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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겼다 찰리 채플린?
Alfred Hitchcock
(1899. 8. 13 - 1980. 4. 29)
드라마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Drama is life with the dull parts cut out.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
이름 | 앨프리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
분야 | 영화, 텔레비전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위치 | 영화 : 6506 Hollywood Blvd. 텔레비전 : 7013 Hollywood Blvd. |
1 개요
영국의 영화 감독. 본명은 Sir Alfred Joseph Hitchcock, KBE.
스릴러 영화와 현대 영화 제작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 영화사 최초의 스타 감독[3] [4] [5]
2 경력
1899년 8월 13일 런던 출생. 부모는 양계와 과일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으며, 가톨릭 신자였다. 후에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영화들을 만든 감독답지 않게, 어렸을 때는 무척 겁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공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6]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서 전기공학을 거쳐 런던 대학교의 미술학과에 진학하지만, 집안 형편 탓에 학업을 그만두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전선제작회사 기능공을 거쳐,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의 소개로 런던 백화점 광고 회사에서 일했다. 이때 그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한다. 훗날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읽은 것이 자신이 공포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처음 영화사에 들어간 히치콕은 타이틀작가, 미술감독 등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알마 레빌을 처음 만나 훗날 결혼한다. 1922년, 시모어 힉스와 함께 단편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를 처음 공동 감독했고, 1925년 《기쁨의 정원》을 내놓으며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한다.[7] 그는 1926년작 《하숙인》으로 평론과 흥행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 된다. 이후 《너무 많이 안 사나이》, 《39계단》, 《사보타주》, 《젊음과 순수》, 《사라진 여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특히 1929년 발표했던 자신의 첫 유성 영화 《협박》[8]은 그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서 명성을 다지는 첫 시작이었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그를 불러, 1940년 《레베카》[9]로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히치콕은 할리우드와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스릴러 및 서스펜스 걸작들을 쏟아냈다. 《의혹의 그림자》, 《오명》, 《다이얼 M을 돌려라》[10], 《이창》, 《나는 결백하다》, 《현기증》[11],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을 거쳐, 1960년 스릴러 영화의 영원한 걸작으로 꼽히는 《사이코》를 만든다. 《사이코》는 절묘한 촬영술과 완벽한 음악의 활용 등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참고로 영화 속에 등장한 거금 4만 달러가 히치콕이 여러 번 언급한 맥거핀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이 세 작품이 불과 1년 주기로[12] 나왔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1955년부터는 TV 프로그램 《히치콕 극장》에서 자신이 직접 사회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6년에는 추리/미스터리 소설 잡지인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을 내기도 했는데, 그는 잡지가 얼마 가지 않아 폐간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수준 높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해난터에서 냈다.
《새》 때까지 히치콕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이후 《마니》, 《황옥》, 《찢어진 커튼》 같은 영화들이 별 성과를 못 거두면서, 나이가 들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프렌지》를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 1976년, 77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영화인 《가족 음모》를 만드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0년, 그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4년 동안 영화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너무 많이 무섭게 했던 사나이"였다.
3 특징
히치콕이 쓴 여러 편집과 촬영 기법은 당대에는 비교할 데 없이 독특하고 새로웠으며, 히치콕 이후엔 액션 영화고 공포 영화고 일반 드라마고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작품에서 재생산되면서 잘 쓰이고 있다. 1950년대 영화인 《현기증》에서 쓴 카메라 360도 회전 기법이 한국 드라마 《질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쓰이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심심하면 한국 드라마에서 써먹는 기법이 되었을 정도. 《이창》, 《현기증》, 《싸이코》 등에서 쓰인 관음주의적 주관적 시점의 쇼트, 이동 쇼트의 과감한 사용, 오버 헤트 쇼트 등. 현재 영화제작 관련 전공자에게 영원한 연구과제논문이 나오고 있다.(…)
《로프》에서, 단 한 번의 커트 없이 롱테이크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 원 컷 무비[13]
이런 영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능력에서도 탁월함을 보이고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는데, 맥거핀이 대표적인 예.
