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와타 케이스케

이름 쿠와타 케이스케 (桑田佳祐)[1]
출생 1956년 2월 26일, 일본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
국적 일본
신체 170.3cm, 67kg
직업 싱어송라이터
학력 아오야마 학원 대학 경영학부 제적
아내 하라 유코
소속 아뮤즈
레이블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사잔 올 스타즈

1 개요

작사, 작곡, 연주, 노래 등 대중음악 전분야를 통틀어 모든 일본 대중이 항상 사랑해 온 일본 최고의 국민 아티스트.
1978년 데뷔 이후 2016년 현재까지 일본 대중음악계 최정상의 위치에 있는 국민가수

쿠와타 케이스케는 1956년 2월 26일 일본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팝 음악을 좋아해 따라 즐겼는데, 특히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틀즈를 동경하던 소년이 일본의 비틀즈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1977년 아오야마 학원 대학 재학생 시절, 사잔 올 스타즈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그 해, 야마하에서 개최한 'EAST WEST 77'록 콩쿠르에서 보컬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 쿠와타 케이스케가 이끄는 밴드 사잔 올 스타즈는 1978년 데뷔한 이래 국민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장수하는 국민 밴드라 인정받고 있다.

2 독특한 혹은 괴짜스런 쿠와타 스타일

쿠와타 케이스케가 가진 최고의 장점은 작사와 가사 표현력. 일본어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입 안에서 맴도는 발음을 최대한 활용해서 부드럽고 독특한 리듬감을 표현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그래서인지 분명히 글자가 넘어갔는데 아직 안 넘어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본 가요계 유일의 시인이라는 찬사까지 받을 정도.[2] 방언, 축약어 등 시적 허용을 가사에서 아주 잘 쓰며[3], 그로 인해 일본 힙합에서조차 찾기 힘든 라임(...)을 구사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대신 일본어를 배우고 번역에 도전할 때 쿠와타가 만든 노래들 중에서 실험정신 있는 노래들은 참 막막하다(…).

그리고 대중가수 치고는 가사를 통해 사회적 메세지를 한번 낼 때 엄청 독하게 내는 편이다. 진보적인 뮤지션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대표적인 노래가 세 곡이 있다. 첫번째는 1998년에 발매한 사잔 앨범 중에 爆笑アイランド(폭소 아일랜드)라는 곡인데, 일본 정치와 사회를 대놓고 풍자한 노래이다.

그 이후에 2002년에 쿠와타 솔로 앨범 활동으로 발표한 ROCK AND ROLL HERO라는 곡도 있는데, 이 노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미일관계에 대한 독한 풍자와 일본 내부의 모순점 등을 비꼬는 가사들로 가득하다. 발음과 따로 노는 가사가 많은데 순수 가사에는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미국은 나의 히어로, 우리 일본인은 순종적인 사람들"이라던지, "인재열도에는 새벽 따윈 오지 않아"라던가, "안돼라고 말 못하는 아버지, 삥땅치다 걸린 어머니, 의혹에 휩싸인 히어로" 등등...

그리고 한동안 이런 노래는 내지 않았다가 2013년에 사잔 올 스타즈 복귀 기념으로 타이틀곡 ピースとハイライト‎(피스와 하이라이트)를 냈는데, 이 노래에 관해서는 사잔 올 스타즈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2014년에는 사잔 올 스타즈의 연말 콘서트에 관객으로 참석한 아베 신조의 면전에서 爆笑アイランド 라는 곡을 오랜만에 부르면서 중간에 가사를 바꿔서 “衆議院 解散なんです”と ムチャを 言う (해석 : "중의원 해산입니다" 라고 턱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바꿔 비판하였다.[4] 그렇다고 쿠와타가 이를 진지하게 준비하거나 한 건 아니라 볼 수 있는게 실제로 그가 그동안의 음악인생에서 공연하는 중에 관객 분위기와 호응에 따라 충동적으로 가사 한두단어나 몇마디를 바꾸는 애드리브를 장난삼아 많이 해 왔던 편이기 때문이다. 그냥 아베가 왔으니 충동적으로 한번 질러준 걸 수도.. 정치계 쪽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문제이겠으나 사잔이나 쿠와타의 팬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그동안 흔히 봐왔던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하다.[5]

추가로 쿠와타의 창법 자체가 노래를 부를때 상당히 혀를 많이 굴리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졌지만 데뷔 초창기에는 가사 자막이 없으면 이게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빠르게 내지르면서 발음까지 굴렸다.[6] 그 덕분에 1978년 사잔 올 스타즈가 데뷔하고 첫 TV 무대를 가진 이후 일본 음악방송에서 가사 자막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띄우게 된 계기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든 주인공이 쿠와타 케이스케 되시겠다. 가사가 궁금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뭐라 씨부리는거야?"라는 항의전화가 폭주해서였다고(…) 이게 뭐야 일본어에 'ㄹ' 받침이 어딨냐고[7] 이것도 쿠와타의 일본 내 절대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에 포함되는 건가 [8]

방송에서 연예인들의 발음 같은 것에 일본 방송계 및 사회 분위기는 사실 매우 민감하고 보수적인 편인데[9] 쿠와타가 이런 혁명적인(?) 발음을 사용하는 창법으로도 최고의 위치에 계속 남았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다.

