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황제의 그림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듯한 그림(...).
1 개요
Βασίλειος Βουλγαροκτόνος(고전 그리스어 - Basilios Bugaroktonus, 현대 그리스어 - Vasilios Vulgaroktonos)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요안니스 1세 | ← | 바실리오스 2세 | → | 콘스탄티노스 8세 | |
마케도니아 왕조 | 마케도니아 왕조 | 마케도니아 왕조 |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사랑은커녕 그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절친한 친구도 없었던 듯하다. 비잔티움의 역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었다.” - 존 줄리어스 노리치「비잔티움 연대기」
로마 제국 제3의 중흥기 절정에 있었던 황제. 그러나 대제 칭호를 받진 못했다.[1]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
976년에서 1025년에 이르는 기나긴 치세 동안 동쪽의 토로스 산맥 너머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혔고, 제국 북부를 위협하던 숙적 불가리아를 멸망시켜 도나우 강 이남의 발칸 반도를 수복했으며, 러시아(키예프 공국)를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1.1 즉위 전
로마노스 2세와 쎄오파노의 아들들 중 장남. 958년에 태어났으며, 재위기간은 962~1025년. 하지만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976~1025년. 로마노스 2세가 젊은 나이에 죽었고, 당시 바실리오스 2세와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는 나이가 어렸기에, 어머니인 쎄오파노는 제국 최고의 장군인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결혼하여 권력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사라센의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은 최고였지만 정치력이 너무 부족했고 이는 또다른 쿠데타를 유발하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요안니스 찌미스키스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조카로 전우이자 부하였지만[2] 곧 흑심을 품었고 쎄오파노와 밀회하며 기회를 도모하였다. 요안니스는 황후와 짜고 니키포로스를 암살하였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쎄오파노는 자신의 위치를 지킬것이라 믿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간섭 때문에 요안니스는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는 제국의 황족이나 황제가 쫒겨날 때 단골로 애용하는 경우인(...) 수도원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1.2 험난한 제위로의 길
976년 요안니스 1세 찌미스키스가 사망하면서 바실리오스 2세가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풋내기. 그는 자신의 친척이자 시종장인 바실리오스의 후견으로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 참고로 후견인인 바실리우스는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자 공동황제였던 로마노스 1세 라카피노스의 서자였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2세는 점차 그와 거리를 두었고, 결국 바실리오스 2세는 바실리오스에게 반란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한다.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분명 바실리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직계자손이었지만, 앞서 두 장군(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의 치세를 거치면서 귀족들은 혈연보다는 능력을 더 중요시했다. 이는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이야기인데,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는 제국의 영토를 늘리고 세수를 증대시켰으며, 병력을 충실하게 만드는 등 국가 전체로 볼때 매우 바람직한 황제였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는 상징적인 황제로 남고, 실력있는 사람이 공동황제가 돼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 혈통만을 주장하면서 자기가 직접 혼자서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젊은이는 매우 우습게 보였다.
당장 요안니스 사망 직후, 요안니스의 친척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Βάρδας Σκληρός)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당시 바실리오스 황제가 포카스 가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이들로 반란을 제압했다. 여기서 패배한 스클리로스는 중동으로 도망쳤다[3]. 후에는 포카스 가문의 바르다스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아시아 지역을 장악했고, 이를 본 스클리로스도 중동에서 병력을 얻어 개입했다. 두 반란세력은 결탁했는데, 이내 바르다스 포카스가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를 제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바실리오스 2세의 최대 위기로, 수도가 포위당했으며, 자신을 구원해줄 세력은 없고, 말이 반란군이지 정예병력은 몽땅 반란군의 지휘하에 들어간 지 오래며, 만일 항복하더라도 기존의 위치인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폐위 및 죽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황제는 해군으로 시간을 벌면서, 키예프 공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는 약 6,000명의 지원병을 보내주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이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대신 그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티 안나를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이후 키예프 공국은 동방정교회국가로 거듭나 오늘날의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로 이어지게 된다.
