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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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감시원과 의용소방대로 복무하던 당시의 사진.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드미트리 드미트리에비치 쇼스타코비치
로마자 표기는 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러시아(소련)의 작곡가피아니스트.
1906.9.25(율리우스력으로는 9.12)~1975.8.9

1 생애

혁명 1년 뒤인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 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내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좋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10대 때부터는 작곡도 시도했는데, 제대로 완성한 것은 드물지만 1905년의 혁명이나 기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취하는 등 음악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레닌이 주도한 공산주의 혁명 직후인 1919년에 고향인 페트로그라드(개명된 지명) 음악원에 피아노와 작곡 전공으로 입학했고, 각각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를 사사했다. 재학 중 여러 편의 피아노곡과 실내악을 써서 직접 초연할 정도로 뛰어난 소양을 보였으며, 원장인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도 그의 스승이자 후원자가 되기를 자처할 정도였다.

1925년에 졸업작품으로 교향곡 제 1번을 완성했는데, 16세 때 1번 교향곡을 썼던 글라주노프보다는 조금 뒤쳐지지만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작곡가가 쓴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초연된 뒤, 몇 년 사이에 서방 국가들에서도 널리 연주될 정도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꿈도 버리지 않았는데, 1927년에 제1회 쇼팽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명예상을 타는 데에 그쳤다.[1] 하지만 그 뒤로도 피아노를 계속했으며, 주로 자작곡 연주에 매진해 녹음도 여럿 남겼다.

1920년대 후반에는 대단히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았고[2], 혁명과 노동절을 기념하는 단악장의 합창 붙은 교향곡 두 곡(2번과 3번)이나 니콜라이 고골의 풍자 소설을 각색한 오페라 '코' 등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형식주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것이 훗날 큰 재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34년에는 두 번째 오페라인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했는데, 초연 당시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반대파들이 무려 소련 최고의 권위를 지닌 신문인 소련 공산당 당간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었다'라며 비평문을 기사화하는 바람에 첫 관광을 당했다. 비단 이 기사뿐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프라우다에는 연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비판하는 글이 실렸기 때문에 그는 한순간에 거의 반동분자로 낙인 찍히는 신세가 되었다. 후새드.

1936년에 시작된 스탈린대숙청 때는 그럭저럭 잘 넘어갔지만, 친지들이나 자신을 후원했던 이들이 비밀경찰에게 잡혀가는 광경에 두려움을 느낀 뒤로는 작풍을 좀 더 '정권 친화적'으로 바꾸어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1937년에 비교적 고전적인 형식의 틀과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사조를 얼마간 받아들인 교향곡 제 5번이 초연되었고, 큰 호평을 받아 작곡가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현악 4중주 등의 전통적인 실내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도 임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러시아 본토에 전쟁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았으나,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거주하던 레닌그라드도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10월에 쿠이비셰프[3]로 피신했고, 거기서 교향곡 제7번의 작곡을 초연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산당에 의해 '레닌그라드'라는 제목이 붙었고, 소련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에서도 수없이 방송되어 승리를 기원하는 음악의 상징이 되었다.

전황이 호전되자 1943년에 다시 거주지를 모스크바로 옮겼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재직하면서 7번보다는 좀 더 비극적이고 거친 교향곡 제8번을 비롯해 전쟁의 경험을 다룬 작품들을 계속 창작했다. 그러나 1945년에 소련이 승전한 뒤 발표한 교향곡 제 9번은 베토벤의 같은 번호 작품을 기대한 이들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고, 이내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문화계의 깡패거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두 번째 레이드(일명 "즈다노프쉬나")를 뛰기 시작했다.[4]

이 때는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그의 선후배와 동료들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가브릴 포포프 같은 작곡가들까지 연루되어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교수직도 내놓고 전쟁을 소재로 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붙이거나 '숲의 노래' 같은 정권 영합형 작품의 작곡에 주력하면서 후폭풍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발표를 미루면서 몰래 실내악이나 교향곡 등도 창작하고 있었고, 스탈린이 죽은 직후 교향곡 제10번을 발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깼다. 혹자는 "저승사자가 쇼스타코비치를 잡아가야 하는데 스탈린을 잡느라 못 잡아갔다."고도 한다(...).[5]