사잔 올 스타즈 항목에도 언급된 것처럼 다양한 음악성을 보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적인 음악으로 흐르고 있긴 하지만 일본 토속풍부터 발라드, 하드 록, 랩, 거기에 일렉트로닉까지 다양하게 시도한 곡들이 꽤 있다.

3 솔로 활동

사잔 올 스타즈로 활동하면서도 솔로 활동을 하였는데, 실제 쿠와타가 활동한 것은 KUWATA BAND로 활동한 것이 솔로 데뷔보다 먼저였다. 밴드 사잔 올 스타즈가 쉬는 김에[10] 쿠와타가 밴드에서는 할 수 없던 정통 하드록, 영미 록을 추구하는 컨셉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것이 쿠와타 밴드이다. 쿠와타의 히트곡 중 BAN BAN BAN, SKIPPED BEAT 등의 곡은 80년대 후반에 국내 나이트 클럽에서 자주 틀어주던 음악으로, 한국에서의 표준 발음대로면 구와타 밴드로 해서 알려진 노래들이다. 쿠와타 밴드 시절에는 항상 자신을 "신인입니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이 아저씨가 어디서 설득력 없는 말을... 향후 쿠와타 케이스케 솔로 활동 이후 발매된 悲しい気持ち (Just A Man in Love)나 Blue ~こんな夜には踊れない 같은 노래도 함께 구와타 밴드로 뭉뚱그려서 알려졌다. 쿠와타 밴드부터 쿠와타 솔로 1집이 주로 1986년~1987년에 발매되었고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락카페나 클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점을 생각하면 80년대 후반에 청춘시절을 나이트 클럽에서 즐겁고 재밌게 보낸 세대이젠 50대쯤?에게 상당히 많이 알려져있다.

실제로 쿠와타 케이스케는 솔로와 사잔의 정체성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일본 내 가수들 인기순위 조사를 하면, 사잔 올 스타즈 순위와 쿠와타의 순위가 따로 나온다. 그러나 둘 다 쿠와타의 음악필드 안에 있는 것이긴 하다.[11]

주로 사잔 올 스타즈가 활동을 쉬거나 몇몇 특정 콘서트만 할 때 솔로 투어를 진행하면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솔로가수 최초로 일명 5대돔 투어 콘서트를 성공한 걸로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사잔 올 스타즈로 활동을 하고 2007년에 솔로데뷔 25주년으로 음반을 내며 활동을 했는데 이 때 발매한 노래가 바로 프로포즈 대작전의 OST인 明日晴れるかな(내일은 맑을까?)이다. 이를 통해 젊은 층과 국내 일드 매니아 사이에서도 쿠와타 케이스케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 싱글을 포함하여 2007년에만 타이틀곡을 3연작으로 발표하고 전국투어를 가졌다. 이 콘서트로 솔로활동 5년만에 새해맞이 콘서트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가졌다.

2008년 당시에 사잔 올 스타즈 무기한 휴식 이후로 솔로 활동을 일부 전개하면서 AAA 2008 혼자서 홍백가합전 공연을 개최하였고, 2009년에는 쿠와타 솔로 명의로 싱글을 발매했었다. 이 때 방송활동도 했었는데 후지테레비에서 桑田佳祐の音楽寅さん 〜MUSIC TIGER〜 (발음은 쿠와타 케이스케노 온가쿠 토라상, 한국어로 번역하면 쿠와타 케이스케의 '음악 호랑이씨'엥? 음악 호랑이?) 라는 프로그램을 내주어 다시 활동했다. 이 방송은 2001년에 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용필이 직접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2010년 정력적인 솔로활동(싱글과 앨범발매 및 전국 돔투어)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같은 해 5월 건강검진 중 초기 식도암을 발견하여 8월 2일 식도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모든 신문의 1면 기사로 식도암 소식이 전해졌고 2008년에 사잔 잠정 활동중단 이후 아뮤즈의 주가는 또 다시 롤러코스터를 탔다(...).

