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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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단군릉/단군릉.jpg

1 개요

평양직할시 강동군에서 발견된 유적. 북한에서는 고조선시대 단군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높이는 22m, 너비는 평방 50m쯤 된다. 북한의 국보 174호.

2 상세

'단군릉'이란 명칭은 오래된 역사서인 한국통사에도 등장하고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단군의 무덤인지는 확인된 바 없었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런 거 없다'였다.

그러던 것이 1993년 북한에서 발굴 조사를 하면서, 알고 보니 진짜 '단군릉'이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성의 지시[1]에 따라, 개건확장(후술하겠지만 절대로 복원이 아니다.)이 이루어졌고, 1994년 위와 같은 모습으로 공개되었다.

일단 이 유적 자체가 완전히 날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 모습은 아래 사진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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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단군릉이라는 비석은 1936년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앞면에는 한자로 '단군릉'이라고 적혀 있고, 뒤에는 한글로 적혀 있다.

그냥 평이한 무덤이었던 것을 김일성이 '우리나라의 원시조'이니깐, 동명왕릉보다 크고 아름답게 만들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서 피라미드처럼 지어졌다. 이를 두고 남한의 언론에서 단군릉 복원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비롯한 유적들을 '복원(復原)'했다고 말하는 대신 개건(改建)이란 표현을 사용한다.[2] 물론 사전상 의미로 봤을 때 확실히 복원보다는 개건이란 표현이 그나마 적절하긴 하지만, 이 결과물은 개건이란 단어가 담고 있는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규모라는 것이 문제. 여기에 대리석을 씌우질 않나, 조각상을 세우질 않나 하면서 원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3 정말 단군의 무덤인가?

사실 북한은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국가(?)답게 "봉건 사가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가에 의해 실재한 고대국가나 인물인 것처럼 과장됐다" 라면서 '단군'이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거나, '왕'을 가리키는 명칭 정도로 보았다. 더욱이 50년대까지에는 '고조선'이라는 존재를 회의적으로 보거나, '고대 노예제국가'가 아니라 '원시공동체사회'로 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없었다는 것. 이 가운데 사료 연구 및 고고학적 성과[3]가 뒷받침됨에 따라, 7~8세기 요동~한반도지역에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4]

그러나 1993년 단군릉 발굴과 함께,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종래에 신화적.전설적 인물로 간주되어 온 단군이 실존 인물이며 우리 민족의 원시조'라고 주장하게 된 것.

현재 남한의 학자들은 단군릉이 전형적인 고구려의 석실무덤으로, 내부에서 발견된 금동관을 고려할 때 무덤의 주인이 사실은 고구려의 지방 귀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단군릉'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과거 사람들이 '오래된 무덤이니 혹시 단군의 무덤이 아닐까?'라고 추측하면서 이것이 기록에도 남은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과거 사서의 기록도 고구려 유물과 함께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즉 굳이 표현하면 '전(傳) 단군릉'('단군릉이라고 알려져 있는 무덤')에 가깝다.구형왕릉의 북한판

심지어 1994년 북한에서 발행한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서도 단군릉의 원 양식은 고구려식 무덤이 맞고, 출토된 금동관 역시 고구려의 금동관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을 통해 매장된 유골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그 측정치가 기원전 3000년 이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고구려인들이 기존의 단군릉을 자기 식대로 새로이 고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자스핀 공명법은 뼈나 치아를 통해 연대 측정할 수 있다지만 그 편차가 너무 큰 데다. 아직 그 신뢰성에는 문제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 수천만년 전 화석의 연대측정에 이용하는 편이다. 어쨌든 이 측정법으로 두 개의 다른 기관에서 각각 24회와 33회 측정했고, 매번 5011년(오차값 ±267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신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남한에서는 이런 발표야말로 연대측정 결과를 조작한 증거라고 본다. 편차가 크고 신뢰도가 낮은 방법으로 수십 번 측정했는데 결과가 매번 1년의 차이도 없이 똑같은 연대가 나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우선 아직까지 고구려에서 단군릉을 개축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또한 굳이 무덤을 파헤쳐서 무덤을 고구려식으로 고친 뒤 그 유골에다가 금동관을 씌우고 다시 묻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더욱이 단군에 대한 숭배 의식이 있어서 단군릉을 다시 만들었다면서, 그 규모가 고작 지방 귀족의 무덤 수준으로 축조했다는 것인데... 그럼 대체 원래의 단군릉은 얼마나 초라했다는 것일까?

4 왜 개건하였는가?

