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파일:Attachment/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CRASSUS.jpg

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 ~ BC 53

어째 창작물에는 항상 뚱보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말랐다.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1 생애

본래 집정관을 지냈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1]로 푸블리우스는 마리우스 - 술라의 내전 와중에 마리우스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킨나의 술라파 박해를 피해 도주했던 크라수스는 술라의 2차 로마 진격 당시 휘하의 무장으로 합류, 술라 휘하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술라의 오른팔이 되어 숙청당한 반술라파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큰 재산을 벌었으며[2][3], 그 외에도 권력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사업을 벌여 부를 쌓았다. 그의 사업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소방서를 매수해서 불끄는 것을 늦추는 사이 불에 탄 집을 싸게 사들인 것이었다. 심지어는 "다 타고 팔래, 그냥 싸게 팔래?"라는 케이스도 있었다고.(...)[4][5] IMF 친구들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어찌나 크라수스의 빚 독촉이 심한지 친구들이 차라리 이자를 내는 쪽이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로마 제일의 부자인데도 평소에는 소박한 음식을 먹었고, 자기 사는 집 외에는 별장을 지은 적도 없었다고 한다. 구두쇠여야 돈을 모으지 않겠는가 2008년 포브스 지가 역사적 인물들 중에 갑부들만 뽑아 그 재산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한 순위에서 전체 75위중 8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여기서 포브스 지가 현재 가치로 환산한 크라수스의 재산은 약 1698억 달러(2016년 달러-원 환율 기준으로 202조 3167억 원)[6].

이렇게 모은 막대한 자금력[7]을 바탕으로 당시 정계의 유력자로 떠오른다. 정계에서는 폼페이우스와는 라이벌 관계였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후원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제안한 삼두정치에 참가하면서 로마 정계를 장악하다시피 하게된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구성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해적 소탕 + 동방 정복,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비견되는 군사적 성공이 없었기 때문에 점차 삼두 가운데서 약세로 밀리게 된다. 돈으로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던 카이사르 마저 갈리아 정복으로 막대한 를 얻으면서 점차 크라수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크라수스도 삼두정치 이전에 스파르타쿠스노예반란을 진압한 군공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노예 반란이라는 사건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다른 나라의 왕이나 야만족의 군대와는 달리 노예와 싸워 이겼다는 것을 그다지 명예로운 승리로 여기지 않았다[8]. 게다가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바로 폼페이우스가 개선식을 했기 때문[9]에 그 빛에 가려져버렸다. 폼페이우스가 전차를 타고 화려하게 행진한 것과 달리 크라수스는 겨우겨우 우겨서 소규모의 개선식을 했을 뿐이다.

이렇듯 다른 두 경쟁자에 비해 군공이 초라한 처지였던 크라수스는 무리하게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했다. 사실 당시 파르티아가 특별히 로마를 공격한 것도, 지원이 들어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공격은 명분도 필요성도 없었다. 그 때문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노린 것은 특히 '부유한 파르티아의 재물'을 탐낸 측면이 많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과도한 욕심 탓인지, 로마군 지휘관의 평균적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졸속 지휘를 한 끝에 카르헤 전투에서 참패, 그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10] 게다가 대장기마저 파르티아에게 강탈당했으며,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마저 목숨을 잃고 다수의 로마군이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는 참사를 당했다.[11]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군기를 잃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지지만, 유달리 명예를 중시하고 시민들 대다수가 참전 군인이던 로마사회에서 대장기를 잃었다는건 나라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다.

여담으로 이 대장기를 되찾기 위해서 파르티아 원정은 계속되었는데, 카이사르가 시도하려다가 암살되었고, 후에 최대 유프라테스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러기 까지 너무나 힘들었다.

2 평가

일반적으로 크라수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우선 그 최후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카르헤 전투가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치욕적인 패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돈 욕심이 많았으며 인격이 영 그랬던 것도 욕 먹기 딱 좋은 거리다.(…)

그러나 크라수스에 대한 이런 평가는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당시 역사 기록에서는 크라수스를 단순한 졸부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그는 로마 공공을 위해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12]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로마 정계에서 그 무게감이 대단하고 위엄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군사적인 재능이 취약해 말로가 비참하긴 했어도 그것만으로 지금같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크라수스가 그렇게 부족한 인물이었다면 아예 삼두의 일인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후대의 2차 삼두정치때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레피두스[13]의 무존재감이 크라수스에게도 덧씌워지는 감이 있는데 당대의 평가에서 삼두정치를 주도한다고 여겨졌던건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다. 카이사르야 말로 당대엔 이 둘을 조율하기 위해 꼽사리 낀 인물 정도로 여겨졌었다.[14]