4개월간의 재활 및 회복 단계를 거쳐, 12월 31일 홍백가합전에 특별 게스트로 컴백하여 부활을 알렸다. 2011년 1월 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새 오리지널 앨범 'MUSICMAN'의 발매 예정을 알렸고, 2011년 2월 23일에 공식 발매했다. 앨범 발표 이후 2월 25일 엠스테 방송으로 복귀했을 땐 후배가수들이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 이전부터 공식적으로 쿠와타의 팬임을 인증했던 aiko가 가장 많이 울었다.

2011년 컴백 이후에 카운트다운 콘서트[12] 당시에 라이브 뷰잉을 통해 전국 영화관에서 중계를 해줬는데, 해외에도 중계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대만, 홍콩 등은 있었지만 한국 상영 소식이 없었으나 후반에 한국이 추가되었다. 당시 메가박스 이수점에서 진행되었는데, 예상외로 잘 팔려서 재미를 봤다는 후일담이 있다. 그 영화관 라이브를 직접 본 경험담으로는 현재 돌아다니는 재방송분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생중계 당시 상당히 유창한 발음으로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한국팬을 향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새해 축하인사를 했었다.

이후 2012년에 솔로데뷔 25주년 베스트앨범인 I LOVE YOU - now & forever - 발매와 이 앨범 안에 신곡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반기부터 12월 31일까지 동명의 전국투어를 가졌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이 베스트 앨범에서 공개한 신곡 중 하나인 100万年の幸せ!!는 마루코는 아홉살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해당 영상을 찾아보면 주인공 마루코와 쿠와타의 캐릭터도 같이 나오는 국민가수와 국민애니의 콜라보 장면도 있다.

2016년 2월 26일에 60세(한국나이로 환산하면 환갑(!)이다)를 돌파하였다. 그리고 6월 29일에 솔로 싱글 ヨシ子さん(요시코 상) 발매를 예고하며 솔로 활동을 재개한다.특설 홈페이지 이전부터 커플링 곡으로 결정된 곡들은 광고에 채용되어 먼저 공개되었다. 2016년 6월 17일자 뮤직 스테이션에서 솔로 발매곡 두곡을 TV 무대로 공개하였는데, 그 중에서 타이틀 곡인 요시코 상은 CD자켓부터 해서 도입부 멜로디, 가사, 무대연출 모두 실험정신과 난해함 사이에 있는 것이 특징. 덤으로 이날 뮤직 스테이션은 예전 노래와 그걸 커버한 노래들을 연계하는 특집이였다. 여기서 쿠와타가 미소라 히바리의 명곡 川の流れのように를 자신의 콘서트에서 리메이크한 영상이 나왔는데, 이 당시 쿠와타가 보여준 돋보이는(?) 의상[13][14]과 무대연출 덕분에 영상을 보던 출연진들이 모두 뿜었다.

6월 25일에 일본 위성방송사이자 사잔/쿠와타의 전속이라 봐도 무방한 WOWOW에서 쿠와타가 도쿄를 소재로 한 여러 노래 옛노래들을 리메이크한 스페셜 방송을 편성하였다. 한국인들에게도 익히 유명한 칸다가와를 비롯한 노래들을 쿠와타 버전으로 리메이크했다. 이날 방영분이 11월 30일에 블루레이/DVD로 발매될 예정. 9월 26일에 홈페이지 공지사항으로 11월 23일 새 싱글 君への手紙을 발매하기로 발표하였다. 그와 함께 2016년 새해맞이 콘서트 ヨシ子さんへの手紙 ~悪戯な年の瀬~를 솔로 활동으로는 4년만에 12월 27일, 28일, 30일, 31일에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개최하는 것도 발표. 이 콘서트는 현재 공지사항으로는 일본 국내 12개 지역에서 영화관 라이브 뷰잉을 하는 것으로 예고되었다.

4 재일교포 루머

일본의 어느 인기 연예인이 안 그러겠냐마는생전의 미소라 히바리와 더불어 재일교포설이 상당히 많이 따라다니는 가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 극우 세력들은 이를 이용하면서 쿠와타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행패를 저지르기도 한다. 1990년대 발표한 노래 중엔 Love Korea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어서한국에서 Love Japan이란 곡을 뮤직뱅크에서 부르면 어떻게 될까? 쿠와타 재일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게 이 노래부터였다는 말이 있다. 사잔 올 스타즈 항목에 영상이 있으니 참조. 그리고 본인 콘서트 중에 한반도 노래인 임진강을 애창곡으로 유창하진 않지만 한국어로 부른 음원이 있다.[15] 여기에, 정작 한국 사람들도 모르는 가사의 네버엔딩 아리랑(...)을 방송 프로그램에서 꽤나 유창하게 불렀다. 임진강과는 달리 일본어로는 구현하기 힘든 한국어 받침발음을 꽤 자연스레 불렀다는게 놀라운 점이였다.

