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조수미(曺修美) |
출생 | 1962년 11월 22일,경상남도 창원시 |
학력 | 선화예술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교 성악전공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소화(小花) 데레사 |
Sumi Jo
목차
1 개요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랭피아로 분한 조수미 |
▲ 2006년 파리 독창회의 마지막 앵콜 곡인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1]
대한민국의 성악가로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1962년 11월 22일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출생. 프로필상에는 서울특별시라 기재되어 있으나 성산아트홀 개관 행사에서 자신이 직접 밝혔다. 본명은 조수경이지만 외국어로 'ㅕ' 발음이 힘들어서 수미로 개명했다. 처음엔 주변으로부터 해외 활동이 많을 것을 고려해 마리아, 크리스티나 같은 외국 이름을 지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조수미 본인이 외국 이름을 짓지 않겠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디 나탈레 덕후 축잘알
2 성악 교육 과정과 뜨거운 열애
어렸을 적 글을 배우기 전에 피아노부터 쳤을 정도로 음악 신동이었다. 부모는 조수미에게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켰다. 부모는 조수미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할머니는 조수미를 보며 "저렇게 아이가 영악하면 단명한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부모는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는지 물었더니 "뭐든지 두드리라. 두드리면 나쁜 기운이 빠져나갈 것이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두드리면 되겠다고 생각한 부모는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고가였던 피아노를 구입했다. 4살부터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조수미는 이유도 모르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쉬지도 않고 하루에 8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는 노래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조수미를 가르친 선생마다 모두 부모님에게 '수경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노래를 시키셔야 합니다' 하고 당부했다고 한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 역대 최고의 점수로 수석 합격했다. 81학번.[2]
하지만 대학교 2학년 때 같은 학교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동갑내기 남학생 K군과 열애에 빠지면서 조수미의 학업 생활은 모범생에서 날라리로 180도 달라진다. 당시 K군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음을 알았지만 나인지 그 여자친구인지 담판을 지으라고 과감하게 대시했고 결국 여친과 헤어지고 조수미와 사귄다. 그 후 다방, 영화관, 디스코클럽, 여행 등 어느 곳에서든 1년 24시간 내내 K군과 함께 하면서 수업은 물론 시험까지 펑크 내는 바람에 학점은 선동렬 방어율로1.20(...), 석차는 1등에서 꼴찌로 전락했다. 당시 이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면 K군과 동거 생활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 조수미는 "상상에 맡기겠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조수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K군이 원한다면 성악가의 길도 포기할 수 있었을 정도로 오로지 K군과의 결혼에만 마음이 전부 가 있었으며, 심지어 K군과 함께 태어날 아기 이름까지도 미리 지었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전두환 정권의 학생통제정책 일환으로 대학 입학정원을 늘린 뒤 성적에 따라서 졸업정원을 조정하는 졸업정원제가 시행 중이었기 때문에 꼴찌를 계속하다 보면 대학을 졸업하기도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졸업정원제는 FM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조수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교수들과 부모님은 결국 합심하여 2학년 때 조수미를 서울대에서 중퇴시킨 후, 이탈리아 로마의 명문 음악학교인 산타 체칠리아(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음악원에 강제 유학을 보낸다. 조수미의 어머니는 이때를 회고하기를, K군이 인물도 집안 배경에서도 흠 잡을 데 없는 괜찮은 인물이었는데 K군과 열애하면서 조수미가 음악을 놓았다는 것에 K군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 후 몇 달 되지 않아 편지를 통해 K군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는데, 주변을 통해 알아보니 조수미의 서울대 같은 과 단짝친구가 K군과 눈이 맞았다고 한다. 그 뒤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악물고 독하게 매달리며 5년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조수미의 옛 연인이었던 K씨는 1987년 결혼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MBA를 받고 1996년에 귀국하여 미국의 모 컨설팅 회사의 서울 지점 파트너로 재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수미가 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높아진 성악가가 된 후에 조수미의 공연장에 말 없이 관람하고 가기도 했다고 조수미가 언급하기도 했다.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장난으로 K군과 전화연결을 마련했다고 하니 조수미는 정말로 당황스러움 반 설렘 반으로 가득 찬 반응을 보였다. 이에 강호동이 놀려대자 '내가 왜 결혼을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겠냐' 며 진담 반 농담 반의 의미심장한 멘트로 받아치기까지 했다. 아직 미혼이기도 하고 바쁜 스케줄 탓에 제대로 된 연애를 하기 어려운 조수미의 생활 환경상 자신의 첫사랑인 K군에 대한 마음을 아직까지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 조수미는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에 외국인과도 충분히 연애가 가능한 환경에 있지만, 개인적으로 배우자 상대는 반드시 한국인을 원한다고 한다. 이는 K군과의 첫사랑의 추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조수미가 언급하기도 했다.