스탈린 사후에는 일종의 '해빙' 움직임도 있어서 창작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는 않았고, 프랑스 등 서방 세계에 연주 여행을 다니거나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는데, 입당이 자의였는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한 상태다.[6] 입당 전후에 쓴 교향곡 두 곡(11번과 12번)도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에 대한 부제를 붙이고 공개한 탓에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정권의 어용 작곡가가 되었다' 는 비판이 서구에서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악 4중주 제8번같이 분명한 공포와 고통을 표현한 작품도 만들었고, 소련 내에서는 공공연한 만행이었지만 공식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를 작곡하는 등 반골 정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논쟁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점차 쇠약해졌고, 특히 오른손에 마비 증상이 오면서 피아노 연주와 악보 작성 등이 어려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건강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그의 작품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는데, 교향곡으로서는 말전인 14번은 죽음을 주제로 쓰여진 시를 가사로 하고 청년 시절에 도입했던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응용하는 등 체제 도전적인 면모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논란을 빚었다. 1970년대에는 폐렴에 심근경색까지 발병했고, 결국 1975년에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완성한 뒤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모스크바 시민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주요 작품들

2.1 교향곡

교향곡 1번 F단조 (1924~25)
교향곡 2번 B장조 '10월' (1927)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5월 1일' (1930)
교향곡 4번 C단조 Op.43 (1935~36)
교향곡 5번 D단조 Op.47 (1937)
교향곡 6번 B단조 Op.54 (1939)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Op.60 (1941)
교향곡 8번 C단조 Op.65 (1943)
교향곡 9번 E플랫장조 Op.70 (1945)
교향곡 10번 E단조 Op.93 (1953)
교향곡 11번 G단조 '1905년' (1957)
교향곡 12번 D단조 '1917년' Op.112 (1961)
교향곡 13번 B플랫단조 '바비 야르' Op.113 (1962)
교향곡 14번 Op.135(1969)
교향곡 15번 A장조 Op.141 (1971)

2.2 관현악

스케르초 F샤프 단조 (1919)
주제와 변주곡 (1921-22)
스케르초 E플랫 장조 (1923-24)
재즈 모음곡 제1번 (1934)
소관현악을 위한 5개의 단편 Op.42 (1935)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소품 (1947-48)
축전 서곡 A장조 Op.96 (1954)
바리에테 관현악단을 위한 모음곡 (1956년 이후) - 흔히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제2번'으로 불리지만, 잘못된 표기다. 진짜 2번 모음곡은 2차대전 중 악보가 행방불명이었다가 1999년에 피아노 악보로 발견되었고, 영국 작곡가 제럴드 맥버니가 관현악 편곡했다.
교향시 '10월' C단조 (1967)[7]
그 외 수많은 부수음악, 영화음악, 오페라에서 발췌한 모음곡들

2.3 협주곡

피아노, 트럼펫, 현을 위한 협주곡 1번 C단조(1933)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1947~48)
피아노 협주곡 2번 F장조(1957)
첼로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1959)
첼로 협주곡 2번 G장조 (1966)
바이올린 협주곡 2번 C샤프단조 (1967)

2.4 실내악

피아노 3중주 1번 C단조 (1923)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1923-24)
현악 8중주를 위한 2개의 소품 (1924-25)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모데라토 (1934)
첼로 소나타 D단조 (1934)
현악 4중주 1번 C장조 (1938)
피아노 5중주 G단조 (1940)
현악 4중주 2번 A장조 (1944)
피아노 3중주 2번 E단조 (1944)
현악 4중주 3번 F장조 (1946)
현악 4중주 4번 D장조 (1949)
현악 4중주 5번 B플랫장조 (1952)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왈츠 (1955)
현악 4중주 6번 G장조 (1956)
현악 4중주 7번 F샤프단조 (1960)
현악 4중주 8번 C단조 (1960)
현악 4중주 9번 E플랫장조 (1964)
현악 4중주 10번 A플랫장조 (1964)
현악 4중주 11번 F단조 (1966)
현악 4중주 12번 D플랫장조 (1968)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1968)
현악 4중주 13번 B플랫단조 (1969~70)
현악 4중주 14번 F샤프장조 (1972~73)
현악 4중주 15번 E플랫단조 (1974)
비올라 소나타 (1975)[8]

