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비도

독비도 / 獨臂刀 / One-Armed Sword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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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독비도(獨臂刀)》
《One-Armed Swordsman》(구미권)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한국)
장르무협, 무술
개봉일1967년 7월 26일(홍콩) / 1968년(한국)
상영시간111분
감독장철
출연왕우, 반영자, 초교, 전풍, 유지양, 유가량
무술지도유가량(劉家良)
각본예광(倪匡)
제작사쇼 브라더스[소씨형제유한공사邵氏兄弟有限公司]
흥행HK$ 1,000,000 이상
국내등급12세 이상 관람가

1 개요

쇼 브라더스 제작, 장철 감독, 왕우 주연의 1967년 영화. 이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보통화(普通話: 북경어) 영화의 부흥과 함께 무협영화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주연인 왕우(王羽)는 그야말로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대스타가 되어 있었다.[1]

1.1 예고편

(한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것에 주의)

2 상세

2.1 줄거리

금도문(金刀門)의 장문인, 제여봉(齊如峰: 전풍 분)은 독문무공 제가금도(齊家金刀)의 고수로서, 불의와 악을 용납하지 않는 성품으로 신도대협(神刀大俠)이라 불리며 지역의 패자(覇者)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회남이독(淮南二毒)이 꾸민 술수로 마취향에 중독되어 위험에 처한다. 노복(奴僕)인 방성(方成: 곡봉 분)이 도를 쥐고 뛰어들어 사력을 다해 싸운 끝에 제여봉을 구해내지만, 방성은 치명상을 입는다. 방성은 제여봉에게 자신의 아들, 방강(方剛)을 제자로 거둬줄 것을 부탁하고 죽는다. 방강은 전투 와중에 부러진 부친의 도(刀)를 유품으로 간직한다.

부친의 유품, 반도(半刀)

세월이 흘러, 사부의 가르침을 받은 방강은 뛰어난 무술실력을 쌓았지만, 그의 천한 출신 때문에, 든든한 가문 출신의 일부 사형들에게 질시와 구박을 받는다. 제여봉의 외동딸 제패(齊佩: 반영자 분)도 방강에게 온갖 트집을 잡거나, 사형제들을 충동질하여 방강을 괴롭힌다.[2] 제여봉은 그런 딸의 행실을 알아차릴 때마다 엄하게 꾸짖지만, 방강은 별 일 아니라며 제패를 감싸준다. 그러나 그런 방강의 행동은, 사형들에게는 아부꾼의 행실이나 위선처럼 받아들여져 더더욱 악감정이 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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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커질 것을 저어한 방강은 몰래 금도문을 떠나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제패는 사형들을 대동(帶同), 숲길에서 방강의 앞을 가로막는다. 방강은 가볍게 두 사형들을 제압하고 빠져나가려 하지만 제패가 붙잡는다.

방강에게 상대가 안 되자 앙탈을 부리는 제패

사부의 딸이라며 양보하여 맨손으로 응대한 방강에게 그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앙탈(…)을 부리는 그녀를 방강이 달래주며 일으켜 세우려 할 때, 그녀는 칼을 휘둘러 방강의 오른팔을 잘라버린다(…!). 방강은 충격과 분노에 떨며 서둘러 몸을 빼낸다. 방강이 남긴 서찰을 보고 뒤따라온 사부는 눈밭에 떨어진 피투성이의 잘린 팔을 발견하고, 제패와 제자들에게 진노한다. 몸을 피하던 방강은 출혈로 시야가 흐려져 다리 위에서 발을 헛디뎌 소만(小蠻: 초교焦姣 분)의 쪽배 위로 떨어지고, 사부는 방강을 찾지 못한다.

팔이 잘린 채 눈발을 헤쳐 나아가는 방강

소만의 극진한 간호로 방강은 건강을 되찾고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방강은 곽승(郭勝: 번매생樊梅生 분)과 진대천(秦大川, 왕세걸王世傑 분)이 소만을 희롱하려는 걸 막으려다가 몰매를 맞는다. 신분을 숨기고, 모종의 목적으로 그 마을에 자리 잡고 있던 그들의 사부(정천수, 당적 분)가 도중에 나타나 둘을 꾸짖고 끌고 가며 소만에게 사과하지만, 방강은 참담한 심정이 된다. 소만은 그런 방강의 모습에 가슴아파하다가, 어느 날, 무예서를 방강에게 건넨다. 그녀가 어릴 적, 피투성이로 돌아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책이었는데, 상심한 어머니가 그것을 불에 던졌고, 타다가 남은 반쪽은 소만이 어머니가 죽은 후에도 계속 보관해온 것. 그 책을 바탕으로 수련한 방강은 독비도법(獨臂刀法)을 창시해내고, 이전보다 더 강해진다.