3 근황
조수미는 미혼이지만 안타깝게도 지병인 자궁근종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조수미의 임신설 루머가 퍼지자 본인이 직접 일축하며 이야기한 부분이며 만약 미래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전세계를 정신 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적 생활 패턴상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어렵다는 것을 조수미 본인도 알고 있는지 결혼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는 듯하다. 1년 365일 중에 330일을 집을 떠나 공연하며 개인 시간은 당연히 거의 없고 2~3년 뒤 공연 스케줄까지 다 짜여져 있다고 한다.
자서전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애견인으로서 커다란 셰퍼드를 공연 중에도 동반하기도 했다고 한다. 앙드레 김과의 관계도 유명한데 조수미의 회고에 따르면 앙드레 김이 처음 조수미의 공연을 관람한 뒤 당시 조수미의 드레스가 형편없다고 한탄하며 조수미의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약 20년 동안 200벌 이상의 드레스를 제작해 주었다고 한다.
로마에서 살았던 덕에 AS 로마와 프란체스코 토티의 팬이며 유로 2012 때 트위터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였다.[3]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봉헌된 미사에 메인 게스트로 초청되어, 식전 행사에서 아베 마리아, 넬라 판타지아 등을 가창하고 미사 중 성찬식 등에서 성가곡을 피로했다.[4]
4 음악 활동과 인지도
데뷔 전에 카를로 베르곤지와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등의 가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경력이 있다. 또한 이 무렵 7개의 국제 콩쿨을 우승했다고 한다.
1986년 이탈리아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역으로 데뷔한 후 각국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1991년에는 필립스에서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을 녹음했고 1993년에는 데카에서 《그림자 없는 여인》[5]을 녹음했는데 이 두 음반은 오페라 부문 최고 음반으로 선정되었다. 다만 이 매의 소리 역은은 단역이므로 조수미를 기대하고 사지 말 것. 근데 국내에서 한 번도 연주된 적 없는 오페라 CD를 살 정도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일반인들에게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역을 맡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수미가 참여한 마술피리는 3년 안에 3개가 서로 다른 메이저 회사에서 녹음되어 나왔고 게오르크 솔티 경이 이미 조수미와 계약 중이던 에라토 사를 설득하여 데카 레이블의 본인 지휘 음반에 참여시켰을 정도였다. 다만 조수미의 밤의 여왕은 너무 기교적으로 예쁘게만 불러서 극의 표현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고 Opera Love 같은 아리아집으로 들어야만 비로소 괜찮다는 평도 일부 존재한다.
MBC 허준의 '불인별곡(不忍別曲)', KBS의 명성황후의 주제가 '나 가거든' 등의 드라마 OST에 참여한 적이 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주제곡인 'Champions' 도 조수미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알려져 있다.
인지도는 영미권보다는 유럽 쪽에서 더 높은 편이다.[6] 전성기 시절 그녀의 유럽 내 인기도와 영향력은 한국인으로써 보면 굉장했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황제라 일컫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조수미의 목소리를 높게 평가하고 칭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여러 거장들이 조수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조수미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최상의 선물이다. 이는 조수미 자신에게뿐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다. - 카라얀
금세기 최고의 콜로라투라 조수미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 주빈 메타
조수미는 내가 만난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중 최고의 기량을 가진 소프라노다. - 게오르그 솔티
정통 벨칸토 창법의 소프라노인 조수미의 음악 세계에는 영혼이 깃들여 있다. - 로린 마젤
오페라 <가면무도회>를 통해 만난 오스카 중 조수미가 최고 역량의 소프라노라는 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 플라시도 도밍고
5 주요 배역
90년대 초중반에 조수미가 맡았던 배역을 보면 리릭 콜로라투라 음역이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보다는 로시니 오페라 히로인이 훨씬 어울린다는 평이 상당수다. 왜냐하면 밤의 여왕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도 악녀 역할이라 드라마티코를 겸비한 소프라노가 맡아야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터키인》 중 피오릴라는 마리아 칼라스와 체칠리아 바르톨리 못지 않게 또 다른 매력이 들어있는 '최고의 피오릴라' 라는 호평을 많이 받았다.
