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첫 연인인 게르타 타로가 찍은 사진.
파리의 한 바에 앉아 있는 카파(프랑스, 1952년)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1]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뉴욕 월드 텔레그램과의 인터뷰 중.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어떤 입장에든 있지 않으면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목차
1 개요
Robert Capa.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출신의 종군 기자로 매그넘 포토스의 설립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스페인 내전부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도차이나 전쟁 등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최전선에 섰던 종군 기자였다. 생년월일은 1913년 11월 22일(부다페스트) ~ 1954년 5월 25일(베트남 타이빈 성).
국내에 발간된 관련 서적으론 본인이 저술한 자서전인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와 알렉스 커쇼가 지은 '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가 있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부모에게서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헝가리어: Friedmann Endre Ernő)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31년에 좌익학생운동을 하였고, 미클로시 호르티 당시 헝가리 섭정의 정치적 압제를 피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사진 에이전시 겸 통신사 데포트의 암실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1932년 11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사진으로 그는 사진 실력을 인정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고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프랑스의 파리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동료 기자이자 자신의 첫 사랑인 독일계 유태인 게르타 타로(Gerda Taro, 1910년 8월 1일 ~ 1937년 7월 26일)와 만나게 되었으며, 이름도 로버트 카파로 바꾼다.
2.2 스페인 내전
1936년, 23살인 그는 연인인 게르타 타로와 함께 스페인으로 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일으킨 스페인 내전의 상황을 필름에 담는다.
특히 1936년에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 1912.1.3.~1936.9.5, 24)의 전사장면을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종군기자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하지만 카파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이 사진은 죽을 때까지 조작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상당히 극적인 사진이었고, 사진 어디에도 총에 맞은 흔적인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쓰러지는 사람'을 찍었다거나, 연출을 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논란이었다. 그리고 카파는 이런 논란에 대해서 아예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논란에 어느정도 신빙성이 더해졌다. 물론 카파의 생애를 비춰볼때 '조작 같은 걸 할 사람인가?'라는 의문도 있고, 결정적으로 1990년대 사진속 남자의 신원도 위와 같이 밝혀지면서 조작설은 완전한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훗날 카파의 지인들을 통해 카파가 사진의 조작설에 대해서 별달리 왈가왈부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려졌다. 당시 전선은 교착상태에 총격전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참호 속에서 지루해하던 카파와 병사들은 장난삼아 참호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근데 운이 나쁘게도 그 순간에 총격전이 벌어져서 병사들이 죽고 다쳤다. 다같이 장난삼아 벌인 일이었지만 자신이 어느정도 부추긴 일이기도 하기에 역사에 남을 사진을 찍었지만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여인인 게르타 타로는 그가 잠시 파리로 간 사이에 브루네테 전투를 촬영하다 후퇴하는 공화국군의 전차에 깔려 죽고 만다. 그는 슬픔에 빠지면서도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2.3 중국
스페인에 있던 그는 1938년에 중국 국민당의 수장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위하여 그에게 사진을 의뢰한 것을 받아들여 중국 한커우에서 중일전쟁의 모습을 취재한다. 물론 촬영이 다 끝난 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2.4 제 2차 세계대전
전쟁당시에 찍힌 그의 모습.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성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 1944년 8월 18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38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가족들에게 간다.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을 시작으로 모든 전장에서 사진을 남겼다.
특히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엔 오마하 해변[2]에 상륙하는 제1파 부대와 함께 움직이며 전장을 사진에 담았고. 해변에까지 올라섰다가 간신히 되살아왔다! 이 사진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드는데 참고하기도 했다.
그는 군인들의 팔다리가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두 대의 콘탁스 카메라를 들고 106여장의 사진[3]을 찍은 후 겨우 살아남아 미국의 라이프(Life)지에 필름을 우송했다. 그러나 35mm 필름 네 롤, 120mm 필름 대여섯 롤을 받은 암실 담당자가 마감에 쫓긴 나머지 건조 도중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10장의 사진이 남았다고 한다. 카파의 입장에선 비운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 해프닝은 오히려 그를 종군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위 사진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라는 카피와 함께 라이프지에 게재된, 오마하 해변에 상륙 중인 미군 공격 제 1파 부대 병사의 얼굴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제116보병연대 K중대 소속의 '에드워드 리건'으로 남은 사진들 속에서 유일하게 신원확인이 가능한 병사였다. 뒤로 보이는 흐릿한 철 구조물들은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발명품이다. #1 #2
2.5 종전
전쟁이 끝난 후, 1946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 그는 이후에도 모스크바와 키예프등 당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소련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으며 제1차 중동전쟁의 현장에 가서 취재하였다.