이러한 설이 퍼지게 된 사례 중에서 TV매체로 방영된 것을 연대별로 이야기하면 2004년 사잔 올 스타즈 명의로 개최한 새해맞이 콘서트 당시 한국팬들이 단체로 31일 콘서트 예매에 성공해서 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콘서트 후기와 녹화영상에 의하면 앵콜순서 마지막 곡을 부르기 전에 "사랑해요!"라는 한국말을 한 다음 한국에서 팬들이 왔다고 소개한 것까지야 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후에 앵콜순서 마지막 곡이 끝날때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는 과정에서 한국말로 여러번 인사를 했다. 커튼콜 인사에서도 "사랑해요!" 와 "今年も안녕!"(실제로 이렇게 인사함) 이라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점이 재일떡밥이 퍼지는데 어느정도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2009년 활동 당시 방영한 온가쿠토라상이라는 프로그램의 한 에피소드에서 Love Korea와 아리랑을 불렀고, 2011년 쿠와타 솔로 새해맞이 콘서트에서는 새해인사를 해외 라이브뷰잉 지역인 중국어/한국어로 각각 준비해서 했는데 이 중에서 유독 한국어 인사를 여러번 가졌다.

그와 함께 쿠와타의 말버릇 중에서 어머니를 일본말인 母親(하하오야)가 아닌 オモニ(오모니)로 많이 발음하는 것 때문에도 재일교포설이 많이 퍼졌다.[16] 이외에 일본인이 자연스레 하기엔 어려운 "아이고~"라는 말버릇이 데뷔 직후 초반기 방송출연 영상에 잡힌 적이 있다고 한다.[17]

그런데 한국계라는 설 외에도 중국계 혼혈설도 있기는 했다.어차피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그냥 일본사람처럼 생겼는데.. TSUNAMI 뮤직 비디오를 보면 좀 오경을 닮긴 했다.

사실 이 한국계라는 소문에는 표정과 헤어스타일에 따라 심하게 달라 보이는 그의 오묘한 외모의 영향도 크다. 40~50대 부터는 은근히 한국이나 중국 느낌이 섞여 보이는 외모로 변한 부분이 있지만땡벌 아저씨 닮았다, 20~30대까지 젊었을 때 쿠와타의 외모는 기복이 심했지만 일본사람 같았다.차라리 쿠와타를 닮은 한국, 중국사람이 일본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더 자연스러운 정도 한국계라는 설도 그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중견가수가 되고 나서야 많이 나왔던 설이기도 하고... 당장 인터넷에서 桑田佳祐로 검색해서 젊은 시절의 사진이나 90년대 초반까지의 콘서트 영상을 찾아보면 누가 봐도 일본 20대~30대의 모습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정말 재일교포이지만 집안이 나름 유복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다른 재일교포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안정된 상황에서 재일교포임을 숨길 필요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 덕분에 어린 시절 일본 사회에서 한국말 표현을 하는 것에 큰 제약을 받지 않은 것의 영향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다른 설로는 재일교포는 아닌 것 같지만, 1950~60년대 당시에는 고향인 치가사키가 재일교포 집성촌이였기 때문에 한국의 모습을 타 지역보다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고 강한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보는 편이다.

설은 두가지지만 공통점이 있는데, LOVE KOREA의 작사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을 때 언급한 쿠와타의 어린시절 자라온 환경이다. 쿠와타가 성장했던 시기의 치가사키시가 그 당시에는 동네 자체가 재일 한국인들이 꽤 모여사는 곳이여서 한국인들의 저녁식사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감안할 때 재일교포가 맞다는 설을 따르면 자기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흔히 들었던 한국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재일교포가 아니라는 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한국어 문장구사와 받침발음이 자연스러운 것, 하하오야 대신 오모니라고 부르는 것, 아이고 등의 말버릇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어릴 때 자연스레 들어왔던 것들이고 호기심에 따라했던 것이 입에 익은 것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

쿠와타의 여러 모습을 보면 국내에서 쿠사나기 츠요시에 비해 덜 알려졌을 뿐이지 일본 안에서는 알아주는 친한파 연예인인 것으로 보인다. 짬밥이 38년이나 됐으니 누가 건드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용필에게 태클 걸 수 없듯이 쿠와타 케이스케에게도 그럴 수가 없음

결론은 그냥 친한 일본인. 누구랑 친한데? 한국 친한파이긴 하지만 쿠와타 본인이 호테이 토모야스의 자서전처럼 가족사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 이상 재일교포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다.