조수미가 데뷔부터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주연으로 시작했지만 《가면 무도회》의 오스카도 찬사를 받았다.[7] 오스카 역은 당시 신예였던 조수미를 카라얀이 점찍어서 캐스팅한 것인데 활달한 성격을 가진 시동 캐릭터에 잘 맞아서 이 역으로 몇 번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카라얀과 같이 가면 무도회 전곡반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하기도 했다. 다만 이 전곡반은 혹평이 상당한데 레나토 역의 레오 누치가 매너리즘이 가득한 노래를 들려주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도 전성기 때와는 달리 템포를 쓸데없이 늘어지게 설정한 바람에 음악에 제대로 몰입할 수 없다는 비평이 상당수다. 그나마 구스타보 3세 역의 플라시도 도밍고와 오스카 역의 조수미만 건졌다고 한다.
카라얀이 지휘할 예정이었던 잘츠브루크 페스티벌의 가면 무도회 공연[8]에서도 캐스팅되었는데 카라얀이 급서한 바람에 계획이 무산될 뻔하다가 게오르그 솔티가 대신 지휘한 덕에 카라얀이 구성한 프로젝트는 무사히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1990년 가면무도회 잘츠브루크 페스티벌 실황이며 TDK에서 DVD로 출시되었다. 파바로티의 1989년 메트 실황과 도밍고의 1975년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 실황과 더불어 완성도가 높은 영상물로 꼽히고 있다.
6 가수로서의 가창
조수미의 가창력은 이탈리아 유학 시절 2년에 7개의 국제 콩쿨을 우승하고(1위끼리의 왕중왕전인 베로나 콩클까지 우승) 카라얀에게 "신이 내린 목소리",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류의 자산" 이라는 극찬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보여진다.
조수미의 음색과 창법은 서정적이면서도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화려하며 테크닉이 완벽에 가까운데 이는 오페라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에게도 호응을 일으키며 아리아가 줄 수 있는 감동을 높은 수준으로 구현해낸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수미의 트레이드마크는 다른 소리가 섞이지 않은[9] 완전한 두성의 활용과 완벽한 절대음감[10], 그리고 미분음 플랫마저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시창이었다. 다양한 콜로라투라 기교를 완벽에 가깝게 습득하였으며 특히 C6 이상의 하이 소프라노 음을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로 내는 기교가 매우 유명했다. 당연하지만 고음을 낼수록 목소리는 커지기 때문에 파사지오 위의 고음을 피아니시모로 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 2014년 신년 콘서트. 1시간 28분 28초경에서 콜로라투라 음인 D6(4옥레!)을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에서 크레셴도 없이 순간적으로 포르티시모(매우 세게)로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인 스스로는 이 기교를 '메가폰'이라고 부른다.
특히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두성의 활용은 절대적이면서도 묘하게 교과서적이지는 않은데 C4(2옥 도)에서 C6(4옥도)에 이르는 소프라노의 테시투라(음역)에서 완벽하게 두성을 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일정 음역대에서 성구 전환(파사지오)라는 것을 겪게 되는데 소프라노의 경우 그 파사지오는 C4(2옥도)에서 C5(3옥도)에 해당한다. 이 구간은 흉성과 두성이 교차되는 부분으로 만일 두성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이 음역대를 내면 소위 '할머니 소리' 라고 하는 음색이 나게 된다. 이것은 인간 성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 때문에 위대한 소프라노들도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인데 조수미의 테시투라는 특이하게도 C4(2옥도) 위로 성구 변환 없이 쭉 두성으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초고음과 초저음을 제외하면 음색이 변하지 않는 것. 당연하지만 이런 현상은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며(...) 그냥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승승장구]에서 조수미는 자신은 '목젖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 (물론 울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악 발성의 핵심이 울대(목젖)에 긴장이 가지 않게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쪽을 두성으로만 이뤄진 테시투라의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고음역대의 콜로라투라 기교를 완벽한 음정으로 클린하는 모습은 조수미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성기에는 그야말로 단 하나의 음정 실수도 내지 않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플랫과 미분음에 민감한 지휘자들의 사랑을 받은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 플랫된 음정을 들으면 괴로워하는 양반들이니... 그 유명한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의 두 번째 아리아' 의 경우 조수미는 다른 소프라노들보다 훨씬 빠른, 알레그로에 가까운 속도로 곡을 녹음했으며(당연하지만 빠를수록 어렵다) 단 하나의 음정 미스도 내지 않았다. 다만 비판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완벽한 테크닉은 오히려 단점이 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맑고 서정적인 젊은 목소리의 창법이었다면 90년대 이후로는 기교도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여지며 근래 나이가 들어서도 보다 풍부해진 성량과 노련미로 오페라 'Norma' 의 'Casta Diva' 같은 본인의 본래 음역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곡에 대해서도 능숙하게 접근하고 있다.