1.3 제국의 중흥을 이끌다
일단 내전을 거치면서, 바실리오스는 성격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본래 탐욕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은 내전 이후 그 모든 욕망이 죽어버린 듯했다. 그는 제국에서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않은 유일한 황제가 된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야사에서 조차도 스캔들이 아예 없다고 써놓았다...심지어 초상화에도 혼자만 있다.[4] 진정한 사나이 증명설 사나이 에게 사랑은 필요 없다 [5]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하면서, 불가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사무엘은 스스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가 되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황제는 원정을 감행하지만 트라야누스 관문이라 알려진 협곡에서 참패한다. 그는 이 패배에서 반드시 불가리아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고, 실제로 그 맹세를 지켰다.
황제는 다시 불가리아에 재차 침공을 감행하나, 안티오히아 총독으로부터의 긴급 지원요청 때문에 불가리아를 벗어나 시리아 지역에 원정을 가게 된다. 당시 기세를 떨치던 파티마 왕조는 동로마의 영토에 또 다른 위협이 되었고, 안티오히아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황제는 전군에 노새를 지급하여 빠르게 이동했고, 며칠 만에 안티오히아 지역에 16,000여명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패배하였고, 황제는 이참에 기세를 몰아 트리폴리까지 밀고 내려간다. 아쉽게도 트리폴리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황제는 만족하며 귀환길에 올랐다.[6] [7] 귀환하던 도중, 소아시아 지역의 귀족 에브마티오스 말레이노스에게 대접을 받게 되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부귀를 누리는 말레이노스의 연회 내내 그는 조용히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귀족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새로운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그동안 귀족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말레이노스는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당연히 소아시아 지역에서 불만이 터져나왔고, 그는 한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러야 했다.
사실 이는 10세기 들어 눈에 띄게 강력해진 아나톨리아의 지방 군벌들을 견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제위 초반부에 바실리오스 2세를 크게 위협했던 포카스, 스클리로스, 쿠르쿠아스, 말레이노스 등의 오래된 명문 가문들은 위세가 상당히 약화되어 점차 기록에서 사라져갔으며 바실리오스 2세 휘하에서 종군한 군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새로 등장한 가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콤니노스 가문, 달라시노스 가문 등이며, 이들은 기존 명문 가문들이 기록에서 차츰 사라져갈 때 제국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주요 귀족으로 군림하였다.
제국 내부가 안정된 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불가리아에 다시 나타났다. 약 15년간에 걸쳐 전개된 이 전쟁은 아쉽게도 기록이 별로 없다. 1015년경에 이 전쟁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전투가 나타나는데, 킴발롱구스 협곡에서 바실리오스 2세는 사무엘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대패시키고, 15,000명의 포로를 잡았다.(1014년 7월 29일, 클레이디온 전투 또는 킴발롱구스 전투) 그는 이 포로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15,000명의 포로들을 100명으로 나누어 1명은 애꾸, 나머지는 전부 눈을 뽑고, 애꾸가 나머지 99명을 인솔해 불가리아로 되돌아 가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라 불리게 되었다. 이 포로들의 행진을 본 사무엘은 화병으로 죽고 말았고, 3년 뒤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
당시 불가리아군이 거의 절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불가리아 포로 학살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설이며, 실제로는 없었던 일로 추정된다. 또한 사무엘은 화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패배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하지만 위 전설이 전해지는 시기 즈음 위 협곡에서의 전투와 바로 그 전에 대규모 야전이 있었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실리오스 2세가 그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고 소모전으로 일관해서 불가리아를 고사시켜 버리는 전법을 보인 여유를 봤을 때, 불가리아가 그때의 야전들로 병력을 그만큼 잃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저 15,000명의 병력은 불가리아 추정 총 병력 35,000명의 1/3을 넘어가는 엄청난 수치로, 저 정도 병력을 그렇게 짧은 시기 안에 다 잃었으면 사실상 그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사무엘이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큰 심적 타격을 입었던 건 사실로 보인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후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으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 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불가리아 정복보다는 이런 편집증적인 인력 관리에 바실리오스 2세의 진면목이 있다.
