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오드리 햅번 (로마의 휴일)
(1954)
그레이스 캘리 (갈채)
(1955)
안나 미냐니 (장미 문신)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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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본명그레이스 파트리시아 켈리 (Grace Patricia Kelly)
출생1929년 11월 12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사망1982년 9월 14일, 모나코(52년 10개월 2일)
왕가하우스 오브 그리말디
가족레니에 3세 (남편)
알베르 2세 (아들)
카롤린 공녀 (장녀)
스테파니 공녀 (차녀)
종교로마 가톨릭
신체169cm, 49kg
직업배우
서명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분야영화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6329 Hollywood Blvd.

1 소개와 생애

기품의 대표인 50년대 헐리우드 미녀 배우
세계 왕족 미인계보의 진정한 끝판왕이자 헐리우드의 자타공인 신데렐라 스토리

1950년대에 헐리우드에서 왕성히 활동하여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영광을 누리다가 모나코의 공비(公妃)가 된 신데렐라 스토리로 유명한 미국의 여배우. 1929년 11월 12일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9월 14일 모나코에서 교통사고로 만 52세의 나이로 사망.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독일계 미국인인 어머니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아버지 덕분에 꽤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춤과 연기를 배웠으며 졸업책에 존경하는 배우로 잉그리드 버그만과 조지프 코튼을 꼽았다. 모델로 경력을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14시간>에서 단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1953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본래 켈리가 맡은 배역은 진 티어니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티어니가 우울증을 겪자 켈리로 교체되었다. 켈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모감보>의 성공은 켈리에게 골든 글로브 상의 영광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눈에 드는 행운까지 안겨 주었다. 히치콕은 켈리를 데리고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제작했고, 그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히치콕의 영화로 인해 우아하고 침착한 냉미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1]이후에도 다작하며 연기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마침내 1954년에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렇게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화려한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이런 면에 히치콕이 붙여준 별명으로는 눈 덮힌 화산. 스캔들의 상대로는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런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덴 등이 있는데 이외에도 염문을 뿌린 상대는 더 많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의 상대역이었던 레이 밀런드와의 스캔들인데, 당시 밀런드는 켈리보다 22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어서 이 스캔들은 켈리의 커리어를 거의 작살낼 뻔 했다.[2] 그리고 러시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올렉 카시니의 아이를 임신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지만, 스캔들과 배우 경력이 끝날 것을 두려워한 켈리는 결국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고 낙태한 적도 있었다.[3]

1.1 여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

이후 몇 편의 영화를 찍고 또다시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에 캐리 그랜트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는데, 화보 촬영차 모나코에 들렀다가 일생일대의 전환이 찾아오게 된다. 모나코 공(公)[4] 레니에 3세가 켈리를 초대한 것. 이후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 여담이지만 재미있게도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 <상류사회>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켈리가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면서 불과 5년 여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1956년 4월 18일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일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로 켈리는 주로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5]라고 주로 불리게 된다. 그녀가 2달러를 선물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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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상 담당인 헬렌 로즈가 디자인한 웨딩 드레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라 요새도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가 나오고 있으며 많은 신부들에게 선택받고 있다. 하지만 몸매가 어지간히 되지 않는 이상 어울리기 힘든 타입의 웨딩 드레스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영국윌리엄 왕세손과 결혼식 때 입은 케이트 미들턴의 웨딩드레스가 켈리의 웨딩 드레스와 디자인이 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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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사진.

켈리는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1957년에 장녀 카롤린 공녀(公女), 1958년에 외아들 알베르 2세, 1965년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낳아 총 1남 2녀를 두었다.[6] 카롤린 공녀의 탄생으로 레니에 3세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생기자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를 넘기게 됐는데 이때 모나코 전역이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후 켈리 덕분에 모나코에 미국인 관광객이 폭증했다. 참고로 이 드라마틱한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 및 추측과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나시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세기의 결혼 이후, 안타깝게도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 했다. 켈리는 '배우 생활을 하며 매너를 지키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 따로 배울 것이 없다.'고 했지만, 공가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모나코에서는 주로 프랑스어를 썼는데 켈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서 언어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적응에 애로사항이 있었다.[7] 뿐만 아니라 공비로서 공가의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또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8] 게다가 시어머니, 시누이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시집살이를 꽤나 했으며, 남편인 레니에 3세는 모나코 내에서 켈리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헐리우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던 차에 1962년에 히치콕이 영화 <마니>에 켈리의 출연을 제안해 왔고 배우로 복귀하려 했으나,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이 도벽이 있는 캐릭터였던 것이 알려지자 품위 문제로 모나코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고 모나코 국민들도 반대해서 결국 무산됐다. 이로 인해 켈리가 출연한 영화는 1956년의 <상류사회>가 마지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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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13일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여 프랑스로 가던 중에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차가 그만 산비탈로 굴러떨어지는 교통사고가 났다.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녀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인 9월 14일, 향년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스테파니 공녀는 이 사고로 큰 트라우마가 생겨 한동안 엄청 고생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녀가 운전을 잘못하여 그녀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으므로 살인자라고 세계적으로 비난받았으며 별 이상한 루머까지 돌았었다. 스테파니 공녀는 "사고 당시에 어머니가 운전했다."고 계속 얘기해 왔지만 애석하게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켈리가 음주한 상태라 운전이 미숙한 스테파니 공녀가 운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는 루머가 지금도 정설인 것처럼 돌고 있으며, 심지어 사고 당시에 모녀가 다투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는 루머도 있다. 게다가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언니인 카롤린 공녀와 사이가 험악해졌고[9] 죄책감 때문인지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막장으로 살아서 구설수에 올랐다. 명색이 공녀임에도 모델과 가수로 활동하겠다고 나서기도 했고[10] 심지어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겠다며 서커스단과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몇 차례나 유부남들과 바람이 나서 가정을 깨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사생아를 낳기도 했다. 애들이 커가면서 지금은 정신 차리고 살고 있지만, 파란만장한 인생 탓인지 나이에 비해 할머니와 다름없을 정도로 폭삭 늙은데다 인상이 좋지 않으며 지금도 언니와는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다. 실제로 카롤린 공녀는 스테파니 공녀가 사생아를 낳았을 때 신랄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2 기타

