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1일 플레이오프 4차전 이후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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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시즌 개막전에서 김성근 한화 감독과 함께.
LG 트윈스 No.79 | |
양상문(楊相汶 / Sang-Mun Yang) | |
생년월일 | 1961년 3월 24일[1]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부산광역시 남구[2] |
학력 | 대연초 - 부산동성중 - 부산고 - 고려대[3]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신체 | 170cm, 82kg |
프로입단 | 1985년 롯데 자이언츠 1차 지명 |
소속팀 | 한국화장품 (1983~1984) 롯데 자이언츠 (1985~1986.10.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6.10.7~1993) |
지도자 |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94~1997)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99~2001)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2~2003)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4~2005)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7~2008)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9)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0) LG 트윈스 감독 (2014~) |
종교 | 불교(대한불교 천태종) |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 ||||
백인천[4] (2002~2003) | → | 양상문 (2004~2005) | → | 강병철 (2006~2007) |
LG 트윈스 역대 감독 | ||||
김기태[5] (2012~2014) | → | 양상문 (2014~) | → |
목차
1 개요
롯데 감독 시절 백인천 후임으로 부임해서 이대호, 장원준, 강민호, 김주찬, 박기혁등을 키워내 로이스터 야구의 발판을 마련한 리빌딩 감독
LG 트윈스 3년의 재임기간 중 2번의 가을야구를 이끈, 성적과 리빌딩을 동시에 잡은 21세기 LG 트윈스 최고의 명장[6]
투수코치로서는 최악[7]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리빌딩의 대가인 아이러니한 인물[8]
감독으로서는 롯데의 비밀번호를 끊게 하는 기반을 다졌고사실 김재박의 DTD 시전 대상이 양상문이라는 건 신경 쓰지 말자, LG에서도 김기태 감독이 도망친 팀을 일으켜 세운 사령관이 되었지만, 2015 시즌에 LG가 환승역 없는[9] 9호선을 타는 신세가 되자, 1년만에 재평가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2015 시즌에 LG가 너무 부진하자, 차라리 SK에게 가을야구를 주고 5위 이하에 머물러야 했다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어쨌든, 2014시즌만 본다면 시즌 초 꼴찌에 머물던 LG는김기태 감독이 도망가는 일이 생겼지만 양상문 감독이 온 덕에 기어이 4위로 가을야구에 합류했다. 그리고 2016년에도 젊은 선수들 기용으로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결국 리빌딩을 하면서도 성적까지 얻어낸 기적의 시즌을 창출 하면서 4위로 LG의 가을야구 진출을 만들어냈다.
롯데 자이언츠,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을 거치면서 활동한 야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은퇴 후 지도자 경력을 시작하여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현장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04~2005년에 롯데 감독을 두 시즌 맡았고 2014년 5월 11일 김기태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LG에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별명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롯데 감독 시절 널리 퍼진 양상치.[10] 2014년 LG 감독 부임 이후 최하위 나락에서 4위까지 극적으로 팀 성적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제갈양상문, 양갈량, 잠실부처, 양상타치(...)란 익숙하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입동님이라는 별명도 있다. [11] LG 감독 부임 후로는 평소에 인터뷰를 많이 잘 해서 입동님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 그리고 양상문 부임후 LG의 성적이 2014년 일시적으로 오르자 위의 양상치의 파생 별명으로 갓상치, 잠실부처(...)라는 별명도 생겨났다. 그러나 2015년엔 순위가 추락하고 분위기도 침체되서 망했어요...최근엔 다시 인기가 높아져 알파고에 빗대어 '양파고'라고 불리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 신자라 생명나눔 홍보대사에 위촉되었다.
2 경력
2.1 선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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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쓴 에이스 양상문 |
두뇌피칭, 양박사
부산 출신의 안경잡이 에이스라는 것 때문에 최동원의 후계자로 기대를 받았다. "한국야구사"에서는 1977년을 부산고등학교의 해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주역이 바로 양상문. 1977년 대통령배 준우승을 이끌면서 이름을 알린 양상문은 1978년 정부 방침으로 출전 제한이 걸려 3개 대회만 나가게 된 상황에서 부산고가 출전한 대통령배, 청룡기, 화랑대기에서 모두 우승을 이끌면서 부산지역 야구팬들에게 화려한 시절을 선사했다.