1.4 말년과 제국의 몰락
1020년경 황제는 넘치는 에너지로 제국의 동쪽 끝자락에서 활동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동로마인들은 992년에 체결된 황금문서에 따라 베네치아의 해상원조를 받으면서 노르만인들을 격퇴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1027년에 원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1025년 12월 사망하였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손을 남기지 않았으며, 이는 제국이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자들은 전부 제국의 몰락에 기여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 쇠퇴의 단초를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우선 자식이 없었다. 유능한 후계자를 미리 지정해 놓아야만 하였으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제위를 이었는데, 그는 연이은 군사반란 이후 성격이 바뀐 형과는 달리 방탕하고 사치스러웠고, 무능하기 짝이없는 팔푼이였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에게 휘둘리고 살아 황권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상속자인 세 공주들을 결혼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 후손이 없는 마케도니아 왕조는 초라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유능하기라도 하면 말을 말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극도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던 제국은 다시금 귀족들이 판치게 된다.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지방의 군사귀족(호족)들과 중앙의 수도 관료귀족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제위에 오르자마자 군사귀족계의 양대산맥을 토벌해야 했던 바실리오스 2세는 평생을 두고 군사귀족을 탄압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수도 관료귀족이 득세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재위의 상당기간을 원정으로 보냈으므로, 자연히 황제가 없는 동안의 행정과 정치는 수도의 관료귀족의 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8]
그러나 수도 관료귀족은 바실리오스 2세가 팽창시킨 제국을 유지할 무력이나 수완이 없었고, 과도하게 탄압된 군사귀족들이 몰락하면서 제국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당연한 현상으로, 군사귀족들은 변방의 영지가 본거지므로 본거지 방위를 위해서라도 외적을 격퇴하는 것을 주임무로 생각하지만, 수도귀족들은 수도가 본거지므로 변방따위는 직접적인 손해만 없다면 어찌되던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게 그 이유다.
덕분에 제국의 변방 방어선은 매우 취약해졌고, 이는 제국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장 수도 관료귀족 중 최상위를 차지하여 마케도니아 왕조 최후의 두 여제(조이, 쎄오도라) 이후 제위를 차지한 두카스 가문은 무력의 부재에 무능한 황제까지 겹쳐 제국을 차차 쇠퇴시키다가 디오예니스 가문의 로마노스 4세가 소집한 7만 군대 중 절반 가까이를 까먹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참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후 로마노스 4세가 휴전조약을 맺고 오자 실력도 없는 주제에 폐위된 로마노스를 대신해 제위를 탈환하고서는 조약을 파기하고 덤벼들었다 아나톨리아를 상실한다. 이는 1081년, 두카스 가문의 사위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제위를 얻어 제국을 부흥시킬 때까지 제국은 걷잡을수 없이 쇠퇴한다.
1.5 여담
여담이지만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에 가려져 바실리오스가 불가리아 이외의 곳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 루스족을 개종시킨 일, 할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동로마의 백과사전 문화를 후원한 업적은 올바로 평가 받지 못했다. 그는 또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엡도몬[9]에서 성 요한네스(세례자 요한) 교회를 건립하고, 콘스탄티노플 성벽 외곽의 군대 연병장 옆에 부속 황궁을 둘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바실리오스의 군사적 업적은 일인칭 형식으로 서술된 그의 비문에도 새겨져 있다.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가 의전서에 정리한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세가지 중 하나를 포기했다. 그 세가지인 즉슨,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포로피로옌니타, 안나 콤네나 항목을 참조), 그리스의 불, 자줏빛 제관(제위)였는데,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인 자신의 여동생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원래 동로마 황실은 절대 포르피로옌니타를 타국으로 출가시키지 않았다. 오토 1세의 며느리 쎄오파노도 황실의 여자였을 뿐 포르피로옌니타는 아니었다[10].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하였고, 아예 번복하기에 이르나 분노한 블라디미르 대공이 제국을 침략하여 바르나 등을 점령하자 어쩔 수 없이 원래 약조대로 한다. 다만 이 이후로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주들을 외국에 결혼을 보내기 시작했고, 외국인 황후들 또한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른 하나인 제위는 1204년 알렉시오스 5세가 수도에서 도망가고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에 협의하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제위에 올림으로써 끝났다. 그리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제국 자체가 멸망하기에 이르지만,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야 의전서고 뭐고 의미가 없으니 이하생략.
