에 태워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기록이나, 고려 태조 왕건이 이성계의 꿈속에 나타나 따져 물었다고 하는 기록은 야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으로, 실록에는 다만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사들이 보일 뿐이다. 단 야사가 으레 그렇듯이 당시 민중들이 두고두고 왕씨를 안쓰럽게 생각했다는 민간의 인식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정 많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죽이는 데 끝끝내 반대했고 신하들이 알아서 손을 더럽혔다는데, 이게 그 뒤로도 조선측의 공식 입장이 된다. 태조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밑의 신하들이 멋대로 저질러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는 식의 뻔한 레페토릭.
하지만 실록의 기사들에서도 사실을 읽어낼 수는 있는데, 후일 숨어 사는 왕씨들을 밀고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씨 색출 및 학살은 매우 철저하고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들 이방원이 왕씨들을 살려줄 때 대놓고 아버지의 본심은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면서 정책을 뒤집어 엎어 대놓고 이성계가 시켰다고 인증을 해 버렸다.[10]
사실 당시 왕씨 몰살의 규모와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사성정책으로 고려 건국 후 엄청난 수의 왕씨들이 생겨났으며, 이후 그 자손들이 번성하여 왕씨는 고려 시대 최대의 성씨가 되었고, 고려 말기에는 왕씨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때문에 왕씨 몰살이 자행되자 이성계와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은 아주 흉흉했다. 특히 왕씨들이 많이 살았던 개성에서는 일가 친척들 중에 왕씨와 엮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에 대한 민심은 거의 증오에 가까웠고, 결국 이성계가 천도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에 이성계가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며 두 아들과 정도전과 남은 등의 충복들을 잃게 되자, 민중들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몰살한 업보로 천벌을 받은 것이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로도 패륜을 저지른 아들이 사실상 실권자로 등극하고 거기에 또 나아가서 자식끼리 싸우는꼴까지 겪은 뒤에 이성계도 말년에 왕씨 몰살을 후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해도 이 시점되면 왕씨의 대다수가 이미 소멸당한지라 별로 남아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때 왕씨의 대다수가 몰살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계의 성씨나 왕(王)자가 들어간 성씨[11]로 바꾸면서 겨우 연명한 걸로 보인다.
5 중지
왕씨 사냥은 태종(조선) 대 들어서 중단되었다. 1413년에 태종이 왕씨몰살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던 것. 사실 이 시점되면 조선이 어느정도 안정화되었을 시점인데다가 태종입장에서도 아버지가 왕씨몰살 정책을 추진하다 민심이 이반되고 자신이 직접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겪고나서도 "왕위를 찬탈한것도 모자라서 왕씨를 대거 죽이더니만 천벌받았고만, 꼴좋다" 면서 동정조차 받지 못한 꼴을 직접 지켜봤으니 굳이 더 시행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 아버지의 정책에 대한 디스까지도 감수했다. 1416년에는 공양군으로 격하되어 있었던 공양왕을 왕으로 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숨겨 준 사람들이 엄하게 처벌되고 대간이 찾아낸 왕씨를 죽일 것을 주청하는 등 왕씨는 계속 위험시되었고 여전히 왕씨들은 모계의 성씨로 바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며 벼슬길도 막혀있었다.
개성왕씨에 대한 차별이 그나마 철폐된건 문종 때의 일이었다. 문종 대에 제씨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왕씨의 후손 왕우지와 다툼이 생긴 사람이 그를 해꼬지할 목적으로 '저놈 사실 왕씨래요!'하고 관가에 일러 바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씨에 대한 방침을 바꾼 덕에 왕우지는 도리어 벼슬을 얻고 왕순례라고 이름을 고쳐 왕씨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문종-단종-세조-성종대를 거치며 의전상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단종을 죽이러 갔다가 시를 읊었다고 청구영언에 기록 된 금부도사 왕방연 왕순례 일가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음서로 출사하여 벼슬이 금오랑(金吾郞)에 이르렀기 때문.[12]
다만 왕순례는 서자는 있어도 본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그의 손자를 끝으로 숭의전 전감 자리도 끊어지고, 왕방연은 문과 출신인데 조선 후기 이전에는 서얼은 문과를 볼 수 없었다. 거기다 본인도 복권 후 오만방자하다고 한 차례 처벌을 받은 선례가 있는데다 1988년 발견 당시 그의 무덤도 황폐하기 그지없어* 그의 자손들이 과연 제대로 벼슬을 했을지는 의문. 왕순례보다는 서울에 살았던 동양군파인 왕미의 자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동양군파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데다, 그가 살던 곳은 아예 왕촌(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451번지)이라 불렸을 정도.
