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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랜드 FC U-15팀 감독 | |
최태욱 (崔兌旭 / Choi Tae-uk) | |
출생 | 1981년 2월 16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인천광역시 |
포지션 | 측면 미드필더 |
신체조건 | 172cm, 73kg |
소속팀 | 안양 LG 치타스(2000~2003) 인천 유나이티드(2004) 시미즈 에스펄스(2005) 포항 스틸러스(2006~2007) 전북 현대 모터스(2008~2010) FC 서울(2010~2013) 울산 현대(2014) |
국가대표 | 29경기, 4골 |
별명 | 총알 |
종교 | 개신교 |
스태프 | 울산 현대(2014 / 유소년 스카우트) 서울 이랜드 FC(2015~ / 유소년 코치) 서울 이랜드 FC U-15팀(2015~ / 감독) |
200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데닐손 | ||||||||||
MF 최태욱 | MF 기성용 | MF 김정우 | MF 에닝요 | ||||||||
DF 김상식 | DF 김형일 | DF 황재원 | DF 최효진 | ||||||||
GK 신화용 |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측면 미드필더. 나름대로 2002 월드컵 4강 신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1 선수 커리어
1.1 고교 시절
고교시절 전국랭킹을 다툴 정도로 특급 유망주였다. 인천광역시 부평고등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이때 같은 학년이었던 이천수, 박용호와 함께 부평고 3인방 하면 전국에서 고교축구 보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 때는 최태욱이 가장 빛났으며, 상대적으로 못 했던 이천수가 그를 뛰어넘기 위해 축구 내적으론 엄청나게 노력하는 선수가 되었다. 고졸 후 특급대우를 받으며 안양 LG 치타스와 계약, K리그로 직행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입단 후 조광래에 의해 윙백으로 굴려진 건 함정
1.2 허정무호 및 히딩크호
고교 시절부터 매의 눈으로 최태욱을 주시하던 허카우터는 2000년에 불과 19세였던 최태욱을 대표팀에 발탁하여 A매치에 데뷔시켰다. 최태욱의 A매치 데뷔무대는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AFC 아시안컵 예선 몽골전이었는데, 아시안컵 예선이다보니 상대팀들이 팀이라고 불러주기에도 민망한 약체들이었고 우리의 허카우터께서는 이 예선경기들을 잠재성이 있는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무대로 삼았다. 이 때 최태욱과 같이 A대표팀에 데뷔한 선수들이 박지성, 이천수 등이다. 최태욱을 높게 평가한 허정무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최종 대표팀 명단에 최태욱을 포함하기도 한다. 당시 올림픽 출전자격 기준이 77년 이후 출생자였으니, 최태욱은 이천수, 박지성과 함께 무려 4년을 월반한 것.
다음해에도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개나 줘버리고 포지션이 윙백으로 바뀌었지만 소속팀 안양LG의 주전으로 도약하였고 거스 히딩크감독의 눈에 띄어 월드컵을 준비하던 대표팀에도 발탁. 그 해 11월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으며 눈도장을 찍었다.서울 월드컵 경기장 1호골 주인공!! 특유의 스피드와 성실함을 높게 산 히딩크에 의해 2002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고, 월드컵을 앞둔 최종 리허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잉글랜드 및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도 연이어 선발 출전할 정도로 준 주전급의 자원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대회 초반에 아예 결장하게 되고, 그 사이에 경쟁자인 이천수, 차두리 등이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서 경쟁에서 완전히 낙마하여 대표팀이 4강까지 승승장구하는 동안 벤치만 지킨다.