가장 오래 외국(...)에 넘겨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리스의 불. 그리스의 불은 출현하자마자 각종 짝퉁이 넘쳐났으나(아랍은 물론이거니와 십자군도 사용했다!), 그 정확한 배합비율은 극비로 취급되어 4차 십자군 당시는 물론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유출되지 않았다. 물론 화약병기의 발전으로 고대와 중세를 풍미했던 액체화약의 필요성이 감소한 것도 클 것이다.
다만 적어도 이런 사항을 동시대인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진 않으며, 그들이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바실리오스 2세는 아주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지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수도에 있을 때면 산더미 같은 결재 서류들이 쌓인 황궁 내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밤이 늦도록 일일이 직접 처리하고 지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야전에선, 본디는 하급 장교들이 해야 할 전투장비 지휘 검열을 열병식 때 몸소 하면서 열외 조치까지 직접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 활동 따윈 전혀 관심이 없고 씻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데다가 옷을 멋지게 입는 것 따위도 아오안이었고, 연인은 고사하고 친한 친구도 만드는 일이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개성에 관대한 현대의 사회인이라도 이런 식이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 못할 텐데, 그는 그 당대에도 천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중세 강대국, 그것도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이 자리는 결코 사생활이나 개인의 개성 같은, 중세에는 있지 않았던 개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자리에는 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역할로서 제국의 위대함, 권위, 세련됨 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출하고, 또 그걸 적극적으로 가꾸고 외국과 자국 내 신민들 모두에게 과시하여 결과적으로 문화력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 자체를 강화할 의무가 있었다. 근대 이전의 군왕들이 신민들의 돈을 쥐어짜가면서도 후세가 보기에는 스케일이 큰 사치에 불과한 거대한 왕궁, 종교 건물, 문화 시설들을 지은 건 물론 군왕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주된 목적은 결코 왕 혼자 억수로 큰 궁전에서 놀라는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왕실의 권위 자체를 지속적이고, 또 적극적으로 표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런 면에선 정말이지 전혀 무관심했을 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다. 모든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일이자 취미이기도 했던 군대 지휘와 내정 관리에 그런 것들이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인간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극도의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앞서 이야기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군인들과 장군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그다지 좋아할 수가 없었던 건 무리가 아니며, 어떤 연구자가 정확히 지적하는 "박약한 책임감"이란 지적은 바로 여기에서 근원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가 해야 했던 이런 역할을 전담하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후세에 무능한 황제로 이름난 그의 동생인 이름뿐인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였는데, 이 사람은 평생 놀고 먹으면서 스포츠 경기나 하고, 성대한 의식을 아내와 함께 집전하는 게 일이었다. 권력 가진 형님 황제는 일이 취미라 권력을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실권 없는 동생 황제는 형이 귀찮아서 싫어라 하는 공적 의식 참여와 집전 그리고 사교 활동하면서 노는 게 일[11]... 제국 황후가 해야 하는 모든 중요한 일은 진작부터 제수가 떠맡아 하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도 나름 할 말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어쨌든 상술한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한 것에 비하면 당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꽤 박했고, 그를 군주로 존경하고 좋아했던 건 그의 군인들뿐이었다. 대체로 후세에 명군이라 이름나는 군주들은 나름의 특이한 개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는데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자신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런 의미에선 세계사적으로도 꽤나 특이한 경우다.
