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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아우크스부르크 No.19 | |
구자철 (具滋哲 / Koo Ja-cheol) | |
생년월일 | 1989년 2월 27일 |
가족 | 부모님, 형 구자충[1], 아내, 아들 구본우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
본관 | 능성 구씨[2] |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윙어, 공격수 |
신체조건 | 183cm, 75kg |
주로 쓰는 발 | 오른발(양발) |
등번호 | 국가대표 - 13번 FC 아우크스부르크 - 19번 |
소속팀 | 제주 유나이티드 (2007~2010) VfL 볼프스부르크 (2011~2014) FC 아우크스부르크 (임대) (2012~2013) 1.FSV 마인츠05 (2014~2015) FC 아우크스부르크 (2015~ ) |
국가대표 | 52경기 / 17골[3] |
2010년 K리그 도움상 | |||||
루이스(전북 현대 모터스) | → |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2010년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상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2010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김은중 | FW 데얀 | ||||||||||
MF 몰리나 | MF 윤빛가람 | MF 구자철 | MF 에닝요 | ||||||||
DF 홍정호 | DF 아디 | DF 사샤 | DF 최효진 | ||||||||
GK 김용대 |
2007 U-18 월드컵 대표팀 주장.
2009 U-20 월드컵 대표팀 주장.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주장.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 주장.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주장.
2010-2011 볼프스부르크 10경기 0골
2011-2012 볼프스부르크 12경기 0골 아우크스부르크 15경기 5골
2012-2013 아우크스부르크 22경기 3골
2013-2014 볼프스부르크 12경기 0골 마인츠 14경기 1골
2014-2015 마인츠 26경기 7골
2015-2016 마인츠 2경기 0골 아우크스부르크 15경기 7골 1어시
K리그 정상급 미드필더에서 빅 리그 주전 미드필더로 성장한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드필더 중 한 명
목차
1 클럽 경력
1.1 제주 유나이티드
2007년 보인고등학교 졸업 후 드래프트 3순위로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오승범, 김재성 등과 함께 제주의 중원을 먹여 살렸지만 팀의 성적이 워낙 저조한데다 데뷔 초반 잦은 부상으로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 제주가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이면서 돌풍의 중심으로 함께 떴다. 플레이오프 포함 5골 12어시스트, 2010 시즌 K리그 도움왕이자 주간 베스트 11 최다 선정자이다.
광저우 아시안 게임 막판 3경기 연속 선발 풀 출장에 그나마도 그 중 두 경기는 연장전이었던 상황에서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러 소속 팀으로 복귀했는데, 이틀 뒤 전북 현대 모터스과의 플레이오프에 선발 출전해 풀 경기를 뛰었다. 이 때 부상을 당하고 '경미한 부상이니 괜찮다'며 또 이틀 뒤 FC 서울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 선발 출장해 풀타임을 소화했다. 경기 초반에 태클 당하면서 부상이 악화되었지만 그 와중에 1도움을 기록하는 저력을 보였다. 부상의 여파로 2차전에는 벤치에서 시작했다. 후반 아디에게 역전골을 허용하자 긴급히 투입되어 투혼을 발휘했지만 워낙 컨디션이 나빠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2010 K리그 시상식에서 판타스틱 플레이어, 베스트 11, 도움왕을 수상하며 삼관왕에 올랐다.
1.2 VfL 볼프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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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시즌을 마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가능한 중소 리그, 그리고 2012 런던 올림픽 출전이 가능한 팀으로 가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각종 커뮤니티가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대체 거기가 어딘데.
후에 스위스 리그의 영 보이즈의 오퍼가 들어왔지만 팬들의 반응은 부정적. 가네 마네를 놓고 설레발이 이어지다가 아시안컵에서 발군의 활약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볼프스부르크, 슈투트가르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에서도 입단 제의가 왔다는 기사가 나오더니만 1월 29일 카타르에서 독일로 바로 출국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보이즈는 되도 않는 FIFA 제소 드립을 치면서 이적 협상을 방해하려 했지만 이미 계약서 싸인 한 선수에게 제소 드립을 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에 모두 헛소리로 치부했다. 아무리 바이아웃을 제시했어도 일단 이적 동의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제주에게 통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제주는 통보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고 에이전트가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이중 계약을 시도할 리가 없다.