6 결과
어쨌든 이 학살로 인해 개성 왕씨를 비롯한 구 고려 왕실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다시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위치를 가지지 못했고 현대에도 왕씨는 김씨나 이씨, 박씨와 달리 화교 취급 안 받으면 다행인 정도로[13] 한국에서 소수 성씨집단으로 전락했다.
이전 왕조에 대해 이 정도로 가혹하게 대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데, 고조선의 경우 전한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 당시 위만조선의 왕족들의 신변에 대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우거왕의 아들 위항은 벼슬을 한 것으로 나와있고 후작 작위를 받아서 산시 성 일대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나중에 반역죄로 사형당하지만 이건 본인의 문제지 고조선의 왕족이라서가 아니다.
고구려, 백제, 발해의 경우 멸망 후 보장왕, 의자왕, 부여풍, 안승, 대인선등 전 국왕과 왕족들이 당나라나 신라, 요나라로 끌려갔는데, 신라의 경우 고구려, 백제 왕족들을 진골~5두품에 편입시켜 귀족 예우는 받으며 살았다. 가야의 왕족들 또한 멸망 후 신라 왕족인 진골로 편입되었다. 물론 신라 기존 진골들에 비해서 다소간의 차별은 있었다고는 하나 가야계 왕족 후손인 김유신은 크게 출세하여 사후에 경주 김씨 왕가와 동급으로 추존되기까지 했다.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가 멸망한 후에 경순왕의 후손들은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즉 왕씨 학살은 이러한 전례들에 비해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당대 사람들도 경악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숙청의 결과 고려 부흥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부흥시키고자해도 구심점이 될 왕족이 없으니까.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 지역의 반발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놓곤 못하고 지역감정 수준이었지만.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의 기행문에 의하면 개성 사람들은 근 500년이 지난 그 때까지도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를 싫어하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개성 사람들은 서울(한양)에 가는 것을 서울에 내려간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성계가 돼지띠였으므로 돼지를 잡으면서 성계육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 난 쌀은 이(李)쌀이라고 부르고, 개성에서 난 쌀은 왕(王)쌀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개성의 유명음식 중 하나인 조랭이 떡국은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고 해서 조랭이 떡국이다.
7 해를 당한 왕씨
- 공양왕 왕요, 왕세자 왕석, 왕자 왕우와 함께 피살되었다.
-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 등의 유력 왕씨들.
- 삼척, 거제, 강화 등지에 모아 놓았던 왕씨 일족 전체
- 그 밖의 중앙, 지방에 있던 왕씨 일족 전체
8 성을 바꿔 살아남다
왕(王)에서 획을 더하거나 점을 찍어 전(全), 전(田), 옥(玉), 차(車), 신(申) 등의 성씨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제 5대 왕인 문종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이 해제되기 까지 왕씨임을 못밝히고 숨기고 살거나, 익숙해진 성에 적응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야기인 만큼 야사 정도로 생각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바로 위의 왕순례의 사례만 봐도 진짜로 성을 바꾸어 숨어 살았던 것을 보면 아주 근거가 없다고 보긴 어렵다. 전씨 옥씨 등 단골로 의심받는 성씨 문중에서는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수백년이 지난 이제와서 자기들 성을 갈아버리는 문제라서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9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 서진은 건국과정에서 조위의 황제 조모를 시해했고[14], 이후 동진이 유송에게 망할때부터 전 왕조의 종실들을 몰살시키는 징크스가 계속된다. 전 왕조 일원들에 대한 처우가 관대해지는 건 송태조 조광윤 시절부터다. 전근대 한반도는 중국의 전례를 공부하고 참고했는데 조선 건국은 송태조 한참 이후 시기라, 왕씨 처분은 동시대 중국 기준에 비추면 잔혹하게 처리한 사례다.
- 아바스 왕조가 세워지면서 이 왕조의 시조 아부 아바스가 친교를 맺을 구실로 우마이야 왕족들을 연회에 초대한 후 돌변하여 모두 몰살시켰다.[15]
- 베트남/역사에서 리왕조에서 쩐왕조로 왕조가 교체될 때 리 왕조 일가가 숙청당했다. 한 사람만이 겨우 살아남아 여몽전쟁 당시의 고려로 갔다. 화산 이씨의 시조.