그 외에 상업 영화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온갖 실험적인 시도를 한 감독이기도 하다. 1944년작 《구명 보트》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명선 한 척 위에서만 진행된다든가, 《이창》처럼 아파트 한 쪽 면을 실내 세트에 만들어놓고(심지어 세트에 가구까지 배치했다고 한다)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걸 보는 영화라든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컷으로 가는 영화를 만든다거나 등등.
하지만 이런 독특함과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전성기 시절에는 평론가들에게 그다지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흥행 영화 잘 만드는 감독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히치콕을 추종하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14] 히치콕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걸 책으로 내면서 [15] 히치콕에 대한 평가가 바뀐다. 장면 하나 하나를 히치콕이 어떻게 만들어냈고, 어째서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가, 하는 서술을 담아냈고 그제야 히치콕의 생각과 연출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흥행감독이나 상업 영화나 찍는, 작품성은 형편없는 감독 등 여러모로 평론가에게는 큰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타계 이후 거의 영화의 신이라는 불멸의 칭송을 받고 있다. 특히 장면장면마다 다른 영화에서 오마주가 되곤 하는데, 《사이코》의 샤워신은 여러 영화에서 패러디가 되고, 새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데에도 한 몫 했다. 다만 지금 《새》를 보면, 와이어가 보이거나 인형이라는 티가 좀 나긴 한다(…). 감독의 한계가 아닌, 당시의 기술적 한계 그러나 적절히 필름에 새의 이미지를 그려 넣기도 해서 현실감을 살렸고, 당시에는 큰 이슈가 된 특수효과였다.
유명한 히치콕 빠가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드 팔마의 초기작에 자주 인용되는 장면 역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 또한 누벨 바그에서는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 《도살자(Le Boucher)》(1970)를 비롯한 '스릴러 3부작'은 대놓고 히치콕에게 바칠 정도였으니…. 특히 누벨바그의 감독들에게는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남긴 그의 발언은 그야말로 고전이 되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문소리로 서스펜스를 자아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운 거리에서 죽은 고양이와 폐물들이 나뒹구는 것보다, 밝은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 있습니다.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알려드릴게요. 네 사람이 포커를 치러 방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네 사람 모두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단지 놀랄 뿐이죠. 그러나 나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남자가 포커판이 벌어지는 탁자 밑에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포커를 하고, 시한폭탄의 초침은 폭발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의미한 대화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죠. 관객은 '지금 사소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 거란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요.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게임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죠. '차나 한잔 하지.' 바로 이 순간 관객의 조바심은 폭발 직전이 됩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서스펜스'라는 겁니다."
빈틈없고 재빠른 영화 촬영도 히치콕의 특징 중 하나. 히치콕은 영화 촬영 전에 영화 전체를 콘티로 만든 후, 콘티와 단 하나의 차이도 없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때문에 현장에서의 수정 같은 게 없어 영화 촬영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런 촬영은 배우들은 철저히 감독의 부품이 되어야 하는 식[16]이라 배우들에 따라선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식의 촬영은 묘하게도 히치콕이 제작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제작사에서 히치콕의 완성품에 불만을 가지고 영화를 재편집하려고 시도해도, 재편집에 쓸 장면 같은 게 히치콕의 촬영 필름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히치콕의 빠른 촬영 스케줄은 제작사 측이 투자 부담을 더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대 미녀 배우들을 발굴하고, 주인공 삼아 촬영하기를 즐긴 감독이기도 하다. 특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미모를 가졌지만, 남자 주인공이 호감이라도 보이면 단칼에 거절할 것 같은 차가운 이미지의 금발과 푸른 눈의 배우들을 좋아했는데, 이에 대해 어린 시절, 가톨릭식의 엄격한 금욕주의 교육으로 억압되고 플라토닉한 부부생활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던 히치콕의 성욕이 표출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부인인 엘머는 갈색 머리를 가진, 지적이고 기가 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영화 속에도 은근슬쩍 엘머로 대표되는 지성적인 여성들을 주인공 남성의 동반자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삽입하기도 했고, 말기엔 딸이 그런 여성들을 연기하기도 했다. 잉그리드 버그먼(버그먼은 발굴한 게 아니지만)을 주연으로 여러 영화를 찍었고, 순진하고 공주 같은 이미지로 주로 통하던 그레이스 켈리의 숨겨진 매력을 발굴해내기도 했으며(실제로 그녀는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 《현기증》을 통해 킴 노백의 관능미를 발산하게 했다. 후반기 발굴한 티피 헤드런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새》의 여주인공으로는 호연. (딸 역시 배우가 되었으니 바로 멜러니 그리피스.)
