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축구 해외파 선수들, 가톨릭/인물
전북 현대 모터스 시절.
이름 | 김정우 (金正友 / Kim Jung-Woo) |
생년월일 | 1982년 5월 9일 |
국적 | 대한민국 |
국적 | 인천광역시 |
포지션 | 미드필더 |
신체조건 | 184cm / 74kg |
가족 | 1남 1녀 중 둘째, 부인 |
프로입단 | 2003년 울산 현대 |
소속팀 | 울산 현대 (2003~2005), 75경기 1골 나고야 그램퍼스 (2006~2007), 54경기 7골 성남 일화 (2008~2011), 50경기 7골 상주 상무 (2010~2011), 40경기 18골 전북 현대 (2012~2013) 알 샤르자 SC (2013~2014) 바니야스 SC (2014~2015) BEC 테로 사사나 (2016) |
국가대표 | 2003~ , 66경기 / 6골 |
종교 | 천주교(세례명 : 헤르마) |
200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데닐손 | ||||||||||
MF 최태욱 | MF 기성용 | MF 김정우 | MF 에닝요 | ||||||||
DF 김상식 | DF 김형일 | DF 황재원 | DF 최효진 | ||||||||
GK 신화용 |
2010 남아공 월드컵때 박지성 다음가는 활약으로 중원을 책임졌던 선수
2010년 월드컵 활약으로만 보자면,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중앙 미드필더로서 역대급 폼을 보여줬기에 공백이 참 아쉬운 선수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별명은 뼈[1]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이나 상주 상무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했다.
1 상세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차두리, 이천수 등 이미 각급 대표팀을 들락날락 거리던 슈퍼스타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2003년 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2003년에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본래 공격형 미드필더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도어 락 축구의 달인인 김정남 감독 밑에서 수비적인 롤을 많이 맡으면서 균형잡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큰 키에 비해선 몹시 마른 체형이지만, 몸싸움 잘하고 터프하며 시야 또한 넓었다. 특히 패스커트의 달인수준인데 상대의 패스길목을 파악하고 미리 위치를 차지하고 뛰어드는 타이밍이 일품으로 태클로 볼을 뺐는 것이 아니라 커트로 수많은 공격권을 가져왔다. 또한 괜찮은 중거리 슛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애당초 공미 출신이라 당시 한국수미 중 몇없는 볼간수가 가능한 미드필더였다. 다만 큰 키에 비해 헤딩경합이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많은 활동량과 투지로 중앙 개싸움에 능하고 특히 커팅능력이 우수하면서 3선에서는 볼간수가 가능한 딥 라잉 미드필더 또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고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Kim Jung-Woo Nagoya Grampus.jpg
중앙 미드필더로 우승을 경험한 이후 팀을 옮겨다니며 여러 룰을 전전하게 되는데 나고야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성남에선 공격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를 오갔으며, 베어백호에선 공격형 미드필더,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김동진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참가)에서는 다시 중앙 미드필더, 허정무호에서는 기성용을 받쳐주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았다. 초기에는 다소 거친 플레이스타일 탓에 카드캡터 소리를 들었으나 경험이 쌓인 이후에는 개선되었다. 유사시 공미 역할도 해줄 수 있는 패싱력[2]과 깡마른 몸과 전혀 상이한 뛰어난 경합 능력으로 감독들의 사랑을 받았다.
2 클럽
2005년 이호와 짝을 이뤄 울산의 중원을 맞아 우승에 큰 기여를 했고, 시즌 종료 후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후 위건 애슬레틱으로 이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했다. 이때 울산 현대와 위약금 논쟁이 일었지만 울산이 위약금을 포기하면서 소동이 가라앉았고, 결국 2009 시즌 내내 몰리나와 함께 성남을 먹여살리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전을 승리로 이끌고 상주 상무에 입대했다.[3]
2011시즌 상무가 광주에서 상주로 이전하고 감독이 이수철 감독이 취임하자 포지션을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옮겼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맡은 스트라이커 역할 이었으나 리그 15골(득점순위 3위), 컵대회 포함 18골을 기록하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2011년 9월 21일 전역해서 성남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복귀전인 전남과의 홈경기에서 후반전 교체된지 20분만에 부상당해 시즌을 조용히 마감했다.
