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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경수(李京洙) |
생년월일 | 음력 1979년 4월 27일 |
출생지 | 대전광역시 |
출신학교 | 유성초 - 대전중앙중 - 대전중앙고 - 한양대 |
포지션 | 레프트 |
신체사이즈 | 신장 196cm, 체중 90kg |
소속팀 |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KB손해보험 스타즈 (2002~2015) |
종교 | 불교 |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배구 선수. 前 구미 KB손해보험 스타즈의 선수이자 現 남자배구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
통산 3,841득점의 기록으로 V-리그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다.[1] 한때 포스트 김세진, 신진식에 가장 가까운 선수였고 실제로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이자 해결사였지만, 이런저런 주변 환경에 심하게 휩쓸리는 바람에 본인이 가진 실력을 팀에 100% 보태 주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 선수였다.
대한민국 배구의 암흑기였던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에 뛰었기에 실력의 저평가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 시기에 최고의 공격수이자 해결사는 이경수였다.
배구를 하기에 적합한 긴 팔과 체격에 유성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단련된 구력으로 2미터대 선수 중에는 역대 최고 수준의 기본기를 가졌고, 특히 스파이크 테크닉에서는 비교를 불허한다. 밀어치는 스타일이라 체력이 떨어지면 종종 밀려서 아웃 타구를 만들긴 하지만, 주특기인 크로스 깊은 각 처리는 센터가 제대로 잡지 못하면 그저 밀려 나가길 바래야 할 정도로 정확했다. 그 전시대 2미터대 날개 공격수들에 비하면 자기 앞 리시브 정도는 무난히 할 정도의 기본기도 갖추었다. 여기에 승부 근성이나 다른 선수의 장점을 보고 배우는 운동선수로써의 투쟁심, 멘탈도 대단했다.
다만 그 멘탈은 이경수의 최대 단점이기도 한데, 한양대학교 시절을 봤다면 그의 승부욕은 탐욕이라는 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 자기한테 공격을 몰아주지 않으면 작전시간 때 세터에게 쌍욕을 하는 걸 현장에서 봤다는 증언도 있었다. 허나 그런 탐욕을 받쳐 줄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양대학교 시절에도 1세트 초부터 가빈화재, 레오화재처럼 모든 공격을 도맡아 하다가 3세트 후반부터 퍼지면서 추격을 허용하거나 역전패를 당하는 패턴을 대학교 때, 그리고 LIG에서 자주 연출했다. 워낙 테크닉이 좋은 선수라 지쳐서 타점이 떨어져도 어떻게든 공격을 성공시키는 재주는 좋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한양대학교 시절부터 심각한 혹사를 자초했고 결국 LIG에서도 경기 후반에 퍼지면서 어이없는 범실로 경기를 내주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2 아마추어 시절
안마시술소를 경영하는 시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유성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했다. 대전중앙중, 대전중앙고를 거치며 1990년대 후반 아마추어 최고의 공격수 유망주로 떠올랐고 대전 중앙중, 고 출신이 많이 가는 배구 명문 한양대학교에 진학해서 장신군단 한양대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다.[2]
이경수는 대학 무대를 초토화시킨 슈퍼스타였다. 2001 슈퍼리그 때는 대한항공을 상대로 51득점(공격점수 46, 블로킹 4, 서브에이스 1)을 쓸어담을 정도의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었었다. 이 기록은 슈퍼리그 사상 최다득점 기록이고 2위 기록도 2000년에 본인이 세운 49득점. 더욱이 리시브도 안정된 완전체 윙 리시버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이미 신진식과 김세진의 뒤를 이을, 아니 어쩌면 그들을 능가할 것으로 기대를 받았던 초특급 유망주로 대우받았다.
문제는 이 때문에 후술할 드래프트 파동이 일어난 것.
3 이경수 파동
이경수의 V-리그 입단 과정은 대한민국 배구 드래프트의 흑역사와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기사를 읽어보는 편이 좋다.