55회 생일을 앞둔 제여봉은 제자들 모두를 초대, 그들 중 한 명에게 장문인 직을 넘기고 은퇴하려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에 제여봉과 이틀을 싸워 큰 부상을 입고 패했던 장비신마(長臂神魔: 양지경楊志卿 분)는 오래 전부터 금도문과 제여봉에게 복수할 준비를 해왔고, 제여봉과 이틀 동안 싸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제(師弟), 소면이랑(笑面二郞) 정천수(鄭天壽: 당적唐迪 분)와 함께 제여봉의 무기와 무술을 파훼할 금도쇄(金刀鎖)와 64초식 금도쇄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금도문으로 가는 길에 매복, 제여봉의 생일에 찾아가는 제자들을 습격한다. 그러나 수하들 모두가 이를 익힌 것은 아니기에, 연습대상이 필요하여 제패와 두 사형을 함정에 빠뜨려 생포해온다. 두 사형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죽지만, 제패는 인질로 쓸 수 있기에 감금되었고 다행히 방강에게 구원받는다. 제패는 방강을 은근히 유혹하지만, 방강은 분노하면서도 꾹 참고 소만에게 돌아간다.

소만에게 돌아온 방강은, 장비신마 무리에게 치명상을 입은 사형 여진(呂振: 해원解元 분)을 구해주게 되는데, 그는 사부에게 위험을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만은 무림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하지 않았냐며 울먹이지만, 방강은 사부님께 받은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며 금도문으로 달려간다. 장비신마와 소면이랑,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제여봉의 제자들은 대부분 죽고, 제여봉도 부상을 당해 수세에 몰린 때, 방강이 도착하여 이들과 맞서 싸워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가까스로 장비신마까지 척살한다. 사부는 방강에게, 자신의 허물이 커 늘 미안했는데, 오히려 네가 가문을 구해주어 고맙다고 하나, 방강은 말한다.

사부님, 제자는 이미 불구자입니다.(師傅, 弟子已經是殘廢的人了)

일찍이 무림에서 누가 강하냐 누가 영웅이냐 다툴 뜻도 없었고(早就無意在武林中爭强稱雄)
이 몸의 무예도 뜻밖에 한 여인에게서 얻었습니다.(這身武藝也是在無意中得自一個女子)
그녀가 절 기다리고 있습니다.(她還在前面等我)
오늘 가르쳐주신 은혜를 갚았사오니, 이제 먼 곳으로 떠나(今日報了師恩, 從此遠走天涯)
밭에 씨를 뿌리는 평범한 농부가 될 것입니다.(做一個種田的農夫了)

매달리는 제패를 뒤로 하고 금도문을 등지는 방강

이에 제패는 울며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제여봉은 침통한 얼굴로 자신의 애병(愛兵)을 부러뜨린다. 그리고 방강은 소만과 재회하고 함께 떠난다.

2.2 등장인물

중문+영문판 포스터

포스터에서 보듯, 왕우, 초교, 반영자가 주인공이다.

등장인물
등장인물
배우배역비고
1왕우(王羽)방강(方剛)
2초교(焦姣)소만(小蠻)
3반영자(潘迎紫)제패(齊佩)제여봉의 딸
4전풍(田豐)제여봉(齊如峰)금도문의 장문인
5양지경(楊志卿)장비신마(長臂神魔)
6당적(唐迪)소면이랑(笑面二郞) 정천수(鄭天壽)장비신마의 사제(師弟)
7번매생(樊梅生)곽승(郭勝)소면이랑의 제자
8왕세걸(王世傑)진대천(秦大川)소면이랑의 제자
9장패산(張佩山)손호(孫豪)부친인 기북대협(冀北大俠)이 제여봉에게 보내 교육을 부탁
10범단(范丹)석일비(石一飛)지역 제일의 부잣집 아들이나, 행실 문제로 부친이 금도문에 기부금과 함께 버릇을 고쳐달라고 보냄
11곡봉(谷峰)방성(方成)방강의 부친
12진연연(陳燕燕)제여봉의 부인
13황종신(黃宗迅)위선(魏宣)금도문 대제자(大弟子)
14정뢰(鄭雷)등충(鄧充)금도문 제7제자
15유가량(劉家良)파쌍(巴雙)장비신마의 제자
16당가(唐佳)정붕(丁鵬)장비신마의 제자
17왕광유(王光裕)배신(裵迅)금도문 제9제자
18해원(解元)여진(呂振)금도문 제8제자

70~90년대 홍콩영화의 유명인물들이 이 영화에 조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말 그대로 잠시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좋을 단역으로 많이 등장한다. 화성(火星)[3], 원화평, 원상인, 유가영(劉家榮), 임세관(任世官) 등.[4]

3 흥행과 평가

흥행 등에 대한 내용과 영화, 출연배우 등에 대한 평가 등을 정리한다.

