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Münchner Philharmoniker, 영어: Munich Philharmonic Orchestra, 프랑스어: Orchestre philharmonique de Munich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주도인 뮌헨을 본거지로 하는 관현악단. 홈페이지
목차
1 연혁
1893년에 프란츠 카임이라는 뮌헨의 음악애호가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당시 명칭은 창단자의 성을 따 '카임 관현악단(Kaim-Kapelle)' 이라고 불렸다. 초창기 상임 지휘자로는 한스 빈더슈타인과 헤르만 춤페, 페르디난트 뢰베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차례대로 초빙되었고, 특히 뢰베와 바인가르트너 재임기에 명성과 연주력 모두 크게 향상되어 구스타프 말러를 비롯한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재정난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악단 운영비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던 카임이 1908년 버로우타면서 새로운 후원자를 부랴부랴 찾으러 다녀야 했다. 같은 해 뢰베가 재차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1911년에는 명칭을 '뮌헨 연주협회 관현악단(Orchester des Münchener Konzertvereins)' 으로 개칭했다.
하지만 1914년에 1차대전이 터지면서 제대로 크리티컬 히트를 맞았고, 단원들이 차례로 군인으로 징집되는 등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간신히 축소 운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종전 후인 1919년에 악단 운영권을 뮌헨 시에 이관하면서 사실상 시립 관현악단이 되었고,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한스 피츠너를 상임 지휘자로 초빙했지만 한 시즌만 재임한 뒤 물러났다.
피츠너의 후임으로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가 신임 상임 지휘자로 초빙되면서 악단 활동이 정상화되기 시작했고, 하우제거는 뢰베 이래의 브루크너 교향곡 연주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뢰베를 비롯한 브루크너의 제자나 친구들이 멋대로 뜯어고친 '개찬판' 을 배제하는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2년에 9번 교향곡의 뢰베 개찬판과 오렐 개정판을 차례로 연주해 후자의 채택을 일상화시킨 공연은 전설로 남아 있다. 1928년에는 악단 명칭을 현재의 것으로 최종 개칭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악단의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치 운동의 발상지로 간주된 뮌헨의 시립 악단이라는 이유로 각종 집회나 관제 행사에 동원될 것을 강요당했고, 사용 악보에도 나치의 갈고리 십자 문장이 새겨진 인장이 찍히는 등 사실상 관제 악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거기에 1938년부터는 열렬한 친나치 지휘자인 오스발트 카바스타[1]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막장화가 심화되었다.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악단의 활동도 점차 어려워졌고, 이래저래 이용당하면서도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반열에는 들지 못해 결국 1944년 전황 악화와 괴벨스의 국민 총동원령에 따라 해산되고 말았다.[2]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도 개발살난 공연장과 군인으로 징집된 단원들의 사망/부상/행방불명, 극심한 재정난으로 맥을 못추고 있었지만, 한스 로스바우트가 미군 군정 당국의 허가를 받아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재건이 시작되었다. 로스바우트에 이어 프리츠 리거와 루돌프 켐페가 차례로 상임 지휘자를 맡으면서 거의 완벽하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1949년 뮌헨에서 바이에른 방송국의 든든한 지원을 배경으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창단되었고, 유서깊은 뮌헨 국립 오페라 오켓트라도 건재했기 때문에 뮌헨 필의 위상은 2차 세계대전 전보다 더욱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1979년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부임해 악단의 리즈시절을 만들어 놓았다. 첼리비다케는 매우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단원들을 자주 녹초로 만들어 놓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런 집요함 덕에 악단의 연주력과 투명하다 싶을 정도의 음향이 만들어져 세계구급으로 격상되었다.
첼리비다케가 1996년 심장마비로 타계한 뒤에는 미국 출신의 제임스 러바인이 뒤를 이었고, 2004년에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부임하였다. 틸레만의 계약은 2011/12년 시즌까지로 잡혀 있었고, 예정대로 2012년 하반기에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으로 이임했다. 악단 측에서는 미리 후임으로 미국의 로린 마젤을 물색해 놓았고, 마젤은 계약대로 2012/13년 시즌부터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마젤이 임기 도중인 2014년 6월 건강 상의 이유로 직책을 사임한다고 발표했고, 7월 13일 폐렴 합병증으로 타계하면서 악단에서는 2015년에 부임하기로 내정되어 있던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할 때까지 나머지 공연은 모두 객원 지휘로 치러야 하게 되었다. 게르기에프는 2020년까지 5년 계약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2 역대 상임 지휘자
부임 예정인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 한스 빈더슈타인 (Hans Winderstein, 재임 기간 1893-1895)
- 헤르만 춤페 (Hermann Zumpe, 재임 기간 1895–1897)
- 페르디난트 뢰베 (Ferdinand Löwe, 재임 기간 1897-1898, 1908–1914)
-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Felix Weingartner, 재임 기간 1898-1905)
- 게오르크 슈네보이그트 (Georg Schnéevoigt, 재임 기간 1905-1908)
- 한스 피츠너 (Hans Pfitzner, 재임 기간 1919-1920)
-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 (Siegmund von Hausegger, 재임 기간 1920–1938)
- 오스발트 카바스타 (Oswald Kabasta, 재임 기간 1938–1944)
- 한스 로스바우트 (Hans Rosbaud, 1945–1948)
- 프리츠 리거 (Fritz Rieger, 1949–1966)
- 루돌프 켐페 (Rudolf Kempe, 1967–1976)
- 세르주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1979–1996)
- 제임스 러바인 (James Levine, 1999–2004)
- 크리스티안 틸레만 (Christian Thielemann, 2004–2012)
- 로린 마젤 (Lorin Maazel, 2012-2014)
- 발레리 게르기에프 (Валерий Гергиев, Valery Gergie, 2015-)
이외에 주빈 메타가 2004년부터 명예 지휘자(Ehrendirigent)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특징
뮌헨에서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나 유고한 전통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밀려 존재감이 없는 콩라인의 안습한 시기를 지내다가 첼리비다케가 부임한 8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다. 물론 첼리비다케 이전에도 한스 크나퍼츠부쉬가 만년에 가장 즐겨 지휘했던 악단이기도 하고, 루돌 켐페와 같은 같은 나름 네임드 지휘자들이 상임지휘자를 겨쳐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악단의 전반적인 수준은 기복이 있었고, 특히 이웃의 매머드 교향악단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3]이 단기간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안습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설 악단으로 시작했다가 경영난 때문에 시에 흡수되어 공설 악단이 된 사례인데, 물론 현재도 시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으며, 부명칭으로 'Das Orchester der Stadt(시의 관현악단)' 이 붙어 있다. 독일계 낭만주의 음악을 주요 공연 곡목으로 늘 유지하고 있고, 말러의 교향곡 4번과 8번도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세계 초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 재정난을 겪고 있던 때는 수많은 듣보잡이나 뉴비 지휘자들도 초빙해 닥치는 대로 공연을 해야 했는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이 악단에 일정 금액을 대주는 대가로 지휘자 데뷰를 치러냈다.