- 프랑스 혁명 직후 부르봉 왕조의 왕족들이 대거 학살당했다. 다만 나폴레옹의 황제즉위를 거쳐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이 공산당에 의해 황제 일가 전원을 포함해서 대거 학살당했다.
- 1958년 이라크에서 카심등 자유장교위원회의 군사 쿠데타 직후 이라크 하심 왕실의 왕과 왕실 일가들이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반란군에 의해 모조리 학살당했다.
- ↑ 이를 자세히 다룬 작품은 용의 눈물 정도다. 길지는 않지만 왕씨들을 속여 배에 태워가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도륙내는 장면들을 묘사했고 나레이션으로 학살의 전개와 이에 얽힌 야사를 설명 해준다. 대왕 세종에서는 배에 구멍을 내서 빠뜨려 죽이는 걸로 짤막하게 묘사된다. 그외 정도전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드라마에선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를 다루지 않았고, 육룡이 나르샤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여말초선을 다루는 매체에서 정몽주와 더불어 다루기 굉장히 어려운 사건이다.
- ↑ 그나마 왕씨학살은 짤막하게 언급이라도 되는 형편이지 정몽주는 정도전만 강조하다보니 아직도 충신 프레임에 갇혀서 역사속 왕좌지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권문세족에 대한 재평가(신진 사대부와 권문세족 구분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는 아예 다큐로도 다뤄진적 없다.
- ↑ 신라가 고려에 흡수된 이후 구 신라 영토였던 경상도 일대에서 지방 반란군 세력들의 반란이 지역성에 합쳐진 신라부흥운동이 고려 시대 초,중기에 일어나긴 했었으나 이는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통일의식을 강조한 고려 왕조의 역사, 이데올로기 정책 아래 고구려,백제 멸망 후에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이나 발해 멸망 후 요나라 시대의 발해 부흥운동과 같은 거대한 파급력을 갖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 진압되었다.* 물론 고려 초기에도 반란과 정치적인 혼란이 잦긴 했으나 이건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들과 왕자들 배후에 있는 지방세력의 대립이지 고려 지배를 부정하는게 아니었다.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시대에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의 부흥운동까지 일어나고 더 나아가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마져도 고려내에서 고구려 부흥운동까지 일어났던 점을 감안하면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우던 고려 체제하에서도 삼국 유민의식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다.
- ↑ 사실 왕망의 신나라 같은 경우는 저지른 실정들이 워낙 심각하였던데다가 왕망의 막장성에 당시 중국 백성들의 한나라에 대한 향수까지 겹치면서 반감이 상상이상으로 확대되어 몰락한 점도 없진 않았다..
- ↑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소생 무안대군 방번이 왕우의 사위였다.
- ↑ '왕씨의 반역에 참여한 관리 몇 명이 점쟁이를 찾아가 불온한 점을 쳤다' 정도로, 반역 사건을 날조할 때 쓰는 억지 구실에 가깝다.
- ↑ 대표적인 것으로, 주의 성왕이 은 왕실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 고사가 있다. 이왕삼각 항목 참조.
- ↑ 공양왕 형인 귀의군의 경우 이성계와 사돈관계라는 이유로 살아남았고 이런 학살극에서 무사할수 있었으며 명맥을 보존시킨다는 계획이 통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의 난리통에 귀의군 직계들이 모두 살해당하여 명맥을 보존하고 제사를 지내게 해준다는 선포가 무의미해졌다.
- ↑ 수수께끼 투성이라 추측만이 가능하긴 하지만, 공양왕도 이 과정에서 뭔가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항목 참조.
- ↑ 물론 아버지가 정말 몰살시킬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고 변호하려고 한 거지만, 이건 형식상 자식이 아버지를 욕할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일 뿐이다. 실제 이성계가 왕씨들을 학살했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 ↑ 천안 전씨항목 참조
- ↑ 참고로 그의 무덤이 있는 곳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왕방골이라 한다.
- ↑ 대표적으로 한국의 유명한 여배우 전지현이 본명이 왕씨라서 화교 의심을 받았을 정도였다.
- ↑ 다만 이때는 유선, 헌제, 손호 같은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 ↑ 한 사람만이 살아남아 간신히 도망가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구체적으로는 권력A급은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투항했으나 모두 죽였고, 권력B급 인사들은 죄다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 휴양지에서 다같이 먹고 마시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도살, 그냥저냥한 이들 역시 우마이야조와 관련되었다면 죄다 색출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