아시안컵 폐막 후 이적 건이 뜨거운 감자로 거론되더니 각종 설레발과 찌라시는 뒤로 하고 독일 분데스리가의 볼프스부르크로 이적이 성사됐다.
큰 기대를 얻고 진출한 유럽이었지만 하필이면 팀이 막장 일보 직전의 팀이었다. 분데스 챔피언의 위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강등 권을 헤매는 팀에서 반년 간 제대로 기회도 얻지 못한다. 그나마 시즌 막판 출전 빈도가 늘어나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1선발 9교체에 0골.
2011-12 시즌을 앞두고 손흥민이 있는 함부르크 SV가 공개적으로 임대 이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절차 다 밟아둔 상태에서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이적을 파탄내면서 결국 잔류했다. 한국 팬들은 상당히 아쉬워했지만 이 사건 때문인지 프리 시즌에 자주 선발 출장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독재자 마가트 감독의 똘끼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 폭풍 영입과 폭풍 방출로 팀 케미스트리는 안드로메다로 떠나고 포지션 경쟁자가 주구장창 몰려오며 결국 시즌을 암울하게 시작한다. 역시나 예상대로 전혀 경기 출장을 못했는데, 시즌 전반 막판 갑작스럽게 기회를 여러 번 얻었다.
하지만 문제는 포지션인데, 공미는 그렇다 쳐도 때에 따라 윙이나 스트라이커로 썼고, 당연히 한국 팬들은 데꿀멍. 경기력은 실전 감각이 쌓이며 좀 좋아졌으나 역시 어울리지 않은 위치에서 고전했다. 공격 포인트는 1어시스트……인데 그 어시스트도 미묘. 프리킥 상황에서 툭 하고 50cm 밀어준 게 어시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참으로 희한한 시즌을 보내던 중, 겨울 이적 시장에 볼프스부르크가 역시나 폭풍영입을 하면서 다시 상황이 미묘해지던 찰나에 구세주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 이적이 성사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마가트가 구자철이 마음에 들어서 키워주고 싶었는데 며칠 전의 뮌헨과의 경기에서 놓친 1:1 찬스 때문에 임대 오퍼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1.3 FC 아우크스부르크 (임대)
위기의 아우크스부르크를 구해내다
이적 후 첫 경기에서 60분에 교체 투입되며 바로 데뷔전을 치렀다. 구자철 투입 이후 그때까지 뻥축을 구사하던 팀의 분위기가 갑자기 확 바뀌었다. 좋은 볼 간수와 수비가담을 보여줬고 양민팀에 오면서 자신감이 붙은 건지 마르세유 턴까지 보여주며 좋은 인상을 남겼다. 경기 후 감독도 후한 평가를 내리며 첫 단추를 잘 채운 모습.
레버쿠젠 원정에서 1-0으로 뒤지던 후반 분데스리가 데뷔 골이자 팀의 동점골을 기록했다. 다만 팀은 3골 더 먹고 4-1로 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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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26차전 1.FSV 마인츠05와의 홈경기에서도 동점골인 2호 골을 기록하며 2:1 역전승에 기여했다. 6경기에 나서서 2골 1도움을 기록 중. 3월 25일 브레멘전에는 경기 종료 직전 슈팅이 어시스트로 인정 됐……는가 싶었지만 후에 취소되었다. 3월 31일 28차전 FC 쾰른 경기에서 전반 18분 선취골을 기록, 2:1 팀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기에서 정대세와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은 가운데 시즌 3호 골을 터트리셨다.펠릭스 마가트 보고 있냐? 아우크스부르크 이적 후 8경기 3골 1도움이란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구자철이다. 더불어 이 승리로 팀이 강등권을 탈출했기에 더더욱 값어치가 컸다.
4월 7일 29차전 리그 2위인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도 전반 23분 동점골을 기록하며 2경기 연속골을 기록했다. 이런 활약 속에 강등 위기에 몰렸던 아우크스부르크가 리그 잔류를 확실히 해냈고 요스 루후카이 감독이나 서포터들도 구자철의 완전 이적을 원했지만 팀 재정문제로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5월 5일 마지막 리그 34차전 함부르크와의 경기. 손흥민과의 맞대결에서 상대방 수비 마크를 완벽하게 벗어나며 분데스에서 첫 헤딩골을 기록하였다. 세레머니로 2011년 5월 6일에 자살한 故윤기원 선수의 기일을 맞이하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귀의 세레모니로 K리그 팬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거기에 아이러브사커에서 원정 간 팬들이 가져간 Pride of K-league라는 플랜카드도 카메라에 잡히며 여러 가지로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냈다.