현대의 기준으로도 그리고 당시 시각으로도 크라수스는 재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당시 기록에도 크라수스는 소위 '기사' 계급, 즉 자산가 계급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가 (고위층 자제들이 큰 빚을 지는게 일상화되던 시절에서도)막대한 수준의 빚에 허덕일때 그 빚 모두를 보증섰던 것이 크라수스고 본인부터가 최대의 채권자였다. 갈리아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독립하기 전까지 카이사르를 막후에서 조정한 것이 크라수스였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또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15] 삼두정치에 참여한 직접적인 이유도 당시 새로 편입된 동방 속주의 징세 업무를 맡았던 기사 계급[16]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해마다 8명만이 뽑히는 법무관이 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개중에서도 크라수스는 수석 법무관이었다. 거기다 당시 최전성기를 맞아 로마 최고의 장군이란 평가를 받으먀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질만큼 로마 정계의 거물이었다. 직위나 경력이 더 높은 인물이야 원로원에 드글드글했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유력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두 사람으로 압축됐고 원로원은 이들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걸 감안하면 크라수스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가 이렇게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역사로 동인지를 쓴다는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를 3류 인간으로 썼기 때문도 크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며 로마와 카이사르에 대한 빠순심이 지나쳐서 나머지는 폄훼하는 경향이 강한 작가이다. 실제로 이러한 로마인 이야기의 만행으로 로마사의 여러 인물이 실제와는 다르게 유독 한국일본에서만 형편없는 인물로 평가절하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역사학과에 진학해서 제대로 로마사를 공부하게 되면 로마인 이야기와 실제 역사 및 평가의 괴리감에 몸서리치는 학생들도 있다. 본 항목의 크라수스, 키케로 등이 그 대표.

다만 군사적 재능의 부족과 그에 따른 미비한 군공이 끝까지 크라수스의 발목을 잡았다. 고대 로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하며 성장한 정복국가였으며 시민 대다수는 참전 경력이 있거나 곧 참전할 예비군이었기에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군대와 군사적 업적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군사적 재능과 공적이 부족한 사람이 최고위에 오르기가 대단히 힘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구조[17]다 보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어마어마한 군 경력은 크라수스에겐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리우스 - 술라의 시절을 거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병을 동원한 쿠데타가 공공연히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사병의 규모와 군사적 재능의 유무가 최고권력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가르는 조건이 되는 시절[18]이 오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과 능력에 대한 크라수스의 부담감은 더 늘어났을테고 실제로도 삼두정치가 진행될수록 크라수스의 위치는 점차적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보다 한단계 낮아진 이 둘의 조율자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을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를 결국 승인해주긴 했어도 두 사람 다 크라수스의 만용에 가까운 행동에 크게 놀랐고 지휘관급 인재와 병력을 더해줄 정도로 크라수스의 원정에 불안감을 가졌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빈약함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로 이 두 사람은 크라수스가 현실에 안주하며 자기들의 완충지대 역할 정도에 머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야망은 이 둘의 밑에서 양자를 조율하는 수준에서 머물정도로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를 한번에 만회하기 위한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다가 본인 능력의 한계로 비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크라수스의 사망으로 완충지대가 사라져버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곧 서로 대립하게 됐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면전이 시작되게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대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어떻게 죽었는가"이다. 설령 패배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로마 귀족답게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다면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 하지만 크라수스의 죽음은 그런 장렬한 최후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것이 사후 크라수스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해 파멸해버린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크라수스이다.

아들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로, 갈리아 원정등에서 "솔개를 낳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평가받았으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총애받았던 인물.

2.1 문제의 군사적 재능

중증의 영웅 덕후 여사님 덕에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저평가된 측면이 있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만큼은 딱히 저평가됐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의 가장 큰 군사적 공적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의 경우,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스파르타쿠스가 초인적인 지휘력을 발휘하여 거의 오합지졸좆밥에 가까운 노예나 거지로 이루어진 군대로 로마 정규군을 박살낸 거물 중에 거물이었으므로 당대 로마인들의 의도적인 외면좆밥한테 깨졌으니 쪽팔렸겠지을 감안한다면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한 그의 군사적 재능도 나쁘지 않다고 평가 할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경쟁자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능력이 너무나도 넘사벽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재능으론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의 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다.