3.1 흥행

1967년에, 홍콩 영화계에서 최초로 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1967년 당시 홍콩의 인구는 370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독비도》를 홍콩 청년, 중장년 인구가 거의 전부 관람한 셈이다. 그러나 이설(異說)도 있다. 백만 명이 아닌 일백만 홍콩달러의 수익이라는 것이다. 교차검증을 해보면 이쪽이 맞는 듯하고, 이 역시 대단한 기록이다. 100만 홍콩달러를 2016년대로 환산하면, 미국 달러로 약 920만 달러, 한화로 100억여 원이다.[5]

3.2 평가

이전까지 그리 높이 평가되지 않았던 장철(張徹) 감독은, 이 영화 덕에 흥행감독으로 떠올랐고, 백만 감독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우는 엄청난 영웅이자 스타가 되어, 팬들이 만들어서 헌정하다시피 한 천황거성(天皇巨星)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이런 예는 전무후무하다.

소만(小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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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패(齊佩)

왕우 외에는 소만 역의 초교와 제패 역의 반영자에 대해 많은 안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소만 역의 초교의 경우,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옹호도 만만치 않다. 고아로 자란 농촌 처녀에 맞는 현실적인 캐스팅이었다는 옹호인데 ‘이게 옹호냐, 돌려까기냐?’는 건 넘어가고, 그렇기에 반영자가 연기한 제패(齊佩)의 패악함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 혹자는 당시 중화권 문화의 미인의 기준과 현대 비(非) 중화권 문화의 기준이 달랐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극중 설정일 수도 있겠지만, 곽승과 진대천이 소만을 보고, ‘궁벽한 시골에 이런 꽃이 있을 줄이야’ 라며 희롱하려고 한다는 것.[6]

어찌 보면 영화 성공의 숨겨진 일등공신은 제패 역의 반영자일 것이다. 제패에게 분노한 관객들이 방강에게 깊이 공감했기에, 마지막의 격투에서 방강이 다 쓸어버리고 사부에게 결별을 고한 후, 제패가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뒤로 하고 떠나는 방강의 모습에 관객들은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이는 흥행돌풍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그럴 듯한 것이, 제패가 방강의 팔을 자른 것은 주인공에게 기연을 주기 위한 설정이라며 억지로 넘어간다 치더라도, 인질로 잡힌 그녀를 방강이 구해준 후의 언행은 그야말로 피꺼솟할 지경이다.

제패: 난 알아, 어릴 때부터 당신이 날 좋아했다는 걸. 그래서 날 계속 피했단 거 알아.(我明白, 你從小就喜歡我. 我知道你有顧忌所以才一直躱著我)

방강: 내가 계속 당신을 피하긴 했소.(我是一直躱著你)
제패: 오늘밤 당신이 날 구했으니 다신 당신을 하인으로 대할 수 없어. 당신도 날 다시는 피할 필요 없고.(今天晩上你救了我, 我不會再拿你當下人看待. 你也不用再躱著我了)
(숨어서 듣고 있던 소만이 울며 달아나고, 방강이 불러보지만 멈추지 않는다)'’

방강과 제패의 말을 엿듣게 된 소만
방강: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당신은 날 또 곤란케 했소. 내가 그녀에게 무어라 한단 말이오?(我剛救了你一命, 你又給我惹麻煩. 你叫我以後怎麽跟她說呢?)