팀은 1:0으로 승리하며 최종 순위 14위를 기록.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모두 15경기에서 뛰며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시즌을 끝냈다. 이 5골은 공격수 사샤 묄더스(5골 3도움)와 함께 팀 내 득점 1위 기록이지만 묄더스가 30경기를 뛰며 기록한 걸 생각하면 구자철은 그 절반만 뛰고 넣은 득점 1위이었기에 그에 대하여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서포터들이나 지역 언론이 에이스라고 칭송하며 완전 이적을 놓친 걸 아쉬워한 게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다.
그리고 6월 4일 아우크스부르크와 임대 연장에 합의하고, 등번호 7번을 받았다.#
하지만 12-13 시즌에선 부진에 빠졌고 팀은 18위 꼴찌로 추락했다. 시즌 첫 골은 12차전 프랑크푸르트 원정에서 기록했지만 2:4로 팀은 패했다.
2012-2013년 DFB 포칼 16강 FC 바이에른 뮌헨전에서 프랑크 리베리와 거친 실랑이를 벌였다. 볼 경합을 하는 과정에서 구자철은 리베리의 허벅지를, 리베리는 구자철의 종아리를 걷어차게 되었다. 구자철이 넘어진 후 리베리가 사과의 제스쳐를 보였으나 구자철은 그대로 일어나서 돌진하였고 리베리는 구자철의 얼굴을 밀쳐냈다. 이후 구자철이 다시 접근하여 리베리의 뺨을 쳤고, 리베리가 그대로 주먹으로 응수했다. 리베리는 당연히 퇴장 당했으며 시비의 발단이 된 구자철도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팀은 마리오 고메스, 샤키리에게 골을 내줘 2:0으로 탈락하게 된다.
2013년 지동원이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되면서 한국인 선수 동료랑 같은 팀에서 뛰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새해 첫 리그 경기 18차전 뒤셀도르프전에서 시즌 3호 골을 기록하며 3:2 승리에 기여했다. 팀은 17위이지만 16위랑 1점차로 어느 정도 강등권 탈출희망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더불어 팀내 공동득점 2위이다.(1위는 역시나 전번 시즌의 팀 내 득점왕 사샤 묄더스가 6골을 기록 중)다만 같은 2위인 토비아스 베르너가 15경기 출전에서 3골, 구자철은 11경기 출전해 3골을 기록 중.
그리고 마지막 34차전, 강등 여부가 걸린 중요한 경기. 18위로 강등 확정된 퓌르트와 벌인 이 경기에서 3:1로 이기면서 팀은 리그 15위로 역전, 극적으로 리그 잔류를 해내며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더불어 지동원은 이 경기에서 75분에 팀의 3번째 골을 기록하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아우크스부르크 통산 37경기 8골
1.3.1 볼프스부르크 복귀
볼프스부르크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제대로 경기에 나오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말리와의 A매치 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나, 이 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그 이후로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다.
결국 2014년 1월 18일 마인츠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1.4 1.FSV 마인츠05
1.4.1 2013-14 시즌
2014년 1월 18일 마인츠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018년 여름까지다. 이적료는 500만 유로, 한화로 약 72억원. 마인츠 구단 역사상 최고 이적료였다.
2월 2일 19차전 SC 프라이부르크를 상대로 벌인 경기에서 팀 동료 박주호가 리그 데뷔 골을 터뜨린 데 이어 구자철도 후반 13분 유누스 말리 대신 교체 투입돼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후반 42분 추가골을 터트려 2:0 승리에 기여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구자철이 좋은 팀에서 잘 나가는 줄 알았다.
1.4.2 2014-15 시즌
width=100%
2014년 8월 8일 유로파리그 3차 예선전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그리스) 원정 경기에서 시즌 첫 골을 기록했다. 앞서 열린 안방경기 트리폴리스 전에서도 도움을 기록하며 1-0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팀은 원정에서 1-3으로 패했고 1승 1패를 주고받았지만 골득실이 2득 3실점으로 뒤쳐져서 탈락했다.