하지만 마지막 터키와의 3-4위전에서 후반전 설기현과 교체되어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를 밟는다.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한을 푸는 듯한 과감하고 날쌘 돌파와 날카로운 크로스로 국민들에게 임팩트를 남겼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최태욱이 필드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끼는[1] 모습이 클로즈업되었고 이는 대회 주관방송사 KBS에 의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1.3 슬럼프, 그리고 부활
히딩크가 인정한 기량과 포텐셜, 그리고 병역특례까지 받은 최태욱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고 소속팀 안양에서도 비록 윙백으로 강제포변당했지만[2]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기량이 만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선택이 최태욱의 선수일생을 바꿔놓는데 2004년 K리그 참가를 목표로 2003년 창단한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와 계약한 것이다. 인천 측은 창단 붐을 일으키기 위해 연고지 인천을 상징할 수 있는 네임드급 선수 영입이 필요했고 그래서 점찍은 선수가 최태욱이었다. 애향심이 남달랐던 데다 본 포지션이 아닌 위치에서 경기를 뛰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던 최태욱 역시 인천행에 흔쾌히 동의하였고, 지원이 탄탄한 원소속팀 대신 갓 창단된 시민구단에서 뛰는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인천에서 그는 3-4-1-2 포메이션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공격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으나, 신생 시민구단으로 필연적인 여러 환경적인 한계로 인해 팀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3] 한편으로는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들어 생애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때 코칭스태프와의 마찰을 빚었던 사건도 발생하였고...[4] 자신에 대한 축구계 여론도 좋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는지 최태욱은 돌연 J리그행을 결정한다. 행선지는 조재진이 활약 중이던 시미즈 S-펄스.[5]
그러나 직선적이고 다이렉트한 최태욱의 플레이 스타일은 J리그의 컬러와는 맞지 않았고 결과론적으로 시미즈행은 최태욱의 슬럼프를 가속화시킨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더군다나 자국에서 열린 2005년 동아시안컵에서 후반 교체멤버로 뛰면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어서 게다가 팀 성적도 막장이어서 팬들로부터 그 창창하던 유망주가 어쩌다 이리 됐누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2006년에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하면서 K리그로 복귀하고, 아드보카트 감독 하의 대표팀에서는 오른쪽 풀백(윙백도 아니고 풀백이다!) 자리까지 마다않으며 월드컵행에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워낙에 폼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 문제. 당연히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뛰지 못했고 포항에서도 전력외 취급으로 전락. 파리아스 감독은 최태욱을 3-4-1-2 포메이션에서 윙백 자원으로만 고려했지 공격자원으로 기용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6]
결국 포항에서 실망스러운 두 시즌을 마치고 최태욱은 포항과 전북의 스왑딜에 엮여 전북 유니폼을 입게 되는데... 이 이적이 선수인생의 반전이 된다. K리그의 대표적 재활공장장 중 한 사람인 최강희 감독[7] 하에서 최태욱은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2008 시즌에 18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으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 시즌 28경기 9골로 완벽하게 부활. 팀에 새로 합류한 이동국을 뒤에서 받치며 에닝요, 루이스와 함께 K리그 최강의 판타스틱 4를 구축하였고, 팀에게 감격적인 창단 최초 우승컵까지 안긴다. 최태욱 본인에게도 2007년 포항의 우승 당시엔 사실상 2군신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선수 커리어 최초의 리그 우승인 셈.
2010 시즌에도 전북 공격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의 이승현의 합류와 서정진의 성장으로 전년도만큼 팀의 핵심은 아니었고, 시즌 중에 FC 서울로 트레이드된다. (아마도)계약조건상 빨리 이적료를 받고 파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한 듯한 전북과, 스탯왕 에스테베즈를 정리하고 윙어진에 빈틈이 있었던 서울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최태욱은 반 시즌을 뛰고도 16경기 6골을 기록해 제파로프와 함께 팀 우승의 마지막 퍼즐이 되었다. 그러나 2011년 부상으로 13경기 출전 3도움에 그치며 부진했고 2012년에는 28경기 2골 7도움으로 출전 횟수는 증가했지만 폼은 전만 못해 팀의 주전에서는 밀려는 모양새였다. 2013시즌에는 몰리나와 에스쿠데로가 건재한 상황에서 고요한이 다시 측면 미드필더로 올라오고 윤일록이 영입되면서 주전 경쟁에서는 완전히 탈락, 백업워머로 전락했다.
2014년 1월 28일 울산 현대로 이적하였지만, 부상으로 시즌아웃. 나이도 있는 터라 재기의 가능성이 낮다고 점쳐졌다.
