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유럽 문화 수도 1999 | ||||
1998년 스톡홀름 | ◀ | 바이마르 | ▶ | 2000년 레이캬비크 베르겐 볼로냐 브뤼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아비뇽 크라쿠프 프라하 헬싱키 |
바이마르 Weimar | |
바이마르 시의 문장 | |
위치 | |
국가 | 독일 |
주 | 튀링겐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준수) |
한국과의 시차 | -7시간 |
1 개요
Weimar
독일 튀링겐주에 위치한 도시로 주도인 에르푸르트에서 기차로 약 30분 걸리며 라이프치히에서는 약 80km, 뉘른베르크에서는 약 170km이다.
인구는 2014년 현재 63,477명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이 도시가 독일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나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학, 철학, 음악, 과학등의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거의 모두 이 도시를 거쳐갔고 또 이 도시 안에서 크게 활약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알렉산드르 푸시킨,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실리 칸딘스키, 발터 그로피우스 등. 말 그대로 독일 문화의 중심지이자 독일 계몽주의의 산실인 셈. 그래서 베를린이 독일의 정치적 수도, 프랑크푸르트가 경제적 수도라면 문화적 수도는 바로 바이마르란 말이 나올 정도이다.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또 이 도시의 이름이 공화국의 별명에 붙여졌다. 이러한 문화 중심지 답게 바이마르 안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의 교외에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인 부헨발트(Buchenwald)가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바이마르 시민들은 근처에 수용소가 있었다는 것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이 수용소에 진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바이마르 시민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문화유산과 강제 수용소가 공존하는 바이마르의 모습은 문명과 야만이 동시에 공존하는 양상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독일의 뒤틀린 근대사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 역사
2.1 초기
바이마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세기 후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개신교가 바이마르에 들어오게 된다. 이때 마르틴 루터도 몇 번 바이마르에 머무른 기록이 존재한다. 이때 무역으로 잠시 번성했으나 이후 에르푸르트에 밀려 쇠퇴한다. 이후 바이마르 공국이 성립된다.
2.2 황금시대(1758년 ~ 1832년)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와 그녀의 아들인 카를 아우구스트 공 |
1714년 작센-아이제나흐 공국과 작센-바이마르 공국이 동군 연합이 되었다. 쇠퇴 이후 그저그런 시절을 보내던 바이마르가 독일의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는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였다. 이 당시 바이마르 공국의 대공비였던 안나 아말리아(Duchess Anna Amalia)와 그녀의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은 문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고 많은 투자를 한다. 이는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는데 바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가 바이마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파우스트 등의 걸작들을 집필하면서 동시에 바이마르를 예술의 중심지로 꾸미는데 일조한다. 1815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으로 공국이 승격된다.
2.3 은의 시대(1832년 ~ 1918년)
1832년 괴테가 타계하면서 바이마르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듯 하였으나 바이마르의 문화적 영향력은 계속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등 걸출한 철학자, 음악가, 문학가들이 바이마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독일의 문화적인 역량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또한 이시기에 바이마르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건축 붐이 일기 시작한다. 다만 이러한 문화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는 자체적인 산업 기반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고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벌어진 독일 혁명으로 인해 제정이 무너지자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도 함께 무너지고 바이마르에서 새로운 헌법이 발표됨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다.
2.4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 ~1933년)
이 시기에도 바이마르의 영화는 꺼지지 않았다. 이 당시 독일 뿐만 아니라 훗날 전세계 건축에 영향을 끼칠 새로운 건축 사조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곳에 바우하우스 학교 (훗날 데사우로 이전)를 설립하면서 이 건축 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 들어선 나치스 정권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고 많은 건축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2.5 나치스
- 참고항목 : 나치 독일
이 천하의 개쌍놈들이 이 시기 바이마르에서 한 주요한 활동은 강제수용소의 건설이었는데 바로 부헨발트였다. 1937년 세워졌으며 1945년까지 이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는 56,545명으로 추산된다.
2.6 동독 시절
- 참고항목 : 독일 민주 공화국
튀링겐 주가 통째로 소련군 점령지에 편입되면서 바이마르도 졸지에 동독에 편입되어버린다. 이 시기 바이마르의 문화적 영향력은 사그라들어버렸으나 다행스럽게도 이전에 있었던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동독 정부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바이마르를 손쉽게 건드릴 수 없었으며 대체적으로 바이마르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도 독일 통일시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 방치된 건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2.6.1 통일 이후
- 참고항목 : 독일연방공화국
통일 직후 바이마르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연방 정부의 지원으로 곧 회생한다. 1996년 바우하우스가, 1998년에는 시가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2004년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에서 동독 시절의 노후한 배선 설비로 인해 건물과 일부 서적들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현재는 복원이 어느정도 완료된 상태이다.
3 볼거리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볼거리는 매우 많다. 특히 도시 중간 중간에 이 도시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두상이나 동상이 세워져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 것이다.
로코코 홀 |
-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Herzogin Anna Amalia Bibliothek)
오늘날의 바이마르를 이룩한 바이마르 공국의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의 이름이 붙여졌다. 괴테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도서관 내부는 풍부한 장서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도서관 중간의 로코코 홀은 도서관의 핵심이자 도서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이며 내부에는 괴테와 실러의 두상,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구 동독 시절 방치되어 있었으며 2004년 노후한 배선 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일부가 타고 상당한 수의 장서가 소실되었으나 건물 자체는 복원이 완료되었으며 장서는 복원중이다.
- 괴테 박물관
- 실러 박물관
- 니체 하우스
- 바우 하우스 박물관
- 시청(Rathaus)
- 바이마르 궁전
- 괴테-실러 극장
극장 앞에 괴테와 실러가 함께 서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e/BuchenwaldKZ-Tor.jpg/606px-BuchenwaldKZ-Tor.jpg
- 부헨발트 강제수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