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

왕녀, 王女, おうじょ
a princess, a princess of the blood

1 개요

주로 일본 쪽 매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는 호칭. 사전적으로는 을 의미하는 말이며 왕희(王姬)라고도 쓴다. 원래는 공주와 다른 의미이다. 둘 다 왕의 딸을 지칭하며, 영어로 쓰면 둘 다 'princess'이지만, 공주가 아닌 왕녀[1]도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순화되어야 할 일본식 표현'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문서 등을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빈번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기실 왕녀라는 말은 '왕의 딸'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서, 엄밀히 말해 작위명에서 의미가 퍼져나간 공주와는 다르다. 즉 왕의 딸이라도 공주나 옹주로 정식 책봉이 되기 전에는 왕녀인 것. 게다가 왕실 예법에서는 관례 등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는 왕의 자녀들은 정식 이름도 없다(…). 왕은 자식을 아명으로 부르고, 궁인들은 아기씨 등으로 돌려 부르므로 이름 쓸 일도 없고.

2 고려시대

고려시대 때는 주로 궁주라고 불렸다. 이외 에도 궁주, 전주, 택주 등으로 불렸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왕실 여인의 호칭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고려의 왕실 여인들의 호칭은 지역이나 건물이름을 땄고, 왕비, 태후, 공주, 종친의 아내 등 칭호의 급은 달라도 칭호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전주, 궁주>원주>옹주>택주[2] 순이었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져 택주는 왕실 여인이 아닌 지체 높은 여성에게도 쓰였다. 그리고 고려 왕실은 족내혼이 전통이었으므로 공주는 왕후이거나 종친의 아내였다.

고려 시대에는 초기에는 왕의 부인들이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건물이름+(원)부인'이라고 불렸다. 고려는 족내혼을 해서 공주가 왕의 부인이거나 종친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건물이름을 따 ㅇㅇ궁부인 혹은 ㅇㅇ전부인이라고 불렸다.

성종 이후 문물정비가 이뤄지고 고려 중기[3]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ㅇㅇ궁주(宮主)(혹은 전주) ㅇㅇ원주[4]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ㅇㅇ궁부인,ㅇ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인 후궁이 후궁인 궁주로 승진하거나[5] 궁주는 선왕의 후궁[6] ,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르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7]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이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고[8] 왕후,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다만 궁주나 원주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일반적인 승은을 입은 경우에는 궁주와 원주가 되지 못하고 궁인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때는 신분의 차이가 엄격해 이런 궁인의 딸은 봉작받지도 못했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9] 왕의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신분 때문에 신하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어야 했다. 이 경우 간혹 택주 칭호가 붙었다. 강종의 서녀였던 정화택주(靜和宅主)가 그 예이다.

고려 후기 제후국 군주의 왕녀를 가리키는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되기도 했다.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고쳤으나... 정작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왕의 의붓딸이나 출신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후궁에게서 보인다. 또한 옹주 칭호는 남발되어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후궁 문서의 158판, 3.1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3 그외

조선의 경우는 정실인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녀를 공주,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녀를 옹주라고 했다. 태종 때에 들어서야 엄밀하게 제정했다는 경위도 있다. 아무튼 현대 한국에서는 왕의 딸 = 공주란 도식이 성립했다. 그래서 옹주가 뭔지 모르는 경우도 많고, 공주/옹주가 작위명임을 모르는 사람도 흔하다. 하지만 왕의 딸 = 공주라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별 탈 없이 돌아간다. 현대에 그런 엄격한 왕실 호칭이 쓰일 일도 없고 해서.

정작 이 표현이 골치거리가 되는 것은 오히려 공주(姬, 히메)라는 말이 쓰이는 일본어를 번역할 경우. 상당한 난제가 되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즉 일본의 봉건적인 체제 때문에 생긴 일로, 이 당시 일본 내부는 수많은 나라가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경위는 불명이지만 왕희에서 왕을 빼서 희(姬 히메) 부분만 사용하는 것이 한 나라의 공주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왕을 뺀 이유는 여러가지가 추측되나, 그 당시에도 왕(덴노)에 대한 예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래 姬란 한자 자체가 '지체 높은 여성'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현재도 귀족이나 황족 등 왕의 딸이 아니지만 그만큼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을 '히메'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와 구별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왕녀라는 표현이 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 탓에 번역가들은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만.(…).

양판소에도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보통은 먼치킨 주인공의 몇 번째 부인 정도의 역할만 수행한다. 또한 왕위 계승권이 있으면 왕녀고 없으면 공주라거나중요도가 현실과는 반대 같지만 넘어가자 성인이면 왕녀고 어리면 공주라는 식이다. 그리고 배경이 왕국이면 왕녀지만 제국이면 황녀다. 황녀는 왕이 황으로 바뀌었을 뿐 그냥 똑같다.

4 왕녀인 인물/캐릭터들

항목에서 일괄 기술한다.

5 왕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해당 이야기에 대한 문서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수록한다.

  1. 우리나라의 경우는 옹주
  2. 옹주와 택주는 고려 후기에 자주 쓰인다.
  3. 여기서는 보통 목종부터 원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 일컫는다.
  4. 궁비(宮妃)나 원비(院妃)가 사용되기도 한다.
  5.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고쳐 궁(宮)으로 고쳤다."
  6.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예에 따라 두 분에 대한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914&categoryId=49632&cid=49632
  7. 공주 역시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 간혹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 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
  8.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이름은 주로 ㅇㅇ전이었다.
  9.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의 경우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
  10. 근데 사실 진짜 왕녀는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