동양인으로서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에 프리마돈나로 무대에 선 최초의 인물이며[11] 1993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에서 루치아 역으로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시 "메트 사상 최고의 루치아" 라는 찬사를 메트로부터 받은 바 있다. 프랑스에 데뷔시 "요정도 조수미의 노래에 귀기울인다" 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밀라노 신문은 "동양에서 온 소프라노가 서양을 가르친다" 라며 오페라의 혁명이라고 극찬을 한 경우도 있다.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조차 실제 부르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여 악보를 수정한 '낙소스의 아드리아네' 의 체르비네타 역을 처음으로 원본 그대로 공연하고 레코딩으로도 남겼다.[12] 이에 대해 메트오페라 뉴스는 "조수미의 노래는 비평을 넘어섰다" 라고 표현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안젤라 게오르규, 르네 플레밍과 함께 세계 3대 소프라노로 초청되어 개막식 행사에서 공연하였다.
2006년 국내 성악가 중 처음으로 바로크 음악 앨범을 출반, 2010년에 독일 가곡집을 출반하였고 2013년 DECCA 레이블로 나온 'Norma' 앨범에서는 세계적인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원래의 메조와 소프라노의 역할을 바꿔 녹음, 취입할 정도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오페라 뿐만이 아니라 크로스오버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성악가로서 첫 크로스오버 앨범 'Only Love' 는 비대중가요 앨범으로는 전무후무한 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하였고 크로스오버와 바로크, 가곡까지 다양한 영역을 추구하는 도전파이기도 하다.
7 비판
7.1 테크닉에만 충실한 가창
조수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꽤 있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충실하기 때문에 오페라 아리아는 그냥 아리아집에서만 들으면 충분히 아름답고 음정도 정확하며 훌륭한 가창이지만[13] 극의 표현에서는 조금 약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솔티가 2번째로 녹음한 마술피리 전곡반에서의 평가는 가창은 충분히 훌륭한 콜로라투라라고 할 수 있지만 크리스티나 도이테콤에 비하면 극의 표현과 분노심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14]
이와는 별개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니까 당연하지만) C5 이하의 중저음에서 저음에는 매우 약하다. 이 타자는 변화구를 잘 못 던지네요 팝, 크로스오버를 부를 때 팝의 창법을 종종 내기도 하는데 음이 처진다거나 벨팅이 필요한 부분에서 내지 못하는 등의 실수가 많다. '천하의 조수미도 이 노래는 못하네' 라는 댓글이 달릴 정도. 몸쪽 낮고 빠른 공에 약한 마이클 조던
7.2 크로스오버/팝페라
2000년대 이후에는 클래식보다는 크로스 오버와 대중의 인기에만 집착한다는 비평도 있다.