본래 이경수는 LG화재에서 뛰고 싶어했지만, 당시 드래프트 상황으로는 무조건 대한항공으로 가야 했고 드래프트 합의 대상인 신인 계약금 제한 때문에 이경수는 드래프트를 수용한다면 계약금 포함해 5년 5억원이라는 네임밸류와 실력에 비하면 헐값에 입단하게 될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버지 이재원 씨와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한양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과에 입학해 배구 코트를 떠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 드래프트가 된다면 정말로 배구를 그만두고 체육 교사로 진로를 수정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이에 대해선 확고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드래프트제에 대한 합의 결속력이 약했기 때문에 자유계약제로 돌아설 것으로 판단한 LG화재는 역시나 이 대어급 선수로 지원금을 타낼 계획이었던 한양대학교의 송만덕 감독과 밀실 협의 끝에, 16억 원(학교 지원금 4억원 포함)에 이경수를 영입했다. 이후 협회의 드래프트 방침 고수가 발표됐지만 LG화재는 그 동안 빼앗겨 온 선수들을 생각하면 이경수를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었고, 결국 그를 영입하며 파문이 시작됐다. 이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구단들이 반발하여 V-리그 출범에 문제가 생길 상황이 되었다.
다만 LG화재는 사안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송만덕 감독과 오랜 유대를 가지고 있던 현대캐피탈은 형식적인 반발에 그쳤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배구협회의 중재안은 일단 이경수가 드래프트에 참가해 거취를 정한 다음, LG화재가 그 팀과의 협상을 통해 이경수를 트레이드로 데려가도록 길을 마련한다로 합의안을 정하고 가장 거세게 반발하던 대한항공과 합의할 것을 제안했는데...
갑작스럽게 신치용 감독과 삼성화재가 이의를 제기했다. 신치용 감독은 당시 드래프트제의 원칙과 취지, 근간을 해치는 타협안이므로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이와 더불어 이경수의 선수 자격 박탈을 요구했다.다른 놈도 아니고 그 시절 신치용의 입에서 원칙과 근간이란 말이 나오다니 가증스럽기만 하다 신치용도 선수 많이 빼앗아 갔으면서 이에 타 구단들은 그러한 신치용의 발언에 반발했고, 이경수 본인도 잘못하다간 부산 아시안 게임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서 일이 심각해진다. 이 문제는 결국 법정까지 끌고 간 끝에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진다.
1.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LG화재가 아닌 구단이 이경수를 지명할 경우에, 해당구단은 LG화재에 이경수를 내주는 대신 신인 1라운드 지명권을 받게 된다.2.그리고 그 '선 드래프트 ~ 후 협상' 의 보증은 협회장이 선다.
그런데 이 합의안은 대한항공의 반발로 처리가 지연되었고[3] 이 분위기에 편승한 삼성화재, 현대캐피탈의 단장은 더 이상 신인 선수 수급을 늦출 수 없으니 드래프트를 접고 자유계약으로 가자고 선언해서 2003 드래프트는 결렬됐다. 이에 따라 이형두, 고희진, 권영민, 윤봉우, 장광균 등 99, 00학번 선수들(+ 01학번이지만 신선호처럼 3학년 중퇴라는 방식으로 현대캐피탈이 입도선매한 이선규와, 고졸로 입단한 박철우까지 포함)은 자유계약으로 소속 팀을 찾게 된다.[4] 수련선수로 많이 알려졌던 리베로 오정록도 사실은 동 시기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현대캐피탈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한 케이스라 수련선수로 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타격으로 결국 피해를 본 건 대학 선수들이었고, V-리그 출범에 드래프트가 필수 조건이었던 배구협회와 구단들의 결정으로 결국 1년 8개월 여만에 이경수가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보고 합의 사항을 이행해 이경수는 LG화재가 가진 2005년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대한항공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LG화재의 선수가 된다. 다행히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 특례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대신 기초 군사훈련을 받게 되어 리그에는 훈련을 마친 후 합류했다.