제패: 그저 촌년일 뿐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一個鄕下姑娘, 那有甚麽?)
방강: 뭐 어쨌냐고? 당신이 내 팔을 자른 그날 밤, 큰 눈이 오는 추운 밤, 그녀가 내 목숨을 구했소. 당신에게 사실을 말하지. 당신이 완전히 틀렸소. 난 여태껏 당신을 좋아한 적 없소. 당신은 내가 당신을 꺼리고 피한 게 그것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오늘 당신을 구한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사부님의 딸이기 때문이오.(那有甚麽? 就是你砍了我胳臂那晩, 大雪寒夜, 就是她救了我一命. 老實告訴你, 你全弄錯了. 我從來就沒有喜歡過你. 你不要以爲我顧忌甚麽才遠遠地躱開你, 我今天救你, 不是爲了你, 是爲了你是我師傅的女兒)
제패: 그래도 설마 어릴 때부터 내가 당신을 좋아했단 걸 몰랐어?(可是你難道不明白我從小就喜歡你?)
방강: 날 좋아해? 그래서 늘 날 이것저것 괴롭혔소? 내 한쪽 팔까지 잘랐어!(喜歡我? 那你還要變方說法地折磨我? 砍了我一條胳臂)
제패: 그건 당신이 나한테 냉담하고 오만해서…(那是因爲你對我那麽冷淡那麽傲慢)
방강: 좋소. 그만 하시오. 이런 밤이니 사부님이 분명 걱정하실 게요. 돌아가시오, 나도 집에 가야 하오.(好了. 別多說了. 這麽晩師傅一定在擔心了. 你回去吧, 我也該回家了)
제패: 당신 쭉 저 여자와 살았던 거야?(你一直跟那姑娘住在一塊兒?)
방강: 당신은 가시오.(你走吧)
제패: 나랑 돌아가서 아버지를 뵙지 않을래? 계속 널 생각하셨어.(你不跟我回家看看爹? 他一直在想念你)
방강: 난 오늘 당신을 구한 걸로 사부님의 은혜는 갚은 거요. 이후 다시는 당신들의 얼굴도 보지 않을 것이오.(我今天救你, 就是報答師恩. 以後我再也不會跟你們見面了)
제패: 대체 내 어디가 그 촌년보다 못한 거야?(我就一點都比不上那鄕下姑娘?)
방강: 비교도 안 되오.(比不上)

제패 역의 반영자는 미모의 여배우이지만, 방강 역의 왕우가 받았던 찬사에 반비례하여 온갖 비난을 받았다고도 한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던데, 설마, 그래서 잘 안 늙는 건가?

이 외에도 《독비도(獨臂刀)》는 홍콩영화계에서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여배우가 주류였던 이전까지의 홍콩영화계에서, 최초로 남자 주인공을 안티 히어로(anti-hero)로 등장시켜 성공함으로써, 이후 남성적인 주인공 전성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 둘째, 경극 풍의 연출이 남은 구파(舊派) 무협에서, 쇼 브라더스가 영입한 일본영화의 인재들의 영향으로 일본의 찬바라 영화의 느낌이 묻어나는, 격렬하고도 피가 튀는 무협장면을 노골적으로 넣어 《대취협(大醉俠)》(1966) 이후, 홍콩식 신파(新派) 무협을 확고하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대취협》만 해도 여배우 정패패(鄭佩佩)가 주인공이었으니, 어쩌면 반영자는 진주인공이 되었을 수도…. 어떤 의미에선 진주인공인가?

《대취협(大醉俠)》의 정패패(鄭佩佩)

3.3신조협려(神鵰俠侶)》와의 연관성

김용(金庸)의 《신조협려(神鵰俠侶)》(1959)의 영향이 보인다.

  • 주인공(양과/방강)은 아버지를 잃고 사부(곽정/제여봉)에게 거둬진다.
  • 사부의 딸(곽부/제패)은 주인공의 팔을 잘라낸다.
  • 좀 차이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다 사부의 딸을 해하지 못한다.
  • 주인공은 도와주는 여인(소용녀/소만)을 만나 새로운 무공을 익혀 보다 강해진다.
  •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고뇌하다가 결국 사부를 구해준다.
  • 자신에게 그 무공을 전해준 여인(소용녀/소만)과 함께 떠난다.

《독비도》의 각본가는 예광(倪匡). 《유성호접검(流星蝴蝶劍, Killer Clans)》(1976) 등 많은 걸작 무협영화들의 각본을 쓰기도 했고, 김용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애초에 쇼 브라더스는 《신조협려》를 영화로 만들 계획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걸음마를 막 떼던 시기였던 홍콩 영화계나 쇼 브라더스로서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광은 그의 명성답게 《신조협려》에서 부분적으로 따온 듯한 내용을 단순하고도 명쾌한 각본으로 써냈고, 장철의 신선하고도 힘 있는 연출과, 왕우라는 걸출한 배우의 연기로 탄생한 《독비도》는 홍콩 무협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4 제여봉은 왜 도(刀)를 꺾었는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방강이 떠나자 제여봉이 침통한 얼굴로 자신의 도(刀)를 부러뜨린 것에 대해 의문이 많았다고 한다. 홍콩의 영화 팬이 했다고 전해지는 해설을 참고해보자.

