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제임스 스튜어트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1)
게리 쿠퍼 (요크 상사)
(1942)
제임스 캐그니 (양키 두들 댄디)
(1943)
험프리 보가트 (아프리카의 여왕)
(1952)
게리 쿠퍼 (하이눈)
(1953)
윌리엄 홀덴 (제17 포로수용소)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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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게리 쿠퍼 (Gary Cooper)
본명프랭크 제임스 게리 쿠퍼 (Frank James Cooper)
국적미국
출생1901년 5월 7일, 몬나타 주 헬레나
출생1961년 5월 13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직업배우
활동1925년 – 1960년
학력그리넬 칼리지
신장191cm
종교미국 성공회가톨릭
가족베로니카 쿠퍼 (1933 – 1961), 1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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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만인의 연인이였던 남자.[1]
존 웨인과 더불어 서부극의 대부.[2]

1.1 데뷔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 출신이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Frank James Cooper). 1925년에 지인의 권고로 이름을 게리(Gary)로 바꿨다.

영국에서 몇 년간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은 아이오와에서 나왔다. 졸업 후에는 잠시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영 신통치 않아 관두고 이후 몇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1927년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무성 영화 《날개》(Wings)[3]에 화이트 생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190이 넘는 우월한 기럭지와 잘생긴 얼굴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1929년작 《버지니아》에서 인상적인 서부극 연기를 선보였으며 1930년작 《모로코》에서는 세계적인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출연해 스타덤에 오른다. 한때 쿠퍼는 2년 연속 가장 수입이 많은 스타였고 세금도 가장 많이 냈다.

1.2 작품

쿠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역 다 합쳐서 115개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IMDb 기준) 대표작으로는 《요크 상사》와 《하이 눈》,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특히 《요크 상사》와 《하이 눈》은 쿠퍼에게 2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겨준다.[4]

그 이외에도 《Mr. 디즈씨, 도시에 가다》, 《양키스의 자존심》[5]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지명되기도 했으나, 아쉽게 후보에만 데만 그쳤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도 처음에는 게리 쿠퍼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본을 본 쿠퍼가 단칼에 거절했고, 이후 버틀러 역에 동갑내기 미남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낙점되자 쿠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좆망 할 것이고, 클라크 게이블은 개좆망 할 것이다."[6] 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현실은...[7]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작품 《해외 특파원》과 《사보타주》에 쿠퍼가 출연하길 원했으나, 이 역시 쿠퍼가 거절했다. 허나 이후 개봉된 해외 특파원을 보고 쿠퍼는 "출연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1.3 스캔들

쿠퍼는 1933년 샌드라 쇼와 결혼하고 외동딸 마리아 쿠퍼를 두었다. 그러나 쿠퍼는 결혼 전이나 후나 시도 때도 없이 염문설을 퍼뜨려댔으며, 개중에는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었다. 쿠퍼가 20대 때 동성애자 배우 앤더슨 롤러(Anderson Lawler)와 수개월간 연인 관계를 맺었고 동거까지 했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진 작가였던 세실 비튼과 연인 관계였다느니, 심지어는 절친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열애설도 있었다.[8] 원래 잘생긴 남자 배우와 게이 루머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동성애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여성과의 염문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것이 바로 여배우 퍼트리샤 닐과의 관계였다. 퍼트리샤 닐과는 1949년 영화 《마천루》에서 같이 공연한 것을 계기로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끝내 쿠퍼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러나 아내인 쇼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끝끝내 이혼에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닐은 낙태를 하게 된다.

이 일로 쿠퍼와 쇼는 잠시 별거했고, 닐은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대신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고, 그녀의 여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건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9]

쿠퍼도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색마 기질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듯 보였으나 1957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밀렌 드몽조와 또 한 번 염문설을 터뜨리며 다시금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런 그의 호색한 기질은 그의 딸인 마리아 쿠퍼가 대놓고 깠을 정도.

