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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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聖王陵
사적 제26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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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38대 국왕 원성왕 김경신의 능이다. 괘릉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 역사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태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문무왕이나 효성왕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왕의 유해가 경주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그곳에는 최치원이 찬술한 비가 세워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최치원이 저술한 초월산대숭복사비문(初月山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이 '동곡사'라는 절은 본래 파진찬 벼슬의 김원양이라는 사람이 세운 절이었지만 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성왕의 능을 그 절터에 꾸몄으며, 옮겨진 동곡사는 '숭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숭복사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지만 숭복사 터가 경주시 외동면에 남아 있고, 이 교차검증에 따라 숭복사 터 아래쪽에 '괘릉'이라는 능이 남아 있었는데, 이 능이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다.

능 이름 치고는 좀 이상한 이름인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이 능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절의 연못이 있었고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는데 물이 괴어 왕의 유골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고 양쪽으로 관을 걸어 유골을 안치해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고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1] 이 괘릉은 현재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괘릉은 195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가묘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이 '물'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삼국사기 기록대로 문무왕의 유해는 동해 바다에 뿌렸지만 경주에 따로 가묘를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때문에 오랫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비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1955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라는 설을 부정했고, 위에 언급된 숭복사 비문이 판독된 데다가 오늘날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자[2] 괘릉이 문무왕 가묘라는 설은 폐기되고 이 능은 원성왕릉으로 인정되었다. 다만 196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능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원성왕릉으로 밝혀진 후 그 비석을 파냈고, 오늘날에도 그 당시의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이런 사연과는 별개로,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능이다.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들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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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물 중 무인상은 그 모델에 대해 페르시아인으로 추정하거나, 최소한 중동 지역의 기풍을 따라한 것으로 당대 신라가 서역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3 교통

경주시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변에 있어 차로 올 때 접근성이 좋은 편인데다 무덤 자체 외에도 원형이 잘 남은 석물들도 있어 수학여행관광버스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다.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버스 154, 경주 버스 600, 경주 버스 605, 경주 버스 609번이 괘릉 앞에 정차한다.
  1. 사실 요즘 기준에서 보면 물이 나오는 묏자리는 별로 좋은 묏자리가 아니다(...). 신라 시대에는 명당에 대한 기준이 달랐을지도. 애초에 풍수지리라는 것도 신라 말기에 유입된 것이기도 하고.
  2. 물론 경주 대왕암에 대해서 말이 많긴 하지만(유골을 바다에 매장했다는 설과 문무왕 유골의 산골처라는 설 등), 경주 대왕암이 문무왕과 관련 있는 장소임은 분명하다. 신라왕릉의 묘제를 연구했던 故 이근직 경주대 교수는 신라 왕릉 가운데 전승과 실제가 부합하는 분묘는 여덟 기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 여덟 기 가운데 괘릉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