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

1 개요

빚 갚고 합시다

구한말 일본 제국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1]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으로, 1907년 2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빠르게 번져나갔다. 여러모로 백년 전 금모으기 운동.

2 배경

을사늑약을 전후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강제적인 차관을 도입[2]하고 1907년 이 운동이 시작될 당시에 이르면 그 액수가 1,300만원에 이른다.[3][4] 당연히 대한제국이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은 없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5]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를 재정고문으로 파견하여 화폐정리사업[6]을 실시하는 등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의 경제권 하에 차근차근히 예속시켜나간다.

3 발단

이런 상황에서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독자투고가 실린다.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1원, 10원, 100원, 1,000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호소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퍼져나간다.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어 국채를 갚자!"라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윤웅렬[7], 유길준, 양기탁, 이상재 등 조정의 주요 관료들도 운동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8년 쯤에 이르면 약 80만원 정도의 거액이 모이기에 이른다. 아직 갈 길이 한 참 멀기는 하지만....

4 결말

당연히 일본이 이를 두고 볼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수하 조직이었던 일진회를 동원하여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온갖 악의적인 소문[8]을 유통하는 한편으로, 이 운동의 핵심 간부였던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하면서 사업이 성공적인 진척을 방해한다.[9] 애초에 부유층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런 횡령 논란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빠르게 식혀버렸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안습... 그렇지만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사상 유례없는아 물론 정확히 90년 뒤에도 한 번 더 반복되긴 하지만경제적 구국 운동이었다는 의의까지 폄하될 수는 없을 것이다.

5 이야깃거리

경술국치 이후엔 양기탁 등이 이 때 모인 돈 중 일부를 이용해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관련 기념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대구광역시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이름의 도로인 국채보상로도 있다.

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문화재청에 신청했고, 문화재청이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했다. ##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는 2017년에 열리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를 거쳐 결정될 예정이다.
  1. 이 돈을 갚지 못해서 고종이 쩔쩔맸다.
  2. 특히 화폐정리사업을 하며 대량 도입되었다.
  3.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다, 약 2년치 예산인 셈.
  4. 정확한 가치환산은 불가능하지만 당시 서울의 집 1채 가격이 1,000원 내외였으며 현재 대한민국 1년 예산이 350조 정도이니, 못해도 700~800조 원은 되는 가치이다. 물론 이건 '가치'환산이고, 환율비교가 아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인구는 꽤 많은 나라였지만, 경제력은 현재의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세계적 위상이 안습이였기에 당시 600만원이 오늘날 350조와 완전히 똑같다는건 틀린 말이다.
  5. 애초에 차관을 반강제로 빌려준 것도 다 이런 계획을 짜놓았던 셈.
  6. 사실 워낙 구한말에 조선정부가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악화를 발행 및 방관했던 탓에 필요하기는 했던 사업이다. 문제는 국가의 핵심주권이라고 봐도 무방한 화폐 발행권이 일본은행에 있었고 덕분에 한국인 상인과 은행이 가지고 있던 현금이 다 악화로 평가받아서 보유가치가 명목가치의 3분의 1로 줄면서 폭삭 망했다는거...
  7. 윤치호의 아버지
  8. 당연히 횡령과 관련된 소문이다. 덕분에 일진회는 국채보상기성회로부터 너 고소를 시전당했지만 애초에 이미 사법부도 일본의 손아귀에 놓인 판국에 뭐 고소가 효력을 발휘할리가...
  9.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대한 매일 신보의 사주였던 어니스트 베델이 모인 돈 중 일부를 투자했다가 환수하지 못하는 사태가 있었다고 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