8월 16일 헴니처(3부리그)와 DFB포칼 경기에서 구자철은 2-2로 맞선 후반 28분 한발 앞서가는 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120분 연장혈투 끝에 5-5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승부차기에 돌입해 4-5로 져 포칼 첫 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충격을 맛봤다. 구자철과 박주호도 각각 두 번째와 네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했지만 결국 승리는 놓쳤다.
8월 24일(이하 한국시간) SC 파더보른과의 2014-15 분데스리가 홈경기 1차전에서 풀타임을 뛰며 후반 추가시간 4분 동점 페널티킥을 넣으면서 극적으로 2-2로 비겼다. 초반 4경기에서 3골 1도움을 넣으며 맹활약을 했으나 팀이 3경기 연속 무승이라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리고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 최악의 폼을 보여주었다. 선발 기회를 꾸준히 잡고 있으나 대표 팀에서나 소속팀에서나 활약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계속 팀에서 자리를 못 잡다가 2015년 3월 15일 지동원의 소속팀 아우크스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전반 20분에 교체 출전했다. 팀 동료 조나스 호프만의 부상으로 갑자기 들어갔으나 꽤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결정적으로 경기 종료 직전 6개월 만에 골을 넣었다!! 골 넣은 후 세리머니를 전혀 하지 않았다. 경기 직후 후스코어드닷컴에서 MOM을 먹었다. # 경기를 본 누리꾼들도 대체적으로 오랜만에 감각이 돌아왔다며 호평을 내렸다.
4월 11일 레버쿠젠과의 홈 경기에서 동료들이 얻은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두 번 성공시켜 페널티킥으로만 멀티골을 달성하였다. 이 날 손흥민도 한 골을 넣어 코리안리거들이 합쳐 3골을 넣는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하였다.
5월 17일 쾰른 전에서 1골을 넣으며 리그 5호 골을 기록했다. 컵 대회까지 합쳐 시즌 7호골.
1.4.3 2015-16 시즌
교체로 2경기를 출전했다.
30일 국가대표팀 합류로 귀국하면서 토트넘과 도르트문트로 각각 이적한 손흥민과 팀 메이트 박주호에 대해 새 팀에서 잘하라며 덕담을 했다.너님이 잘해야 돼요.
31일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어 독일로 재 출국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구자철의 이적을 강력히 요청하였고, 이를 거부해오던 마인츠에서도 수락하면서 계약이 성사되었다.
마인츠05 통산 42경기 8골
1.5 FC 아우크스부르크
2015년 8월 31일 오피셜이 뜨면서 아우크스 완전 이적이 확정되었다. 2년 계약을 체결하면서 2년 만에 아우크스부르크에 복귀하였고 등번호는 19번을 부여받았으며, 이적료는 클럽 레코드를 기록했다. 이로써 홍정호, 지동원과 함께 유럽 무대에서 코리안 리거가 3명이 한솥밥을 먹는 진광경을 연출하게 되었다.(지구호라고도 불림)[4] 하지만 이적 절차를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라오스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레바논전 출전 가능 여부도 불분명했으나 박주호와 함께 베이루트에서 선수단에 합류했고 레바논 원정경기에 출전했다.
1.5.1 2015-16 시즌
9월 13일 뮌헨 전에서 선제골을 감각적인 힐킥으로 어시스트했다. 이런 걸 국대에서 하라고. 비록 패하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데다 오자마자 활약해 주었기 때문에 아욱국 입장에서는 낙관적이라 여길만 하다.
누가 글 좀 써줘
이후에도 주전으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답답한 아욱국의 공격진에서 그나마 공격을 풀어주는 선수긴 하지만, 혼자 경기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16년 2월 19일 기준으로 스탯은 3골 1어시스트.1호골 2호골3호골
2월 22일 하노버96와의 경기에서 감각적인 퍼스트 터치로 두명의 선수를 벗겨낸 다음, 측면으로의 드리블 돌파를 하다 중앙쪽으로 컷인해서 자신감 넘치는 중거리슛으로 시즌 4호골을 넣었다.#
3월 6일 레버쿠젠을 상대로 혼자 5, 6, 7호 골을 몰아치며 프로 데뷔 첫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5] 그야말로 이날 경기를 지배했다. 인자기가 접신한 듯한 기막힌 위치 선정은 덤. 인자기가 되었다가 이동국[6]이 되었다가... 그런데 수비가 어이없게 말아먹어서 3:0으로 이기다가 자살골까지 넣고 3:3으로 비겼다.[7]손흥민의 볼프스부르크전 해트 트릭이 생각난다. 참고로 이 기록은 아욱국의 1부 리그 최초 해트 트릭 기록이라 한다.(...) 여담으로 경기 막판에는 8호 골까지 넣을 기회가 있었으나 하필 위치를 잡는 순간 주심이 구자철의 앞을 지나며 시야를 가려버리는 바람에 8호 골과 경기 4연속 골은 무산되었다. 주심 개새끼 해봐
4월 3일 마인츠를 상대로 8호골을 넣었으나 팀은 4:2 패배를 당했다.
