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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
공산당 개새끼해봐로 요약가능하다. 마녀사냥 이다. 간혹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던 공산간첩 엘저 히스도 목록에 들어있었으므로 마녀사냥이라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앨저 히스 1명이 공산간첩이었다고 마녀사냥이 아닌 게 될 규모가 애초 아니었다.
1 개요
1950~1954년 사이에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 근거 없는 무분별한 주장이나 고발을 비판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어원은 이 행위를 최초로 자행한 조지프 매카시의 이름에서 따왔다.
2 매카시즘 선풍의 전말
미 상원의원인 조지프 매카시는 1950년에 열린 공화당 당원의회에서 "중국을 공산당에게 빼앗긴 것은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며 "미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라는 발언으로 관심을 모았고 이는 전국적인 화젯거리가 됐다. 먼저 공화당에서 매카시의 주장으로 포문을 열고 뒤이어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이 주장에 동참했다.죄수의 딜레마?
이 때문에 미국 전역에서 반 공산주의를 넘어선 혐 공산주의에 가까운 분위기가 조장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문받았으며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1954년에 에드워드 머로 기자가 매카시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열린 청문회에서도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매카시의 주장은 힘을 잃는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200만 명의 명단을 공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매카시 의원이 모스크바 시내 전화번호부를 막 손에 넣은 모양이다."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후일 매카시의 이런 행동을 경력 위조, 상대방 비방 등을 이유로 끝나가던 정치생명을 이어가기 위함으로 보기도 한다.
3 재평가 논란
그 뒤 1995년 기밀해제로 공개된 미-영간의 러시아어 암호 해독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에 의해 매카시가 공산주의자 및 소련의 간첩으로 지적한 이들(가령 뉴딜 정책의 발안자인 해리 화이트, 그리고 로젠버그 부부 등)이 당시에 정말로 소련의 간첩으로 활약한 사실이 드러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지적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베노나 프로젝트에 의한다 하더라도관련 글 매카시의 '지적'이 재평가할 정도로 미국 안보를 공고히 하였는지는 의문이며 매카시의 주장으로 50년대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경직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현재 국내에 재평가 하면서 나도는 떡밥은 미국의 앤 콜터(Ann Coulter)[2]라는 정치평론가의 저서다.
그러한 역매카시즘 때문에 이후 거꾸로 반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미국에 팽배하게 되었고 소련 간첩을 열심히 잡고 신고하는 사람은 변태 취급을 받게 되어 오히려 미국의 방첩망에 큰 장애를 주었다' 라고 하며 현대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까지 들먹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독재국가도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안보를 핑계삼아 합리적이고 적법절차를 걸친 검증을 거치지 않고 오직 한 정치가의 선동에 휘둘려 인민재판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부터 흑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4 실제로 안보에 악영향을 끼친 매카시즘
매카시즘은 소모적인 공산주의자 논쟁을 일으킨 것 뿐 아니라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 소련 및 공산권 관계를 극도로 경직시켜 국가 정책에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특히 정보전에 있어서 막심한 손해를 끼친 사례로는 영화배우인 스털링 헤이든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헤이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 자원하여 독일점령지 유고슬라비아에 잠입, 당시 반독게릴라를 이끌던 티토를 지원하는 임무에 종사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티토와는 개인적 친분을 쌓게되어 전쟁이 끝나 귀국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공산 정권의 수장이지만 반소 성향이 상당히 강했던 티토였으니 이 인맥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망이 저절로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매카시에게 알려지자 그는(나라를 위해 적지에 단신 잠입하여 작전을 수행하고는 은성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에게) 공산주의자의 협력자로 매도당했고 결국에는 누명을 벗기 위해 밀고자 노릇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른다.
헤이든은 매카시즘 종식 후 할리우드에서 사실상 쫓겨난다. 그나마 반할리우드계 감독들인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이 배역을 줘서 연기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큐브릭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 《킬링》에서 주연을 맡았던 인연으로 주변의 만류와 주변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사이코 광신도(수도물 불소첨가가 성불구를 만들려는 소련의 음모라는) 핵 우월론자 잭 리퍼 장군 역을 맡기기도 했다.[3]
헤이든은 이 사실을 두고 평생 괴로워했고 티토와의 친분도 끝장나버렸다. 미국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 차버린 셈이었던 것이다.[4]
또한 당시 칼텍 항공우주공학과 교수였던 첸쉐썬 박사 또한 매카시즘 떄문에, 중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5년간 수감상태에 있다가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병사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귀국했다. 첸쉐썬 박사는 미국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중국의 우주개발과 핵개발을 주도, 중국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ICBM을 개발하고, 다섯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 핵무기 클럽에도 가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중국의 핵개발 및 미사일 개발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안보환경을 악화시켰다.
이미 1960년대부터 매카시즘은 반공적인 한국에서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 후보는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는 야당에게 "매카시즘적인 공격을 멈출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누가 누구한테
또한, 베트남전 해병대 참전 용사이자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G 마나,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무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웨슬리 피셸 교수[5]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930년대, 1940년대를 걸쳐 쌓아 온 제3세계 전문 지식인 집단으로써,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숙청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베트남 전쟁 참전을 비롯한 이 후 미국의 외교 정책이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근시안적 삽질성 대외 개입을 연발하게 된 원흉이며, 크나큰 해악을 남긴 실책이였다는 것이다.