2.5 피아노

5개의 전주곡(1920-1)
3개의 환상적 무곡 (1922)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F샤프 단조 (1922)
피아노 소나타 1번 (1926)
피아노 소나타 2번 B단조 (1943)
6개의 소품 '어린이들의 노트' (1944-45)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1950~51)

2.6 가곡

테너와 관현악을 위한 일본 시인의 택스트에 의한 6개의 로망스 (1928-32)
유대 민속 시집에서 (1948)
5개의 로망스 Op.98 (1954)
3개의 노래 Op.80b (1956)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에 의한 7개의 로망스 Op.127(1967)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에 의한 가곡집 Op.145 (1974)

2.7 오페라

코 (1927~28)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1934) - 1963년에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 라는 제목으로 개작되었다.

2.8 오페레타

12개의 의자 (1937-38)
모스크바, 체르노무슈키 (1958)

2.9 발레

황금시대 (1929~30)
볼트 (1930~31)
맑은 시냇물 (1934~35)

3 수상 경력/주요 직위

국내
사회주의노력영웅 (1966)
레닌훈장 (1946, 1956, 1966)
10월혁명훈장 (1971)
노력적기훈장 (1940)
인민우호훈장 (1972)
러시아 공훈예술가 (1942)
러시아 인민예술가 (1948)
소련 인민예술가 (1954)
레닌상 (1958)
국가 스탈린상 예술부문 (1941 2회, 1942년, 1946 2회, 1948, 1949 3회, 1950, 1952)
소련 국가상 (1968)
러시아 국가상 (1974 2회)
소련 최고 소비에트 회의 부의장 (1962~75)

국외
동독 예술원 회원 (1955)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1958)
국제 시벨리우스상 (1958)
세계 평화 회의 은메달 (1959)
유네스코 국제 음악의회 명예 회원 (1963)
유네스코 국제 음악의회 정회원 (1966)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1966)
오스트리아 대공로훈장 은장 (1967)
독일 바이에른 예술 아카데미 회원 (1968)
빈 모차르트 협회 모차르트 기념 메달 (1969)
동독 인민의 우정의 위대한 별 금장 (1972)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교 명예 음악박사 학위 (1972)
덴마크 소닝상 (1973)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명예 예술학박사 학위 (1973) 외 다수

4 창작 성향

일단 어느 시기 할 것 없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는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과 특유의 톡 쏘는 듯한 신랄함, 행진곡이나 서커스 음악의 향취, 아이러니 등으로 볼 수 있다. 베토벤에게는 소재를 긴축시켜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작곡법이나 '투쟁과 승리'의 도식을, 무소륵스키에게서는 러시아의 토착 민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러에게서는 다채로운 관현악법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 등을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뭔가 뒤틀린 것처럼 여겨지는 신랄함도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어법인데, 서방 세계의 악습이나 구태를 풍자하는 '선전용 작품' 뿐 아니라 교향곡이나 실내악 같은 절대음악 계통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다. 이것을 작품 끝까지 유지시키느냐, 아니면 진지하게 분위기를 바꾸느냐, 또 에너지를 실어가며 폭력적인 방향으로 변형시키느냐에 따라 음악의 성향이 왔다갔다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행진곡이나 서커스 음악 등에서 나타나는 통속적인 요소가 삽입되어 약간 '깨는' 느낌도 주는데, 혁명의 혼란기에 소년 시절을 보낸 작곡가로서 군악에 대한 인상이 꽤 깊었던 모양이다. 또 서커스 음악풍 요소도 작품에 밝은 색채 혹은 긴장감을 더하는데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발레 같은 무용음악에서 이런 식의 작곡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시기가 작품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초기와 후기에 주로 국한되지만, 서구의 무조음악/12음 기법이나 미국에서 건너온 블루스/재즈의 어법도 작품에 도입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학구적인 작곡 기법이던 서구의 '이국 취미풍' 요소건, 일단 쇼스타코비치의 손에 들어가면 특유의 신랄함이나 아이러니가 더해져서 성격이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탈린 말년에 가면서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네 개의 음도 쇼스타코비치 연구가들에게 좋은 떡밥인데, 레-미b-도-시로 이루어진 이 음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이니셜이기 때문이다.[9]