부산고 졸업 후 고려대학교를 거쳐 실업 리그에서 뛰다가 1985년 1차 지명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 잡는 학원 야구부에서 열심히 혹사당한 결과 롯데 자이언츠 입단 당시에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강속구는 물건너갔고 제구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롯데 구단을 쥐락펴락했던 박종환 전무(뒤에 KBO 사무총장 역임)의 눈 밖에 나서 2시즌만에 1987년 임호균과 함께 청보 핀토스로 트레이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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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시절 투구 모습
트레이드 상대로는 롯데: 임호균, 양상문, 배경환, 이진우, 김진근, 청보: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 트레이드 핵심은 롯데의 '양상문 + 삼미 시절 활약했던 임호균'과 청보에서 가장 날렸던 2루수 정구선의 트레이드였다. 전반적으로는 청보가 좀 더 득을 많이 본 트레이드로 기록된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
태평양 시절 김성근 감독과 특훈(...) 앞에서 두번째가 양상문
이후 팀이 태평양 돌핀스로 바뀌고 신인투수 삼총사가 등장할 때까지 꾸준히 에이스 노릇을 해주다가, 199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후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로 임명되어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다.
투수로서의 능력만 본다면 꽤 쓸 만한 기교파였지만 통산 기록은 63승 79패 13세이브 40완투(10완봉) 평균자책 3.59로, 팀이 안습의 절정을 달린 청보와 태평양이다 보니 까먹은 성적이 많다. 청보를 기준으로 본다면 짧은 역사를 대표할만한 선수이고, 인천 야구 팬들 입장에서는 암흑기에 그나마 버틴 에이스. 선수 시절의 평판은 통산 기록에 비해서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2.1.1 연도별 주요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5 | 롯데 자이언츠 | 33 | 101 | 6 | 3 | 4 | - | 0.667 | 3.83 | 120 | 7 | 30 | 58 | 57 | 43 | 1.436 |
1986 | 21 | 37⅓ | 1 | 2 | 0 | - | 0.333 | 1.93 | 27 | 2 | 14 | 21 | 8 | 8 | 0.964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7 | 청보 핀토스 | 36 (2위) | 209⅓ (3위) | 12 | 13 | 0 | - | 0.480 | 3.10 | 188 | 18 | 71 | 84 | 87 | 72 | 1.213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8 | 태평양 돌핀스 | 38 (2위) | 169⅓ (5위) | 9 | 12 | 3 | - | 0.429 | 3.83 | 185 | 12 | 56 | 68 | 89 | 72 | 1.411 |
1989 | 35 | 161⅔ | 8 | 11 | 4 | - | 0.421 | 3.28 | 131 | 12 | 77 | 91 | 60 | 59 | 1.249 | |
1990 | 34 | 162⅓ | 11 | 9 | 1 | - | 0.550 | 3.22 | 151 | 10 | 57 | 68 | 72 | 58 | 1.269 | |
1991 | 25 | 123⅓ | 6 | 9 | 1 | - | 0.400 | 3.50 | 122 | 6 | 46 | 80 | 54 | 48 | 1.354 | |
1992 | 28 | 144⅓ | 7 | 8 | 0 | - | 0.467 | 4.55 | 134 | 22 | 78 | 83 | 78 | 73 | 1.455 | |
1993 | 22 | 101 | 3 | 12 | 0 | - | 0.200 | 4.46 | 110 | 9 | 50 | 46 | 62 | 50 | 1.545 | |
KBO 통산(9시즌) | 272 | 1209⅔ | 63 | 79 | 13 | - | 0.444 | 3.59 | 1168 | 98 | 479 | 599 | 567 | 483 | 1.335 |
2.2 코치 1기 시절
은퇴 직후 롯데의 투수 코치로 재직하다 1997년에 한번 잘리고 1999년에 돌아와서 2001년까지 투수코치를 했다. 이 시기에 신고선수 출신의 박지철과 삼성에서 이적한 박석진을 전천후 스윙맨으로 키워내면서 롯데의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소소하게나마 기여한다. 그 후 2002년 LG 트윈스로 팀을 옮겨 김성근 감독 밑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12]
(...)
이 시기 양상문은 그 전 시즌 팀 방어율이 5점대를 넘으며 막장이 된 LG 투수진을 개선시켜 팀 방어율을 3점대 중반으로 낮췄고, 류택현과 큰 승호를 각성시키며 LG의 좌투수난을 해소시킨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2002~2003년에는 뛰어난 투수코치라는 평판을 얻었다. 김성근 감독도 투수코치로써 양상문의 능력을 거듭 높이 평가했다.
2.3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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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과 함께.
