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사에서 삼국시대 6세기 중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 지역을 삼국과 가야 소국들, 거기에 일본 등이 모두 얽혀서 다투다가 최종적으로 신라가 장악하게 되는 과정이다. 짧게는 551~553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직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는 이 판도가 확정되는 사건이다.
교과과정에서는 이 때부터 5세기 광개토대왕, 장수왕 대에 형성된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2 배경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쳐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시작했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근근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475년 9월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하고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비로소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는 크게 약화되었고 혼란기를 거쳤지만 동성왕과 무령왕대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 성왕대에는 슬슬 고구려에 반격이 가능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 북진 직전에 일어난 548년의 독산성 전투 때까지도 고구려가 쳐들어 내려오면 백제와 신라가 서로 도와주는 나제동맹은 유효했다.
3 북진의 시작
나제동맹군의 고구려 공동정벌 | ||
날짜 | ||
551년 3월 | ||
장소 | ||
한반도 중부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백제군, 신라군 | 고구려군 |
지휘관 | 성왕(聖王) 진흥왕(眞興王) 거칠부(居柒夫) 구진(仇珍) 비태(比台) 탐지(耽知) 비서(非西) 서력부(西力夫) 비차부(比次夫) 미진부(未珍夫) 노부(奴夫) 야이차(也尔次)† 그외 미상 | 양원왕(陽原王) ←혜량(惠亮) 그외 미상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규모 | 불명 | 남부 한강 유역 16개 이상의 군을 빼앗김 |
결과 | ||
고구려군 대패, 영토 축소 |
12년(서기 551) 봄 3월,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임라를 말한다.】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1]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550년에 나제동맹군은 힘을 합쳐 드디어 본격적으로 북진에 돌입, 한반도 중부 16여개 군을 탈환하게 된다. 한강 하류 지역인 중부지방 서부는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인 중부지방 동부는 신라가 차지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는데, 특히 백제로서는 76년만에 옛 도읍과 고토를 수복한 것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러나,
4 나제동맹의 분열
13년(서기 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2]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백제 성왕은 위례성을 비롯한 고토를 회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강유역을 확실하게 점유하려고 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당초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까지 단독으로 모두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동안 진흥왕이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차지했다는 설이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한강 유역의 방어에 한계를 느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에서 철군했고,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진흥왕의 신라군이 내려와 차지했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신라가 멀쩡히 백제군이 주둔한 땅을 빼앗은 게 아니고 백제가 관리능력의 부족을 느껴 스스로 포기한 것을 신라가 차지했다는 설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위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먼저 버린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거론된다. 또 백제 성왕이 속으로는 씁씁하게 여기고 칼을 갈았겠지만 대외적으로 신라에 대해 항의나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점, 2년 후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내면서까지 신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한 것, 또 관산성 전투 출병 당시 백제 귀족층이 출병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점 등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수세에 몰린 고구려가 추가적인 북진을 막기 위해 나제동맹의 한 축인 신라에게 이 쪽으로 오지 말고 저 백제 쪽을 대신 노려서 더 많은 땅을 얻으라는 제안을 했고 신라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설도 있다. 당장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과 투닥거리느라 남방 전선에 집중할 수 없었고, 수도 평양성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황초령 순수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본다는 것. 또한 이후 백제와 신라가 대대적으로 맞붙을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방어해야 할 군대까지 김무력이 데리고 내려가는데, 이러면 필히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우려가 큰데, 미리 고구려와 밀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관산성 전투 직후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통과해 백제를 공격하기까지 하는데, 이것 또한 신라가 고구려군이 진격할 수 있도록 임시로 길을 내 주었다는 것이다,
5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
아무튼 이로 인해 백제의 한강유역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유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성왕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3] 유화의 제스쳐를 취한다.
이 기록은 곧 일어날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결혼동맹 1년 후인 554년, 성왕은 갑작스럽게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시집간 딸의 운명은... 이 신라 보복군에는 대가야와 일본의 원군까지 합세하였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6 결과
신라는 이후에도 옛 옥저 땅이었던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하며, 백제의 견제가 약해진 틈을 타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를 정벌해 영남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등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며 삼국통일 이전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일본서기/긴메이 덴노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관산성 전투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