방강은 제여봉을 사부(師父)가 아닌, 사부(師傅)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의 오른팔을 자른 따님을 용서해주고 악적(惡賊)에게서 구해준 것으로, 제여봉이 아버지[父]처럼 자신을 길러준 은혜는 갚았다는 의미를 담아, 사부(師父)가 아닌, 사부(師傅)라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제여봉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사부(師傅)로서 자신을 가르쳐준 은혜도 갚았다는 것. 또한 이 무예는 그 여인에게 얻은 것이라고 방강은 말하는데, 이는 의미심장하다. 제여봉에게서 제가금도(齊家金刀)를 배워 익혔던 오른팔은 사부의 딸이 잘랐고, 방강이 창시한 독비도법(獨臂刀法)은 좌수도법이므로, 이제 사부(師父)도, 사부(師傅)도 아닌 당신에게 난 더 이상 얽매일 게 없다는 방강의 통렬한 선언이 된다.[7]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제여봉은 이를 알아듣고, 이 모두가 자신의 부덕(不德)함 탓이라는 자괴감에 스스로 도(刀)를 꺾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딸자식 하나 주안술(駐顔術)을 익힌 불로마녀(不老魔女) 잘못 키워, 문파가 개발살나고, 제자도 명성도 인재도 모두 잃은 셈. 망했어요.[8]

그러나 월어(粤語: 광동어)권 홍콩이라 그런지 오류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대사를 잘 들어보면, 처음부터 방강은 계속 제여봉을 사부(師傅)라고 부른다는 것. 참고로 이 영화는 광동어가 아니라, 보통화(普通話), 즉 북경어[Mandarin]로 녹음되었다. 그렇다면 전술(前述)한 사부(師父) → 사부(師傅) 부분은 설득력을 잃지만, 그 부분을 제해도 전체적인 맥락은 여전히 유효하다.[9]

중국의 전통적 정서가 반영돼있다 보니, 다른 나라의 관객들에게는 조금 어색한 전개도 일부 있지만, 《독비도》는 시종 빠른 전개를 보이고, 이야기 흐름도 따라가기 쉽다. 간단히 요약하면, 청년이 한 팔을 잃고, 처녀를 만나고, 청년은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싸운다 정도일 듯. 그러나 《독비도》는 분명 영웅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강호(江湖)에서의 협객의 삶의 덧없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신조협려(神鵰俠侶)》의 일부를 각색한 듯한 예광(倪匡)의 탁월한 각본과, 절치부심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기다리며 공부하던 장철(張徹) 감독의 역량이 빛을 발한 것일 듯. 이런 암시는 속편 《독비도왕(獨臂刀王)》(1969)에 보다 복잡하고도 뚜렷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5 이 영화와 왕우는 왜 성공했는가?

《독비도》는 국내에도 수입, 개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당시 아이들은 한쪽 팔을 옷의 안으로 넣어 배를 감싸 쥐고 빈 소매를 휘날리며, 다른 팔로 목검이나 막대기를 휘두르며 외팔이 무사 놀이를 했을 정도. 그때는 배가 좀 나오고 살집이 있으면 사장님 배라느니 하며 우대받던 시대였지만, 배가 나오면 외팔이를 할 때 팔이 너무 티가 나서 모양이 안 난다며, 또래 애들이 외팔이 역을 시켜주지 않아 싸움이 났다는 얘기가 부모님들에게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인, 정확히는 홍콩과 동남아 등지의 화교들의 반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전란(戰亂)과 극심한 치안부재의 역사 탓인지, 중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의심이 많은 사람에게, ‘너 뙤놈 빤스를 입었냐?’, ‘뙤놈 빤스 삶아먹었냐?’는 말이 사용되곤 했었다. 또한 장사나 도박 등에서 보이는, 이해득실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독함 역시 유명하다. 그런 중국인들에게 관우가 그리도 추앙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보여준 유비에 대한 의리가 크게 작용했다는 의견도 많다. 자신을 후하게 대우해주는 조조를 뒤로 하고, 쫄딱 망한 유비에게 돌아간 관우의 모습이, 의리와 신뢰에 목마른 중국인들에게 어떤 임팩트를 주었을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독비도》의 방강은 어떤가? 집안 머슴의 자식인 자신을 사부가 거둬 무술을 가르쳐주었다지만, 그건 방강의 아버지의 목숨 값이나 다름없다. 사부의 딸 제패는 자신의 팔까지 잘랐다. 그런데도 방강은 그녀에게 보복하기는커녕,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강은 사부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자, 반도(半刀)를 쥐고 달려가 목숨을 걸고 싸워 사부와 그 가족을 구해낸다. 이런 방강의 모습은, 당시 관객들에게는 관우가 떠오르게 하는 강렬한 느낌을 주었으리라. 이는 한국에서도 통하는 정서였던 듯, 수입제목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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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상술했듯, 당시 왕우의 별호(別號?)는 “천황거성(天皇巨星)”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하늘의 황제와도 같은 큰 별’ 정도의 거창한 의미이다. 그러나 이 별호는 왕우나 쇼 브라더스가 붙인 게 아니라, 팬들과 언론이 만들어서 헌정하다시피 한 것이다.