5 사생활

쇼스타코비치는 일생동안 세 번 결혼했는데, 1932년에 맞이한 첫 아내 니나 바르자르는 1935년에 잠시 이혼까지 갈 뻔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좋은 관계를 회복했고, 1936년과 1938년에 각각 딸 갈리나와 아들 막심이 태어나 대숙청이라는 험난한 시기에 위로가 되었다. 막심은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고, 지금도 현역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니나가 1954년에 죽은 뒤에는 콤소몰의 운동가였던 마르가리타 카이노바와 1956년에 두 번째로 결혼했는데,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겨우 3년 만에 이혼했다. 1962년에 이리나 수핀스카야와 마지막으로 결혼했고, 이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음악출판사에서 일하던 이리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편집과 초연 준비 등 음악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었고, 쇼스타코비치 사후에도 생전의 반려자로서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

지인들로는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틴스키, 작가 미하일 조셴코, 극작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 소련군 원수 미하일 투하쳅스키,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와 투하쳅스키는 대숙청 기간 동안 목숨을 잃었고, 조셴코도 특유의 풍자적인 시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작품 활동을 금지당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주변인들의 이러한 불행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축구를 관람하는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지인들. 우측 아래가 쇼스타코비치다.(...) 이예아!! 어느 팀을 응원 하는 걸까? 인간적으로는 전형적인 '러시아인'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 열혈 축구팬이기도 했다. 음식도 뻴메니(러시아식 만두)나 블린늬(러시아식 팬케이크)같이 소박한 것을 즐겨먹었고, 좋아하던 술도 보드카였다. 우리 식으로 치면 대작곡가라는 사람이 자장면이나 부침개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먹었던 거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고위층이 아닌 이상 음식으로 돈지랄을 할 일이 있나 하지만 술과 담배를 평생동안 즐긴 탓에, 이것이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시간 감각이 정확하다 못해 앞질러나가는 스타일이었고, 주변인들이 이를 맞춰주느라 진땀을 뺐다는 일화도 있었다.[10]

그리고 자신이 공격당할 '꺼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사소한 대화 때도 뭔가 확실히 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자신이 음악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올랐던 중년 이후에는 젊은 작곡가들이나 예술인들이 부당하게 당이나 정부로부터 공격받을 때 구명을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우 오히려 종교적인 입장이나 과거 행적을 이유로 변호는 커녕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다소 모순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11]

6 평가

'음악과 정치'의 연계를 주장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공산 체제의 어용 음악가에서부터 '내부 반항자'까지 천차만별이고, 여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수수께끼같은 요소나 생전의 각종 행적 등까지 더해져 격한 논쟁이 오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게다가 쇼스타코비치 사후 그와 나눈 대담을 정리했다면서 솔로몬 볼코프라는 음악학자가 서방에서 펴낸 '증언'이라는 책이 이런 논쟁을 격화시켰다. '증언'은 쇼스타코비치를 거의 민주화 투사처럼 그려내고 있는데, 거기에 쇼스타코비치의 반대파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나 소련 체제의 비판 등이 더해져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1990년대 후반 부터 쇼스타코비치의 논문과 사적인 대화록 등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편집했다는 비판을 받아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비판에 볼코프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은 것도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미망인인 이리나는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를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라면서 책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데이비드 패닝 같은 음악학자들은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여러 글과 '증언'의 내용을 대조하면서 볼코프의 작업을 비판하는 논문을 내놓았다. 반면 쇼스타코비치와 친한 사이였던 플로라 리트비노바는 쇼스타코비치가 "젊은 레닌그라드 출신의 음악학자와 자주 만나면서 내가 나와 내 작품에 대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을 받아 적고 그 다음 내가 그것을 검토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볼코프는 레닌그라드 출신임.)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도 아버지가 볼코프와 만나 함께 작업하였으며 자신은 '증언'과 볼코프를 지지한다고 소련 붕괴 이후 인정했다. 실제로 책을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책의 내용에 의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갈 까봐 자신의 사후에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실제로 출판은 쇼스타코비치의 사후에 이루어진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증언'의 내용에 비판적이라고 알려졌던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은 직접 비판을 가한 적은 없고, 사망 이후 자식들이 그렇게 증언했을 뿐이다.