피셸 교수의 경우 당장 본인이 1960년대 중반 까지만해도 대표적인 주전파이자 미국이 베트남에서 판돈을 점차 키워 나간 것에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깐 나도 잘못 된 정보를 받았기에 잘못 된 판단을 내렸던 거다"라는 식의 자기 변호성 발언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1950년대 이전 까지 미국은 물론, 서구권 전반에서 중국과 유라시아 변경사 최고 권위자였던 오웬 라티모어 박사를 비롯하여 이 시기 사상을 불문하고 중국, 소련측에 직접적인 연줄이 조금만 있어도 의심, 밀고 당하는 분위기 때문에 영향력이 큰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미국에서 대거 추방당했다.[6] [7]
오웬 라티모어가 책임자로 있었던 2차대전기 미국의 중국통 싱크탱크였던 China Hands의 구성원 모두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해 뭐 막상 중국에 대해서는 아는 바 하나도 없는 일자무식 정치인들과 선동꾼들에게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못 했으니 중국이 공산화 당했을 것이다라고 매도 당하며 미국에서 추방 당하거나 본인들이 활약했던 업계에서 억울하게 매장당했다. 상원의원이자 상원 대외관계 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8]는 완고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숙청당한 외교관 존 패튼 데이비스, 존 스튜어트 서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훗날 1970년대에 국회에 다시 초청하여 "당신들은 대중이 받아 들이지 못한 진실을 말해서 핍박 받았다"라고 말할 만큼 대아시아, 특히 대중국 외교와 정보계에서는 확실하게 맥카시즘을 통해 위축되었다[9]. 라티모어 못지 않게 당대 중국학의 권위자였던 존 K 페어뱅크 박사의 경우 자기가 속한 하버드 대학의 밥통이 워낙 강철이라 추방은 면했지만 이 사람도 청문회에 종종 끌려갔고, 무혐의로 풀려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훼방을 당했다. 위의 맥카시즘 옹호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오히려 맥카시즘 자체가 미국의 안보와 정보 태세에 큰 해악을 끼친 셈이다.
베트남 전쟁 사학자인 데이비드 마는 그의 저서에서 베트남전 개입 이전 미국의 국무부 자료를 보면 막상 베트남 현지의 사정이나 배경은 아예 관심 조차도 없이, 오로지 중공을 막아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집착만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베트남의 뿌리 깊은 불신의 역사, 당시 월맹 지도부측의 미국으로 향한 유화적 메세지 같은 당장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정보는 마치 일부로 무시한 양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이에 대한 원인으로 베트남전 개입 직전 세대에 터졌던 매카시즘 때문에 애초에 얼마 안 됐던, 그나마 미국과 월맹이 일제에 대항해 동맹이었던 OSS시절 부터 베트남과 관계를 맺었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싹 사라졌던 것을 주목했다[10]. 역시 베트남전 관련 언론, 학술 활동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현대도 대외 정책 전문가로 활동 중인 작가 제프 스타인은 2010년대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행정부가 베트남 시절과 똑같이 현지의 현실과 복잡한 권력 관계는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주제에 미국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며 이에 따라 삽질성 개입을 반복하는 근시안적인 인지부조화를 미국의 대외정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은 바가 있는데[11], 이 두 학자들이 베트남전과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두고 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이 비서구권 세계와의 대외정책에서 저지르는 삽질에는 구조적이고 의도적인 무지함이 가장 큰 원인이고, 이런 반지성주의의 씨앗이 미국 외교가에 퍼진 근원은 매카시즘이 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매카시즘이 미국의 지식인 사회와 미국의 정책 지도부 사이에 뿌려 놓은 해악은 심지어 현대 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5 문화계에 미친 사례
이 밖에도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붙였을 때 일부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의 동료배우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아남았는데 엘리아 카잔, 게리 쿠퍼 [12],그리고 영화배우 출신의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등이 그러한 영화인이다. 이후 매카시즘이 잦아든 뒤에 이들은 배신자란 낙인을 찍히고 제대로 영화인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엘리아 카잔으로 그가 1999년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받을 때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대단히 험악했다. 물론 존 포드 같이 대놓고 비난하며 맞서던 영화인도 있었지만.