여담으로 故 박용하가 일본에서 겨울연가의 대히트와 함께 가수로 활동할 때 짧지만 대화를 가진 적이 있었다. 뮤직 스테이션 2004년 7월 16일자 방영분에서 사잔 올 스타즈와 박용하가 같이 나온 적이 있는데, 쿠와타가 먼저 한국말로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고, 자신도 겨울연가를 잘 봤다고 하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악수를 하기도 했다. 이후 더 질문하고 되냐고 진행자 타모리에게 허락을 구한 다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다. 이 당시에는 통역가를 통해 대화를 하였는데 리액션을 보면 짧은 한국말을 빠르게 청해를 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정말 여담이지만 쿠와타 케이스케는 한국에선 손석희 JTBC 보도총괄사장, 박원순 서울특별시장과 동갑이다(...). 손석희가 제일 어려보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명의 프로필 사진을 동시에 띄워놓고 비교해보는 것이다. 어 그럼 서세원과 유동근은? 이러면 끝이 없잖아

5 Act Against AIDS 콘서트 참가

Act Against AIDS 라는 행사에 1993년 출범 때부터 꾸준히 참여를 해왔는데 쿠와타의 순서에서 리메이크 공연을 많이 가졌다. 타 가수들의 노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부르는 영상이 많이 있다.

이 중에서 영상발매화가 된 2008년과 2013년 콘서트는 ひとり紅白歌合戦(혼자서 홍백가합전)이라는 컨셉으로 콘서트를 열었는데 한 공연당 최소 50곡 가량을 골라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실제 영상을 보면 옛날 노래에 대한 재해석도 있고, 상당히 충공깽스러운 선곡과 퍼포먼스도 존재한다.(...)

6 디스코그래피

6.1 솔로 싱글

01. 1987.10.06 - 悲しい気持ち(JUST A MAN IN LOVE) - 솔로 데뷔 싱글
02. 1988.03.16 - いつか何処かで(I FEEL THE ECHO)
03. 1993.10.06 - 真夜中のダンディー [18]
04. 1994.08.24 - 月[19]
05. 1994.10.31 - 祭りのあと
06. 2001.07.04 - 波乗りジョニー[20][21][22]
07. 2001.10.24 - 白い恋人達[23][24]
08. 2002.06.26 - 東京[25]
09. 2007.05.16 - 明日晴れるかな
10. 2007.08.22 - 風の詩を聴かせて
11. 2007.12.05 - ダーリン
12. 2009.12.09 - 君にサヨナラを
13. 2010.08.25 - 本当は怖い愛とロマンス
14. 2011.08.17 - 明日へのマーチ / Let's try again ~kuwata keisuke ver.~ / ハダカ DE 音頭 ~祭りだ!! Naked~[26][27]
15. 2013.03.13 - Yin Yang(イヤン) / 涙をぶっとばせ!! / おいしい秘密[28]
16. 2016.06.29 - ヨシ子さん[29][30]
17. 2016.11.23 - 君への手紙 (발매예정)

6.2 정규앨범

01. 1988.07.09 - Keisuke Kuwata[31] - 솔로 데뷔 앨범
02. 1994.09.23 - 孤独の太陽[32]
03. 2002.09.26 - ROCK AND ROLL HERO
04. 2011.02.23 - MUSICMAN[33]

6.3 베스트앨범

01. 1992.06.27 - フロム イエスタデイ
02. 2002.11.27 - TOP OF THE POPS[34][35]
03. 2012.07.18 - I LOVE YOU -now & forever-[36]

6.4 합동 싱글

01. 1995.01.23 - 奇跡の地球 [37][38][39]

6.5 KUWATA BAND 싱글

01. 1986.04.05 - BAN BAN BAN
02. 1986.07.05 - スキップ・ビート(SKIPPED BEAT)[40]
03. 1986.07.05 - MERRY X'MAS IN SUMMER
04. 1986.11.05 - ONE DAY

6.6 KUWATA BAND 앨범

01. 1986.07.14 - NIPPON NO ROCK BAND[41]
02. 1986.12.05 - ROCK CONCERT

6.7 SUPER CHIMPANZEE 싱글

01. 1991.09.26 - クリといつまでも
02. 1991.11.21 - クリといつまでものカラオケ付き

6.8 嘉門雄三&VICTORWHEELS 앨범

01. 1982.03.02 - 嘉門雄三&VICTOR WHEELS LIVE! [42]