6 비판과 반론: 쇼 브라더스의 미학(美學)

현란하고 화려한 곡예를 보는 듯한 현대영화의 무술, 격투 장면에 비하면, 《독비도》의 그것은 조잡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무술의 고수인 유가량이 무술지도를 맡았다니까 더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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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유가량 노사(老師)

그러나 이 영화는 1967년 작품이다. 1960년대는 일본의 찬바라 영화의 노하우를 흡수하며 홍콩 무협, 무술영화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유가량은 물론 황비홍의 직계제자이며, 실제 무술의 고수로 이름 높다. 그렇지만 실제 무술의 고수인 것과 영화 등에서 무술의 고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성룡의 걸작 《취권2》에서도 원래는 무술대회 우승경력도 많고, 영화와 게임 등의 모션 캡쳐 경험도 있는 박호성과 마지막 격투를 할 계획이었으나, 도무지 촬영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룡의 연기지도와 액션에 대한 경험과 이해도가 높은 노혜광으로 바뀌었다. 현실 속의 간단한 예로, UFC나 태권도 대회 등에서 실제 실력자들이 겨루는 것과, 영화의 격투를 떠올려보자.

노혜광도 뛰어난 실력자이지만, 영화에서 무술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면에선 박호성보다 뛰어났던 셈

또한 항공촬영과 CG, 온갖 첨단기법이 동원된 21세기 영화를 보는 시각으로 이 영화나 쇼 브라더스의 무협영화들을 보면, 배경과 세트 등에 대해 혹평이 나올 때도 있다. 《독비도》만 해도, 방강이 팔이 잘린 후 몸을 피하는 와중에 건너던 다리와 그 강이 특히 그렇다. 그럴 듯한 풍광을 갖춘 촬영지를 찾기가 극히 힘든 홍콩의 여건[10]을 감안해도, 세트가 너무 조잡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방강이 잘린 팔을 부여잡고 몸을 피하는 장면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을 움켜쥐고,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비틀거리던 방강은, 가짜 티가 너무 나는 조잡한 다리 위에서, 역시 딱 봐도 가짜 강 위로 떨어진다. 어쩌면 떨어진 게 아니고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 일부러 뛰어내린 것일까?

이야기 전개에도 비판이 적지 않다. 정말 운이 좋게도(…) 방강이 떨어진 강위로 지나가던 조각배가 있었다. 게다가 더더욱 운이 좋은 것은 그 배를 몰고 있던 사람은 아주 착한 고아 처녀였다. 그녀가 바로 소만(小滿)이고, 죽어가던 방강을 근 이레 동안 헌신적으로 간호해 회복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둘은 사랑에 빠지고, 방강은 더 이상 운이 좋을 수 없게도, 그녀가 준 무공서 덕에 이전보다 더 강한 도객(刀客)이 된다.[11]

옹호론도 있다. 오늘날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에서 CG로 만든 배경도, 실제 풍광에 CG로 덧칠을 한 게 아닌 이상, 아무래도 가짜라는 게 티가 난다. 1960년대, 쇼 브라더스가 당시의 홍콩에서는 정말 엄청난 투자를 하여 스튜디오와 실내 세트를 지었다고는 해도, 시대와 지리적 한계를 넘기는 무리였으리라는 것. 그러나 분명 당시의 실내세트로서는 거의 최고의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런 이야기 전개는 세부설정만 다를 뿐, 현대의 영웅물 역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약간 비틀었을 뿐이라는 것.

사실 1950년대부터 쇼 브라더스는 영화제작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런데도 배경이 좀 부자연스러운 것은 당시 기술력의 한계였는지, 아니면 건축부지, 기자재, 의상, 촬영용 말과 마사(馬舍) 등등에 이르는 엄청난 투자[12]로 인한 예산의 한계였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스튜디오 내부 세트에서의 촬영은 쇼 브라더스 특유의 미학(美學)을 만들어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배경, 그러나 결코 싸구려 3류 연극무대 같지는 않은 배경, 때로는 규모만 작아 보일 뿐 꽤나 세련되었으면서도 뭔가 딴 세상 같은 배경, 그런 이상한 나라(…)에서 촬영된 쇼 브라더스의 무협영화들은 현실의 세상이 아닌, 무언가 이 세상 밖에 있는 곳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 무협이나 신화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해주었고, 이는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 특유의 미학(美學 aesthetics)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독비도》와 독비도객(獨臂刀客) 왕우 역시 무협영화의 신화(神話)가 되었다.