AFI에서 선정한 "전설적인 여배우 50명" 중 13위에 랭크되어 있다.

뷰티풀피플닷컴(BeautifulPeople.com)에서 회원 12만 7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세계 왕족 외모 순위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에 랭크되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으로부터 "눈덮인 화산"이라는 평을 들었다(Grace Kelly's apparent frigidity was like a mountain covered with snow, but that mountain was a volc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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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 카롤린을 찍는 그레이스 켈리.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들은 켈리가 그렇게나 각별히 신경썼음에도 불구하고 피는 못 속이는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능가하는 화려한 스캔들을 자랑했다(…) 그런데 미모는 세 사람 모두 어머니 미모에는 ...못 미친다. 장녀 카롤린 공녀(Caroline, Princess of Hanover)는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거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등[11] 막장으로 살며 어머니인 켈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살 때 17살 연상인 필립 주노와 기어이 결혼했지만 켈리의 염려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주노가 바람을 피우자 카롤린 공녀 역시 맞바람을 피우다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그 후에 이탈리아 석유 재벌가의 막내아들인 3살 연하남 스테파노 카시라기과 속도위반으로 두번째 결혼을 하여 2남 1녀를 낳았다.[12] 애들도 낳으며 카시라기와 행복하게 잘 살았으나[13] 불행히도 카시라기가 요트 사고로 사망해 사별했다. 그 이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사는 듯했으나 3살 연상의 친구 남편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빼앗아 세번째로 또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 1999년에 불혹을 넘겨 넷째 자녀인 알렉산드라 공주를 낳고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하는 듯 했으나, 아우구스트 공작은 폭행 관련으로 구설수에 자주 올랐으며## 2009년 6월부터 지금까지 별거중이다. 사실상 이혼 상태라 봐도 무방할 정도. 게다가 아우구스트 공작은 폭행도 모자라 태국 푸켓의 해변에서 젊은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사진 # 기사 스크랩 아우구스트 공작이나 카롤린 공녀나 끼리끼리 만난 셈[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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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켈리와 차녀 스테파니 공녀

차녀 스테파니 공녀 (Princess Stéphanie)는 젊은 시절에 뒷날의 패리스 힐튼처럼 온갖 막장짓으로 부모 속을 썩인데다 그나마 힐튼은 사업가 가문 출신답게 막장짓으로 돈이라도 벌어들이지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결혼과 이혼을 2번 했으며, 위에 나온 것처럼 사생아도 한 명 있다.

외아들인 알베르 2세 (Albert II, Prince of Monaco)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전직 수영 선수로 자신보다 20살이나 연하인 금발 미녀 샤를린 위트스톡과 2008년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결국 자신의 난잡한 사생활과 이미 태어나 있는 사생아들을 못 감당하겠다며 도망가려던 여자를 붙잡아 강제로 결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15] 이러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콩가루 집안 중 하나일 수밖에 없게 됐다.

콩가루 집안답게, 집안 구성원 간의 사이도 당연히 대대로 좋지 않다. 카롤린 공주와 스테파니 공주의 사이가 그레이스 공비 사후부터 심각하게 안 좋은 건 워낙 유명하고, 알베르 2세가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카롤린 공주가 알베르 2세의 결혼을 방해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유인즉 알베르 2세가 정식 결혼으로 아이를 얻지 못하면, 공위를 자기 아들인 안드레아 카시라기가 잇게 되므로. 그런데 어릴 적 그렇게 이쁘고 멀쩡하던 서양인들은 게이같다고 깠지만 안드레아도 술, 담배, 마약으로 맛이 갔고 2013년에 한 살 연상의 콜롬비아 재벌 상속녀 타티아나 산토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아들부터 낳고 2014년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안드레아의 여동생 샬롯 카시라기는 15살 연상인 약혼남 모로코프랑스인 코미디언 겸 배우인 가드 엘마레와 약혼하고 2013년 12월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까지 결혼 소식이 없다.[16] 그래서 명색이 가톨릭을 신봉하는 나라인데 정작 공족들은 꼭 애부터 낳고 결혼한다고 말이 많다(…)