4 작품 목록
1923 《Number 13》, 《Always Tell Your Wife》[17]
1925 《쾌락의 정원》
1926 《산 독수리》[18], 《하숙인》
1927 《내리막 길》, 《쉬운 선행》, 《링》
1928 《농부의 아내》, 《샴페인》
1929 《맥스맨》, 《협박》
1930 《살인》, 《주노와 공작새》, 《엘스트리의 부름》[19]
1931 《야바위》
1932 《부자와 이방인》, 《17번》
1934 《위대한 왈츠》, 《너무 많이 안 사나이》
1935 《39계단》
1936 《첩보원》, 《사보타주》
1937 《젊음과 순수》
1938 《사라진 여인》
1939 《자마이카 여인숙》
1940 《레베카》, 《해외 특파원》
1941 《스미스 부부》, 《의혹》
1942 《파괴자》
1943 《의혹의 그림자》
1944 《구명 보트》
1945 《백색의 공포》
1946 《오명》
1948 《패러다인 사건》, 《로프》
1949 《염소자리》[20]
1950 《무대 공포증》
1951 《열차 안의 낮선 자들》
1953 《나는 고백한다》
1954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1955 《도둑 잡는 방법》, 《해리의 고민》
1956 《누명 쓴 사나이》(《오인》)
1958 《현기증》
1959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60 《싸이코》
1963 《새》
1964 《마니》
1966 《찢어진 커튼》
1969 《황옥》
1972 《프렌지》[21]
1976 《가족 음모》
5 기타
그가 하던 여러 말들은 영화사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있다.
- "나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답니다. 그는 오로지 카툰만 그리지 않아요? 만약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영화에서 그를 찾아보는 것도 잔재미이다. 《새》에서 애견 2마리를 데리고 말없이 가게에서 나오는 신사라든지, 트렁크 가방을 들고 바삐 달려가는 세일즈맨이라든지, 창문을 청소하는 청소부, 경찰관, 지나가는 사람. 별의별 카메오로 나온다.
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에 후보로 엄청 오르고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1968년 공로상을 받았을 뿐이다. 아카데미의 굴욕[23]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 의상 디자이너 이디스 헤드와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1924년작인 《하얀 그림자》의 경우, 필름이 소실되어 히치콕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만 떠돌다가, 2011년에 뉴질랜드 필름보관소에서 필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필름보관소 사이트에서 동영상을 업로드하여 일반 네티즌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확인 결과 현재 사이트에서 무료로 볼 수는 없고 DVD 판매로 바뀌었다.밑에서 2번째 항목 참고
2012년 《사이코》를 기획, 촬영 그리고 후에 호평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 《히치콕》이 개봉하였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이자 조감독이었던 앨마 러바일의 노고 또한 재조명한다.[24] 앤서니 홉킨스가 히치콕, 헬렌 미렌이 앨마, 스칼릿 조핸슨이 재닛 리, 그리고 제임스 다시가 앤서니 퍼킨스로 분하였다.