백인천의 후임으로 2004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참고로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부산고 출신 감독이다. 그 전까지는 경남고와 부산상고 출신만 감독을 역임했다. 당시 롯데는 8888577의 절정기로 전년도 성적이 딱 3할을 간신히 찍었던 막장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2004년 시즌에 팀을 맡았던 양상문 감독 체제 하에서 롯데는 그해도 꼴지로 끝마치긴 하였지만, 막장이었던 전년도에 비해 승률을 4할대로 끌어올리며 나름 고무적으로 마무리했다. 이어 2005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뒤엔 DTD가 따라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4년 연속 꼴지의 사슬을 끊고 5위를 기록, 재계약이 유력해 보였으나 구단의 새로운 투자계획이 발표되면서 재계약 무산. 그리고 롯데는 다시 77 후임자로는 강병철 감독이 부임.[13]
사실 이 시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투수코치 양상문과는 달리 상당히 호의적인 편인데, 일단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던 팀을 5위로 끌어올렸으며 백인천 시절 트레이드당할 뻔하는 등 부진에 빠져 있던 에이스 손민한을 다시 일으켜 세워 2005년 MVP를[14] 타게 하기도 했으며, 이대호, 박기혁, 강민호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는 등 리빌딩에 꽤 공헌했다는 평가다. 여하튼 그의 재임기간에 롯데가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막장팀에서 그래도 미래가 존재하는 팀으로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로이스터 시절에 롯데가 상위권으로 도약한데는 양상문 감독 재임 시절의 리빌딩이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다. 그의 뒤를 이은 강병철 감독이 다시 77을 기록한 것도 고평가에 한몫했다.
물론 어두운 면도 있다. 가장 큰 것은 리빌딩 과정에서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고참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 때문에 욕을 먹은 것. 더구나 그 본보기가 공교롭게도 박정태였던지라 당시 일부 롯데 팬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욕을 얻어먹었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쾌조의 컨디션이었던 박정태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개막 엔트리에서 빼버리고 롯데 2루수급 자원들이 돌아가면서 줄부상을 당해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서 쓰지 않고 외면했다. 당시 롯데 주전 2루수였던 조성환이 골절로 시즌 아웃되고 나서 대체 자원인 신명철, 신종길에 박준서까지 죄다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져 2루수 자원이 바닥인 상태에서마저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 쓰지 않고 신인 박진환을 올렸고, 박현승 또한 양상문 감독 재임기간 중에는 거의 전력 외 취급을 받았다. 꾸준히 1할대의 타율을 마크하던 박기혁은 전 경기를 선발로 기용하면서도 고참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자, 롯데팬들이 참다참다 5월달부터는 롯데 구단 홈페이지 갈매기 마당에 '박정태 1군 등록 릴레이'를 펼치고 심지어 홈경기 외야석에 '우리는 악바리 박정태를 원한다' 는 플랜카드를 걸고 시위까지 벌이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박정태는 8월 초에야 1군으로 콜업될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양상문은 어쩌다가 한 타석씩 대타로만 기용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15] 그러나 당시 팀을 장기적인 계획하에 리빌딩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노장 박정태를 배제하고 신진 선수들을 기용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팬들의 수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상문은 이 기조를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특히 감독 첫해인 2004년 당시 아직 포텐이 터지지 못한 이대호, 김주찬, 박기혁 셋은 거의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양상문과 더불어 죽도록 까였다. 당시 이대호 기용에 대한 롯데팬들의 울분
다만 상술했듯이 의도적으로 박정태나 박현승 등 베테랑들을 배제한 것이 이듬해 패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욕을 먹어가며 키운 어린 선수들이 시즌 초반 선전해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5월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양상문 체제 하에 베테랑들이 정리되거나 부진한 롯데로서는 위기에서 중심을 잡고 이끌어줄 리더십이 부재했다. 결국 다시는 상위권으로 올라갈 탄력을 받지 못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4강 탈락이 확정된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선 선수단 분위기가 감독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해졌고, 이는 결국 4년 연속 꼴찌팀을 5위로 끌어올린 소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양상문과 재계약하지 않고 신임으로 강병철 감독을 재영입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덤으로 후임 강병철은 비록 팀 성적은 끌어올리지 못했지만 정보명이나 이승화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 기회를 주면서도, 전임 양상문처럼 고참을 기준없이 홀대하지 않고 최소한 공정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양상문 재임 기간 동안 경기를 거의 뛰지 못해 은퇴 위기에 내몰렸던 박현승은 강병철 감독 밑에서 다시 기회를 얻어 2007년 0.325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까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팀 성적을 전년도 꼴찌에서 5위로 끌어리는 등 리빌딩의 성과가 보이자 프런트는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을 하게 되었고, 양상문 감독과의 재계약 대신 롯데의 2회 우승을 이뤄낸 강병철을 다시 데려 오게 된다. 당시 야구인들은 양상문의 재계약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었고 실제로 2005시즌 종료 후 마무리훈련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급작스럽게 강병철로 교체되어 롯데구단은 전임 감독에 대한 예의도 없다고 언론에서 두들겨맞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양상문이 해놓은 팀의 체질 개선이 후퇴하고 팀성적 역시 2년 연속 7위에 그치며 다시 비밀번호 시절로 회귀한 것. 결국 강병철은 재계약에 실패하고 후임으로 로이스터가 오게 되었고 로이스터는 양상문의 아이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롯데의 중흥기를 이끌게 된다.
