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Dmitri Mendeleev
1834년 2월 8일 ~ 1907년 2월 2일
1 소개
원소들이 가진 규칙성에 따라 원소들을 나열한 표인, 주기율표를 고안한 화학자로, 현대 화학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에도 원소를 질량 순으로 나열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규칙성을 찾아 나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전부 조잡한 수준이었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쨌든 원소들에 모종의 규칙성이 있음은 모두가 추측하던 것이지만, 이걸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된 표로 정리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최초다. 세계 과학계를 뒤집어 놓은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했을 때가 고작 35세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했다. 아니, 그냥 현대 화학을 만들었다. 화학을 배울때 제일 먼저 만나는 주기율표가 없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애초에 주기율표가 정립되기 전에는 화학은 제대로 된 과학 취급조차 못 받았다!
다만 아쉽게도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1906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불소의 분리에 성공한 무아상에게 단 1표 차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당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해 정교하게 원소를 나열한 것이었을 뿐, 원소가 왜 주기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알려지지 않은 탓에, 획기적인 발견이었음에도 포스가 좀 딸렸다. 러시아 국적이기에 차별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사망했기 때문에 탈 수 없었다.[1] 그러나 저 주기율표가 화학과, 나아가 물리학에까지 끼친 영향 덕에 훗날 '프라우다' 지에 '러시아 화학의 개척자'라는 헌사가 실렸을 정도이다.
지금은 원소의 주기성을 일으키는 원인이 밝혀지면서 확고하게 입증된 탓에 주기율표 = 넘사벽 취급을 받지만, 주기율표를 멘델레예프가 고안했을 당시에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원소들을 정밀하게 나열한 것'에 그첬다. 그래서 기나긴 기간동안 엄청난 고생[2]이 들어간 불소의 분리와 팽팽하게 맞붙은 업적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주기율표가 압도적으로 더 대단한 업적으로 여겨지지만…. 후일, 주기율표의 굉장한 완성도가 후일 전자껍질이 밝혀지면서 입증되고, 미발견 원소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딱딱 들어맞으면서 모두가 오오 멘델레예프 오오를 외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때 살아있었다면 험한 꼴 봤을지도….
주기율표 101번 멘델레븀이 여기에서 따왔다.
2 생애
동시베리아의 '토볼스크'(Tobolsk)라는 마을에서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는 유리공장 주인의 딸이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상에 저항해 오빠들의 공부를 훔쳐보는 것으로 배웠을 정도로 학식은 물론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드미트리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두 눈을 실명하여, 그 시점에선 친정의 유리공장을 물려받아 육아는 물론 경영까지 떠맡았음에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해낸 억척스러움도 갖고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고교 시절까지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15세가 됐을 적에 부친이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유리공장도 불이 나 전소되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친은 이 모든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 드미트리와 그 손위의 누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대학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는 타 지역 출신에 대한 입학 제한 규정 등이 존재했던 터라 시베리아 깡촌 출신의 드미트리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과 의학학교에도 신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3] 결국, 대안으로 드미트리는 교원 양성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원 양성소에 들어간 지 10주만에,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모친이 작고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우수학생에게 수여되는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 때 본격적으로 화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5년, 건강이 안 좋아 러시아 남부의 오데사로 자청해 발령을 받고 교원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고 다시 1년 후인 1857년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2년 후인 185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국비 유학하여, 이 때 카를스루에 학회(1860년 9월)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화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에 귀국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과학 교재 관련 저술 및 편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공업연구소 화학 교수로 처음 발령, 3년 뒤엔 일반화학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자기 눈에 차는 교재가 없어서 자기 손으로 500쪽짜리 '화학원론'이란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이게 세계적으로 히트해서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고, 또한 그 책을 저술하면서 당대 화학자들의 화두였던 원소들의 분류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원자론'을 발표하면서 원자량의 개념을 내놓은 이래로 많은 화학자들은 원소들간의 유사성 및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는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는 주장을 했고,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와 뉴랜즈는 서로 교류하며 원소의 규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불과 35세였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어서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기존의 원자량 측정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비어있는 칸의 원소들도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면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 시대가 아닌 당시 사람들이야, 당연히 이런 용자스런 반응에 '이뭥미' 내지는 '이뭐병'했지만….
그 후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부아보드랑이 갈륨을 발견했다. 드미트리는 갈륨의 발견은 자신이 에카알루미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덕분이라고 주장했고 부아보드랑은 갈륨을 발견한 실제 연구는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드미트리는 부아보드랑이 발표한 갈륨의 데이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근거도 없이 일부 측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는데, 갈륨의 밀도와 질량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값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자 부아보드랑은 자신이 발표한 데이터를 철회하고, 드미트리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게르마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드미트리가 예언한 것과 거의 딱 들어맞는 성질과 원자량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점차 인정받으면서 화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라는 말도 나왔다. 듬성듬성하던 주기율표도 시간이 지나면서 빠진 부분이 채워지고 개선되어졌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대우는 매우 미묘했는데,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못했다. 1890년에는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멘델레예프가 관여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에는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이때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표준 도수 40도를 정했다. 후세의 보드카 브랜드 중에는 '멘델레예프가 도수 품질을 정한 보드카'란이 사실을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멘델레예프는 의학이나 생리학자가 아니라 순수 화학자이고, 도량형국 국장의 위치에서 정한 것이므로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보드카의 도수를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말년에 냉대를 받다가 폐렴으로 190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원소 주기율표를 들고 따랐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멘델레예프(1886~1922)는 크론슈타트 엔지니어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의 멘델레예프 전차를 설계하였다. 멘델레예프 전차는 생긴건 컨테이너 박스 비슷한 차체에 정면에 120mm 주포를 달은 아주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당시 고안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전차였다. 가스압 피스톤 서스펜션을 통해 트랙의 장력 조절과, 높이 조절을 통해 트랙/구동부를 차체 안으로 넣어 보호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게만 해도 175톤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중량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군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령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차체에 주포가 고정된 전형적인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차 디자인인지라 이후 발전하게 되는 전차 기술에 뒤쳐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짜르 탱크보다는 전투의 효율성은 높앗을것으로 보인다. 짜르 탱크보단 눈에 띄지도 않고, 전면 150mm / 후면 100mm 수직장갑의 방어력도 그렇고. 티거 중전차가 차체 정면 장갑이 100mm, 포방패 장갑이 110mm인 점에서 상당한 두께인 셈. 다만 러시아의 당시 기술력으로 볼때 방호력이 제대로 제값을 하긴 어려울테지만 짜르 탱크에 비하면 상당한 떡장. 화력도 짜르 탱크는 측면에 달린 9파운드 포가 가장 강한 화력인데 비해 멘델레예프 전차는 120mm 해군용 함포를 탑재해서 화력 면에서도 앞섰다. 적어도 이동식 포대로 쓸 수도 있는 활용성은 있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역이 있다.
3 일화
평생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거칠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여행을 할 때도 늘 3등칸을 탔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석유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유조선과 송유관을 설계하고 저장 탱크도 만들었다.
세상의 관행이나 부조리에 저항했던 모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진보적이고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라는 유언을 소중히 간직하여, 훗날 자신의 논문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적어놓기도 했다.
상술한 학생들의 저항 활동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 위에서 인세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들인 농장을 경영할 때도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해 수익을 올렸는데, 그는 이 농법을 주변의 다른 농가들에게도 흔쾌히 가르쳐주었으며, 아울러 치즈 제조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그야말로 화학자라는 공인으로서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라는 개인으로서도, 유능하면서도 선량했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