해당 시즌의 총평은 그야말로 커리어 하이. 해외 진출 이후로 최다골을 기록하고 팀을 강등에서 구해낸 일등공신이 되었으니, 개인적으로도 만족한 시즌이 되었을법 하다. 전반적으로 해외파들이 지지부진했던 시즌에서 해외파의 공백을 메운 셈이기도 하다.
후반기 키커 랑리스테 공격형 미드필더 부문 전체 5위에 랭크했다. (K-5 판정)
팀 상황상 정해진 포지션 없이 측면과 중앙, 2-3선을 오가는 와중에도 굉장히 높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1.5.2 2016-17 시즌
지동원과 함께 아우크스부르크의 에이스
포칼 컵에서 5부리그 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팀의 2대 0 승리에 기여했다.
다름슈타트와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크로스로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이후 뮌헨과의 리그 경기에서도 노이어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시즌 1호골을 달성했다. 비록 팀은 1-3으로 패했다.
2 청소년 대표
2.1 U-20
2009년 이집트 U-20 월드컵의 주축으로 활약하여 청소년 대표팀을 8강에 진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기성용이 A대표 팀으로 차출이 결정된 상태에서 지명도 있는 선수가 없는 당시 청대 상황을 생각하면 구자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대회에서 득점을 한 김보경, 김민우, 윤석영 등이 주목을 받았지만 이들을 후방에서 지원해준 구자철이 없었다면 역대 최약체 청대로 남을 뻔 했다.
2010년 초 블랙번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진출하진 못했다. 국가 유공자 자녀이기 때문에 병역은 6개월 공익(일명 육방)[8]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해외 진출에는 문제가 없다. 제주는 일찍이 해외에서 콜이 들어오면 대승적 차원에서 보내겠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2011년까지 제주 유나이티드와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각 팀에서 군침을 흘리는 중.
아무튼 월드컵 엔트리 최종 발표 전에 탈락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K리그 빠들이나 아는 존재였다가 아시안 게임 주장을 맡게 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와일드카드인 박주영과 김정우가 있는데 왜 어린놈이 주장이냐 하면 멤버들이 거의 U-18 올림픽 대표 팀 멤버들이었으며 그 때의 주장이 구자철이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동메달이었으나 요르단 전 2골, 우즈베키스탄전 1도움, 이란 전 1골로 주장으로써 할 만큼 했다.
2.2 올림픽 대표
야아! 런던이다아!
2012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어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다. 기성용, 박종우, 김창수와 함께 올림픽 팀 동메달의 1등 공신으로 꼽히고 있다. 기존에 약점으로 거론되던 체력에 대한 우려를 한 방에 불식시켰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체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지성도 대표 팀 경기를 보고 "자철이가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나도 저렇게 뛰면 힘들다."라고 평할 정도.
16강, 8강, 4강에 이르기까지 중앙에서 활발한 압박과 볼 배급을 선보였으며 간간히 공격에 힘을 보태는 등 전체적으로 나이스 플레이를 보였다. 다만 이번 올림픽 공공의 적인 심판(…)에겐 어쩔 수 없이 힘든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선수의 기질이 다분히 공격적이라 심판에게 어필하는 부분도 화면에 많이 잡혔다.[9] 특히 일본과의 3-4위 결정전에서 주심에게 "Why?"를 외치는 모습이 화제에 올랐다.