7 트리비아

  • 많은 아티스트와 두루두루 친한 편이지만 같은 소속사인 아뮤즈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매우 친하다. 그리고 같은 소속사의 포르노 그라피티의 경우에는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사잔 올 스타즈와 같은 소속사 가수가 되고 싶어서 현재 소속사인 아뮤즈를 선택했을 정도로 존경과 친분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소속사로는 미스터 칠드런의 사쿠라이 카즈토시와도 친하다. 미스터 칠드런의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한 코바야시 타케시가 쿠와타의 솔로음반과 사잔 올 스타즈의 일부 음반에서 키보드 서포트와 프로듀싱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외에 동향 치가사키 출신의 선배가수인 카야마 유조를 경애하기도 하면서 친분이 쌓여 80년대에 카야마 유조 & 쿠와타 케이스케로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2014년에는 카야마 유조의 무도관 공연에 축하 게스트로 출연한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 가수들과의 친목? 그의 인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가 2006년에 사잔 올 스타즈 명의로 개최했던 공연이였던 몽인도 페스티벌이였다. 이때 같은 소속사의 후쿠야마 마사하루, 포르노 그라피티, 비긴 등을 포함하여 미스터 칠드런에 GLAY(그 밴드 글레이가 맞다)까지 섭외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와다 아키코와도 친분이 있다. 2008년에 와다 아키코가 한 방송에서 자신의 노래를 쿠와타가 리메이크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 발언 이후 실제로 같은 해 12월에 쿠와타가 자신의 솔로 이벤트 공연인 혼자서 홍백가합전의 마지막 노래로 리메이크해주기도 하였다. 음악계 이외에는 뮤직 스테이션의 진행자인 타모리와 오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으며,[43] 아카시야 산마와는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한 적 있고 사잔의 콘서트에 영상 축전을 여러 차례 보내기도 한 사이이다.
    • 그리고 쿠와타의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공인받은 사람들도 꽤나 있다. 후배 가수 중에서 히라이 켄aiko는 자신의 발매작품에서 꾸준히 사잔 올 스타즈와 쿠와타 케이스케의 노래를 리메이크할 정도로 열성적인 팬이다.
  • 하지만 그런 쿠와타와도 사이가 안 좋은 가수가 있는데 바로 한국에서 RUN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나가부치 쯔요시... 쿠와타 케이스케가 본인 솔로 싱글에서 나가부치에 덤으로 쿠와타 입장에서도 대선배인 야자와 에이키치를 디스하는 듯한 뉘앙스의 가사를 썼다. 야자와는 "뭐 그거 가지고... 나는 신경 안쓴다네. 하지만 이 일로 쿠와타 군이 곤경에 처한게 걱정되는군" 이란 반응으로 쿨하게 넘겼지만 나가부치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서 대사로, 소속사 차원에서까지 사잔을 디스했다. 그랬다가 90년대 말부터 나가부치 쯔요시가 마약 관련 문제로 일본 연예계에서 빨간줄이 그어지면서 이제는 쿠와타와 별 의미가 없는 관계가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쿠와타와 나가부치 간의 디스전이 다소 꼴사나워지면서 흑역사가 생겼다는 것(...).아무리 20여년 전이라지만 그때도 상당한 대가로 공인받던 사람들이 참...
  • 2015년 주간 현대에서 조사한 일본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에 1위를 차지했다.[44]
  • 일본 가요의 절대 거성답게 저작권 수입도 거대하고, 음반 판매량, 대형 공연 및 방송출연 같은 다양한 활동이 꾸준히 많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재산도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86~2006년까지 20년간 납세액이 23억엔(현재 환율로 약 210억원)으로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일본 전체 연예인들 가운데 3위였다. 이로 인해 일본 언론에서 추산한 그의 수입은 69억엔(현재 환율로 약 630억원)[45]이다. 저 시기 이전에도 스타였기 때문에 수입이 좋았을 것이고, 저 시기 이후에도 현재까지 10년간의 수입을 더 생각해보면... 거기다가 부인 역시 사잔 올 스타즈를 함께 한 멤버로 큰 수입이 있으니까 ㅎㄷㄷ 쇼난 붐의 진원지와도 같던 젊은 청년이 어느새 일본의 수백억 자산 갑부아저씨가 되었다.