6 미디어에서의 매카시즘
2008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4편에서 매카시즘 광풍을 희화적으로긴 해도 나름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를 빨갱이로 모는 CIA, 공원에서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는 피켓을 들고 단합대회하는 사람들. 다만 영화의 배경인 57년은 매카시즘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점이라는 건 애교로 넘어가주자.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노골적으로 매카시즘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영화는 스릴러와 인간승리로 포장했지만 원작은 블랙 유머로 매카시즘을 풍자하고 있다. 소설판에서 공산당 간첩을 강조하는 사람의 군대 시절 이야기는 매카시의 그것을 풍자했고 영화에서 그 의원 역시 매카시처럼 알코올 의존증에 포즈까지 흉내낸다. 심지어 영화 중간에 그 의원의 기록영상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새로 찍은 게 아니라 매카시의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이렇게 반공주의를 외친 사람이 바로 소련의 진짜 첩자라는 게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면서도 현실적인게, 사실 맥카시즘 시절 저런 고발과 의심의 광풍을 주도한건 전직 미국 공산당원들이었다. 2차대전 당시 소련과의 우호 관계 등을 고려한 것도 있고, 아직은 사상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풍토가 확고하게 강했기에 1910년대 1차 적색공포 시절 대대적으로 한번 탄압 당한 이후 다시 성장 할 수 있었던 미국 내 좌파 세력이 이 시절 갈려나가면서 밥그릇과 삶의 터전이 위기에 처한 전직 공산당원들이 서로를 마구잡이로 고발하면서 맥카시즘의 판도가 저렇게 커진 것이다. 당장 위의 차이나 핸즈 중국통 싱크탱크 숙청을 주도한 언론인 루이 F 버덴츠, 프레다 어틀리 같은 사람들은 모두 전직 공산당원이었다. 미국 헌법의 원칙을 숭상하며 적법한 절차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 영미식 보수주의,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 알콜 중독자 아저씨가 무죄추정의 원칙이고 법이고 나발이고 없이 사람 마구잡이로 아니면말고식 고발을 해대는 꼬라지도 보기 싫은데 저런 뿌리 없는 전직 빨갱이들이 서로 살아 남겠다고 아귀 처럼 물어 뜯으며 사회 분위기를 개판으로 몰고 있었으니 이 작태 자체가 이념을 떠나 눈꼴시러웠던 것도 무리가 아니며, 이렇기 때문에 맥카시즘을 끝장 낸 것도 정작 이들이 때려 잡으려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한 좌파가 아니라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같은 반공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자유주의 언론인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트럼보에서는 각본가인 달톤 트럼보가 겪는 고초를 통해 매카시즘의 야만성을 보여준다.
- ↑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매카시 견책결의안에 서명하면서 한 말. 보면 알겠지만 영어 be동사의 현재형과 과거형을 가지고 한 말장난이다.
- ↑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 보수 언론인이다.
- ↑ 특이한 것은 또 다른 밀고자 아돌프 만주(Adolphe Menjou)도 큐브릭의 영화 《영광의 길》에서 인간말종 프랑스 장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큐브릭의 할리우드 혐오가 잘 드러나는 사례.
- ↑ 덧붙이자면 영국의 SIS가 냉전 중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기위해 주로 사용한 창구가 유고와 체코였다. CIA가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을때 SIS는 외교행낭에 넣어간 달러 뭉치로 무기 메뉴얼까지 입수하고 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 ↑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등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미시건 대학의 싱크 탱크 베트남 고문그룹의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사람이다. 전쟁 중반에 반전파로 돌아섰다.
- ↑ 라티모어 교수는 당장 청조 말기 톈진의 미국인 영어 교사 부모에게서 나고 자라 중국어를 모국어 처럼 구사했으며, 적백내전과 중국의 대군벌시대, 국공내전으로 개막장 무법지대였던 1930년대 신장 위구르 일대와 몽골, 소련령 튀르키스탄에서 직접 수년간 도보로 여행하고,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의 고문으로 일했던,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아예 몸으로 직접 겪었던 미국인이기에 순수한 학문적인 명성 뿐만 아니라 아예 나고 자란 중국통으로 넘사벽의 명성을 자랑했다. 당연히 그가 추방 당하면서 새로 일자리를 찾아 온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는 왠 떡이냐 하며 꿀꺽 받아 아아주 잘 대접하며 89년 별세하기 이전에는 미국은 돌아 보지도 않았다.
- ↑ 특히 이 사람이 집중 연구 했던 몽골-만주 스텦의 중국 변경사는 아예 이 사람이 당시 학술 활동 따위 할 정신머리는 없었던 동양 국가들을 포함해 독보적이고 독자적으로 설립한 분야이기 때문에 특히 서양측의 시각으로 중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 쯤 읽어 보았을 교과서적 위치의 거물 학자이다.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된 심사도 없이 대충 눈에 드러난 연좌제적 성격의 전적과 의심, 여론 몰이 만으로 덜컥덜컥 추방했다는 거다
- ↑ 풀브라이트 장학금에게 이름을 준 그 사람이다
- ↑ 풀브라이트는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이와 별개로 조셉 맥카시의 마녀사냥질이 적법한 절차를 따른 안보 정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설치는건 경멸하며 강경하게 반대했고, 사실 제대로 된 안보관의 소유자라면 이게 당연한 모습이다
- ↑ Vietnam: State, War, and Revolution (1945–1946), 2013년 작 중
- ↑ 이 사람은 2006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 치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점도 모르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하여 주목을 끈 전적도 있다
- ↑ 희한하게 게리쿠퍼는 매카시즘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하이 눈에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 자체가 엄청나게 은유적이고, 여러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리 쿠퍼가 제대로 알았을지는 의문이지만, 각본가의 의도를 알았다면 아마도 출연을 거절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