이 파동의 여파로 인해 이경수를 양도한 대한항공이 2시즌 후 드래프트가 부활했을 때 지명한 1, 2라운더 선수는 신영수와 김형우였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3년 후배인 신영수가 대한항공의 주포가 되었으니..... 이 때의 이경수 파동은 정말로 대한민국 배구의 역사를 바꿨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반면 LIG는 이경수를 품에 안는 데 성공한 대신 제대로 된 전력 보강을 하지 못하면서 후유증을 톡톡히 앓고 있고, 프로 출범 후에는 단 3번의 봄 배구[5]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초특급 대학 유망주와 그 유망주를 가지고 돈을 더 받으려던 대학교와 V-리그 간 선수 이권 싸움은 2년 뒤 김요한, 문성민 사태로 그대로 반복되고 말았다.
4 프로 시절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2003년 실업배구 대제전 대회 도중에서야 비로소 데뷔한 이경수는 2001년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공격상을 받으며 보여줬던 뛰어난 실력을 프로에서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V-투어 2004년 신인상을 타고 2006-2007 시즌 리그 최우 수 선수와 올스타전 MVP를 차지하며 대한민국 배구의 기둥으로 거듭났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장장 15년이 되도록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적어도 2000년대 초중반 대표팀의 에이스는 국제대회에선 신장의 한계가 있던 신진식, 점차 노쇠화가 진행되던 김세진이 아닌 이경수였고 2006년에는 도하 아시안 게임 금메달에 기여했다. 2009년 1월 27일 대한항공전에서 프로 통산 2,000 공격득점을 기록하였고, 2012년 12월 29일 삼성화재전에서는 프로배구 최초로 통산 3,000 공격득점을 기록하는 등 대한민국 대표 거포 공격수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워낙 팀이 약체인지라 우승 복은 없는 편인데, 그나마 2012년 코보컵 우승이 우승 경력의 전부다.... 2014-15 시즌에는 손현종, 이강원 등 후배들에게 밀리는 상황이 되어 벤치 멤버가 되어가는 형국이다.아아...
그리고 절치부심하며 마지막 시즌을 준비했지만 그 동안 신음해 왔던 허리 부상이 재발하며 그와 팀의 비원이었던 V-리그 우승을 이루지 못한 채, 2015-2016 시즌 개막을 불과 4일 앞둔 2015년 10월 6일에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15년 7월 청주 코보컵이 사실상 마지막 현역 무대가 되었다.그래도 코보컵 덕분에 한때 동료였던 센터보다 낫다
2015년 11월 27일 박기원 감독이 복귀한 남자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로 발탁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V-퓨처 펀드에 1,000만 원을 기탁했다.
2016년 2월 27일 박정희체육관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 2위는 김요한, 3위는 박철우.
- ↑ 이 때 한양대학교 주전에는 국가대표 센터 이선규, 윤봉우와 세터 장영기(이상 현대캐피탈), 대각에 대전중앙고 후배 신영수, 라이트에 김웅진(이하 대한항공)이 나오는 평균 신장 196cm를 넘는 장신 거포 라인업이었다.
- ↑ 이 와중에 대한항공 한장석 감독(야구선수 한승혁의 아버지)이 박석윤에게 물컵을 던져 상처를 입힌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는 10년 넘게 배구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 이들 중 가장 대어였던 고졸 신인 박철우는 결국 당시 배구단 단장들 간의 합의 내용이었던 드래프트 신인 계약금 상한선인 5억원을 뛰어넘는 총액 8억 원을 받고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 ↑ 그것도 원년(2005) 시즌은 시범경기나 마찬가지였고, 2010-11 시즌은 준 플레이오프 덕에 간신히 4위로 올라간 것이었으니 2005-2006 시즌이 사실상 제대로 된 유일한 봄 배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