1947년에는 유명인사들과 함께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하고, 1951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메카시즘으로 과거 좌익 운동 전력으로 인해 FBI의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2.6 베트남 전쟁과 죽음
그가 죽기 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그는 전쟁의 참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54년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프랑스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고, 그의 사망을 확인한 프랑스군 소속 베트남인 장교는 "사진기자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2.7 그의 유산
그는 죽었으나 그가 인류에 남긴 유산은 엄청나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가 촬영했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의 정신을 기려, 투철한 기자정신의 대명사가 되는 '카파이즘'이 생겨났다.
2.8 사생활 그리고 여성
그에게는 많이 여성들이 따랐는데, 이는 그의 외모와 함께 그의 기자 정신도 한 몫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앞에서 나온 게르타 타로의 원래 이름은 게르다 포호릴레스(Gerda Pohorylle)였으나 카파처럼 이름을 바꾸었다. 공산주의자였던 게르타는 남성 편력이 화려했지만 카파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고 사진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이후 청혼은 거절당하고,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사진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게르타가 공화국의 탱크에 치여 죽은 후 그 누구와도 결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일레인 저스틴(일명 핑키), 윈스턴 처칠의 며느리인 파멜라 처칠, 헤밍웨이의 부인이었던 마사 겔혼[4], 그리고 카사블랑카로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 등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2.8.1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사랑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당시 연합군 병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었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유럽 순회 위문 공연 중이었다. 파리 리츠 호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을 본 로버트 카파와 작가 어윈 쇼는 버그만에게 한눈에 반했고, 대담하게도 바로 그녀의 방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주제: 저녁식사, 프랑스 파리, 6일 6시 45분수신: 잉그리드 버그만
1. 이것은 공동의 노력이다.
2. 우리는 오늘 저녁 당신을 초대하는 이 초대장과 함께 꽃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의논해본 결과, 꽃값이나 저녁식사 비용을 지불할 수는 있으나 그 둘을 모두 지불할 여력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투표를 했고 근소한 차이로 저녁식사가 선정됐다.
3. 저녁식사 생각이 없으면 꽃을 보낼 수도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 이 안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4. 꽃 말고도 우리에게는 어정쩡한 재료들이 많다.
5. 우리의 매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자세히 쓰면 정작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것이다.
6. 우리는 6시 15분에 당신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7.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와 어윈 쇼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보낸 초대장
" 호텔 방에 앉아 꽃병을 바라보느니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초대를 받아들였다. "- 잉그리드 버그만
" 어머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카파를 만났고, 아주 멋지고 놀라운 그분과 사랑에 빠지게 됐죠."-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 < 로버트 카파 다큐멘터리 > 중에서.
버그만은 그들의 초대에 응했고, 두 젊은 종군기자는 금방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버그만의 두둑한 지갑 덕분에 바에서 나이트클럽으로 옮기며 파리의 밤을 달구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버그만은 영화 촬영을 위해 할리우드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후 카파는 버그만의 청에 못 이겨 잠시동안 할리우드에서 일했다. 카파는 둘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고, 기자들의 눈을 피해 어윈 쇼의 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또한 버그만이 출연한 알프레드 히치콕[5] 감독의 스릴러 영화 '오명'과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비극적인 멜로 영화 '개선문'의 스틸 촬영을 카파가 맡은 이유로, 촬영장에서 만나는 일도 잦았다.
잘생겼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유명 인사였던 카파는 할리우드 사교계에 쉽게 발을 붙일 수 있었다. 덕분에 일도 수월했다. 비록 종군 사진기자 출신이었지만, 버그만이 추천한 작가가 스틸 컷을 찍는 데에 반대하는 감독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예측할 수 없었던 전선에서 생생한 현장 사진을 담아냈던 그에게는 잘 짜인 대본처럼 돌아가는 할리우드는 영 매력이 없었다. "할리우드는 내가 발을 들여놓은 곳 중 가장 최악이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카파는 당시의 안정적인 생활을 끔찍해했다. 버그만 역시 자서전을 통해 "카파와의 사랑은 매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버그만은 카파와 결혼할 준비[6]가 되어 있었지만 카파는 그렇지 않았다.
- ↑ 요즘 시대에도 통하는 명언이다.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가까이 가서 찍으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스티븐 맥커리라는 유명한 사진작가도 마지막 필름한롤가지고 촬영할떄 주로 가까이 가서 찍거나 아니면 아예 안찍는다.
- ↑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곳들 중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곳이다!!
- ↑ 살점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오열하는 장교의 바로 옆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 ↑ 새벽 4시에 호텔방에 같이 있었다고... 카파가 거기에 왜 있었는지는 아직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 ↑ 후에 히치콕 감독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이창'을 찍었는데, 이는 카파와 버그만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 ↑ 사실 카파와 사랑에 빠졌을 당시 버그만은 혼인한 상태였다. 이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카파가 이혼을 말렸다고.
- ↑ 버그만은 카파가 떠난 후 남편과 이혼하고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