실제로 '증언'의 진위 여부는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기는 하나,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은 그 내용이 대체로 진실임을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첼리스트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인 키릴 콘드라신,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피아니스트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활동중)와 딸 갈리나가 이전까지는 볼코프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소련이 붕괴하고 나자 입장을 바꿔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을 무시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체로 쇼스타코비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인정되고 있으며 특히 위서 운운하는 것은 모함에 가깝다. 게다가 '증언'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쪽은 쇼스타코비치를 애국자로 포장해서 내놓았던 붕괴 이전의 소련이었다.

1999년에는 솔로몬 볼코프 자신이 '증언'에 대한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 뉴욕 Mannes College에서 기자 회견까지 열었지만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1] 참조. 실제로 볼코프를 비롯한 지지자들에 의해 '증언'에 대한 비판은 모두 반박되었으나 쇼스타코비치를 잘 알던 지인들은 대부분 사망한데다 볼코프 본인은 원본 러시아어 원고를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고 공개할 생각을 하질 않으니 논란이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들어 보인다. 심지어는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자신의 사후 이러한 이미지를 갖기를 원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나올 지경이니(Richard Taruskin) 갈 데까지 간 셈이다.

'증언'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 첫번째. '증언'에 등장하는 일부 문장은 이전에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것과 일치하며 따라서 '증언'은 이것들은 짜깁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두번째. 핀란드어 번역자인 Seppo Heikinheimo가 무단 유출한 러시아어본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서명이 빠져 있다.(하지만 무단 공개된 러시아어판은 원본이 아닌 편집본이고 원본은 공개된 적이 없다.)

물론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대한 이전까지의 해석이 크게 바뀌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의 진위 여부가 음악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만한 일은 아니다.

'증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Testimony_(book) 참조.

소련 붕괴 후인 1990년대 후반 부터는 절충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이 많은데, 쇼스타코비치는 레닌 등 초기 혁명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계속 유지했지만 스탈린이나 후속 집권자들의 독선과 폭력에는 거부감을 느끼고 작품에 우회적인 비판과 풍자를 더했다는 식이다. 네 곡의 혁명 소재 교향곡(2, 3, 11, 12번)은 1905년부터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 때까지를 그린 표제음악 스타일이고,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드러낸 곡이라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를 '관제 작곡가' 나 '체제 비판자' 같은 정치적인 문제와 얽기 보다는 음악 자체만 놓고 평가해 보자는 '순음악' 계열의 움직임도 있다.[12] 이런 움직임은 서방이나 일부 망명 음악가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볼코프의 '증언'이 진서로 취급받던 1970~80년대에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에서 '선전성'을 걷어내고 냉정한 시각을 견지하는 해석이 나타났다는 점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수많은 소련 작곡가들과 함께 작품 전체가 금지곡으로 지정된 흑역사가 있었고, 음반 수입도 막혀서 해외에서 몰래 들여오는 LP를 숨어서 듣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한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국 정부의 태클을 씹어버리고 교향곡 5번을 연주하는 용자 기질을 보여준 바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 예술규제가 완화되면서, 이 때부터 서서히 국내 공연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우방국'이나 일본보다도 훨씬 뒤늦은 해금이었고, 다루는 레퍼토리의 폭이나 연주 수준에 관해서는 아직 개선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많기도 하다.

