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모리카와 준에서 넘어옴)

파일:/storage/upload/2009/06/11/63419820 1244334209.jpg

洪蘭坡 1897년 4월 10일 ~ 1941년 8월 30일

1 소개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한다.

경기도 남양군에서 태어나 5세 때 상경, 14살이 되던 해인 1914년 YMCA 중등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7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문학,미술,음악의 3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2 친일 논란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자필로 쓰고, 출옥하게 된다. 이후 홍난파는 1938년부터 1941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할때까지 친일행적을 남겼다.[1]

'모리카와 준'이라는 창씨개명으로 일본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하면서 이를 두고 보수적인 양악계가 펼친 옹호론[2]를 보면,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이전까진 음악가들도 생활이 어렵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 홍난파도 그런 뜻으로 친일파 명단에 올리는 건 안된다는 것. 이것을 두고 문학이나 미술 분야 및 종교계, 군인 다양하게 논의되는 것인데 이게 객관적인 논의를 벗어나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어 서로 다른 극과 극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향과정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사회주의자이고 민족주의자이고 가릴거 없이 일제 경찰은 독립운동 활동했던 사람들이나 연루되는 사람들 죄다 닥치고 가둬버렸다. 그리고 일제 경찰은 정치범들에게 일괄적으로 전향서를 요구했었다. 전향서를 안쓰면 절대 내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향서를 쓰고 감옥에서 나온 이상 '사상보국연맹'이나 전향단체에 들지 않거나 협력하지 않으면 취직할 곳도, 글을 발표할 곳도 없어 극심한 생활고에 빠져야만 했다. 이 가운데 자발적인 변절자도 있었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향서를 쓰는 이가 늘어났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매우 신중히 다뤄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홍난파 같은 경우엔 이미 90년대부터 한국의 친일파 99인이라든지 여러 친일파 고발 책자에서 음악가 대표로 크게 나오고 이 책 신문광고에서도 홍난파가 친일파였다며 크게 소개되었기에 친일인명사전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알던 사람도 꽤 되었다. 당시 한 고등학교 음악선생은 홍난파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분노하기도 했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홍난파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다.[3] 그러나,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의적으로 햇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를 했다. 그러나,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이 '홍난파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해버렸다. 이에 따라 법원 결정으로 명단에서 일시 제외됐던 홍난파가 친일인사 명단에 다시 등재될 것으로 보일 듯 하다.

친일 의혹 외에도 지나친 서양음악에 대한 빠심이 지적되곤 한다. 특히 조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하며 쓴 논설에서는 전통음악을 구닥다리라고 찍어누르고 서양음악이 우월하다고 자뻑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 이 때문에 국악인들 가운데에는 홍난파의 친일 행위와 상관없이 사대주의 성향의 음악가였다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홍난파의 작품들에는 그 곡이 친일용 곡이었던 아니건 간에 대부분 (일본을 거쳐 걸러 들어온) 서양음악의 요소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데, 어느 정도 민요 등 전통음악 요소를 접붙이기 해보려고 했던 안기영이나 채동선, 김성태 등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4]

3 여담

윤치호 일기 에 따르면 그가 윤치호에게 250원이나 지원을 받았음에도 또 편지로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더 달라고 부탁했고 윤치호가 자기아들이라도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편지로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했다. 또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한다. 이때 윤치호는 자기 일기에 "공부하라고 돈 보내줬더니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으면서 돈 더 안보내준다고 나를 욕하는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홍난파를 씹었다. 단 윤치호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다 싫어했다...

홍옥임이라는 조카[5]가 있었는데, 옥임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친구 김용주와 동반자살을 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 있다. 옥임과 용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훗날 콩칠팔 새삼륙이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922676_image2_1.jpg

참고로 홍난파의 흉상은 1968년에 남산 KBS 사옥 앞에 세워졌다가 1976년에 여의도로 이전할 때 같이 옮겨졌으나 200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홍난파의 친일 경력을 문제삼자 KBS 측에서 자진 철수하여 2004년부터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옛 저택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 친일행적이란 것이 주로 문학인 이광수등이 작사한것을 작곡해 지휘 연주하거나, 방송국에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지휘, 연주했다거나 하는것 등이었다.
  2. 조두남, 안익태,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등을 비롯한 대다수 음악가들이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 그나마 채동선 같이 집안이 부유층이라 친일행위를 하지 않아도 생활이 어렵지 않은 이는 극소수다...라는 것. 이를 두고 부유층들도 친일을 했기에 부자라고 친일행위를 안한다는 논리를 반박하는 것도 있다.
  3. 민족문제연구소 측 입장은 이렇다.#
  4. 그리고 창가 등을 위시한 일본음악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가령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고향의 봄'의 선율 구조는 도(C) 음을 기음으로 하는 요나누키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5. 형 홍석후의 딸. 홍석후는 에비슨의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1기생 7명 중 하나인데, 박서양, 김마리아(1번)의 숙부인 김필순이 동기이다. 그리고, 그 에비슨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한테 연대 경제학 교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한반도 근대 방역 전문가가 에비슨이었고, 스페인 독감을 제대로 경험했을 유일한이 할 선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여기의 인연도 좀 더 빠를 일. 여담으로 유일한은 위 윤치호와도 인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