- 참고할 만한 자료
백괴사전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또 이상한 짓(#)을 해놓았다.[25]
6 일화
- 평소 이미지와 다르게 유쾌하고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었다. 영화 촬영 중 조명기사 한 사람이 자신은 몸이 밧줄에 결박당한 채로 스튜디오에서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자랑하자 히치콕이 그에게 내기를 걸었고, 조명기사를 밧줄에 묶고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설사약이 잔뜩 들은 커피를 건넸다고 한다. 결과는…
이런 건 유쾌한 장난이라기보다는 범죄에 가까운… ㄷㄷ또한 TV 드라마 시리즈인 《히치콕 극장》에서는, 자기가 감독하지 않은 작품이라도 앞뒤에 꼭 직접 등장해서 작품 내용과 약간 관련된(?) 개그를 하고는 했는데, 이것들이 아주 걸작이다. 온갖 블랙 코미디와 함께, 광고를 사이에 집어넣는 스폰서들을 신랄하게 까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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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가 자신에 대한 리포트를 쓸 때 히치콕이 도움을 줬다. 그러나 교수의 평가는 C였고 이유는 조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히치콕은 손녀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 자신의 이미지 마케팅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히치콕은 인터뷰에서 "카메오로 출연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다" 라고 말은 했지만, 매 영화마다 자신이 감독한 영화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항상 자신이 화면의 중심에 보이도록 장면의 구도를 잡아놓고 카메오 출연장면을 찍었고, 자신의 이름을 본뜬 잡지와 TV시리즈를 만들었다. 감독경력 초창기에는, 영화계에서 일하는 주변 동료들에게, 일부러 자신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영화 제작자들 귀에 들어가도록 퍼뜨려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사이코》가 개봉된 뒤, 히치콕은 어떤 남자로부터 아주 재미있는 항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제 딸이 《디아볼릭》을 본 후부터 목욕을 하지 않으려 하더니, 《사이코》를 보고 나선 샤워도 하지 않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히치콕은 그 남자에게 간단하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은 드라이 클리닝을 하시죠.
- 티피 헤드런의 딸 멜라니 그리피스는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실사 크기의 헤드런 인형이 들어가 있는 모형 관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헤드런과 히치콕 사이에 점점 금이 가다가 《마니》 촬영 당시, 티피 헤드런과 히치콕이 아주 심하게 말싸움을 했는데, 이때 헤드런이 히치콕한테 돼지라고 모욕을 했다. 당연히 히치콕은 분노했고, 다시는 헤드런과 작업하지 않았다.
- 《사이코》를 완성하고 히치콕은 주변 동료들을 불러 비공개 시사회를 가졌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영화라며, 특히 샤워신은 영화사(映畵史)에 있어 길이 남는 장면이 될 거라고 히치콕을 칭찬하고 있는데, 가만히 영화를 보고 있던 히치콕의 부인이자 영화 편집자이기도 한 엘마 러바일이 샤워신은 다시 편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마가 말하길, "재닛 리가 이미 죽었는데 침을 삼켰어요". 그 말을 들은 히치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다음 날 샤워신을 재편집했다고 한다. 그 외에 본래 히치콕은 샤워신에 자넷 리의 비명소리 외에는 무음으로 처리하려 하였는데 엘마가 버나드 하먼이 새로 가져온 음악을 듣고 샤워신에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여 현재의 샤워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부모님으로부터 엄격한 가톨릭식 금욕주의 교육을 받은 데다가, 결혼하기 전까지 여성과의 교제를 해본 적이 없던 히치콕은 여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영화 촬영도중 생리 기간이었던 여배우가 시나리오의 물속에 들어가는 장면 촬영을 거부했는데, 히치콕은 이때 카메라맨으로부터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히치콕이 결혼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동정 마법사의 위엄실제로 스릴러적 연출에 있어서는 가히 신급인 히치콕이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 적잖게 나오는 남녀주인공의 로맨스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개연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썸도 제대로 탄 적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시점에 사랑 고백을 한다든가… 근데 바로 상대방이 받아준다…응?[26]
- 은근히 변태적인 성향이 영화에 묻어나온 데다 금발 미녀들을 선호하며 굴린 일화 때문에 오해를 사곤 하지만, 부인인 엘마 러바일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훗날 엘마는 영화 편집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중 갑자기 히치콕과 결혼한 이유를 인터뷰어에게 질문받자, "폭풍우 치는 날씨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이 더욱 예민해져 있는 여성에게, 갑자기 동료가 비를 다 맞아가면서 고백을 하면 당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걸요"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부인도 히치콕 못지않게 재능 있는 데다 성깔 있는 인물이어서, 히치콕은 공처가로 유명했다. 엘마가 저녁을 차릴 시간인 6시 전에는 항상 영화 촬영 스케줄을 끝냈고, 배우 선정이나 대본 수정, 최종 편집에도 엘마가 깊게 관여했다고 한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에 징집대상으로 지목되었지만, C3[27]로 분류되어 면제받았다. 그러나 국내기지에서만 조건부로 복무를 할 수는 있었기에 그는 왕실 공병대의 사관생도 연대에 자원입대했다.