7 트리비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빗장을 꽁꽁 걸어잠그던 냉전 시대에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서방에서 대중적인 용도로 여러 차례 인용된 바 있다. 특히 바리에테 관현악단을 위한 모음곡에 나오는 두 번째 왈츠가 인기를 끌었는데, 신랄함 보다는 슬라브풍의 애수어린 곡조가 춤곡 이듬에 실리는 묘한 느낌 때문인지 영화나 방송, 광고 등지에 삽입되고 있고 스탠리 큐브릭이 마지막으로 감독한 아이즈 와이드 셧에도 삽입된 바 있다.

'축전 서곡'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테마 음악으로 쓰였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OST[13]에 5번 교향곡의 4악장을 패러디해 집어넣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크게 인기를 끌었던 모 단장이라는 애가 깽판치는 애니메이션에도 7번 교향곡 1악장이 컴퓨터 게임 장면에 삽입되는 덕스러움을 보여준 바 있다. 한국에서는 MBC의 개그 프로그램 중 '미스터 뚱'이라는 판토마임 코너에 발레 '황금시대'의 폴카가 BGM으로 깔린 적이 있다.

한국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이 작중에서 중요한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공연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로 2005~06년 사이에 7번 교향곡의 1악장과 4악장이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공연되었다는 보도가 집중적으로 나온 바 있다. 그리고 2005년에는 같은 악단이 김호윤의 지휘로 전곡을 녹음한 CD가 북한 유일의 음반사인 '광명음악사'에서 발매되었는데, 외국 클래식 작품 전곡이 들어간 최초의 북한 CD였다고 한다. 흠좀무.[14]

그리고 의외로 미소년형 외모였는데, 특히 10대나 20대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영락없는 해리 포터다(…). 아래 짤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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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위는 레프 오보린이 차지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기교는 완벽하나 감정 표현 면에서 다소 단조롭다' 였다고.
  2. 서구의 신 빈 악파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소련 내에서는 상당히 튀는 성향이었다.
  3. 현재의 사마라.
  4. 사실 이 레이드는 쇼스타코비치 작품부터 깐 것은 아니었다. 바노 무라델리라는 무명 작곡가가 쓴 '위대한 우정' 이라는 오페라가 스탈린을 빈정 상하게 했다고 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내 소련의 모든 음악계로 파급되었다.
  5. 물론 선배인 먀스콥스키가 이미 27곡이라는 경이적인 숫자로 미리 깨놨지만, 지금은 후배인 쇼스타코비치의 명성에 발리는 바람에 지못미. 사실 먀스콥스키 말고도 9곡 넘게 교향곡을 작곡한 작곡가는 꽤 많다. 9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당대 최고 수준의 A급 작곡가에 한정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6. 쇼스타코비치의 주변인들은 대체로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7. 교향곡 2번과는 다른 작품이다.
  8. 죽기 며칠 전에 쓴 작품이다.
  9. 독일어로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을 쓰면 Dmitri Schostakowitsch인데, 레=D, 미b=S, 도=C, 시=H로 풀이할 수 있다(Dmitri SCHostakowitsch). 노보데비치 묘지의 쇼스타코비치 묘비에도 이 네 음이 새겨져 있다.
  10. 이를 가지고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나타나는 강박성이나, 피아니스트로서 쇼스타코비치의 연주 스타일을 유추하는 음악학자들도 있다.
  11. 이는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반체제적이라며 금서화한 '증언'이라는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평가' 항목 참조.
  12. 망명 음악가들 사이에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대한 접근은 서로 다르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나 막심 쇼스타코비치는 '체제 비판자'라는 모습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는 '순음악 작곡가'로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강조하는 상이한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13. 모리오카 켄이치로(森岡賢一郎)가 음악을 담당한 '우주로부터의 메시지(宇宙からのメッセージ)'.
  14. 당연히 한국에서는 수입 금지 품목임. 일본의 쇼스타코비치 팬이 만든 사이트에서 정체와 평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평가는 매우 낮은 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