카이사르의 경우 당시 갈리아가 대규모의 내전과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약화됐다고는 하나 늘상 더 적은 병력으로 압도적인 숫자의 갈리아 군대를 번번히 격파했으며 특히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될만한 베르킨게토릭스와의 결전에서는 초반의 패배를 극복하고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격전 끝에 항복시켰다. 갈리아 군대도 로마 정규군에 비하면 현격한 질 차이를 보이지만 아무리 그 차이를 크게 잡아도 스파르타쿠스가 이끌었던 노예 군단의 질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거기다 카이사르는 수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20] 승리했지만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군보다 더 많은 병력[21]인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의 수에비족중 가장 강력한 세력인 아리오비스투스와 브리튼족의 세력중 가장 강력한 카시페이우스를 고전끝의 이이제이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갈리아족중 네임드가 강한 인두티오마투스와 가장 교활하기로 소문난 암브오릭스를 계략으로 몰락시켰다. 이러하니 박한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폼페이우스와의 비교에선 더더욱 초라해진다. 폼페이우스항목에서도 나오듯 폼페이우스의 군공은 화려함 그 자체이다. 특히 지중해 해적 토벌과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22]와의 전투는 왜 폼페이우스가 천재 장군이라고 불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폼페이우스가 싸운 군대들도 대부분 크라수스가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정예군들[23]이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나 세르토리우스[24]같은 적 지휘관들도 스파르타쿠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다시 한번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로마인의 의도적 외면을 감안하더라도 크라수스의 공적이 폼페이우스와 비교할 수준이 못되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내부 인물로는 더 이상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25]에 처했을때 사실상의 비상수단으로 법률을 어겨가며[26]전권을 위임하여 투입한 인물이다. '마그누스'란 별명[27]이 괜히 붙은게 아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카르헤 전투에서의 어마어마한 대삽질이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크라수스의 인생과 행적 모두에 있어 박한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카르헤 전투는 시작부터 크라수스의 오판을 바탕으로 억지로 이뤄졌으며[28] 그렇게 억지로 시작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는 적국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29] 동맹국의 조언[30]을 무시함은 물론, 적국의 계략에 휘말린데다[31] 부하의 조언[32]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지휘관인 크라수스가 최악의 판단만을 고집한 결과 로마군은 기병위주의 적군에게 유리하고 보병위주의 아군에겐 불리한 최악의 장소인 사방이 뻥 뚫린 평지에서 적과 마주쳤고 전투 와중에도 크라수스는 별다른 지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로마군은 병력상의 우위[33]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2만, 포로 1만이라는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비록 파르티아가 후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침공도 막아냈고 그를 물리친 아우구스투스도 전쟁보단 화친을 선택했을 만큼 만만치 않은 국가였다곤 하지만 그 점이 크라수스의 패배를 가려주진 못한다. 간단한 반증 사례로 카르헤 전투 이후 패잔병 1만을 수습해 달아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그 병력만으로도 파르티아의 반격을 막아낸다. 이외에도 카르헤 전투 당시 파르티아군을 이끌었던 수레나스의 탁월한 능력이나 당시 파르티아군의 합성궁의 성능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역시 크라수스의 무능을 가려주진 못한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였다면 애시당초부터 수레나스의 계략에 휘말려 평지로 진격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며 이는 다른 능력은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는 안토니우스도 파르티아 침공때 산맥을 따라 진공했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카르헤 전투 이전에도 로마군이 비슷한 수준의 기병을 가진 아르메니아와의 전투에서 기병이 움직이기 힘든 지형에 아르메니아 기병을 몰아넣어 승리한 적이 있다. 파르티아 기병이 로마 군단병보다 강해서 진게 아니라 크라수스의 능력이 수레나스보다 못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합성궁의 경우 역시 근접거리에서 직사로 쏜게 아니라면 로마군의 견고한 방패를 뚫지는 못한다.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 궁기병의 화살에 로마군의 방패가 뚫린건 파르티아의 활이 유달리 강해서가 아니라 근접거리까지 파르티아 궁기병의 접근을 허락해서 발생한 일이다. 사실상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결정타를 가한건 궁기병이 아니라 중무장 기병인 카타프락토이였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만약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같은 당대의 명장들이 나섰다면 카르헤 전투같은 대참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34] 이는 후대에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침공했을때 동맹국인 아르메니아가 배반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없이 부대를 후퇴시킨 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당대의 경쟁자인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음을 증명해준다 할 것이다.
