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의 아이들

1 개요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전임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이 2000년 이후 영입해 육성했던 유망주(양아들)들을 일컫는 말. 유사품으로 FC 서울조광래의 아이들이 있다. 이후 조광래 감독이 경남 FC의 감독을 맡고나선 경남 FC를 조광래 유치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야구 버전도 있는데, 이른바 강병철의 양아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 데포르티보 팀을 이상형으로 삼아 스타가 없어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쉽게 지지않는 풍부한 재미가 있는 축구를 추구했던 김호 감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젊은 선수들을 육성해 수원의 축구를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김호 감독이 물러나고 차범근 감독이 영입되면서 이 구상은 통째로 어그러졌고, 김호의 아이들은 중용되지 못한채 뿔뿔히 흩어졌다. 차범근 감독의 가장 큰 실책으로 김호의 아이들을 통째로 날려먹은걸 드는 사람도 있을 정도. 비록 차범근 감독은 재임기간(2004~2010) 동안 2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즉시 전력감을 중시하고 신인 육성을 등한시하면서 이후 노화한 스쿼드는 자연스레 전력 약화로 이어졌다.

김호 감독이 2007년 대전으로 부임하면서 권집, 이여성, 고창현 등 옛 제자를 끌어모으고 새로 2군을 육성해 김호의 아이들 시즌2를 만들려 했으나 대전 전력이 워낙 약해 여의치 않았다. 이와중에 대전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김형일을 떠나 보내고 베테랑들을 상당수 방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김호 감독은 2009년 시즌 도중 경질되었다.

이들을 명단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해외에서 크게 성공한 선수는 없어도 k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톱 플레이어들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수원에서 포텐 터진 선수는 아무도 별로 없다는거... 그나마 고종수, 곽희주는 수원에서 포텐이 터졌다. 조병국과 조성환을 여기에 넣기도 하는데 조병국은 성남에서, 조성환은 포항과 전북에서 맹활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진출에 성공했다. 이들의 수원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머지는 플레이스타일도 안맞는데다 유망주를 기다려주지 않는 차붐시절을 거치며 죄다 방출, 타 팀에서 포텐이 터지거나 만년 유망주로 끝났다.

2 김호의 아이들 명단

3 당시 코칭스탭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보좌하던 코치들 면면도 화려하다. 선수들과는 달리 코치들의 경우 상당수가 감독으로 성장해서 활약하고 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전부 한 때 모여서 김호 감독을 보좌한 것은 아니다.

4 애증의 관계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친정 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굉장히 싫어한다. 대표적으로 조재진과 조성환. 물론 수원 팬들도 이 둘을 굉장히 싫어한다. 조재진은 상무 전역 후에 차범근이 자신을 윙포워드 또는 No.3 스트라이커로 쓰는 것 [1] 에 불만을 가져서 이적요청을 했고, 조성환도 막판에 팀을 떠날 때 연봉 및 출전시간 문제로 이적 요청을 하는 등 많이 시끄러웠다. 조병국도 수원 팬들에게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수원을 매우 싫어한다. 성남에 처음 왔을 때 성남 팬들도 못 믿었을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했었다.

코치진의 경우 조광래김호와 불화를 겪고 나간 뒤 아예 최대 라이벌인 안양 LG 치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사건으로 시작된 게 지지대 더비였다.[2]

최강희의 경우도 역시 김호와 불화가 있다가 동계훈련 도중 느닷없이 쫓겨났다. 그리고 잠시 국대 코치를 맡다가 나왔는데, 그 무렵 수원 삼성에 김호의 후임으로 현역 시절에 개인적인 앙금이 있었던[3] 차범근이 부임하고, 설상가상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을 할 때 염기훈이 수원으로 이적을 요구하며 팀 분위기를 흐리자 다른 팀은 몰라도 수원 블루윙즈한테는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했다.

윤성효도 수원 블루윙즈 감독 시절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퇴진을 요구하는 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할 때에는 수원 블루윙즈 팬들에 대한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1. 당시 투톱은 그 시즌 K리그 최고의 용병 조합이던 나드손, 마르셀...지못미
  2. 이 후 안양 소속인 서정원이 수원에 오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3. 1991년 차범근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노장 선수였던 최강희와 불화가 생겼고, 결국 최강희가 1992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