4강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3-4위 결정전에서 한 골을 보태며 논산 거부포를 쏘고[10] [11]동메달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여담으로 이날 대한민국은 호쾌한 피지컬 축구를 앞세워 일본을 부숴버렸는데 구자철 역시 태클을 넣다 유독 옐로카드를 남발하는 심판에게 걸려 옐로카드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달려드는 게 아주 그냥 파이팅이 넘쳤다 일본 선수를 밀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질 뻔 했지만 구자철을 말린 건 다름 아닌 셀틱일진 기성용!! 평소엔 투지 넘치는 기성용을 구자철이 말리고 달래는데 역변한 상황이라 일부 팬들은 '기성용이 저런 때도 있다니'하며 당황스러워했다고, 그리고 후일 기성용은 "얘가 내 캐릭터를 탐내는 구나"라고 평했다....
3 국가대표
구자철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하나이며 탄탄한 기본기, 테크닉을 바탕으로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직접 슈팅으로 이어지는 키패스에 능하며 최전방의 득점력이 약한 국가대표팀의 특성상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합류하고있다.
3.1 통산 국가대표 기록
2016년 9월 1일 기준
연령 | 출전 | 골 |
U - 17 | 0 | 0 |
U - 20 | 16 | 5 |
U - 23 | 16 | 5 |
A 대표 | 52 | 17 |
종합기록 | 84 | 27 |
4 플레이 스타일
미드필더치고 골을 자주 넣으며, 넣을때마다 멋있게 넣는다. 그냥 골을 정말 많이 넣는다. 손흥민과 함께 현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 경기수 대비 득점율은 손흥민이 좀 더 좋지만 대신 구자철은 득점력의 기복이 거의 없다. 바레인전에서 2골을 득점한 것 외에 대표팀에서는 2골 이상 득점한 경기가 없다. 반대로 손흥민은 골을 몰아쳐 스탯을 쌓는 경향이 상당한 편.
본래 수비형 미드필더로 시작했지만, 뒤를 받쳐주는 선수가 있을 때 발휘되는 공격 본능으로 주목받았다. 제주 시절에는 준수한 퍼스트 터치와 안정적인 볼 키핑,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중거리 슛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성용에 비해 피지컬은 떨어지지만 바디 밸런스와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움직임이 준수하고 숏 패스 능력도 갖추고 있어 공격형 미드필더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어느 정도 수비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였다.
그러나 조광래가 아시안컵 대표팀에서 지동원과 연계한 섀도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포지션에서 뛰게 하면서 모든 게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해당 대회에선 의외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서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데 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결정력, 피지컬, 드리블이 전업 공격수로 뛸 정도로 좋은 선수가 아니었던지라 아예 공격수로 고정하자 이내 한계가 찾아왔다. 게다가 독일 진출 이후 기존의 간결한 볼터치 대신 공을 질질 끄는 버릇[12]이 심해졌고 잘 되지도 않는 드리블 돌파를 자주 시도하여 공격 템포를 떨어뜨리는 일이 잦아졌다. 역습 상황에서의 접기 혹은 팽이질을 하면서 역습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간간히 보인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팽이질 덕분인지 탈압박은 매우 뛰어나긴 하다.
팬들 사이에선 2011 아시안컵 이후 겉멋이 들어 자신의 본분을 완전히 망각했다는 의견이 있다. 어디까지나 본분은 미드필더이고 골은 옵션인데 미드필더 위치에 서있으면서 스트라이커 마냥 골을 노리고 달려드니 구자철을 선발로 쓰면 중원의 공수간격이 크게 벌어져 경기 밸런스가 무너진다. 즉, 현재 폼과 상관없이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문제가 되는 선수.
또 다른 단점은 피지컬. K리그 시절부터 지목받아온 문제점인데 독일에서도 리그가 뒤로 가면 갈수록 체력이 방전되어 활동량이 줄어든다. 스피드나 경합 능력도 떨어진다. 2011년 이후 골만 노리고 달려드는 모양새를 보면 아예 공격수로 올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으나 그럴 수 없는 게 톱에서 뛰기엔 피지컬이 너무 떨어진다.
종합적으로 볼컨트롤과 신체밸런스, 활동량, 킥력이 장점이었던 선수인데 수미/중미였다가 공미/셰도 스트라이커로 포변하면서 기존의 장점이 해당 포지션에서는 큰 장점이 아니게 되었고 셰도 스트라이커로서의 판단력이 떨어져서 비효율적인 움직임과 본인의 장점을 과신하여 무리한 플레이를 일삼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공미로 세워도 말이 공미지 움직임이나 활동위치는 거의 톱이나 다름없는지라(...) 사실상 미드필더 한명을 버리고 그놈의 골만 기대해야 하는 포지션조차 애매한 선수가 되어버렸다. 준수한 킥력, 중상급 볼컨트롤, 분명 많이는 뛰는 활동량 등 하드웨어적인면은 뛰어나서 소속팀이나 국대에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지만 위치에서의 전술이해도와 축구지능이 떨어져 활용이 애매한 선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만 컸으면 훌륭한 선수가 될 자질이 많았으나 잘크지 못해 안타까움을 남기는 선수로 이제는 유망주라고 하기도 어려운 나이가 되어버렸다.