- ↑ 히치콕의 별명 "The Master of Suspense"를 직역한 표현.
- ↑ 코미디, 섬세한 드라마 등에서도 뛰어나지만, 주로 서스펜스로 유명해 이런 별명이 붙었다.
- ↑ 감독으로서 극장 간판에 얼굴이 실린 최초의 감독이다. 그 전에 감독이 극장 간판에 실린 사례는 없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찰리 채플린이 최초의 스타 감독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으나, 채플린은 대중에게는 희극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며, 영화인들에게는 감독과 배우 외에도 편집, 각본, 음악 등을 모두 담당한 먼치킨 영화예술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 ↑ 덕분에 각종 영화 매체나 평론가, 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감독을 뽑을 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 ↑ 심지어 감독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던 195-60년대 한국에서도 개봉 당시 대대적으로 이름을 내세워 홍보했던 감독이기도 했다.
- ↑ 어릴 때 아빠의 심부름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아빠의 쪽지를 전해 받은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히치콕을 감옥에 10분 정도 가두었다고 한다. 아빠의 장난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실제로 그는 경찰 외에도 달걀과 자동차 운전을 무서워했다.
- ↑ 이미 《13번》이란 빈민층의 생활을 다룬 코미디 영화를 감독, 제작했지만, 제작비 조달 실패로 중단했던 경험이 있었다.
- ↑ 이 영화는 영국 영화사상 첫 유성 영화이기도 하다.
- ↑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감독상은 받지 못했는데, 그 해의 감독상 수상자는 《분노의 포도》를 만든 존 포드였다.
- ↑ 그의 유일한 3D 영화이다. 21세기에 3D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3D로 찍은 작품이다. 놀라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보다 입체경이 약 60여 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무성영화 시절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이 3D가 본격적으로 광고에 적극 활용되던 시기였는데, 지금과 달리 눈의 피로가 워낙 심하고 2D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대중화되진 못했다. 《다이얼 M을 돌려라》 역시 개봉 직후 금방 2D로 상영되었다.
- ↑ 이 영화는 2012년 영국영화협회가 발간하는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전 세계 846명의 영화평론가, 감독, 시나리오작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영화 조사에서, 1962년부터 2012년까지 50년 동안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누르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 ↑ 차례로 1958, 59, 60년
- ↑ 영화상의 시간은 끊김이 없지만, 실제로는 한 번에 촬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영화촬영 기술상 10분 넘게 연속으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10분쯤 될 때마다 각 배우들이 돌아가며 자연스러운 내용상의 이유로(술을 가지러 가거나 다른 물건을 가지러 간다거나 하면서) 카메라 쪽으로 다가가 카메라를 완전히 가려버려서 화면을 까맣게 만들어 촬영을 멈추고,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필름을 갈아 끼운 다음 그 상태 그대로 촬영을 이어갔다. 《로프》를 자세히 보면, 약 10분 주기로 배우가 카메라로 다가 오고, 화면이 깜깜해진 다음 0.1초 정도의 어색한 끊김이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화면을 가리는 배우 등 뒤에 있는 다른 배우들의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천재 거장 히치콕이 연출한 이상, 자세히 여러 번 보지 않으면 물론 모른다.물론 당시 관객들은 영화만 보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 ↑ 실제로 트뤼포는 부드러운 살결부터 시작해 한동안 히치콕 스타일을 자기 영화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 ↑ 이 책이 바로 히치콕/트뤼포다. 동명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어 2016년 개봉했다.
