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게토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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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5월,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이 항복하는 모습. 흔히 1944년 바르샤바 봉기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게토 봉기 당시의 사진이다.

1 개요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트레블링카 집단학살 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봉기이다. 1943년 4월 19일에 일어나 4주 뒤인 5월 16일 진압되었다

역사상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바르샤바 봉기라는 이름이 붙은 봉기는 많은데,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은 1943년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유대인 중심의 봉기이다.

1944년에 바르샤바 각비에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와는 별개의 사건이다.

2 배경

“우리의 슬로건은 이것이다. ‘우리는 인간답게 죽을 준비가 돼 있다’”

-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츠(Mordechaj Anielewicz)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하고, 바르샤바에 유대인을 수용하는 게토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이 과밀 수용되어 봉쇄된 게토의 상황은 민생이 매우 열악하였고,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질병과 식량부족, 물자부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독일은 1942년 부터는 본격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을 시작하여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이송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 이송되어 나간 유대인들이 말살당하고 있다는 정황은 점차 수용소 내부에 알려졌고, 공포에 질린 유대인들은 대응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Żydowska Organizacja Bojowa)을 조직하여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사실, 말이 저항이지 폐쇄되어 외부와의 연락과 물자 반입도 어려운 게토에서 제대로 된 전투 준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소수의 유태인 저항세력이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였던 독일군에 맞서 싸워봤자 어차피 승산은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짐승처럼 도살될 것이다. 따라서 저항을 택한 사람들은 무력하게 죽느니 '싸우다가 인간답게 죽기'를 결심하였다.

3 봉기의 시작

1943년 1월 9일, 하인리히 힘러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유대인들을 이송할 것을 명령했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이 명령에 반발하여 게릴라 전으로 저항하였고 몇몇 독일군이 살해되었다. 게토 내부에 독일군이 진입하는 것이 위험했기 때문에 이송 작전은 도중에 중지되었다.

당시까지 게토의 행정은 독일이 임명한 바르샤바 게토의 자치조직인 유대인 평의회가 맡고 있었다. 유대인 평의회는 어떻게든 유대인의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애초에 유대인의 멸종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의 움직임 앞에서 평화적인 저항은 성과가 미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말살이 벌어지는데도 무력하기만 한 유대인 평의회에 실망한 게토 주민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에 열광하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유대인 평의회는 게토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게토의 통치는 유대인 전투 조직이 장악하였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독일의 앞잡이들과 유대인 경찰을 붙잡아 처형했다. 유대인 경찰의 우두머리였던 유제프 셰린스키(Józef Szeryński)는 청산가리를 먹고 음독자살했다.

4 전투 준비

유대인 전투 조직은 본격적인 전투를 대비하여 무기를 비축했다. 그러나, 봉쇄된 게토에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무기는 확보할 수 없었다. 수백 자루의 권총, 약간의 소총과 카빈총, 극소량의 기관총, 폭약, 화염병, 수류탄 등을 준비했다. 전투원의 장비는 권총과 수류탄 몇 개가 고작이었다.

폴란드계 저항조직이었던 폴란드 국내군은 유대인 전투 조직에 높은 평가를 내렸지만, 국내군 자신들도 무기가 부족했기에[1] 무기는 제대로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권총 50정, 수류탄 50개, 약간의 폭약을 지급해 주었을 뿐이었다. 무기가 너무 적어서 지원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였고, 전투원의 수는 유대인 전투 조직과 유대인 군사 동맹을 합쳐도 1000명에 못 미쳤다. 그리고 게토 각지에 벙커를 준비하였다. 에어컨과 전기 시설을 갖추고, 몇 개월은 버틸 수 있는 양의 물, 식량, 의약품을 비축했다.

언제 전투가 시작될 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전투 조직은 훈련을 거듭했다.