나치 시대와 2차대전을 겪은 뒤로는 독일의 여느 악단들 처럼 지난 날의 과오를 어떻게든 반성하고 재출발해야 했고, 그 동안 연주 금지를 받아왔던 멘델스존이나 말러 등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부활 상연하는데 힘을 쏟기도 했다. 대전 후 창단 혹은 재출발한 여느 악단들 처럼 동시대 음악에 대한 비중도 늘기는 했지만, 라이벌 악단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만큼 자주 다루지는 않고 있다.
뮌헨 자체가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도시인 만큼 레퍼토리의 독일계 편중 현상은 크게 변함이 없고, 상임 지휘자들도 대개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다만 레바인의 경우 아이브스의 관현악 작품을 비롯한 미국 레퍼토리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렇기는 해도 주요 연주곡들로는 베토벤과 브람스, 브루크너의 작품들이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녹음은 하우제거 재임기였던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나치 시기에는 뮌헨의 제국 방송을 중심으로 한 방송국들에서 이런저런 방송용 녹음이나 실황 녹음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업용 녹음은 전후에 주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이 유명하다. 켐페도 텔레푼켄 등에 녹음을 남겼지만, 후임인 첼리비다케의 경우 상업적 녹음을 거의 증오하다시피 한 지휘자여서 제대로 된 녹음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만년에 가서 소니 클래시컬에 영상물 제작은 해도 좋다고 해서 브루크너 교향곡 6-8번의 뮌헨과 도쿄 공연 실황이 비디오 테이프와 LD 등의 포맷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첼리비다케 사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바이에른 방송국이 떠놓은 실황녹음 테이프들을 가지고 EMI에서 박스 세트들로 출반하고 있다.
레바인은 독일 음반사인 욈스(Oehms)에서 미국 작품을 중심으로 한 음반을 취입했고, 틸레만은 전속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음반을, C Major나 유로아츠 등의 영상 제작사에서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다. 2009년에는 독일의 클래식 영상물 전문 제작사인 유니텔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1-9번을 영상물로 제작하기로 계약을 맺고 제작 중이다.
상주 공연장은 초기에 튀르켄슈트라세에 있던 톤할레를 사용했었지만, 2차대전 중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개발살났다. 이후 뮌헨 대학 강당이나 독일 박물관 회의장, 레지덴츠 궁전의 헤르쿨레스잘 등을 사용하다가 1985년 이자르 강가에 현대적인 설계로 신축한 가스타이크 필하모니가 완공되자 상주 악단으로 들어갔다. 합창 붙는 작품의 공연 때는 뮌헨 필하모닉 합창단(Philharmonischer Chor München)과 자주 협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악단이기는 하지만, 외국인이나 여성 단원의 영입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고 단원 수급을 위한 관현악 아카데미 등을 운영하면서 수시로 젊은 단원들을 영입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시행 착오가 있어왔는데, 1990년대 초반에는 수석 트롬보니스트가 여자라서 마음에 안든다고 첼리비다케가 짜르려고 했다가 법정 다툼까지 가는 등 심각한 스캔들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결국 해당 연주자는 뮌헨 시를 상대로 진행한 소송에서 승소했고, 이후 단원 모집 때의 오디션 방식을 성별과 국적, 인종에 따른 편견이 사전에 개입되지 않도록 무기명 블라인드 테스트 식으로 바꾸었다.
독일 오케스트라 중에서는 상당히 드물게도 트럼펫 파트에서 피스톤식 악기를 사용하는 악단이었다. 모든 단원이 항상 피스톤 악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악단 전체의 트럼펫 칼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음 파트 단원이 거의 항상 피스톤을 사용했다. 뮌헨 필의 금관이 다소 무미 건조하고 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들리는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 같은 해 나치에 입당한 뒤, 공식 행사에서 꼬박꼬박 히틀러 경례를 붙이고 온갖 극우꼴통 발언을 일삼아 제대로 나치빠 기질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전후 연합군 당국의 징벌을 비관해 음독자살했다.
- ↑ 제국 관현악단 호칭을 받은 관현악단만이 단원들의 병역 면제와 급여 보장 등의 혜택을 받으며 종전 직전까지 활동이 허락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등 몇 개 단체만이 이 호칭을 받았다.
- ↑ 초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클래식 음악회와 방송용 콘서트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 대편성으로 구성되었다가 나중에 방송용 오케스트라로 뮌헨 방송 교향악단이 분리 독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