7 관련 영화들

파급력이 워낙 대단했던 영화라 그 영향이 보이는 영화들이 많다. 이후 홍콩영화계의 병폐라는 비판을 받았던, 히트작이 나오면 비슷한 영화들이 우르르 나오는 풍조가 떠오르기도 한다. 외팔이 외에도 신체훼손(…)물이 여럿 나오게 하는 데에 영향이 컸다.[13]

  • 《독비도왕(獨臂刀王, Return of the One-Armed Swordsman)》(1969) - 《독비도》의 공식 속편이다.
  • 《독비도대전맹협(獨臂刀大戰盲俠, Zatoichi and the One-Armed Swordsman》(1971) - 독비도(獨臂刀) 방강(方剛)과 일본의 맹인 검객, 자토이치가 겨룬다는 일본–홍콩 합작영화. 왕우는 골든 하베스트의 사장, 추문회(鄒文懷)와의 친분으로 이 영화에 무보수로 출연[14]해주어, 당시 신생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트를 살려주었다.
  • 《신독비도(新獨臂刀)》(1971) - 쇼 브라더스와 왕우가 결별한 후, 《독비도대전맹협》이 대히트하자, 쇼 브라더스가 강대위와 적룡을 기용하여 제작한 영화. 영화 자체는 무협 팬들에게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삼절곤의 달인인 악역, 용이지(龍異之)는 《독비도》에서 방강의 아버지로 나왔던 곡봉이 맡았다.
  • 《독비권왕(獨臂拳王, One-Armed Boxer)》(1972) - 왕우가 도(刀) 대신 맨주먹으로 격투를 벌인다.
  • 《독비쌍웅(獨臂雙雄, The One-Armed Swordsmen)》(1976) - 강대위와 왕우가 독비도객으로 나온다.
  • 《독비권왕대파혈적자(獨臂拳王大破血滴子, One-armed Boxer vs. the Flying Guillotine》(1976) - 혈적자(血滴子)를 사용하는 맹인 라마승(금강 분)과 혈투를 벌인다.
  • 《독비권왕용전초문구자(獨臂拳王勇戰楚門九子, One Armed Swordsman Against Nine Killers》)(1976) - 역시 왕우 주연이다.
  • 《독비협대전독비협(獨臂俠大戰獨臂俠, One Arm Chivalry Fights Against One Arm Chivalry)》(1977)
  • 《도(刀, The Blade)》(1995) - 국내에도 《서극의 칼》이란 제목으로 수입, 개봉된, 《독비도》의 리메이크작이다. 원작과 비교하면, 방강은 정안(定安, 조문탁 분), 소만은 흑두(黑頭, 종벽하鍾碧霞 분)[15], 제패는 소령(小靈, 상니桑妮 분). 장비신마는 비룡(飛龍, 웅흔흔熊欣欣 분)[16]
  • 《무협(武俠, Wu Xia)》(2011) - 견자단(당룡唐龍 역)이 외팔이 도객으로 나온다. 금성무, 탕유(湯唯), 혜영홍 등이 출연하며, 놀랍게도 왕우(王羽)가 최종보스인 72지살교주(地煞教主)로 등장하여 살인적인 무력과 경기공(硬氣功)을 과시하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준다.

8 트리비아

사우스파크》에 지미 발머(Jimmy Valmer)라는 등장인물이 있다. 신조어(新造語) handi-capable이 여기서 퍼졌다고도 한다. handicapped(장애를 가진, 불구의) + capable(유능한)을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서, 장애를 가졌지만 뛰어난 사람을 칭하는 신조어이다. 그리고 《독비도》의 독비도객(獨臂刀客) 왕우를 영미권의 팬들이 칭하는 말들 중 하나가 handi-cappable one-armed swordsman이다. 그리고 왕우의 영어식 이름은 Jimmy Wang Yu이다. Jimmy라는 이름은 영어권에서 비교적 흔한 이름이고, 독비도객이 외팔이라면 지미 발머는 다리가 불편한 것이기도 하니, 어디까지나 이는 우연이겠지만, 우연치고는 묘하다.

