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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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最古/가장 오래된)였던 운동장.

이름경성 운동장(1925~1945)
서울 운동장(1945~1984)
동대문 운동장(1984~2008)
개장1925년 10월 15일
폐장+철거2007년 12월 18일
소재지서울특별시 중구 흥인문로
사용구단1989~1995 일화 천마
1990~1995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
1991~1995 유공 코끼리
부속건물주경기장/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배구장 등
수용인원건립 당시 25,800명, 보수공사 후 약 6만명[1]

1 개요

"전국에 계신 스포츠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운동장입니다.[2]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일대에 위치한 종합 운동장이다. 애칭은 성동원두(城東原頭). 수많은 국내•국제 체육 경기가 벌어졌던, 대한민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장소이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끝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주경기장의 경우 트랙은 우레탄 포장, 그리고 필드는 천연잔디를 깔았다. 28단의 스탠드는 3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부속 건물로 동대문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배구장 등이 있었다.

2 건립

1925년 10월 15일 건립된 이래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最古)의 경기장이자, 국내 스포츠의 메카였다.

2.1 건립 배경

일제강점기 근대화된 식민지조선에서는 근대적 체육 행사가 자주 개최되었다. 하지만 마땅한 경기장이 없어서 사립학교의 운동장을 빌려서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러한 임시방편만으로는 현대적인 체육행사의 수요를 감당할수 없었고 학교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체육행사의 성격이 반일감정을 표출하는 자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러한 체육행사는 큰 인기가 있어 많은 관람객이 모였는데[3], 이는 곧 대규모의 반일 시위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조선총독부는 독자적인 근대적 운동장을 건립하기로 고민했다.

2.2 건립

1925년 일본의 동궁(히로히토 일왕)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4] 경성운동장은 천황의 결혼식이라는 일본의 최대 경사를 경축하는 뜻을 담는 동시에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건립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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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경성운동장의 배치도

경성운동장의 부지가 조선시대의 훈련원(訓練院) 자리와 성벽을 허물고 남은 공터였던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아픈 역사의 한 부분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굴곡이 뒤엉킨 자리에 그것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명분으로 건설한 것이 바로 축구장, 육상경기트랙,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을 아우르는 '동양 최대의 종합경기장' 경성운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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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붉은색 선이 성벽의 위치이다. 정확히 가운데를 관통해 지나간다.

경성 운동장은 경성부의 토목기사인 오모리(大森)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그 구조를 보면 총면적 22,700평, 총 공사비 155,000원(약 34억), 총 수용인원 25,800명이며 육상경기장 8,500평(15,000명), 야구장 5,500평(7,000명), 정구장 1,000평(3,900명)의 규모이다.

2.3 부속 건물

  • 주 경기장 : 최초에는 육상경기전용 경기장이었다가, 축구경기장이 추가되었다.
  • 동대문야구장 : 한국 야구의 성지와도 같은 곳. 실업야구-고교야구의 전성기를 보냈던 곳이다.
  • 배구장 :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이 들어서기 전에 주로 사용했던 체육관으로 지붕이 없는 노천체육관이었다.
  • 수영장 : 미스코리아 대회의 수영복 심사장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 테니스장 : 최초 건립시에는 정구장이었다.

3 역사

3.1 1928~1945

건립후 해방 전까지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조선자전거경기선수권대회 등 각종 대회의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근대적인 경기장으로는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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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울과 평양이 축구로 겨루는 경평축구대회의 서울측 홈구장이기도 했다. 제2회 경평축구대회에는 2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하였다.

3.2 1945~1984

해방이 되자 일본이 서울을 칭하던 경성(京城)을 서울로 바꾸어, 서울운동장으로 개명 되었다.

1962년의 보수공사로 육상경기장을 비롯 야구장·수영장·배구장·테니스장 등이 국제규모의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고, 196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구장에 야간 조명시설이 마련되었다. 1968년 보수공사로 메인스타디움인 육상경기장이 면모를 갖추었다.


종합경기장으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축구, 야구, 정구, 육상, 종합경기 등 전국규모의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사진설명 - 1976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전.

더구나 이곳은 단지 스포츠의 공간이 아니라 때로 정치, 사회, 문화의 현장이기도 했다는 점에서도 틀림없는 '종합'경기장이었다. 8.15 경축행사, 어린이날행사, 국군의날 행진시 최종 도착지, 미스코리아 대회장(부속 수영장), 종교 행사등 갖가지 모임에 활용되었다.

사진설명 - 서울운동장에서 진행된 월남전 귀국장병 환영대회.