이런데도 슈틸리케가 구자철을 중용 하는 이유는 단 하나. 2선에서의 득점력 때문이다. 최소한 자기 진영 시작점 부근에서부터의 압박이 기본이 되어버린 현대 축구에서는 디디에 드록바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같은 월드 클래스 타게터가 아닌 이상, 개인 전술만으로 두터운 상대 수비를 부수고 득점을 만들 수 있는 일 자체가 줄어들었다. 전술한 월드클래스 공격수가 없는 팀에서 중앙 공격수는 스코어러가 아니라 본인의 움직임을 통해 2선들이 활용할 공간을 만들어 줘서 2선 선수들의 활동반경을 넓히고 편하게 해주는 임무에 집중한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선수가 박주영과 이정협. 그럼 득점은? 2선 공격수들이 해줘야 한다. 이것 때문에 다소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기용하는 것.
비슷한 연배에 플레이 스타일 차이가 확연한 기성용과 자주 비교되었는데 둘을 함께 기용할 경우 엇박자가 심해 이 둘의 공존이 10~12년에 국대 주요 떡밥거리였다.[13] 그래서 조광래가 구자철을 공미로 돌렸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으나, 이는 벌써 5년 이상 지난 이야기. 현재 기성용과 구자철 모두 경기 운영적인 부분과 수비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음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조합도 고려해볼 법 하다.브라질 월드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기억 상실증에 걸린 팬들이 인터넷상에 상당히 많은 듯하다. 문제는 취소선에도 쓰여 있지만 이 둘의 조합은 2016년까지도 미완성이다.
5 기타
- K리그와 올림픽 대표 팀 시절까지는 팬들 사이에서 멘탈이 좋다는 칭찬이 많았다. 그러나 부진과 홍명보호에서의 해외파 파벌논란 이후 페르난도 토레스처럼 실제론 멘탈이 형편없는데 팬들이 과대 포장한 게 아닌가 하는 수군거림이 있다. 언론플레이나 팬서비스가 좋다고 프로선수로서 멘탈이 좋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 월드컵 졸전 직후의 경험드립이나 부진을 지적하는 여론에 대해 관심 없다는 식의 인터뷰를 해서 팬들에게 크게 실망을 줬었다
- 친정팀 제주 유나이티드와 K리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비시즌이면 반드시 원 소속팀을 방문하고 지역 방송에서 해설을 자처하기도 하며 런닝맨 등 여러 미디어에 출연했을 때에도 K리그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았다. 또한 해외 생활을 마친 후 반드시 국내 무대로 돌아와 은퇴하겠다고 공언을 하여 제주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선수다.
- 2010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삼성 라이온즈 소속 투수였던 구자운이 그 해 단 1경기에 출장해 3이닝 2실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뜬금없이 엔트리에 발탁되었다 좋은 활약을 펼치자 구자철과 상관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플레이오프가 워낙 비범했던 가운데 던져진 떡밥이라 한동안 구자철과 구자운이 나란히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전후해서 그의 오글거리는 인터뷰가 화제가 되어 구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동료 선수의 부모님이 쟤는 무슨 말을 저렇게 느끼하냐고 하자 원래 그런 형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 외에 트위터에서 좀 심하게 진지한 멘션을 했다가 절친 기성용에게 까이는 일도 종종 있다.
- FC 서울의 넬로 빙가다 감독의 추천으로 2010 서울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 호날두 에이전트 쪽에서 경기를 보러 왔었다고 한다. 이 에이전시는 축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에이전트 중 하나인 조르제 멘데스의 회사다. 호날두 뿐만 아니라 무리뉴 및 거물 포르투갈 선수들과 스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거대 에이전시다.
- 구자철인데 KOO라고 쓰기 때문에 캡틴 쿠라고도 부른다.