  1. 본 항목의 크라수스의 아들 이름 역시 푸블리우스다. 이 당시 로마인의 이름은 개인이름 + 씨족이름 + 가문이름의 3단계로 구성 돼 있는데 씨족명과 가문명은 거의 고정됐고 개인명만 바뀌는 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문제는 이 개인명의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것. 덕분에 이 당시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거기서 거기인 수준. 아버지-아들 이름이 같았던건 예사고 수백년 뒤의 후손 이름도 똑같아서 후대 사람들을 골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다.
  2. 물론 이게 크라수스만 욕먹을 일은 아니다. 술라 휘하의 무장이라면 이 때 다들 많이도 챙겨먹었다. 크라수스는 좀 지나치긴 했던 모양인데, 어느 무고한 백만장자를 고소하자 술라가 격분하여 크라수스와 언쟁을 벌였고,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크라수스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혹은 지나친 약탈행각을 막기위해 본보기로 삼은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딱히 대단한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
  3. 이후 반술라파의 명예회복이 이뤄지면서 크라수스를 포함해 반술라파의 재산을 챙겼던 사람들은 원래 소유주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계속 소유할 수 있었다.
  4. 이 기상천외한 수익창출에 후대 사람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크라수스의 재산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일화가 되었다. 거기다 일화로 소개되는 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고 내용을 깊게 다루지 않는 책에선 아예 그런 방법만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5. 어린이용 학습만화중에 하나에서는 한수 더 떠서 상대가 거래를 거절하자 불을 안끄고 가려고 하고, 집주인이 뒤늦게 거래에 응하자 '흥정하는 동안 집이 더 탔다' 라며 처음 제시한 돈의 반만 주는 내용도 나온다.
  6. 참고로 2016년도 대한민국 1년 예산이 대략 387조 정도
  7. 전해지기론 BC 67년 당시 로마의 1년 예산이 2억 세스테리우스(이것도 폼페이우스가 시작한 동방원정 이후 급격히 불어난 예산이다.)였는데 크라수스의 개인재산은 1억 7천만 세스테리우스였다고 한다.
  8. 그 때문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기록은 기록덕후 로마인 답지않게 대단히 부실한 편이다.
  9. 폼페이우스항목에도 나오듯이 폼페이우스도 스페인 정벌을 끝내고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참가하길 원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도착 전에 반란 진압이 끝나버리자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던 반란군 패잔병을 토벌하곤 자신이 반란을 진압한것처럼 로마에 보고서를 보낸다. 처음부터 이 반란을 부끄럽게 여기던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이 가지는 비중을 낮춤과 동시에 크라수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그 보고서를 인정하고 폼페이우스의 개선식 명분에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을 곁다리로 덧붙여버린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가 험악해진건 당연한 수순.
  10. 파르티아가 포로로 잡힌 크라수스의 탐욕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목구멍에 녹인 황금을 부어서 죽였다는 일설이 전해지지만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이야기. 기록상으로는 파르티아군 지휘관인 수레나스가 제안한 사실상의 항복권고에 가까운 회담을 병사들의 강압에 마지못해 받아들여 만났다가 자신을 잡으려는 수레나스의 계략을 확인하고 저항을 시도하다 지휘관이 포로로 잡히는 걸 막으려는 측근의 손에 현장에서 죽었다. 이후 파르티아가 크라수스와 닮은 뚱뚱한 로마군 포로를 데려다 크라수스처럼 꾸미고 모욕을 줬다는 기록을 보면 만약 실제로 생포당했다면 험한 꼴을 봤을 가능성이 높다.
  11. 이때 끌려갔던 크라수스 휘하의 로마군 포로들은 파르티아 동쪽 변방의 국경선을 지키는 강제노역에 처해졌는데 이때 전한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면서 유배온 로마군들과 접촉했다는 설이 있다. 상세한 내용은 카르헤 전투 참고.
  12. 물론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위해 자비로 공공사업을 벌이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후 로마에서 벌인 대규모 행사에서 재산의 10분의 1을 썼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쓸 땐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13. 폼페이우스가 반란을 진압했던 레피두스의 아들이다.
  14. 물론 협약이 비밀리에 맺어지면서 초반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세명의 정치적 동맹을 눈치채지 못했다.
  15. 물론 중증의 영웅 덕후 여사님은 절대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외려 채무를 가지고 크라수스를 이용했다는 주장까지 하시고 계신다.