  • 역대 누적 음반판매량은 사잔 올 스타즈가 약 4894만장으로 일본 역사상 4위[46] 이고, 쿠와타 케이스케 개인앨범 역시 누적판매량이 1400만장에 육박하는 수준이라 합치면 6000만장이 넘는다. 실제로는 그렇게 말하기 힘들지만, 이렇게 계산하면 일본 음반 역사상 2위가 되는 판매기록이다. 2015년에 사잔 올 스타즈로 복귀한 앨범 포도가 발매 이후 2015년 상반기 누적 판매량 50만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 그룹과 솔로 모두 왕성히 활발하면서 작품성과 대중성 양쪽 모두 균형있게 탄탄한 인기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꽤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 그의 일본내 인지도를 나타내는 사진
    Qnn6y0U.jpg
  • 2016년 2월 26일에 60세를 맞이했다. 그 기념으로 레코초쿠, 아이튠즈 등의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에 솔로 곡들이 해금되었다. 해금된 곡은 KUWATA BAND, SUPER CHIMPANZ의 작품을 포함한 싱글 20작, 앨범 9작에 수록된 총 211개의 곡이다. 그 영향으로 레코초쿠나 아이튠즈 랭킹에 쿠와타의 곡이 몇 보인다. 그 중에 明日晴れるかなMr.Children과의 합작인 奇跡の地球가 눈에 띈다.
  1. 특이하게 일본어 입력기로 케이스케라고 입력해서는 저 한자가 안 나온다. 佳 이 한자는 주로 음독으로 か(카)인데 이 사람의 이름일 때는 けい(케이)라고 읽어야 한다.
  2. 과장이 섞인 찬사기는 하다. 최근에는 이 '시인' 호칭이 Mr. Children의 사쿠라이 카즈토시에게도 많이 쓰이는 듯.
  3. 그래서 몇몇 곡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 무지 힘들다. 대표적인 노래가 쿠와타 밴드의 Skipped Beat
  4. 참고로 원곡의 가사는 이렇다. 優能な内閣総理の表明 原稿を読み国家を救う…“Baby, 行革なんです”と ギャグを言う hey / 우능한 내각총리의 입장표명 / 원고를 읽는 나라를 구한다 / Baby, 행정개혁입니다 라고 개그를 말해 hey 이것도 발매 당시 일본 정치권을 풍자하면서 디스한 내용인데 2014년 연말 콘서트에서는 앞부분 가사에 뒷부분을 “衆議院 解散なんです”と ムチャを 言う 라고 바꾼 것이다. 원래 가사의 우능이란 말은 일본어로 발음이 '유능'과 같아서 장난을 친 것이다.
  5. 2천년대 초반 콘서트에서는 열광하는 팬들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TSUNAMI 가사 중 '사실은 보기보다 더욱 강한 내(僕, 보쿠)가 있어'를 '사실은 보기보다 더욱 강한 그대(君, 키미)가 있어'라고 바꿔 부른 적도 있다.
  6. 특히 일본어는 한국어 'ㄹ' 받침발음 혹은 영어 'L' 발음이 없지만 쿠와타는 항상 그런 발음으로 불러왔다. 예를 들어 가사 "스가루"를 "스갈르", "모로이"를 "몰로이"에 가깝게 발음하는 식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런 발음을 인식하는데 약해서 연속적으로 이렇게 발음하면 진짜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이 발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 중 하나가 사잔 올 스타즈의 상징이 된 전설의 노래인 TSUNAMI이다. 쿠와타의 오리지널 발음을 다른 가수들이나 가라오케 버전과 비교하면 이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런 발음은 2014년에 낸 싱글 커플링 곡 중 하나인 パリの痴話喧嘩 라는 노래에서 매우 극단적으로 다시 나왔다.
  7. 지금도 사잔 올 스타즈의 히트곡을 다른 가수들이 방송 및 공연에서 부르거나 아마추어 밴드가 공연하는 경우에 잘 들어 보면 그들 중 99% 이상 쿠와타가 부를 때와 느낌이 많이 다른데, 그 원인은 창법 차이도 있지만 발음의 차이가 가장 크다. 다른 가수들은 다 전형적인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는데 쿠와타는 그런 정통 일본어 발음이 아닌지라...그 발음 때문에 재일교포 떡밥이 나오는데도 영향을 줬다 근데 그 발음이 쿠와타의 가창에 대한 독보적인 이미지를 만들기도 해서
  8. 그러나 사실 이 데뷔무대의 곡 '마음대로 신드바드'는 발음 문제 쪽으로만 보기 어려운게, 원래 일부러 중간중간 리듬에 비해 가사가 과도하게 많게 들어가게 한, 랩에 가까운 포스트모던적인 신개념 포크록이었기 때문에 발음을 아무리 정확히 해도 보통의 랩보다 더 빨라서 사실 그 부분들은 못 알아 들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 부분들은 한국으로 치면 아웃사이더의 랩 정도 속도라고 보면 된다.70년대에 그런 속도 ㄷㄷ 그러니까 일부러 노래의 일부분을 '알아들으려면 알아듣고 못 알아들으면 말라'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봐도 될 정도. 애초에 가사도 심히 관능적인(!) 뉘앙스라 당시로서는 시청자가 못 알아듣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사잔은 방송 공연에서 노래 중간에 그 가사들을 읊어댈때 갑자기 무대에 드러누워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일어나는 퍼포먼스까지 보여 줬기 때문에 누워 있는 그들을 카메라가 하이앵글로 찍어야 했고 결국 제대로 클로즈업을 할 수 없어 입모양조차 볼 수 없었다.