3 출연작

연도작품
195114시간(Fourteen Hours)
1952하이 눈(High Noon)
1953모감보(Mogambo)
1954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이창(Rear Window)
갈채(The Country Girl)
에메랄드(Green Fire)
원한의 도곡리 다리(The Bridges at Toko-Ri)
1955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1956백조(The Swan)
상류 사회(High Society)
  1. 아이스퀸 "ice queen"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뒤에 진짜 모나코 공비가 된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
  2.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켈리가 주로 한참 연상의 유부남 배우들과 스캔들이 잦았던 이유가 파더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뻘인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 실제로 켈리는 그녀의 부모가 낳은 다섯 자녀들 중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아이였다고. 훗날 배우 활동을 접으면서까지 레니에 3세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자신의 결혼으로 친정 가문이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거란 생각에서였다는 비화가 있다.
  3. 아이러니하게도 이 낙태한 사실이 훗날 켈리가 결혼할 때 임신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는 비화가 있다.
  4. 모나코의 국가 원수는 왕(王, King)이 아닌 공(公, Prince)이다.
  5. 켈리를 모나코 왕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니에 3세가 공이므로 켈리는 '공비(公妃, Princess)'라고 해야 옳다.
  6. 참고로 세 자녀를 두었으나 임신은 세 번 이상 했다. 켈리는 알베르 2세를 낳고 스테파니 공녀를 갖기 전에 몇 번 임신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유산을 거듭했다고 한다. 스테파니 공녀가 늦둥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유산한 뒤에 본 자식이라 더 애지중지했다는 비화가 있다.
  7. 실제로 프랑스어가 미숙했던 켈리는 자녀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대신 가정교사가 그녀의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8. 그러나 어쨌든 레니에 3세는 켈리와 약 23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자녀를 셋이나 낳았고 함께 정성껏 길렀다. 또한 켈리가 사고로 숨지자 생중계되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공의 체통을 다 내려놓고 대놓고 흐느끼며 사별로 인한 슬픔을 못 견디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켈리 사후 20여년 뒤에야 죽었지만 그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쭉 혼자 살았다. 이런저런 점을 보면 잡음은 있었어도 켈리를 아내로서 나름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9. 이 역시 스테파니 공녀가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는 루머를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카롤린 공주와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까지 벌인 적도 있었다... 흠좀무.
  10. 정작 본인 명의로 발매한 앨범은 혹평받고 망했다(…) 그나마 잘 알려진 건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In the Closet에서 Mystery Girl 명의로 나레이션을 한 것인데 음색은 꽤 괜찮다는 평을 받았다.
  11. 일반인들 입장에선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거나 미니스커트를 입는게 뭐가 나쁜가 싶겠지만, 카롤린 공녀의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왕가나 공가 사람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해서 충분히 문제가 된다. 비슷하게 스웨덴의 마들렌 공주도 워낙 쇼핑과 파티를 즐겨 'Princess Party'로서 스웨덴 언론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짜 막장이었던 카롤린 공녀에 비하면 마들렌 공주는 그냥 평범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정도뿐이었지만.
  12. 안드레아(1984년생), 샬롯(1985년생), 피에르(1987년생)이다. 알베르 2세가 미혼일 땐 안드레아가 공위계승권에 가까웠고 한때 외모도 출중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샬롯 역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패션감각을 지녀서 예전부터 인기 많은 셀렙이었다.
  13. 실제로 카시라기는 카롤린 공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였으며, 이 당시 카롤린 공녀의 모습을 보면 정말 행복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14. 아이러니하게도 엄연한 군주국인 모나코 공국보다 없어진 왕실인 하노버 집안 몸값이 더 높아서(…)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과의 결혼으로 유럽 대륙 정식 왕족 반열로 대우받고 있다. 그래서 카롤린 공녀로선 굳이 이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15. 카더라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2012년에 거행된 결혼식 당시에 샤를린 공비가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게다가 신랑인 알베르 2세는 그런 신부를 보고도 달래주기는 커녕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어서 구설수가 심화됐다. 뿐만 아니라 결혼 후 얼마간 공식석상에서 샤를린 공비는 억지로 미소짓는 듯한 서글픈 표정을 보였다. 또 2014년 초까진 결혼한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임신 소식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윌리엄 왕세손케이트 왕세손빈은 그보다 한 해 전인 2013년 7월에 이미 아들을 낳았다. 물론 이 부부는 젊은 사람들끼리 결혼한 거란 걸 감안해야 하지만
  16. 엘마레가 유대인이라 공실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사실혼 관계로 얼마든지 아이를 함께 기를 수 있으니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