조수미는 오페라 극에서 배역을 맡기보다는 본인의 이름을 내건 콘서트를 더 선호하여 주로 콘서트에만 치중하고 있으며 이는 오페라의 발전과 확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조수미를 선호하는 사람이나 조수미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는 이들 모두가 거의 인정하는 부분이다. 조수미 팬들 중에서는 "조수미가 크로스 오버나 대중가요가 아닌 오페라나 전통 클래식을 계속 맡았으면 목소리도 더 풍요로워지고 레퍼토리도 더 폭넓게 구사할 수 있는 더 완벽한 콜로라투라 가수가 되었을 것" 이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이 "다른 사람이 되어 맡은 노래만 해야 하는 오페라 배역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연주가 더 좋다" 고 하니 이는 정통 오페라 팬으로서는 아쉽겠지만 일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조수미를 더 접하기 쉬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마리아 스투아르다, 연대의 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청교도의 엘비라 역을 조앤 서덜랜드의 남편 리처드 보닝이 조수미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배역이라고 권유했다니 더욱 안타까운 점이다.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전성기 때보다는 못하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조수미가 오페라 무대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크로스오버를 일정한 나이가 되었을 때까지 미루거나 또는 서로 골고루 병행했다면 "딴 길로 샜다", "대중의 인기와 상업성에만 치중한 것으로 변질되어버린 가수" 라는 비평 같은 것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오페라 팬의 입장에서 나온 비판이다. 애초에 돈 받고 하는 모든 예술은 상업예술이다. 오페라건 덥스텝이건 마찬가지다. 엑소의 미니앨범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똑같은 상업예술이다. 오페라 무대 대신 크로스오버나 팝페라로 기울어진 조수미가 안타깝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의 기본 전제는 오페라는 크로스오버보다 우월한 예술 장르라는 것이고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이 대중적인 인기와 상업성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오페라가 절대적인 예술성의 기준이며 다른 장르는 오페라보다 열등한 것' 이라는 식의 위험한 아집으로 읽힐 수도 있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예술 분야에 절대적인 한계를 긋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오페라 팬으로서 조수미가 오페라 가수로서의 경력 대신 크로스오버를 택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크로스오버를 건드린 조수미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조수미는 오페라 가수로서 음악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비판 대신 팝을 이해하는 가수로서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성악가들이 조수미와 같이 크로스오버 쪽을 시도할 의도도, 또 크로스오버로서 성공할지 의문시되기 때문에 이는 singer로서의 역량에 달린 문제이지 비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테너도 존 덴버와의 'Perhaps love' 나 모린 맥거번과의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같은 히트곡들이 있으니 말이다. 또한 2006년 '바로크로의 여행' 이나 2010년 '독일가곡집', 2013년 데카 레이블의 'Norma' 같은 앨범에서 보듯 여전히 정통 클래식에서 녹슬지 않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수미는 음악적 역량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확장시켜나가는 노력파, 프론티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다양한 음악적 볼륨을 가진 성악가는 조수미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8 음반과 영상물
8.1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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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의 첫 오페라 전곡반으로 《오리 백작》 관련 음반들 중에서 헤수스 로베스 코보스가 지휘한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과 비토리오 귀이의 EMI 음반과 함께 오리의 대표적인 연주로 꼽히고 있다.
조수미가 부른 도니제티, 베르디, 롯시니, 마이어베어 아리아 모음집으로 《리골레토》의 '그리운 그 이름(Caro nome)', 《몽유병의 여인》 중 '아! 믿을 수 없어라(Ah! non credea mirarti)',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로지나의 아리아 '방금 들린 그 목소리(Una voce poco fa)' 가 녹음되어 있다.
8.2 영상물
조수미 관련 영상물 중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오페라 실황물이다. 1990년 잘츠부르크 패스티벌 가면 무도회 실황으로 베르디의 원래 의도했던 스웨덴 판본 버전[15]을 사용하고 있다. 오스카 역의 조수미는 물론 플라시도 도밍고가 구스타보 3세를, 레오 누치가 요한 앙카스트롬 백작[16]을, 조세핀 바스토우가 아멜리아를 맡았다.
이 실황은 본문에서 언급했듯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카라얀의 가면 무도회 전곡반과 같은 캐스팅이며 이를 토대로 카라얀이 프로덕션을 계획하고 지휘까지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라얀은 1989년에 급서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이 프로덕션은 해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봉을 잡은 덕에 카라얀이 구성한 프로덕션은 무사히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는 훈훈한(?) 에피소드가 담겨진 영상물이다.
조수미의 오스카는 카메라 앵글이 너무 근접할 땐 비주얼에선 약간 부담이 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편이며 음악적인 면에선 이 역으로 유명했던 래리 그리스트 못지 않은 멋진 노래를 들려준다. 구스타보 3세 역의 도밍고 역시 1975년 런던 코벤트 가든 실황에 비해 노련한 노래와 연기를 보여주며 요한 백작 역의 레오 누치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훨씬 괜찮은 노래를 들려준다.[17] 솔티 경의 지휘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두 전곡반[18]에 비해 박력은 약간 떨어졌으나 가수진들을 잘 배려하는 편이고 아멜리아 역의 조세핀 바스토우는 좋은 연기에 비해 실망스러운 노래를 들려준다. 카라얀이 남긴 가면 무도회 전곡반은 카라얀의 처진 템포와 레오 누치의 매너리즘 가득찬 노래도 있지만 바스토우의 실망스러운 가창 역시 혹평을 받는 데 한 몫 했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도밍고와 조수미를 제외한 나머지는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인지도에선 1975년 런던 코벤트 가든 실황물과 1989년 메트로폴리탄 영상물과 더불어 높은 축에 속하는 편이다. 이유는 윌리엄 더들리의 아름다운 무대 디자인이 압권이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설득력 있는 존 슬레신저의 연출이 내용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조수미 팬들 뿐만 아니라 이 오페라의 애호가들 또는 가면 무도회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한 번쯤 감상해도 좋은 영상물이다. 녹화된 연도에 비해 음질과 화질도 좋다.
