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선종

금의 역대 황제
7대 위소왕 완안윤제8대 선종 완안오도보9대 애종 완안수서
묘호선종(宣宗)
시호계천흥통술도근인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英武聖孝皇帝)
연호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여진어왕기얀(Wanggiyan)
중국어완안(完顔)
여진어오도보(吾睹補)
중국어순(珣)
생몰기간1163년 4월 18일 ~ 1224년 1월 14일
재위기간1213년 9월 22일 ~ 1224년 1월 14일

생몰 1163년 ~ 1223년
재위 1213년 ~ 1223년.

금(金) 제국의 제8대 황제. 선효태자 현종 윤공(宣孝太子 顯宗 允恭)의 장남으로 장종의 이복 형이자 위소왕의 조카다.

장종의 형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는 황위계승순위에서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쳐들어와서 화북이 황폐화하고 수도인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가 포위되는 막장 상황까지 갔다. 이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인 나이 50살의 오도보를 제위에 옹립했다. 이 때 몽골은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선종은 황제에 오른 직후, 호사호를 제거하고 1214년 5월 수도를 지금 중도대흥부에서 원래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이 사안을 놓고 조정에서 큰 소란이 있었지만 선종은 천도를 강행하였으며, 옛 수도인 중도대흥부에는 황태자 완안수서를 남겨서 지키게 했다.

선종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수도를 카이펑으로 이전한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들 때문이었다.

  • 기존 수도인 중도대흥부는 몽골 방면의 적에 대항할 군대가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앞의 촛불 신세다. 이미 위소왕 때 중도대흥부가 포위되면서 선종 자신이 직접 이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
  • 수도를 이전할 필요성은 높지만, 카이펑같이 방어력이 높으면서도 자체 생산력도 좋은 지역을 요동이나 화북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산서지역의 대동같은 경우에는 방어력만 높지 경제력이 바닥인 데다가 역시 포위당하면 답이 없다. 그리고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이번에는 황하 이남인 금나라 영토의 지배능력을 잃는다. 이미 화북의 황폐화로 대타격을 입은 금나라에서 해당 영토를 추가로 빼앗기면 세수 부족 등으로 바로 망해버린다.
  • 카이펑에서 북송이 방어에 실패함은 정강의 변만 봐도 나오듯이 그들 스스로의 뻘짓이 큰 원인이었다. 지형만으로 본다면 황하와 대운하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그물망같은 수로망으로 방어가 쉬울 뿐더러, 주변 농경지도 많아서 식량 마련이 쉽다. 게다가 그나마 허술하다고 볼 수 있는 남쪽 방면의 방어망은, 이걸 실제로 쓰려면 남송의 영토를 지나야 하므로 몽골이 쉽사리 이 길을 고르기는 힘들었다.
  • 남송은 약체화가 진행중이므로, 기회를 봐서 남쪽을 침공하면 남송의 경제력까지 확보해서 다시 한 번 몽골과 싸울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단점도 있었기에 조정에서 난리가 났다. 심지어 겁에 질려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으니...

  • 국가를 창건한 요동과 옛 수도인 중도대흥부 및 화북의 상당수를 사실상 잃는다. 이는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는데, 선종의 천도 사실을 안 몽골이 재차 침공하는 바람에 중도대흥부를 지키던 황태자는 도망치고 중도대흥부가 불바다로 변했으며, 요동 지역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져 쉽게 몽골이 빼앗았다.
  • 몽골의 전력을 정면에서 상대할 만한 기병 전력을 더 확보하기 힘들다. 과거 중국의 제국들도 북부와 서부의 변경지대를 잃으면 말을 구할 수 없어서 기병전력을 크게 축소하고 보병 위주의 전력으로 재편하는데, 이러면 수비능력은 보유하겠지만 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공세로 돌입하기 힘들다. 특히 화북지역의 많은 평야 탓에 기병의 위력은 느는 반면, 보병의 능력은 크게 줄어든다. 당장 북송도 이 문제로 군대꼴은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북송 시즌2(그나마도 강남이 없는)였다.
  • 카이펑과 하남이 당장 방어는 쉽겠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몽골과 남송 사이에 끼어있다. 만일 두 국가가 연합한다면 일시에 양면공격을 받고, 도망칠 길도 없다. 이는 금나라의 멸망 때 실제로 나타났다.

일단, 선종의 천도는 금나라가 당장 붕괴하는 것을 막고 10년 이상 버티면서 조금씩 실지를 회복하는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사안에 대해서는 둘 다 나쁜 선택지에서 그나마 좋은 선택지를 고른 경우라고 보면 된다.

다만, 남쪽으로 천도하면서도 일단 남송과 화평해 남쪽에 배치한 군대를 북쪽으로 상당수 돌려 실지회복을 않고 기회만 있으면 남송을 먹어버리려는 시도를 이었으니 큰 실수였다. 그래서 남송은 예전의 큰 원한도 있어서 선종의 다음 대인 금나라의 애종 시절에 몽골군의 남송 영토 통과를 인정해, 끝내 개봉이 뺏겨 금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때 남송 조정에서는 과거의 원한과 금선종의 찝적거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몽골 도왔다가 몽골이 금나라 멸망시키면 다음에는 우리 나라 차례가 아니겠냐? 차라리 금나라가 멸망하지 않게 도와주자. 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기에 선종이 남송과의 화친에 신경썼다면 정말 애종 대에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 점은 선종의 완벽한 병크인 셈.

거기다 선종이 천도를 강행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적대행위로 생각하고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대흥부를 함락시킨 뒤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을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겼는데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에 의해 하북의 군현이 차례차례 함락되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구나 변경 안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황조는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잠시나마 중도대흥부를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선종과 황족들,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몽골에게 깨졌다는 소식이 들려 올때는 한숨을 쉬거나 곡을 하다가 조금 지나면 그거 잊고 연회를 벌인다던가 국토가 피폐해졌는데도 나라에 바친 양들이 살 찌지 않았다고 책망하고 격구에 쓸 채를 만들기 위해 흰 암소 가죽을 찾으러 다니는등 일반 백성들이 볼때는 보기가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선종은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오랜 기간을 재위하진 못했고 간신히 금나라가 생명 연장을 하면서 망국의 군주가 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