홍콩 무협, 무술영화사상 최초로 장애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가 《독비도》라는 평에 대한 반론도 있다. 《독비도》보다 1년 먼저 나온 《단비신룡검(斷臂神龍劍, The One-Armed Swordsman)》(1966)이라는 영화가 있었다는 것. 이 영화는 광동어로 녹음된 흑백 영화인데, 외팔이 등장인물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활약이 없고, 동료의 등에 업혀 몸을 피하려다가 화살에 맞아 죽는다.[17]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하는 내용이었으므로, 홍콩, 무협, 무술영화에서, 《독비도》가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장애를 극복하고 초인적인 활약을 보여주는 최초의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1. 갑작스레 유명해진 것은 아니긴 하다. 왕우는 1965년, 《원앙검협(鴛鴦劍俠, Twin Sword)》으로 데뷔했는데, 데뷔작에서부터 주연으로 나왔고, 흥행 역시 괜찮아서 속편인 《강호기협(江湖奇俠, Temple of the Red Lotus)》(1965)이 연이어 제작, 개봉됐는데, 여기에서도 주연이었다. 《독비도》는 그의 여섯 번째 주연작이다.
  2. 은근히 방강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 분위기도 있다. 츤데레? 얀데레?
  3. 《독비도》 영화 초반부, 부친 방성이 죽어가는 모습에 울먹거리는, 방강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잠깐 나온다.
  4. 화성은 성룡의 《A계획》에도 나온 성가반 소속이기도 하고, 원화평, 원상인은 형제사이로서 무술감독으로 유명하며, 원화평은 《매트릭스》의 무술안무를 맡기도 했다. 유가영은 유가량, 유가휘와 형제사이이고, 무술영화 등에 단골로 얼굴을 내밀거나 무술감독 등을 맡았다. 임세관은 성룡 주연작 《용권(龍拳)》(《당산비권》)의 종견균(鍾鋻均), 《소권괴초》의 임천화(任天化) 역을 맡기도 했고, 1990년대 들어 무협영화가 다시 흥행할 때, 《황비홍》(1991)의 엄진동(嚴振東), 《동방불패》의 임아행(任我行), 《철마류》의 연공화상(衍空和尚) 등을 맡으며 화려하게 부활하기도 했다.
  5. 홍콩달러의 잦은 변동이나 한국과 홍콩의 시장, 경제규모 등은 배제한 계산임.
  6. 여담으로 초교는 한국관객들이 홍콩영화에서 한 번 정도는 봤을 관록의 배우, 증강(曾江)현재 부인이다.
  7. 제자를 파문할 때, 팔다리의 근맥을 자르기도 하는 무협소설 등에서의 파문절차를 떠올려보자.
  8. 제여봉은 방강의 뛰어난 무재(武才)와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여, 딸과 혼인시킬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부인은 방강을 자식처럼 아끼긴 했지만, 그런 남편에게 드러내놓고 반대하진 않았어도 조금 탐탁찮아 하긴 했다.
  9. 사부(師父)는 사부(師傅)의 (극)존칭에 가깝다. 실제로는 사부(師傅)가 많이 쓰이며, 근래에는 노사(老師)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10. 홍콩은 무협이나 시대극 등을 찍을 만한 장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쇼 브라더스 같은 대형세트와 소품 지원이 안 되는 군소영화사들은 대만이나 한국 등에서 촬영한 경우가 많고, 당시 물가가 가장 쌌던 한국이 각광받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는다고 해보자. 당장 한국, 중국, 일본의 사찰은 그 형태부터 차이가 좀 있다. 한국의 해인사, 중국의 백마사(白馬寺), 일본의 지온인(知恩院)을 비교해보자. 이 외에도 많은 문제가 생긴다.
  11. 외팔이 검객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중국무술에서는 (劒)과 (刀)를 구분하니, 방강의 무기는 도(刀)이므로 도객이 보다 정확하다.
  12. 1960년대의 소씨영성(邵氏影城), 즉 쇼 브라더스 스튜디오만 해도, 잠실야구장(구장 넓이가 아닌, 잠실야구장 건물 전체 면적이 45,312㎡, 즉 13,706평) 약 72개를 합친 넓이인 100만평의 대지에, 11개 스튜디오, 200개 이상의 직원 숙소가 있었고, 탈의실, 의상실, 기자재 보관창고, 의상실, 필름현상소, 음향작업실, 심지어 촬영에 쓰일 말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대형 마사(馬舍)까지 있었다. 돈지랄?
  13. 한국영화계에서도 일자다리로 유명한 한용철 주연의 '외다리' 시리즈가 이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14. 당시 왕우의 출연료는 2016년으로 환산하면 한화(韓貨)로 약 10억에 달했다.
  15. DVD에 따라서는 영어자막을 번역한 듯한 블랙키(Blackie)(…)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16. 황비홍에서 이연걸의 고난도 액션을 거의 전부 대신한 실력파 무술배우이다.
  17. 이 영화를 보고 《독비도》를 보면, 유가량의 무술지도가 대단하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