  16. 로마는 세금 징수권을 경매에 붙였다. 높은 징세액을 적은 사람이 징세권을 얻는 방식. 당시의 동방 속주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처음 약속한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7. 키케로가 괜히 유명한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집정관이 됐음을 자랑한게 아니다. 그런 키케로도 본인이 짬밥이 안 맞는다고 금방 때려치웠지만 참전 경력도 있고, 군사호민관을 지냈던 군필자였다. 거기에 당시 로마 공화정이 겪던 극심한 대내외적 혼란덕에 유력 정치인의 군사적 공적이나 능력이 더더욱 중시되고 또 필요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18. 이걸 못해서 망한 대표적 케이스가 마리우스 사후 로마를 통치했던 킨나다. 술라 사후 술라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여러 마리우스파들도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술라파 장군들을 이기지 못해 끝장이 났다. 카이사르-폼페이우스의 분쟁만으로 이 시기의 로마를 내전기라고 부르는게 아니다.
  19. 이런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의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小 카토이다. 생전에는 일반 로마 시민과 반대 노선인 옵티무스파의 거물로 활약하는 바람에 로마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다 패배한 후, 의관을 정제한 뒤 플라톤의 저서를 읽다 배를 가르는 극도로 강렬한 방식의 자살을 선택하면서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많은 로마 시민들은 小 카토의 자살을 장렬한 죽음으로 여기고 생전과 달리 동정과 지지를 보냈는데 그 수준은 카이사르가 직접 小 카토의 주장과 자살 선택을 반박하는 글을 대중에게 발표했어야 할 정도로 강렬했다.
  20. 더군다나 역사에 보기드문 소수 병력으로 다수가 농성한 성을 포위 공격하는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
  21. 마지막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군대의 규모에 대해선 정확한 숫자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크라수스의 진압군보단 훨씬 적은 규모였음은 분명하다.
  22. 폰토스 왕국의 왕으로 로마의 영향력으로 약해진 폰토스 왕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평생에 걸쳐 로마와 싸웠다. 한때는 폰토스 왕국의 영역을 크게 넓히기도 했지만 술라루쿨루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탈탈 털려버리면서 결국 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자살했다. 잦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로마군과 맞섰지만 술라-루쿨루스-폼페이우스로 이어지는 로마 명장 라인에 정말 그림같이 털리면서 후대엔 로마군용 전투력 측정기 취급을 당하기 일쑤인 안습한 인물. 이 항목에서 자주 까이는 여사님은 아예 자기 책에서 대놓고 비웃을 지경
  23. 심지어 해적들도 당시 로마와 대립하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지원을 받아 사실상 정규군에 가까울 정도였다.
  24. 마리우스파의 장군으로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자 스페인으로 가서 반기를 들었다. 스페인 전 지역을 장악하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의 술라 정부에 대항했고 폼페이우스를 상대로도 5년이나 버텼을 정도로 유능했던 장군. 전성기의 폼페이우스도 궁지에 몰아넣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세르토리우스를 직접 해치우진 못했고 결국 수하에게 암살당했다.
  25.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스페인 반란의 진압. 당시 원로원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투입된 폼페이우스도 전쟁을 쉽게 끝내진 못했다.
  26. 술라가 원로원 강화를 위해 세밀하게 정해놓은 연공서열에 따른 진급 규정. 이 규정에 따르면 폼페이우스는 나이가 너무 어려 스페인 원정군같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 직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27. 영어로는 'The Great'로 '위대한' 이라는 뜻이지만 당시로서는 알렉산더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군사적 능력이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된다는 자부심으로 애용했다. 시작은 술라가 반 장난으로 붙였지만 본인이 능력으로 이를 인증한 셈.
  28.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와 적대하지도 않았고 외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29. 기병을 위주로 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평탄한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수도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
  30. 아르메니아의 왕이 파르티아의 기병을 피하기 위한 산악지대 우회 진격을 조언했다.
  31.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때 협력을 했던 사람을 매우 신뢰하여 현지 안내인으로 썼는데 이 사람은 이미 파르티아의 사주를 받은 상태였다
  32. 사막지대 횡단 대신 강을 따라 진격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과 마주쳤을때 충분한 휴식 후 전투를 하자고 조언했지만 이 역시 무시당했다.
  33. 로마군은 총 병력 4만에 육박했고 파르티아군은 1만에 미치지 못했다.
  34. 그 이전에, 그들은 군공 세우겠다며 잘 지내던 강대국을 침공해서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을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