- ↑ 이 부분은 약간의 예외가 있는 게, 몇몇 배우들과는 상의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여러 히치콕 영화에서 주연을 한, 세계적인 일류대 프린스턴 대학교 출신 엘리트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가 있다. 《현기증》 같은 영화를 촬영할 때 의견을 물었던 적이 꽤 있었다고.
그래봤자 의견 참고로 끝이었겠지만그러나 스튜어트만큼 주연을 많이 했던 캐리 그랜트와는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고, 이처럼 어차피 특별대우 받은 배우가 주연배우들 중에서도 극소수였기그랜트는 대학 안 나왔는데, 학벌주의인가때문에 대부분의 배우에 대해서는 부품 취급했다고 지적할 수 있긴 하다. - ↑ 두 작품 모두 미완성작
- ↑ 히치콕 장편 영화 중 유일하게 유실된 영화. 제작 당시에는 영화사 내부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으며 개봉되지 않았다가, 《하숙인》의 흥행으로 1927년 5월에야 개봉되었다. 흥행 성적 역시 좋지 못했다. 훗날 히치콕은 이 영화에 대해 '끔찍한 것'이라 회고하며, 자신 역시 이 영화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 영화 협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는 영국 영화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유실된 작품을 다시 찾기 위해, BFI 75 Most Wanted라는 리스트를 공개했는데, 이 영화는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영화 역사가들의 성배'라고 강조했다.
- ↑ 상영 시간 10분의 단편 코미디 영화. 현재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 ↑ 히치콕 본인이 실패작이라고 인정한 영화.
- ↑ 여성들을 강간 살인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에 대한 스릴러 영화이다. 한국영화 《살인의 추억》과의 차이점이라면, 초반에 이미 범인이 누군지 나온다는 점. 그런데 범죄 장면보다 더 관객들을 겁먹게 하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극중 사건을 수사하는 영국 경찰 간부가 일마치고 집에 귀가할 때마다 그를 위해 그의 부인이 저녁식사를 정성스러운(?) 영국 요리
아아, 진짜 스릴러로 준비하여 대접하는 장면(심지어 극중 설정으로는 매일 요리학원을 열심히 다니는 부인아아악, 진짜 잔인해)이다. 결론적으로는 그 경찰 간부(남편)가 그 음식들을 제대로 먹는 장면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씹다가 몰래 뱉는 장면은 있다. 영국 요리/증언 항목 참조. - ↑ 영국 기자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시는 게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 무덤덤하게 저 한 마디만 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겠지만, 보통은 '여긴 유명세와 달리 할리우드일 뿐이야. 뭘 기대했어?' 라는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 ↑ 이런 거장의 진면목을 한 번도 못 알아봤다는 거니까 굴욕 맞다. 히치콕 본인도 이걸 마음에 담아서인지 공로상을 받을 때 "쌩큐!" 한마디하고 얼른 내려갔다는데,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짧은 수상소감이다.
- ↑ http://www.telegraph.co.uk/culture/film/film-news/9832084/Mrs-Alfred-Hitchcock-The-Unsung-Partner.html
- ↑ 영문판 번역본으로써 글씨가 모두 파란 색이라서 구분이 안 되는데, 잘 살펴보면 글자들 사이에 링크가 몇 개 숨어 있다.
- ↑ 예를 들어, 영국 정보국에서 지시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처음 만난 남녀공작원이, 정부가 지정한 사람을 며칠 동안 찾다가 그로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 남자주인공이 그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때 갑자기 여주인공이 울며, "나는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근데 그런 당신이 사람을 죽이려 계획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어? 니가 사랑하는 거랑 공작원 임무랑 뭔 상관이야?남자주인공은 "사실 나도 그렇소. 미안하오."사랑해서 사람 못 죽일 거면 공작원 애초에 왜 했어? 공작원이 우스워?진짜 장난 하냐? 사랑 참~ 쉽죠~잉 - ↑ 비대한 몸집과 알려지지 않은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