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1 貢女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바쳐지던 여성들. 주로 강대국의 간섭을 받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의 젊은 미혼 여성들을 모아 보냈다.

강대국인 황제국이나 상국이 제후국에 공녀를 요구한 일차적 목적은 궁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공녀가 고관의 첩이 되거나 유곽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대부분의 공녀는 황제국에 가서 궁녀가 되었다.[1] 기황후도 몽골 궁궐의 일반 궁녀로 시작했다. 그는 차를 따르는 궁녀였다. 황제국이 제후국에서 궁녀를 충원한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국이든 제후국이든, 궁녀를 모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힘든 일이었다. 사극이나 동화에서는 궁녀가 꽤 괜찮은 자리였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평민 여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궁녀 자리를 기피했다. 궁녀는 자유인 신분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개중에는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몇 백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다. 상당수의 궁녀는 평생토록 왕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 의해 목숨을 잃기 쉬웠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국은 자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이런 일을 제후국에 떠넘긴 것이다. 한편 제후국은 자기 나라 궁궐에 들일 궁녀 뿐만 아니라 황제국 궁궐에 들일 궁녀까지 뽑아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바쳐야 했던 공녀의 역사는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신라에서 북위에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공녀 문제와 관련하여 당나라는 다른 중국 왕조와는 비교적 색다른 태도를 보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 53년(631년) 7월 신라는 당태종에게 두 명의 공녀를 보냈다. 그러자 당태종은 측근인 위징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들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이후에도 신라는 계속해서 여인들을 파견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는 짜증 섞인 반응을 나타냈다. 당고종은 "이후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공문을 문무왕에게 보냈다. 하지만 신라는 중단하지 않았다. 성덕왕 22년(723년) 3월에도 두 명의 공녀를 당나라 당현종에게 보냈다. 당나라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나라는 푸짐한 선물을 안겨서 이번에도 여인들을 귀국시켰다. 당나라 황제들이 신라 여인들을 귀국시킨 일차적 이유는 신라와의 공조관계가 필요했던 그들로서는 신라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신라인들은 미인 앞에서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군주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소지 마립간은 파로라는 사람이 소개한 당대 최고의 미소녀인 벽화(파로의 딸)를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하여, 백성들로부터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2] 이런 신라인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당나라 황제들이 공녀들을 그냥 돌려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서기 792년에 이변이 돌출했다. 그동안 신라 공녀들을 거부하던 당나라에서 아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원성왕 때(792년)의 일이었다. 공녀를 받아들인 황제는 당덕종이었으며, 이때 신라 공녀는 김정란이었다. 당덕종이 김정란을 받아들인 이유는 '신라 본기'에 간접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신라 본기'에서는 "그는 국색(國色)이며 몸에서 향이 났다"고 했다. 국색은 나라 최고의 미인이라는 뜻. 김정란이 '미스 신라'였다는 것이다.

공녀 차출이 가장 극성이었던 시기로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였다. <고려사>에 근거한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275년부터 1355년까지의 80년간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 공녀는 공식적으로 176명이다. 보통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인 공녀들은 원칙상 상품으로 취급되어 원나라에 끌려갔다. 상품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이들을 보내는 조건으로 고려가 대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되던 20세기 이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려에서 공녀가 포함된 조공품을 일괄적으로 제공하면, 원나라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회사품(回賜品, 답례품)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일괄적으로 거래했다'는 것은, 공녀 1명씩에 대해 별도로 값을 매기지 않고 공녀가 포함된 조공품 전체에 값을 매긴 뒤 답례품의 종목과 수량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고려사> '고종 세가'에 실린 국서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데이칸은 "사신을 통해 고려 왕에게 물건을 보내니 그것을 받으면 답례 물품을 보내라"고 하면서 남녀 인질 및 금·은·구슬·말·수달피 등과 함께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외교 친선 관계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인신매매, 인질, 포로 등과는 다른 개념이나, 공녀로 선발된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평생 부모 형제와 헤어져 이역만리에서 궂은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궁궐에서 중노동을 하고 결혼·이성교제가 금지되는 것에 더해, 언어 및 문화적 고충까지 덤으로 짊어져야 했다. 또 고려 궁궐에 근무하면 어쩌다 가족이라도 만나볼 수 있지만, 몽골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가족과 사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딸을 조혼시키거나(기혼 여성은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숨기는 일은 예삿일이었으며, 차출된 여성이 신세를 비관하다 자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정도로 기피되는 일이었으면 힘이 없는 하층민 여성들만 공녀가 되었을 것 같지만, 공녀들 중에 이른바 좋은 출신의 여성을 포함해 보내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상류층 여성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다. 심지어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딸이나 여동생을 원나라 고위층에 공녀로 바치던 천하의 개쌍놈 부원세력들도 있었다. 일례로, 강종의 서녀인 수령궁주가 딸[3] 을 공녀로 보낸 충격으로 병사한 내용이 수령궁주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가 원나라에 보내던 공녀는 1356년 공민왕에 의해 반원개혁정책이 실시된 후에야 비로소 중단된다.