2011년 시즌을 마치고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했으며 연봉 15억 가량으로 K리그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김정우의 전성기는 이해가 마지막이었다. 2012 시즌에는 잔부상에 시달리며 5골 2도움에 그쳤고 특히 팀이 상위스플릿에 진출한 리그 후반기에는 완전히 침묵하여 최강희 감독을 잃은 팀을 어렵게 만들었다. 2013년에는 부상에 심리적 압박감까지 겹쳐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간에 임유환과 더불어 무단이탈설이 돌기도 했다.
최강희 감독 복귀 후 팀 리빌딩 과정에서 알 샤르자로 임대되었다. 전북 측에서는 아예 이적시키길 원했으나 워낙 연봉이 높아서 실패했다. 중동 이적후에는 어느정도 폼을 회복하여 팀의 리그 최소실점을 기록하는 데 이바지하며 13~14시즌 UAE 리그 베스트 11에 뽑혔다. 시즌 종료 후 아부다비를 연고로 하는 구단인 바니야스로 이적했다. 2015년 2월 부상으로 소속팀과 계약을 해지하였고, 태국의 BEC 테로 사사나로 이적하였다. 기사 그러나 이적 직후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다시 팀을 떠났고 이후로는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3 국가대표
허정무호의 숨은 주역으로 김남일의 뒤를 이어 대표팀 중원을 책임졌던 살림꾼.
2003년 울산 현대 입단 이후 당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올라서면서 가치가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도움을 주었다 국가대표팀 데뷔는 2003년 10월 오만과의 2004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첫 출장하였다. 이후 김남일, 이호, 백지훈과 중앙 미드필더 주전 경쟁을 벌였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은 예비 명단에만 포함되었고 최종 명단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월드컵 이후 핌 베어벡 체제에서 중용받으면서 경험치를 쌓은 끝에 2007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하였다.[4]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인도네시아전에서 엄청난 빈공으로 답답한 축구 끝에 간신히 결승골을 넣으면서 8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07년 아시안컵 이후로 대표팀 주축 선수로 부상한 이래 안티가 꽤 많았었다. 그전까지 붙박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김남일 팬들이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해 프리미어 리그까지 진출했던 조원희 팬들에게 특히 욕을 많이 먹었다. 결정적인 찬스 상황을 내주기 전에 끊어버리는 역할도 하기에 카드 수집도 많은 편이고, 대표팀에서 쓰는 홀딩을 쓰지 않는 시스템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 더욱 까인다.
사실 허정무호 시기 김정우 이상의 선수는 없었다. 김남일은 30줄에 접어든 나이, 수원과의 갈등과 해외진출로 부침을 겪는 와중에 폼이 하락했고, 조원희는 EPL에서 벤치만 달구며 폼이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잊혀진 선수가 되었다. 게다가 김남일, 김정우와 달리 공격 전개능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김두현은 애초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라 수비 능력을 기대할 수 없었고 당시 기대주로 떠올르던 신형민, 김재성은 실력이나 경험이 아직 일천했다. 일례로 2010년 2월 14일 열린 동아시안컵 일본전을 보면 김정우가 퇴장당하자마자 한국의 중원은 피지컬에서 열세인 일본 상대로도 줄곧 밀렸다. 당시 구자철과 김재성, 신형민은 김정우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5]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허정무호에선 국대의 차세대 에이스이자 후방 빌드업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혼자 떠맡은 기성용의 대체불가 파트너로 자리잡았다. 아니, 이때는 김정우의 파트너가 기성용이라고 말하는게 옳다. 기성용 역시 박스-투-박스 미드필더이기에 두명을 공수 번갈아가며 활용하는 것이 주요한 전술이겠지만, 이 시절 수비력이 안좋았고 셀틱 이적 직후 폼도 심하게 떨어졌던지라 김정우에게 주어진 부담이 굉장히 컸다.[6] 기성용-김정우 라인은 기성용이 빌드업에 약점을 보이는 조용형-이정수등의 국가대표 센터백라인 대신 후방까지 내려와 볼을 잡고 특유의 롱패스로 빌드업을 하는 동안 김정우가 전방위 백업으로 기성용 앞을 치워주면서 전방의 양박쌍용까지 연결하는 국대의 허리역할을 책임지면서 혼란기에 빠졌던 국대 중원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09년 11월 열린 덴마크 국가대표와의 평가전에서 덴마크의 미친개 크리스티안 폴센을 상대해서 발라버리는 기염을 토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몇 주 앞두고 벌어진 몇차례 평가전에서 그를 저평가 해온 팬들도 눈치챌 만큼 기량이 급상승한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스페인, 아르헨티나등 강팀과 상대하면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상대 미드필더들을 씹어먹으며 중원을 장악하여 폼이 처참하게 떨어진 기성용의 구멍을 훌룡히 메꾸었다. 단점으로 지적받던 카드수집도 태클실력이 늘어났는지 상당히 줄었다. 아르헨티나전에서도 그 메시를 태클하며 공을 종종 뺏는 대활약을 했다.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도 킥력빼곤 폼이 완전히 죽었던 기성용을 보좌해서 중원을 책임졌다. 남아공 월드컵 당시 상무 소속으로 계급은 일병이었다.[7]