9 여담
- 파울로 소렌티노의 2015년 영화 <유스>에서 본인 역으로 출연했으며, 여기서 부른 곡 'Simple Song #3'으로 제 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다고 나왔으나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것은 해당 곡을 작곡한 프로듀서이다. 시상식 원칙상 노래를 부른 가수가 아닌 작곡가가 후보에 오른다. 제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초청받아 참석하나, 축하공연은 없다고 한다.
- ↑ 공연 3일 전 조수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해당 공연일은 아버지의 발인이었다. 조수미는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어머니는 이를 극구 반대했으며, 결국 조수미는 예정된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게 된다. 공연에서의 최종 앵골곡으로 이 곡을 선보이며 조수미는 해당 공연을 아버지에게 헌정했다. 이 공연은 <For My Father>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 ↑ 당시 실기 시험 현장에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불참해서 본인이 직접 모든 지원자들의 반주를 해준 후, 마지막에 피아노 연주와 함께 가창을 한
소위 문 닫고 나가는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 ↑ 스페인전에서 발로텔리를 빼고 안토니오 디 나탈레를 넣으라 했더니 진짜 넣었고 골까지 넣어 화제가 되었다.
- ↑ 성체성가 503번 '생명의 양식'
- ↑ 게오르그 솔티 말기 녹음으로 이 전곡반에서 조수미는 매의 소리 역을 맡았다. 그래미 클래식 앨범상 수상.
- ↑ 이는 기본적으로 조수미의 거주지가 이탈리아 로마이고 초기 독창 앨범들이 프랑스 아리아가 주로 나왔으며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 근래에는 오페라극 출연보다는 세계 각국에 끊임없이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주로 단독 콘서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사이틀로 이렇게 각국의 청중을 모을 수 있는 성악가는 대한민국에 조수미밖에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 질다, 피오릴라, 밤의 여왕, 올랭피아만큼 많이 맡지는 않았다. 오스카 역이 조연에 불과한 역이라서 그런 듯하다. 물론 조수미가 맡은 비중이 적은 조연 중에서는 그나마 많이 맡았던 배역이다.
- ↑ 도이치 그라모폰 전곡반의 캐스팅과 같은 구성진이었다.
- ↑ 당연하지만 성악가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소리가 섞이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
- ↑ 본인 스스로 자신하는 '완벽한' 절대음감에 대한 일화로 서울대 입학 시험 당시 반주자의 연주 미스를 지적한 사건이 유명하다. 또한 절대음감 탓에 오히려 학생 시절 조옮김을 연습할 때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장조에서 장2도 올린 라장조라면 F#은 계이름 '미' 에 해당하지만 본인은 죽어도 파#(F#) 그대로 들리는 통에 고생했다고 한다.
- ↑ 더군다나 20대에. 그리고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 ↑ 몰론 이건 전체 오페라를 말하는 거고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만 따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
- ↑ 이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체칠리아 바르톨리도 항상 지적당하는 사항이다.
- ↑ 다만 밤의 여왕을 제외한 오스카와 같은 역에서는 조수미가 좋은 평을 받기도 하고 도이테콤이 다른 역에서 비슷한 평을 받은 걸 단순히 표현력 부재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사실 밤의 여왕이라는 역이 워낙 까다롭기도 하고 리릭 콜로라투라인 조수미의 음색이 드라마틱 콜로라투라로 분류되는 밤의 여왕이랑 잘 안 맞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밤의 여왕만큼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한 명가수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리타 슈트라이히가 있다. 여담이지만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밤의 여왕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 ↑ 가면 무도회는 검열에 걸려서 베르디가 세 번이나 설정을 수정해야 했던 오페라였다. 예전에는 보스턴 판을 많이 사용했는데 요즘엔 스웨덴 판본을 많이 올리는 추세.
- ↑ 보스턴 판본의 레나토를 말한다.
- ↑ 일부에서는 피에로 카푸칠리에 비해 중량감이 약간 떨어진다는 혹평도 있다.
- ↑ 솔티 경은 데카에서 1962년, 1983년을 거쳐 가면 무도회 전곡반을 두 번이나 녹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