  9. 일본의 음악교육, 특히 창법이나 작사 등에서도 정통 일본어 발음에 맞게 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지금도 기본이다. 어기는 걸 잘 용납치 않는다.
  10. 1985년 당시 쿠와타와 베이스 세키구치 카즈유키의 음악 견해차로 인한 불화가 매우 심해 해산 위기까지 갔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중재하면서 밴드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하였고 이 당시 아내인 같은 밴드 멤버 하라 유코가 임신을 하여 밴드의 활동을 쉴 필요가 있었다.
  11. 아직도 40대 이상에서는 사잔과 쿠와타의 개인 순위 모두 계속 5위 안에 드는 최상위권이다. 사잔은 활동하는 시기에는 항상 40대 이상 조사 부동의 1위. 그러나 30대의 지지도 있기 때문에 일본 전체 순위를 공개할때도 20위 안에는 둘 다 꾸준히 든다. 15~20여년 전만해도 전체 1위를 했을텐데
  12. 이 콘서트를 사잔과 쿠와타 콘서트에서는 주로 年越し(토시코시) 콘서트라고 부른다.
  13. 516NMJYKRHL.jpg
  14. 문제는 이 의상에 쿠와타 얼굴이였다는 것...
  15. 임진강이 조총련계 쪽에서 불려지다가 포크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를 통해 발매되어 일본에서 인기를 끈 노래다보니 조총련계 재일교포가 아닌가 하는 얘기도 설이 돌았다.
  16. 여담으로 순전히 한국어에 호기심을 가져서 일부 표현을 한국말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의 연예인이나 예술인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홍콩영화의 영향으로 따거 같은 중국말을 종종 사용하기도 하듯이 말이다.
  17. 자연스러운 대화에서 쓸 일은 없지만 일본에서 '안녕하세요', '만세'와 더불어 한국어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단어 중 하나이다. 한국인에게 일본어 하면 떠오르는 '스미마셍', '곤니찌와'를 떠올리면 될 듯.
  18. 솔로 싱글 첫 오리콘 주간차트 1위
  19. 어머니의 별세가 제작의 계기였다고 한다. 매우 쓸쓸하고 슬픈 멜로디와 가사를 가지고 있다.
  20. 2001년 7월 월간 싱글차트 1위
  21. 2001년 연간 싱글차트 4위
  22. 쿠와타 솔로에서 첫 밀리언셀러 싱글
  23. 2001년 11월 월간차트 1위
  24. 두번째 싱글 밀리언셀러
  25. 2002년 7월 월간 싱글차트 1위
  26. 3A 싱글
  27. 이 중에서 Let's try again은 아뮤즈 소속 연예인들이 모인 팀 아뮤즈 명의로 발매한 적 있는 응원곡이였는데 이를 제작자인 쿠와타 케이스케가 재편곡을 한 것이다. 먼저 발매한 팀 아뮤즈의 Let's try again은 사비 멜로디만 있고 나머지 전개는 아뮤즈 소속 가수들의 대표곡을 리믹스(...)한 것이다.
  28. 3A 싱글
  29. 타이틀곡 1곡과 커플링곡 3곡과 이 중에서 TV방영 Edit. 버전 1곡으로 해서 총 5개 트랙으로 발매하였다.
  30. 참고로 초회한정판의 경우에는 보너스 트랙으로 과거 발매곡의 라이브 버전이 더 들어간다. 초회한정판 한정으로 거의 정규앨범에 맞먹는 총 9곡짜리 싱글이다.
  31. 오리콘 주간차트 2주 1위
  32. 오리콘 주간차트 1위, 첫번째 솔로 앨범 밀리언셀러
  33. 2011년 2월 월간 앨범차트 1위
  34. 2002년 12월 월간 앨범차트 1위
  35. 2003년 연간 앨범차트 4위
  36. 2012년 7월 월간 앨범차트 1위
  37. Mr.Children과의 합동 싱글
  38. 1995년 2월 월간 싱글차트 1위
  39. 1995년 연간 싱글차트 7위
  40. 첫 주간 싱글차트 1위. 참고로 싱글 차트에서는 사잔 올 스타즈 활동 때보다 먼저 1위를 달성했다.
  41. 오리콘 CD 차트에서 1986년 연간 1위
  42. 嘉門 雄三(かもん ゆうぞう)라는 명의로 활동한 것인데 기타 항목에 서술될 선배가수 카야마 유조의 이름을 활용한 예명으로 활동했다.
  43. 쿠와타에게 쿠와타 군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
  44. B6kmpxeCYAI_7Jo.jpg
  45. 현재 엔저 현상이 심해서 그런 거지, 당시 환율로는 760억원이 넘는다.환율 때문에 100억이 넘게 바뀌나
  46. 최근에야 수년간의 휴식기를 접고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5천만장을 돌파하지 못했지만, 이미 5천만장을 넘긴 1위 B'z, 2위 미스터 칠드런, 3위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어 일본 역사상 4번째로 5천만장 돌파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