5 무장 봉기

5.1 4월 19일 : 유대인의 승리

1943년 4월 18일, 무력으로 빈민가를 제압하고 이송 작전을 개시한다는 정보가 전해졋다. 즉시 게토의 주민들에게 경고가 알려지고, 벙커에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의 생일인 4월 20일을 기념하여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기로 결정했다. 4월 19일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첫날이기도 했다.

4월 19일, 오전 3시 2000여명의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를 포위했다. 이 부대는 그리 전력이 대단치 않아서, 훈련이 부족하거나,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폴란드 총독부 휘하 폴란드 경찰과 폴란드 소방대도 동원되었다. 전차는 프랑스경전차 뿐이었다.

오전 6시 경에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로 침입을 시작했다. 유대인 레지스탕스들은 화염병으로 전차를 공격하고, 무장친위대 대원들에게 발포했다.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태만해 있던 부대는 의외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7시 30분에 패주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8시에 지휘관을 교체하였고,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사냥은 가차없는 결단력과 냉혹한 방법으로 실시하라. 공격은 강력할 수록 좋다. 이 최근의 사례는 유대인이 어떻게 위험한지를 보여준다."는 명령을 내렸다.전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건 너네가 제일 위험하거든? 그러나 유대인들은 격렬한 저항 끝에 오후 5시 독일군은 전차 1대와 장갑차 1대를 잃고, 게토에서 임시 철수. 이날 전투는 종료했다.

여성 레지스탕스 지도자 치비아 루베트킨(Cywia Lubetkin)은 이 날의 승리에 대해서 "아주 기뻤다. 내일 일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우리들 유대인 투사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화염병과 수류탄에 겁을 먹고, 무적의 용사로 보였던 독일군이 후퇴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2]

5.2 초토화

그러나, 4월 19일의 승리는 방심하고 전투력도 장비도 변변치 않은 2선급 부대에게 거둔 승리일 뿐이었다. 4월 20일, 바르샤바 야전군 사령관 프리츠 로숨(Fritz Rossum) 소장의 파견 부대가 도착했다. 독일군은 시가전에 맞서서 초토화 전술을 실행했다. 게토의 건물에 불을 질러서 숨은 유대인들을 태워죽이는 것이다.

4월 20일, 독일군은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게토에 침입하였다. 동시에 국방군이 보유한 고사포와 곡사포로 포격을 퍼부었다. 게토의 여러 지역은 불타올랐고, 전기, 물, 가스의 공급을 완전히 차단했다. 물이 없어서 불을 끌 수도 없었고, 레지스탕스들은 초소를 포기하고 벙커로 철수하였다.

봉기시작 2주째에는 벙커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다. 독일군은 하나하나 벙커를 발견하고, 벙커에 수류탄과 최루탄을 던져넣어 유대인들을 소탕했다. 숨어있던 게토 주민들 역시 전투에 휘말려 건물에 깔려 죽고, 벙커에서 사망했다. 게토의 하수도로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독일군은 하수도를 폭파하여 저지했다.

체포된 주민들은 열차에 실려서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5.3 바르샤바 게토의 붕괴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아닙니다.

게토 외부에서 폴란드계 레지스탕스 조직인 폴란드 국내군과 폴란드 인민군이 산발적인 교전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게토 내의 저항조직원들을 도피시키는 것을 돕기도 했다.

유대인 군사 동맹은 게토의 중심인 무라노프스키 광장(Muranowski Square) 주변을 거점으로 하여 오랫동안 싸웠다. 4월 27일, 유대인 군사 동맹의 지도자 다비드 모리츠 아펠바움(Dawid Moryc Apfelbaum)이 부상을 입었다. 이 때, 헨리크 이반스키(Henryk Iwański) 소령이 이끄는 국내군 부대[3]지하도로 유대인 군사 동맹의 부상자를 옮기고 있었지만, 아브펠바움은 게토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다음날 28일 사망했다.