3.3 1984~2000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사용목적으로 잠실에 건설된 운동장이었던 '서울종합운동장'되면서 1984년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화려한 영광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장충체육관, 효창운동장, 잠실종합운동장, 목동운동장 등의 운동장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유일한 종합운동장'의 지위마저 상실했으며, 여러차례의 개보수를 했다고 하지만 준공 후 60년 이상 지난 시점이어서 시설의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슈퍼리그 현재의 K리그 원년인 1983 시즌 역사적인 개막전 경기를 비롯 매시즌 가장 많은 중립경기가 배정되었으며 그리고 1989년 부터 일화 천마 (현 성남 FC)를 시작으로 1990년 LG 치타스 (현 FC 서울), 1991년 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가 서울 연고팀들 생기자 고정적인 서울 연고구단들의 홈경기를 비롯 실업 축구 결승전, 대학 축구 결승전과 같은 주요 경기가 열려 국내 축구의 메카로 불리기도 하였다.

1995년 당시 서울 연고팀들이었던 일화 천마 (현 성남 FC유공 코끼리 (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동대문 더비 경기

사진설명 -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 (현 FC 서울 )우승 세러모니 사진
출처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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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 연고팀이 전부 없어지면서 그 후 정규리그 일부와 컵대회 등의 중립경기들이 열렸으나 점차 프로축구 경기 개최수가 줄어들었으며 2000년 10월 22일 성남 일화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컵대회 경기를 마지막으로 프로축구 경기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1999년 중립 경기로 벌어진 대전 시티즌부천 SK와의 경기

사진설명 - 2000년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골을 터트린 서정원 선수 골 세리모니 사진
출처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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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00~2008

8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온 만큼 낡은대로 낡아서, 안전상의 이유로 정상적인 운동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5]

2001년 일부 부지가 체육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수영장, 씨름장, 테니스장은 소멸하게 된다.

이로 인해 2003년에 주경기장은 폐쇄되었으며, 철거전까지 주차장과 풍물시장등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청계천 공원화 사업으로 청계천 등지에서 노점상이 장사할곳이 없어 동대문 운동장내 공터에 자리를 마련하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6] 경기장 안에 시장과 주차장이 있는 기묘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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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기장(축구장)과는 달리 야구장은 철거직전까지 고교야구-대학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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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윤현석이 너에게 날리는 홈런을 그렸을 당시에 취재를 갔던 사진들이 있다. 보러가기

4 철거

전통시장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동대문 운동장은 결국 정리대상이 되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공약했던 디자인플라자 계획의 부지로 동대문 운동장 일대가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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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운동장 부지의 공원화 사업 계획이 발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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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간 국내 스포츠계의 성지였던 만큼, 체육계에서 반대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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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운동장 주변 지하상가 상인[7]들과 풍물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철거를 반대 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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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공간인만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임시정부 환국봉영회,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 김구 선생 국민장(장례식) 거행, 신탁통치 찬반 집회[9] 등 해방 직후의 정치집회[10]등이 있었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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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은 결국 2007년 12월 18일 철거가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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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념관내 모형으로만 남아있는 동대문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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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과정에서 조선시대 하도감 시설과 성곽등의 유적지가 발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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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내에서 장사 했던 풍물시장 상인들은 신설동으로 이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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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용은 DDP 항목으로.

5 연관 검색어

  1. 주경기장 23,500명, 야구장 26,000명, 부속 경기장 각각 2,000~5,000명
  2. 해방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펼쳐졌던 실외 국제 스포츠 대회 중계방송의 첫머리는 늘상 이 멘트였다. 실외경기의 메카가 서울운동장이었다면 실내경기의 메카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충체육관이다.
  3. 지금도 스포츠경기는 인기가 많지만, '즐길거리'가 많지 않았던 1920년대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4. 개장 당시의 정식명칭는 '동궁전하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東宮殿下御成婚記念 京城運動場)'이었다.
  5. 가장 단적인 예로 동대문야구장의 철거 직전이었던 2007년에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가 정규시즌 일부 경기를 고별경기 형식으로 치르려 기획했다가 노후된 경기장 시설 때문에 철회됐던 적이 있었다. 참고로 저 세 팀은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팀(삼성 vs MBC)과 한국시리즈 맞상대팀(OB vs 삼성)이었다. 또한 두 서울 연고팀인 MBC와 OB는 각각 1982년과 1985년에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6. 일본에 오사카에서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가 1989년 후쿠오카로 연고지 이전을 한 이후, 난카이의 홈구장이었던 오사카 야구장 내부에 모델하우스를 설치한 적이 있다. 화차(소설)에 이런 기묘한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
  7. 운동장 주변이라는 특성상 주로 스포츠 용품점들이 많았다.
  8. 단순한 철거 반대라기 보다는 생존권 보장 차원이었다.
  9. 1945년 12월 30일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측이, 1946년 1월 3일에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좌익측이 집회를 열었다.
  10. 1946년 노동절 대회는 우익측(대한노총)은 축구장, 좌익측(전평)은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