- 구자철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이고 형은 ROTC로 병역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14] 6개월간 공익근무만 이행한다면 군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 근데 정작 본인은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 올림픽 동메달을 취소당할 뻔했다. 2012년 올림픽 남자 축구 3, 4위전에서 구자철은 박종우와 같이 독도와 관련된 세리모니를 하려고 했는데 구자철의 경우는 주위의 코칭 스텝들이 문제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말렸기 때문에 그냥 만세만 부르고 끝났다. 하지만 박종우는 독도 세리모니를 하는 바람에 박종우 혼자서만 동메달 수여가 보류되었다. 나중에 받긴 했지만.
- 집안 사정을 조금 더 서술하자면 어린 시절은 전투비행단에서 자랐다고 한다. 원인은 아버지. 아버지가 사실 공군 장기 부사관 출신이었다고.상세 기사 이 인연 때문인지 공군 홍보대사를 했다.
- 지금은 헛소문이라고 판명된 기성용이 국가대표 올대vs비올대, 해외파vs 국내파 파벌 형성의 주범으로 찍힌 상황에서 절친인 구자철도 동조 내지는 방조를 하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었다. 축구 사이트에서 이 주제가 거론되면 상주하던 구자철 팬들이 실드치다가 키배가 벌어지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 어째서인지 구자철이 기록하는 골들을 보면 평범하지 않은 자세나 상황의 골들이 많다. 그래서 알싸나 네이버 기사 리플들을 보면 일단 넣으면 멋있게 골을 넣는다 라는 식의 반응이 많다.
- ↑ 대전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 ↑ 능성 구씨 27세손 '滋'자 항렬이다.
- ↑ 2016년 9월 1일 기준이다.
- ↑ 이전에도 3명이 유럽권에서 같은 팀에 있던적이 있었으니,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현영민, 이호, 김동진이 뛴적이 있었다. 딕 아드보카트가 제니트로 감독을 옮기면서 이호와 김동진을 데려간 영향이었다. 하지만 이런 진풍경은 현영민이 6개월만에 울산 현대에 복귀하면서 오래가진 못했다.
- ↑ 레버쿠젠은 이전 라운드에서도 클라우디오 피사로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브레멘에 1-4로 대패했다. 레버쿠젠 입장에서는 치욕의 기록인 셈.
- ↑ 7호골은 발리 슛으로 넣었다.
- ↑ 이 경기를 극적으로 비긴 레버쿠젠은 잔여 9경기에서 8승 1패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따냈다.
- ↑ 연기자 이병헌 등이 대표적인 육방 복무자이다. 가장 최근에 육방으로 복무 중인 유명인사는 연기자 김영광. 대신 육방 때문에 "피끓는 청춘"의 개봉을 보지 못했다.
- ↑ 영국과 맞붙은 8강전에는 아예 심판의 기질을 파악하고 일부러 미친 듯이 어필했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이건 무슨 담당교수 성격 파악하는 것도 아니고 - ↑ 참고로 그 골은 구자철의 무시무시한 보디 밸런스를 잘 보여주는 골. 뒤에서 넘어온 골을 중심을 잃지 않고 발끝으로 터치한 뒤 역시 어려운 자세로 균형을 잃지 않고 그대로 슛을 날렸다. 힘이 아닌 중심을 잡는 밸런스가 정말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골.
- ↑ 애초에 구자철은 국가유공자 자손이라 훈련소 대체로 병역이 해결된다.
- ↑ 독일 가서 생긴 버릇은 아니고 제주에서 잘나가던 2010년경부터 조금씩 나타나던 버릇. 자신의 볼 컨트롤을 과신한 나머지 볼을 바로 걷어내야 할 순간에도 잡고 끌어서 보는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치명적인 실수가 나온 적은 거의 없었지만 수비안정감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수비적인 롤을 맡은 박현범, 오승범의 기여도가 매우 높았다.
- ↑ 예전 홍명보 감독의 청대에서 구자철-기성용 라인을 시험했으나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던 데다 동선이 완벽하게 겹쳤다. 그러나 기성용이 셀틱 이적 후 수비력이 늘어 수미로 뛸 수 있게 되었고, 2011 아시안컵에서 구자철을 4-2-3-1의 중앙공미로, 기성용을 이용래와 함께 더블 볼란치로 쓰며 공존에 성공했다.
- ↑ 2012년 6월에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