그러나 2012년 전북 이적 이후부터 점점 하향세를 그리면서 더 이상 국대에서는 볼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후 2013년에는 중동으로 진출하여 당시 기성용을 보좌할 중앙 미드필더 경쟁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지난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억하던 팬들은 82년생으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까진 충분히 폼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되었기에 급격한 몰락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지간해선 눈에 잘 안 뛰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숙명에다 대표팀에서의 전성기가 3년여에 불과해 최초의 원정 16강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에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 대표팀은 김남일과 김정우의 뒤를 이을 수비형 미드필더감을 찾지 못해 한동안 고심하다 2015년 아시안컵에서는 풀백이었던 박주호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 이후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경쟁은 지난 월드컵에서 기성용을 보좌한 한국영과 정우영 등 여러 미드필더들의 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남아공 월드컵 때의 김정우만큼의 위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미들진과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미들진을 비교해보자. 이탈리아 국대에 비유하자면 피를로가 경기를 조율하고 빌드업을 시작하는 반면, 그 피를로에게 압박을 하는 선수를 제거하는 가투소가 있엇기에 피를로가 더 빛나보인 것이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미들진은 기성용과 한국영(...). 기성용이 남아공월드컵 때보다 기량이 상승한 것은 맞으나, 기성용을 자유롭게 할 상대팀 선수들이 아니고, 결국 기성용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게 되는데 이것을 풀어줄 김정우 같은 파이터가 없었기에 미들진이 탈탈 털렸고,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않는 티키타카를 시전하다 볼 뻇기고 역습 이후 골. 더이상 말이 필요한가? 갓정우니뮤ㅠㅠ
4 기타
- fm 11 11.21 패치에서 EPL 중상위권에서 주전 먹을 능력치를 가지는 공미로 등장해서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상무에 있어서 2년 후에 온다. 첫시즌 기준으로 2년 후면 나이 서른…. fm 12에서도 탈 K리그 급의 능력치를 이어갔다.
- 탤런트이자 영화배우인 이연두와의 열애 사실이 알려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2012년 7월 초 결별했다. 그러다가 한혜경이라는 배우와 2014년 2월 8일에 결혼하였다. 기사.
- ↑ 본인은 정작 '뼈'가 들어가는 별명은 좋아하지 않는편
- ↑ 공미치고는 패스가 뛰어나진 않지만, 수미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다.
- ↑ 이해 아챔과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포항을 물리치고 성남이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성남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북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미있게도 전북을 먹여살린 수비형 미드필더는 성남의 리빌딩 과정에서 쫓겨난 김상식이었다.
- ↑ 당시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안정환, 김남일 등 기존 유럽파 및 국가대표 주전급 선수들 모두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2000년대 이후 역대 최악의 전력으로 대회를 꾸려가게 되었다.
- ↑ 순간적인 역습 기회를 살린 김재성의 쐐기골이 없었다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 ↑ 기성용이 그때는 수비를 어떡해 해야할지 몰라서 형들 따라서 뛰었다고 밝힌 인터뷰가 있다
- ↑ 당시 그의 경기를 보던 모부대에서는 국가연주가 나올적에 그가 거수경례자세로 서있자 괴성을 지르면서 그를 응원하였다.
- ↑ 대런 플레처+ 해골. 사실 플레처도 EPL 최상위권 팀의 주전 중미라는 위상에 비해 몸이 마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