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金素月
(1902년 8월 6일 ~ 1934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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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1]오산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1 소개

국민 시인

대한민국시인.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본명보다 소월(素月)이라는 아호로 더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양적인 시가 아닌 민족의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흔히 그의 시를 보고 김소월을 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삶[2]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 등 현실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3] 실제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시절 후 발표하는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가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진달래꽃, 노래로 불려진 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 문학관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2016년 현재 북한 행정구역이어서 마음대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엔 정 반대의 의미로 전 세계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2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후 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한다.[4]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소월 집안에 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계희영의 남편은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홀로 남은 그녀는 어린 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동화나 민요들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5] 이후 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입학,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한다.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6]을 만나게 되며 김소월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기가 된다. 종종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김억이 그를 자신이 참여하던 동인지 <창조>에 소개하여 등단시키려고 하였으나 무명의 10대 소년이라는 점이 내키지 않던 다른 문학가들의 반발로[7] 소월의 시를 꼭 책에 싣고 싶던 김억이 어쩔 수 없이 소월의 초기 시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먼저 발표한 것이다. 이후 독자들과 문학가들의 좋은 반응을 얻자, 1920년 창조 5호에 김소월이라는 이름으로 <낭인의 봄>을 비롯한 5편의 시들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문단 데뷔하게 된다.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소월의 장례식 비용까지 다 대준 인물이다. 소월 역시 그런 김억을 존경했으머 소월의 유고 시인 삼수갑산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시이다.

한편 같은 시기 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된다. 하지만 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고 결국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시집을 가게됨으로서 끊어지게 된다. 오순은 19세의 나이로 결혼하게 되는데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그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들 시는 훗날 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츠바시 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귀국한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고 있던 소월의 집안은 몰락해가던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8] 겸, 소월이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삼아 가까스로 소월을 상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었는데 김소월은 학과가 마음에 안 들어서 유학을 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평생 김소월에게 한으로 남았다고...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출판으로 출간하였다.

이후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시 창작을 잠시 중단하면서까지 신문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으나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때문인지 한 월간지에서는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도 한 바 있다.

3 대표작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일컫어질 정도로 대표작이 많다. 김소월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져 아직도 불리우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후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 中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접동새」

 

임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왜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아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아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

4 가족 관계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단실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그러나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한국전쟁 도중 사망했으며, 3남 김정호는 인민군으로 남한에 왔다가 포로가 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재입대하였고 전쟁 후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로 인한 혜택은 커녕 전혀 없고, 저작권조차도 없으며, 오히려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의 병수발을 평생 들어줬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남한에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고 싶어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녀 김은숙 씨와 손자 김영돈 씨,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소월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재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이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미스터피자 광고에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준 돈 약간 뿐이라고.참고
  1. 이 이미지는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과 남한으로 내려온 그의 셋째아들 김정호씨의 진술, 손자 김영돈씨의 사진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진영, 즉 그림이다.
  2. 특히 소월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실질적인 가장의 의무를 하지 못한것을 본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말년에 집안의 가장으로써 돈을 못 벌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굉장히 우울해했다고 한다.
  3. 다만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짧은 시작 활동기 탓에 현실비판시를 발표할 여건이 안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길에 철도일을 하던 일본인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PTSD에 시달리며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여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다고. 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5. 그녀는 소월보다 오래 살아서 훗날 소월에 관한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6. 김소월의 시 중 그를 소재로 한 '제이 엠 에스(JMS)' 라는 시가 있다. 제이 엠 에스는 조만식의 이니셜. 사이비 종교와는 관계없다!
  7. 당연히 자비로 겨우 잡지를 출간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처음 보는 10대 소년의 시들을 잡지에 실어달라고 한다면 평소 자존심이 강한 문학가들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8. 소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쿄 유학파였다.
  9.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여 동요로 잘 알려져 있다.
  10. 민요적이고 여성적인 시를 주로 쓰던 소월답지 않은 남성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시다.
  11.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김소월이 중학생 때 쓴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