참고로 쿠퍼는 여성을 유혹하는데 단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이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한다. 이는 짤방으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요지는, 정말 저 세마디 말로 유혹이 가능하다기 보다는 그만큼 경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쿠퍼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남에 키까지 컸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알아두면 좋은 얘기인데,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빌리 와일더 감독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다. #

1.4 죽음

쿠퍼는 1960년 4월 자신의 전립선에 암이 생겼음을 알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폐와 뼈로 전이된 상황이었다. 이후 쿠퍼는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5월 13일 쿠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10]

쿠퍼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은 절친한 친구이자 배우였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쿠퍼를 대신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던 중 "쿠퍼가 위중한 상태이다." 라고 울먹이면서 알려졌다.

1.5 평가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켜 "제가 만약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게리 쿠퍼를 백악관으로

또한 미국의 모 정치인은 "저 사람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이러다 정치인들 인기 다 떨어지겠군." 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적었듯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시나리오 제조기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작품에서 구축된 것이 많으며, 결정적으로 《요크 상사》에 출연해 원조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대로 각인되었다. 1차대전에 참전했고 공화당 지지자였다가 민주당으로 바꿨다.

좌우간 당시 미국인들이 얼마나 게리 쿠퍼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는지는 Puttin' On The Ritz[11]의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Dressed up like a million dollar trouper
백만장자 배우가 된 것처럼 차려입고
Trying hard to look like Gary Cooper (Super Duper)
게리 쿠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게리 쿠퍼 덕후로 유명하다. 대학 시절 쿠퍼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기 위해 결석했다고. 흠좀무


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생전에 자동차 만지기를 좋아했고 세차도 자신이 직접 정성들여 손수할만큼 차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1939년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자 당시 최고급 차인 두센버그를 사서 라이프지에게 자랑하는 모습.

2 웨스턴 샷건의 등장인물

웨스턴의 보안국 국장. 만 54세의 청춘(?)으로 웨스턴 전체의 치안을 책임지는 중역이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은 외모와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제니퍼 로페즈가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이시네요"라고 틱틱거릴 정도. 평상시엔 농땡이를 피우며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국장 직위를 포커쳐서 따진 않았는지 능력있는 모습 또한 자주 보여준다.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보안국 본부가 공격당할 것을 예측하고, 오아시스가 보안국 본부를 공격할 당시 완전히 포위된 와중에도 C4를 미리 빼돌린 뒤 옥상까지 유인한 다음 C4를 폭파해서 적 병력을 날려버렸다. 이 때의 대사가 상당한 명대사. "연방 보안국 건물 따위야 새로 지으면 그만이지만, 국가는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후 지원군을 이끌고 국회의사당에서 저항하던 쿠데타군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는 연설[12]을 하여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 54세의 청춘(?)이라며 자기 입으로 말한다...
  1.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최초의 미남스타인 루돌프 발렌티노의 뒤를 이은 가장 미국적인 전설적인 미남.
  2. 둘다 미국 서부극을 상징하는 배우들이지만 연기 스타일은 달랐다. 존 웨인이 전형적인 Badass 스타일에 호쾌한 서부극 주인공을 연기했다면 게리 쿠퍼는 이런저런 사건과 고민에 자주 휩싸이는 소시민적인 서부극 주인공을 연기했다.
  3.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4. 참고로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 역시 2013년까지는 2회였다. 쿠퍼 이외에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2번 수상한 배우는 프레드릭 마치, 스펜서 트레이시,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숀 펜 등이 있다. 이후 이 기록은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링컨 그 자체였다는 찬사를 받았던, 이 시대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로 남아있다.
  5. 이 영화에서 쿠퍼는 루 게릭 역할을 맡았다.
  6. "Gone With The Wind is going to be the biggest flop in Hollywood history. I'm glad it'll be Clark Gable who's falling flat on his nose, not me."
  7. 알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완전히 개발살 내버리며 초대박을 쳤다.
  8. 쿠퍼가 사망한지 2달도 안 되어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을 함으로써 그런 의혹에는 더욱 불이 붙었다.
  9. 참고로 퍼트리샤 닐은 2010년 타계했다.
  10. 사망 6일 전은 쿠퍼의 생일이었는데, 쿠퍼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1. 어빙 벌린이 1929년 작곡한 곡. 1982년 독일의 뮤지션 타코(Taco)가 리메이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12. "군대의 최고사령관은 국민일세. 자네들은 지금 그 국민에게 총을 겨눴다는 것을 생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