2 지도자
결국,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5월 15일 울산 현대 구단은 "최태욱이 은퇴를 결정, 유소년 스카우트로 변신한다. 은퇴식은 오는 7월 12일 포항 스틸러스와 홈경기에서 열릴 예정이다"고 밝혔다.
2015년 2월 6일 새로 챌린지에 참가한 서울 이랜드 FC의 유소년 코치로 부임하였다. 2015년 11월 17일 서울 이랜드 FC의 U-15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3 해설위원
2016-17 시즌부터 SPOTV의 해설위원으로 합류. EPL 중계에 참여한다고 한다.
4 종교
이영표에 버금갈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5 논란
2012년에 갑자기 한국 축구사에 남을 역대급 쓰레기를 옹호하는 트윗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한 서호정 기자의 반응이 간결하면서 날카롭다. "화이팅 해주는 건 좋은데 트위터 말고 카톡으로 보내시든가"
둘이 같은 크리스천이고 아테네 올대 출신으로 친밀한 사이라서 저런 말을 한 듯 보이지만 승부조작으로 이미 가슴에 대못이 박힌 팬들을 두 번 능멸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고 기사까지 나면서 전방위적으로 까이자 결국 사과문을 게시한다. 하지만 마지막 멘트가 '승부조작은 없어져야 합니다.' 라 더욱 비웃음을 샀다. 승부조작은 없어져야 하는데 승부조작범은 용서하자. 김상혁 한 명 추가요
- ↑ 그동안 이 순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첫 월드컵이 끝나 버렸으니... 물론 같은 필드 플레이어임에도 1분도 뛰지 못한 윤정환, 현영민, 최성용보단 나은 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그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되었다.
- ↑ 당시 안양LG는 조광래 감독이 최태욱, 한정화, 최원권 등 유망 신인 공격수들을 3-4-3 포메이션의 윙백으로 돌려 출장시켰는데, 이 때 조광래가 윙백덕후라는 평판을 얻었다. 다만 이는 포백과 달리 수비수 전향이 아니라 공격 재능을 살리려는 의도로, 실제 선발 좌우 윙백으로 출장했다는 이영표와 최태욱의 위치가 경기중 어느새 바뀌어 있을 정도로 공격적인 미션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먹히는 경기는 한 시즌에 두 손에 꼽힐 정도이고, 특히 2000~01년의 안양LG는 리그에서 가장 수세적인 팀이었다는 게 문제. 오히려 원래 센터백 후보였던 김동진이 이 과정에서 만개했다.
- ↑ 인천은 창단 감독 베르너 로란트가 단 반년만에 사임했다.
- ↑ 김호곤 감독이 그리스전과 말리전 연달아 최태욱을 선발로 넣고 전반에 교체시켰는데 이에 빡친 최태욱이 교체되어 나오면서 유니폼을 벗어서 거칠게 집어던졌고, 이를 본 수석 코치가 최태욱을 불러세워놓고 삿대질을 하며 공개적으로 갈군 사건. 그리스전의 경우는 김치곤이 퇴장당하면서 불가피하게 전방자원 한 명을 빼고 수비를 두텁게 해야 했던 상황이라 최태욱이 재수없게 교체된 셈이지만 말리전의 경우 0-3으로 끌려가며 최악의 경기내용을 보였고 감독 입장에서는 교체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해야만 했는데 선수 입장에선 자신만 연이어 전반도 다 못 뛰고 교체되니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
- ↑ 여담이지만 시미즈는 조재진 최태욱, 그 전에는 안정환 등 한국 선수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던 팀인데 이로 인해 타 J리그팀 빠들이 시미즈를 깔 때 춍-펄스라는 인종드립을 치기도 했다. 뭐 2013년 현재도 이기제와 이민수가 소속되어 있는 팀이기도 하다.
- ↑ 그도 그럴 것이 최태욱이 인천에서 뛰었던 1 자리엔 K리그 역대급 외국인 선수인 따바레즈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기에...
- ↑ 아테네 올림픽 당시 김호곤 감독을 보좌하여 최태욱을 지도했던 코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