원나라를 대신해서 중국 대륙과 만주를 차지한 명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해왔다. 그리하여 고려를 멸하고 새로 건국한 조선에서도 명나라에 공녀를 바쳐야만 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는 모두 12차례에 걸쳐 공녀를 요구하였다. 이 가운데 명나라 황제의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고 실제로 처녀가 보내진 것은 7차례였다. 태종 8년(1408)에 처음으로 공녀를 보냈고 1408년에서 1417년까지 3차례에 걸쳐 40명의 공녀가 명나라로 갔다. 그리고 세종(1427~1433) 때 4차례에 걸쳐 74명의 공녀가 보내졌다. 명나라의 경우는 원나라와 다르게 뽑힌 처녀와 처녀를 모실 여종들 역시 함께 갔다. 기록에 따르면 뽑힌 처녀는 모두 16명이었지만, 그에 따른 여종들은 48명으로 이밖에도 집찹녀 42명과 기무녀 8명을 합하면 모두 114명의 공녀가 받쳐진 셈이었다.

일단 공녀를 보내라는 요청이 오면 조선 조정은 임시로 진헌색(進獻色)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나이 어린 양가 처녀들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자진해서 머나 먼 이국땅으로 고이 기른 딸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하여 나라에서 내린 금혼령을 피해 황급히 딸들을 결혼시키는가 하면 몹쓸 병이 들었다고 거짓 고하기도 하고 몰래 숨겨놓기도 하였다. 공녀를 원한 명나라 황제들 중 유명한 사람은 영락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하였다. 영락제가 생존해있는 동안 총 세 번의 공녀 차출이 있었다(1408년, 1409년~10년, 1417년). 그 중, 첫 번째 공녀에 속하여 그 중 첫째라고 하는 권씨는 영락제의 본처인 인효서황후(仁孝徐皇后)가 1407년 죽은 후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영락제는 권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총애하여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그래서인지 <명사 후비전>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 여인이기도 하다. 물론 자국민이 아니라서인지 그녀에 대한 기록은 짧다. 영락제 사후에는 선덕제가 딱 한 번 공녀를 요구하였고, 그 후 조선에서 공녀 차출은 더 이상 없었다. 물론 정덕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급사하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다.

2 公女

공작 영애. Princess 등 서양식 작위의 번역어나 고귀한 신분의 젊은 여성을 수식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에 공작 작위가 없었으므로 비교적 최근에 사용하게 된 말이다. 공작의 여식이라는 의미에서 공작녀라고도 하나 발음하기 불편한지 최근에는 공녀로 많이 쓰고 있다. 공국 군주의 딸은 공작의 딸이기도 하고, 서양에서는 왕족들이 공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딸들은 공녀에 봉작되게 되므로 공주왕녀와 많이 겹친다.

3 工女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는 여공의 동의어.
  1. 어떤 경우에는 귀족의 부인이나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고려사절요>의 충선왕 편에 따르면, 대사헌 조서의 딸은 정식으로 공녀가 되어 몽골에 간 뒤 몽골 권력자의 부인이 되었다.
  2. 물론 소지 마립간은 공개적으로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은밀히 벽화를 불러들여 자식까지 낳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소지 마립간에게 환호를 보냈던 것이다.
  3. 궁주의 딸이었으면 그 여성은 무려 왕의 외손녀였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고위층 여성도 피하지 못한 것이 공녀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