5월 8일, 유대인 전투 조직의 벙커가 독일군에 포위되었다. 가스탄과 수류탄, 폭발물 공격으로 유대인 레지스탕스 사상자가 속출했다. 생존자들은 이제 끝이라고 판단하고, 서로 총을 겨누어 집단 자살했다.[4]

이틀 뒤, 수십명의 유대인 레지스탕스가 폴란드 공산주의자의 협력으로 하수구로 게토를 탈출했다. 그 뒤에도 몇몇 전투 부대가 게토에서 전투를 계속하여 5월 15일 까지 산발적으로 전투가 기대되었다.

봉기의 전체 희생자수는 확실하지 않다. 독일군의 피해에 관한 독일군의 공식 발표는 17명 전사에 93명 부상이었다.[5] 폴란드 측에 의하면 86명 전사에 420명 부상이었으며, 유대인 측에 의하면 300여 명 사상[6]이었다. 또한 13,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7]당했으며, 56,885명은 학살 수용소로 이송되어 가스실이나 총살대에서 생애를 마쳤다. 극히 운이 좋은 유대인들은 폴란드 국내군과 공산주의자[8]의 지도 하에 빠져나왔다.[9]

SS소장 위르겐 슈트로프 장군은 5월 16일에 "더 이상 바르샤바 게토는 없다."는 선언이 했다. 8시 15분에는 진압 기념으로 바르샤바의 시나고그(유대인 회당)가 폭파 해체되었다.

6 이후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약 100여명의 사람들은 이후 바르샤바 봉기에서 다시 한 번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7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Uprising이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피아니스트에서도 중요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 소설 독수리는 내리다와 이를 영상화한 동명의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루프트바페 공수중령(영화에서는 대령) 쿠르트 슈타이너와 그의 부하들이 동부 전선에서 열차편으로 귀국하던 중, 이 봉기 진압 후 압송되는 과정에서 SS에게 거칠게 다뤄지는 유대인 소녀를 도와줬다가 일종의 형벌부대에서 죽을 때까지 혹사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1. 국내군 숫자가 최소 2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당시 국내군이 보유한 무기는 중기관총, 경기관총 합계 300여 정, 소총 6천여 정 정도에 불과했다.
  2. 후일 운 좋게 살아남은 루베트킨은 이후 이스라엘 건국과정에도 참여한다.
  3. 총 18명. 이 중에는 헨리크의 형인 바츠와프(Waclaw)와 헨리크의 아들인 로만(Roman)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반스키 휘하의 소(小) 부대는 4월 27일 탄약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을 지참하고 게토 내로 이동했으며, 바츠와프는 전투 중에 사망하고 헨리크와 로만은 중상을 입었다. 헨리크의 또다른 아들인 즈비그니에프(Zbigniew)는 카르멜리츠카(Karmelicka) 거리의 전투에 참여, 이후 게토 바깥으로 탈출하는 유대인들을 호위하다가 5월 3일 전사했다.
  4. 이 때 아니엘레비츠 또한 자신의 연인과 함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홀로코스트 역사학자들의 학장(Dean)이라 불리는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 또한 이 수치가 대체로 맞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6. 바르샤바 게토 봉기부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자 운 좋은 생존자인 마레크 에델만(Marek Edelman)이 이 수치를 언급했다. 나중에 에델만은 국내군이 일으킨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전했으며, 이후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거부하고(그는 반시온주의자였다) 죽을 때까지 우치(Lodz)에서 심장 전문의로 일했다.
  7. 이 중 6,000여 명은 산채로 화형당하거나 화염의 연기에 질식사했다.
  8. 인민 근위대(Gwardia Ludowa). 후에 공산 폴란드 인민군(Armia Ludowa)에 통합.
  9. 유일하게 나치 독일의 점령지 중 어떤 형태로든 유대인들에게 도움을 준 폴란드 인들은 즉결 처형되었기에 이들 중에서도 또 운이 좋은 일부만이 살아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