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키 오사무

統 (でざき おさむ)

1943년 11월 18일 ~ 2011년 4월 17일

1 개요

일본애니메이션 감독, 연출가, 각본가.

이름이 비슷한 즈카 오사무와 혼동할 수 있으니 주의. 근데 더 특이한 건 데즈카 오사무와 깊은 연관도 있다.더 헷갈리게 데즈카 오사무의 회사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비슷해서 사부님에게 더 마음이 끌렸나

다만, '데즈카'를 '테즈카'로 쓰는 건 상관없지만이쪽은 테카로 쓰는 사람이 은근히 많고, 이 사람은 절대로 '테'자키 오사무가 아니다. 이름 후리가나 표기를 유심히 살펴 볼 것.구글 '테자키 오사무' 검색 결과

2 상세

도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잡지에 응모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만화가는 역시 그 당시 가장 활약하고 있던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아 영화적인 연출의 스토리 만화를 그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프로 만화가로 대본소용 만화를 그렸지만, TV의 출현으로 도쿄의 대본소 만화업체는 모두 오사카로 전향하고 만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시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63년 9월에 무시 프로덕션의 구인 광고를 신문에서 보고 입사를 결심. 500명 정도가 입사시험을 봤으나, 3명이 합격하는 난관을 통과. 즉시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뽑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당시 면접에서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스기이 기사부로는 "이 녀석은 이미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 자신의 것을 하고 싶어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공부하기 위해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고, 일종의 작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무시 프로덕션에서 작화 스탭으로 일을 하다가, 1964년에 같은 무시 프로의 선배 스기이 기사부로와 함께 일본 최초의 작화 독립 프로덕션 '아트 프레시'를 설립한다.

1965년에 철완 아톰로 연출 데뷔[1], 1967년에는 '오공의 대모험'[2] , '도로로' 등을 연출.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이것을 만들고 싶다고 직접 무시 프로에 기획을 들고 간 인기만화 '내일의 죠'(1970년부터 방영)를 총감독, 만화영화가 아직 평면적인 연출을 하던 시기, 실사영화같은 연출로 일약 세간을 주목을 받는다.
당시 프리랜서였던 토미노 요시유키는 이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의 재능에 질투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로 분했지만, 도게자를 하는 심정으로 내일의 죠를 만들고 있던 스튜디오에 찾아가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자청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건담을 만든 토미노는 될 수 없었다" 라고 회고했다.

NHK BS 아니메 야화에서도 다뤄진 내일의 죠

'내일의 죠'의 성공 이후에 야마모토 스미카 원작의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자신만의 캐릭터 해석[3]과 인물의 심리묘사, 독자적인 영상연출 등의 데자키 스타일을 확립한다. 나중에 '데자키 연출'이라고 불리게되는,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3회 팬(pan), 중요한 장면은 화면을 멈추고 일러스트풍의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모니 기법, 필름으로 촬영할 때 셀화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찍은 셀을 합성해서 입체적이고 화려한 배경효과를 주는 투과광(透過光) 기법[4]과, 슬로우 모션 등의 시간의 확장, 화면분할 등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연출 기법들은 등장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이 캐릭터는 이 장면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라는 머리속의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 '데자키 연출'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한, 1975년 감바의 모험, 1977년 집없는 아이, 1978년 보물섬[5], 1979년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 1980년 베르사유의 장미 등은 일본 애니메이션사에 길이남을 걸작으로 꼽힌다.

80년대에는 우주해적 코브라의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티비판 애니메이션, 그 이듬해에 고르고13의 극장판을 감독한다. 그러나 '고르고 13'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데자키 감독은 미국으로 가서 오보트 같은 도쿄무비신사가 추진하던 미일 합작 애니메이션에 참여한다.

그러다 일본으로 복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에이스를 노려라!2와 에이스를 노려라 파이날 스테이지를 감독, 다시 한번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건재를 과시한다.

1991년에 감독한 창룡전 애니메이션판은 감독의 이름값에 많이 못 미치는 작품이었지만, 창룡전 직후의 작품인 이케다 리요코 원작의 디어 브라더는 섬세한 연출과 캐릭터 묘사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데자키 감독의 능력을 또 한번 확인케 했다. 1993년부터는 블랙잭 ova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96년에 개봉한 블랙잭 극장판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tv로 복귀해 '백경전설'을 만들었는데 제작의 어려움으로 결국 조기종영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로는 2005년에 방영된 눈의 여왕 tv판과 2005년 AIR 극장판, 2007년 클라나드의 극장판, 그리고 2008년의 울트라 바이올렛 tv판이 있다.

이후 2009년 1월에 겐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겐지 이야기 천년기 genji"의 감독을 맡았으며, 2011년 4월 17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항년 67세.

3 트리비아

데자키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끼친 영향은 측량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모니 기법과 투과광 기법은 수많은 감독들이 애용하는 연출기법이 되었다. 데자키 감독은 블랙잭 극장판에서는 하모니 기법을 한단계 진화시킨 하모니 동화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걸작을 만들고 지대한 업적을 남긴 명감독이지만 말년에는 노쇠한 기미가 살짝 보였으며, AIR 극장판, 클라나드 극장판도 졸작이라는 이유로 젊은 덕후들에게는 대차게 까였다. 물론 올드덕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올드 덕후들에게서는 데자키 감독이 아깝다는 불평이, 젊은 덕후들에게서는 원작이 아깝다는 불평이 동시에 나오는 실정. 데자키 감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올드덕후, 뉴덕후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

여담이지만, 루팡 3세 팬들에게는 시리즈를 말아먹을뻔한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자세한 건 그가 감독을 맡았던 루팡 3세 TV 스페셜 항목 참고.

아다치 미츠루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4 작품 목록

  1. 112화, 123화, 132화.143화, 175화. 데자키는 아톰의 로봇으로써의 정체성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용을 그렸는데, 데즈카 오사무한테 좀 더 즐겁고 액션도 집어넣는 것은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2. 이 가운데 데자키 오사무의 연출은 1,4,6,12,14,20,29,35. 몇편은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창고로 직행했다고 한다. 중국 고전 서유기를 바탕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나의 손오공>을 원작을 1,2,3화 부터는 서유기의 내용을 따라가다가 4화부터는 개그 노선으로 폭주하기 시작..당시 어린이 시청자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시청율은 낮았다.
  3. 시나리오가 있어도 시나리오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를들면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에서 무나카타 진 코치가 오카 히로미를 단련시킨 이유를 돌아가신 어머니와 연관시킨 것은 원작에 없는 설정이다.
  4. 이 기법은 데자키 오사무가 창안한 것은 아니고 무시 프로덕션의 선배였던 실험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한 야마모토 에이이치가 먼저 선보인 것이다.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 화면에 빛줄기가 들어간 장면에서 힌트를 얻었다. 본래 할리우드 영화에서라면 실패한 촬영이지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전위적인 이 영화에서는 야외촬영의 현장감을 주는 오히려 신선한 효과를 냈다.
  5. 인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롱 존 실버를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