남한이 아닌 북한을 한반도 역사의 정통계승자로 놓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끼어 있을거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왜 이렇게 해놨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뭐, 북한이 혹부리우스뽀그리우스를 신으로 떠받드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공동체가 되어 버린 마당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 관장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이렇듯 1993년 발굴과 1994년 개건은 학술적이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이다. 사실상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왜곡행위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5 여담

사실 이 단군릉으로 인한 북한 학계의 변화를 살펴보면 북한 학계가 이미 학자로서의 비판의식과 객관성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었느냐에 대한 문제는 한국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사실 북한에서는 '한반도 중심설', '요동 중심설', '이동설'(요동→한반도)이 모두 제기되었고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었다. 그 가운데 60년대초 학술토론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5]가 발표되면서 사실상 '요동 중심설'이 정설로 자리매김한다. 이와 함께 중국과 함께 요하일대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졌었고, '요동 중심설'은 공고화되었다. [6] 더군다나 이 시기 북한이 보았던 고조선 국가 성립 시기는 기원전 7~8세기설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단군릉이 진짜 '단군'의 릉이라고 선전되면서 그냥 '평양 중심설'이 되었다. (물론 1990년대초 이와 관련하여 북한에서 나름대로 학술대회와 토론회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이러하니깐 너는 거기에 뒷받침할 것만 만들라는 것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북한에서는 세계 5대문명설을 주장하며 대동강 문명을 끼워넣기도 했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면, 평양이 세계문화의 발상지가 될 기세...

한편 북한이 단군릉 개건 기념 어천절 행사를 홍보하면서, 대종교 교주이자 통일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안호상[7]씨가 방북을 적극 추진했었다. 당연히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당시 통일원은 방북을 불허했다.[8]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밀입국했었다.[9][10] 이 사람의 사상이 사상인데다가, 고령이고 별 다른 대공혐의점이 없어서 조사 후 방면했다.

환빠들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통일되면 성지. 단순히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 놓은 걸 보고 환국이 있었다느니 마야, 이집트가 한민족과 한뿌리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오죽 정신 나갔으면 돼지가 만든걸 유물이라 우길까. 그 정신나간 북한도 오래된 유물이라고는 안한다

  1. 대리석으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만들 것 등등을 지시한다.
  2. 이렇게 '개건'된 북한의 또 다른 문화유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동명왕릉정릉사가 있다.
  3. 특히 요하지역에서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비롯한 순장무덤이 발굴되면서, 이러한 순장무덤을 만들 정도면 이 시기 '고대국가'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과거 80년대 한국 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연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는 순장무덤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집단 매장된 공동무덤으로 보고 있다.
  4. 60년대초까지만 해도 북한은 학문의 자유가 나름대로 보장되어 있었으며 해방전후로 유명한 학자들이 다수 월북했었던 터라, 남한보다 우수한 학문적 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어디까지나 비정치적인 분야에 한했다. 이러한 자유조차도 이후 제정일치국가(...)로 나아가면서 사라진다.
  5. 지나치게 고조선 영역을 넓게 잡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현존하는 대부분의 기록들을 집약해서 분석하고 있다. 80년대 한국의 고조선 연구 열풍에 기여하기도 했다.
  6. 이전의 서술에는 김일성의 입장어명으로 요동 중심설이 정설이 되었다고 서술하지만, 김일성의 말은 학술평가가 끝나서 공식화된 것을 '동의'한다고 승인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공식적 입장에 대해서 끝까지 반박했던 이들은 60년대 후반무렵 소식이 끊겼다.
  7.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대종교 16대 교주로 소개하고 있으나, 대종교측 자료를 보면 14대 '총전교'로 나와 있다. 대종교 교주 칙위의 호칭이 원래는 '도사교'였는데, 3대 도사교 윤세복 시절에 호칭을 '총전교'로 바꾸었다. 따라서 3대 도사교가 1대 총전교인 것. 여기서 대수 계산의 차이가 생겼다.
  8. 1994년 김일성이 죽은 뒤로 남북정상회담이 파토나는 등 남북관계는 경색되었었던데가, 김일성 생일과 가까운 날짜였다.
  9. 그의 방북은 종교적 행동으로 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벌이던 통일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하나되어 민족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을 하며, 통일운동을 벌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에서 민족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니 '민족통일의 공통분모'라면서 참가한 것. 그에 따라서 남북이 함께 어천절행사를 하자고 주장했었다...
  10. 여담으로 안호상은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던 시절에는 이승만 독재에 부역하며 반공주의 입장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했는데, 정작 말년인 1995년에는 방북을 하여 단군릉을 만든것을 들어 김일성 주석을 찬양했다.(...)진정한 종북 그야말로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