허나 그 당대인들의 아들, 손자 세대에서 그의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게 되는데 조카딸인 조이의 남편들, 여동생, 양자의 치세 그리고 그 경쟁자들 간의 권력암투를 뒤에 두고 마케도니아 황조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표면적인 이름의 들러리로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보인 일련의 무뇌적인 행각들과 바실리오스 2세의 뒤를 이은 무기력하거나 무능하거나 정통성 없는 황제들의 지배, 페체네그족과 투르크족, 노르만족에게 시달리던 11세기 중반 당대의 백성들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서 이야기로 들어온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무적을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가 그의 대한 후세대의 평가를 극적으로 바꿔놓게 된다. 마지막 결정타로서 만지케르트(...)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가 다시 한번 도래하기는 하지만 초강대국 로마 제국이란 의미에선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작가 노리치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인 1025년 12월 16일을 동로마의 몰락이 시작되는 날로 보았다.- ↑ 이유는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의 호감을 사고말고가 아니라, 이 황제가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이상한 성격적 결함이 있었던 탓에 당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다.
- ↑ 최소 9세기부터 기록에 등장한 아나톨리아의 명문 귀족 가문인 쿠르쿠아스 가문 출신으로, 찌미스키스는 별명이다.
- ↑ 두 가문 모두 당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다. 이외의 유력 군벌로는 쿠르쿠아스, 멜리시노스, 크라티로스, 말레이노스, 아르기로스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바실리오스 2세의 주 탄압 대상이 되었다.
- ↑ 이런 이유로 서구권에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는듯 하다. 다만 그가 남성을 좋아했다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는 없다. 어찌보면 무성애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 ↑ 그런데 줄리어스 노리치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여자들 꽁무늬 쫓아 다니는게 거의 유일항 취미였다고!
- ↑ 이때 이집트군의 침공에 어리버리하게 대처한 안티오히아 총독을 해임하고 용감하게 싸운 젊은 군인을 새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후기 비잔티움 역사에서 지겹도록 언급 되는 달라시노스 가문의 선조인 다미아노스 달라시노스이었다.
- ↑ 해임당한 전임 총독 미하일 부르찌스도 젊은 시절 니키포로스의 시리아 원정 당시 가장 먼저 안티오히아 성벽을 용감히 돌파한 공으로 총독까지 이르렀었는데 세월의 무상함 이란... 이전 버전에선 새로 제수된 인물이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이라고 서술되었는데,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11세기 후반에야 기록에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은 디라히온 전투에서 등장.
- ↑ 이 때 관료집단의 급속한 팽창 덕분에 중산층 이하의 능력 있는 청년들도 출세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중 한 명이 향후 두카스 왕조와 함께 나라를 말아먹은 미하일 프실로스이다.
- ↑ 지금의 이스탄불 바크르쾨이 지구
- ↑ 명문 군벌인 스클리로스 가문 출신이었다.
- ↑ 콘스탄티누스 8세에 대한 이런 평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동안 형의 정치적 조력자로서 당대에 흔히 발생하는 부모자식, 형제지간에도 쉽게 저지르는 배신을 저지르지 않은 든든한 아우였고, 초기 권력 투쟁 시기에는 형과 함께 군사 귀족들의 반란 진압에 직접 선봉에 선 경력도 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사후 황제로서의 통치가 무능하다고는 하지만, 딱히 큰 문제가 터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선임황제로서의 제위 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했다. 2년 동안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단순히 형과 비교해서 무능하다고 폄하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부분이 있다지만.....그러나 안 까일 수는 없다. 2년 동안이라 한들 그 짧은 기간 동안 형이 심혈을 기울여 세워놓은 토지 정책을 대부분 다 엎어버린 데다가, 후계자 선정도 어처구니없이 이뤄졌고 그 기간 동안 딸들을 결혼시켜 놓지않아 이사키오스 1세까지의 불안정 했던 제위계승과 다툼으로 인한 제국이 쇠망하는 원인에서 분명 큰 부분이므로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