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 남자부 감독 | |||
김세진 (OK저축은행) | 80px | 최태웅 (현대캐피탈) | |
신진식 (삼성화재) | 박기원 (대한항공) | ||
공석 (한국전력) | 50px | 공석 (KB손해보험) | |
김상우 (우리카드) |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 | |
박기원(朴基元) | |
생년월일 | 1951년 8월 25일 |
출신지 | 부산광역시 |
출신학교 | 성지공고 - 한양대 |
포지션 | 센터 |
신체 | 196cm, 99kg |
소속팀 | 한국종합화학 (1973~1979) 피네토 볼리 (1979~1981) |
지도자 | 이탈리아 프로배구팀 감독 (1981~2002) 이란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2005)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감독 (2007~2010)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2015)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 (2016~ ) |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KB손해보험 스타즈 역대 감독 | |||||
신영철 (2004~2007) | → | 박기원 (2007~2010) | → | 김상우 (2010~2011) |
1 소개
前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現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의 감독이다.
...하지만 여러 모로 대한민국 남자 배구계 내외부의 적이 되어 버린, 꼬여도 단단히 꼬인 감독.
2 선수 시절
성지공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마치고 1973년에 한국전력에 입단했으나 한국종합화학에도 스카우트되자 이중등록 문제로 인해 2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받을 뻔했으나 북한 팀과의 대전으로 인해 징계는 유보되었고, 이후 종합화학에서 뛰다가 1979년에 대한민국 배구 선수로는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했다. 피네토에서 2년간 선수로 뛴 뒤 이후 2002년까지 감독 또는 헤드 코치로 12개 팀을 맡으면서 미스터 마지코란 별명을 얻었다. 마지코는 마술사라는 뜻. 2·3부 리그팀을 맡아서 상위 리그로 승격시키고 우승 5번, 준우승 4번을 차지한 그의 지도력을 극찬한 말이다. 세리에 A 파르마 감독까지 했던 김호철보다는 위상이 낮았지만, 유럽무대에서 검증된 감독인 것.
3 이란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박기원 감독의 의도치 않은 매국 시즌 1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이란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이란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 1990년대까지 아시아에서 배구 변방국이었던 이란을 스피드 배구 시스템으로 잘 묶어서 아시아 선수권 메달권에 올렸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배구 은메달을 차지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남겼다. 이후 후임 조란 가이치, 훌리오 벨라스코 등 유럽 명장의 영입으로 성적을 올리면서 한국배구와 이란 배구는 완전히 실력상 역전된다.
최근 들어와서는 박기원이 이란 배구에 공을 세운 것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고평가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 이유로는 박기원 감독이 2005년에 떠난 후 아시아의 배구강국이 된 이란의 현재 팀 구성은 오히려 박기원 감독의 후임인 조란 가이치 감독과 훌리오 벨라스코 감독의 지도가 오히려 더 컸다는 것이다. 현재 이란배구대표팀의 기둥인 사이드 마루프와 모하마드 무사비같은 선수들 역시 조란 가이치 감독 시절 때 발탁된 선수들이란 점이란 것도 시사해 볼 만할 점이다. 그렇긴 해도 이란 현지에서는 남자배구 리빌딩의 토대를 만든 게 박기원이라는 점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이란에 경기를 하러 갈때 이란 관중들이 "미스터 팍!"이라고 환호하며 손뼉을 쳐주던 목격사례가 있다. 배구계의 히딩크
4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감독 시절
2007년 신영철 감독이 물러난 뒤 LIG의 감독으로 들어왔다. 스피드 배구를 도입하겠다는 포부와 함께 스페인 용병 기예르모 팔라스카를 영입한 후 당시 국내 최고의 공격수였던 이경수와 신예 김요한이 있는 LIG는 상위권에 위치할 팀으로 보였으나...2시즌 연속 4위를 기록하며[1] 사임한 후 후임 감독으로 김상우 코치가 임명된다.
박기원의 실패는 LIG라는 팀 환경에선 예견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스피드 배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운동량과 스피드가 받쳐줘야 하고, 특히나 세터의 기민함과 대담한 토스웍, 윙스파이커들의 적극적인 개인전술 활용이 필수인데 LIG는 V리그 팀중 가장 느려터지고 가장 세터가 취약하고 윙 스파이커들의 개인 전술이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신인인 김요한이 리셉션이나 폼이나 타법같은 것이 교정되야 할 프로 초기에, '요새 추세는 리시브가 아니라 리셉션이다. 좀 후져도 된다'는 어이없는 말로 김요한을 방치해 당시 코치였던 이상열이 타법을 수정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고 그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 라이트윙에서 세터로 전향해 토스가 불안정한 황동일을 끊임없이 기용해 팀의 공격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후임 김상우 감독이 같은 팀의 스쿼드를 가지고 준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해 삼성화재와 어느정도 치열하게 붙었다는 점에서 박기원 감독이 한국 배구팬에게 나쁜 인상이 된 건 이 시즌이 결정타.
박기원의 최대 업적은 LIG에서 짤렸다는 것이다.
이 글이 어디에도 있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5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박기원 감독의 의도치 않은 매국 시즌 2
2011년에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LIG에서의 부진한 실적 때문에 인선 당시 말이 있었지만, 달리 할 사람이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취임 초기부터 계속 해왔던 스피드 배구를 도입하고 기본기를 탄탄하게 하겠다는 운영 목표를 밝혔으며, LIG와 달리 문성민, 전광인, 서재덕 등 스피드 배구를 할 만한 선수가 그나마 있어서 LIG 때보다는 낫겠지라는 기대를 했지만, 현재까지는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2014년 월드리그에서 일본과 같이 19위가 되었으며 과정도 형편없었다. 이에 박기원 감독은 아시안 게임에서 잘 하겠다고 말했지만 준결승에서 세계선수권에 아예 탈락한 일본을 만나 세트스코어 3-1로 처참하게 무너졌다.동시에 한선수의 2015년 8월 4일 전역과 박철우 군대 확정 지못미
2015년 4월 문용관에게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넘기고 배구협회의 국제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아시아배구연맹 코치위원장으로 선임된 데 이어 2015년 11월 27일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스피드 배구를 완성하겠다고 말했지만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기 위해 배구계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계선수권도 태업했던 그와 배구협회가 이런 말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신뢰가 높지는 않다. 그리고 결국 아겜도 구식배구 하다가 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