총평을 하자면 비록 연차가 많은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과정 가운데서 잡음이 있었고 선수단 관리에도 헛점을 드러내며 본의 아니게 롯데 감독 생활을 일찍 마무리하긴 했지만, 전임 백인천에 의해 손 쓸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롯데를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미래가 기대되는 팀으로 끌어올린 것은 분명히 양상문 감독의 공이자 업적이다. 이 때 양상문에 의해 키워진 이대호나 장원준, 강민호 등은 훗날 모두 각 포지션에서 리그 최고의 선수들로 성장했고 이 선수들은 모두 양상문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백인천 감독, 강병철 감독 등과 계속 트러블을 일으켰던 손민한도 양상문 감독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양상문 감독이 재임하던 2005년에는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2.4 해설위원 1기
롯데의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6년에는 MBC ESPN에서 해설을 했고, 도하 아시안 게임 국대 투수코치를 맡아 도하 참사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2.5 코치 2기 시절
이 때의 양상문이 2014, 2016년의 기적을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첫 해인 2007년에는 2년 연속 꼴찌를 달리던 팀 방어율을 6위로 끌어올렸으나, 2008년 도로 꼴찌로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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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정영기 감독을 이어 롯데 2군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정영기 감독시절에 비해 2군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듬해인 2010 시즌에도 롯데 2군은 퓨처스(구 2군) 남부리그 4위를 기록하였다.
2010년에는 아로요 코치의 뒤를 이어 롯데의 1군 투수코치를 지냈다. 2010년 양상문 코치 하에서 롯데 투수진이 폭망했다고 평하는 팬들도 있지만 이전 시즌 혹사로 인해 조정훈, 손민한 두 에이스가 동시에 이탈한 점을 감안하면 아로요 시절보다 2단계 떨어진 팀방어율 6위를 기록했던 2010년이 객관적으로 나빴다고 보긴 어렵다.
2010년 양상문 투수코치 시절을 비판하는 이들에 따르면 2007 시즌에 팀 세이브 최하위였다가 아로요 투수코치 하에서 2008, 2009 시즌을 거치며 안정적으로 변해왔던 불펜진의 경우 2010 시즌 들어서 양상문 코치가 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사망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2010년 롯데 투수진 자원 자체가 썩 좋지 않았고 부상이 많았다. 특히 손민한과 조정훈 두 에이스의 동시 이탈은 뼈아펐다. 이는 선발야구를 하고 있던 롯데에게는 엄청난 악재였다. 2009년 다승왕을 차지하며 맹활약했던 조정훈은 포크볼의 과도한 사용으로 부상의 우려가 컸었는데, 역시나 2010년 초부터 부상으로 고전하더니 결국 이탈하여 이듬해에 공익으로 훈련소에 입대하고 말았다. 전국구 에이스 손민한의 이탈 역시 타격이 컸다. 부상으로 2009년 WBC에서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던 손민한은 부상 와중에도 2009년 14경기에 등판하며 팀에 기여했다. 그러나 손민한은 2010~2012 세 시즌 동안은 아예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또한 외국인 용병 두 명 모두 투수인 경우가 많았던 당시 타 팀에 비해서, 투수 사도스키와 타자 가르시아를 용병으로 쓰던 롯데는 상대적으로 투수력에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2010년에는 선발진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빠지다보니 불펜 투수들의 출장 수가 늘어나며 혹사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전반적으로 투수 운영에 큰 어려움에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보는 눈이 없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 주장은 다소 편파적이다. 조정훈을 뽑은 스카우터진에게 왜 쟤를 뽑았냐고 조정훈이 보는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근데 양상문의 말도 틀린 게 아닌 게, 당시 타팀에서는 윤석민, 오승환 등을 뽑았던 것 비해 롯데는 상위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훈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정훈 선택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롯데 팬들 사이에 말이 말았다. 조정훈이 2009년 팬들과 전문가들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포크볼을 뿌려대며 공동 다승왕[16]을 차지할 때는 롯데의 선택이 옳고 양상문의 판단이 틀린 듯 하기도 했으나... 김수완은 원래 양상문이 2군에 있을 시절 방출하려고 했었으나 박정태를 위시한 2군 코칭스탭들이 뜯어말려서 방출은 면했다.[17] 이후 김수완이 잠깐 빤짝했을 때 김수완을 방출하려 했던 양상문이 까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즌 초 양상문이 직접 선발후보가 될 수 있다라고 했던 진명호의 경우 2009년 3경기 선발로 나와 3경기 동안 7⅓이닝 동안 16실점 하면서 평균자책점 19.64라는 아름다운 성적을 기록하면서 진명호를 추천한 양상문까지 같이 까였지만, 2011년에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오히려 팬들로부터 혹사 걱정을 받고 있다.
가장 간단하게 납득하고 싶다면 LG와 롯데의 경기를 보자. 양상문이 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하는 곳과 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했던 곳의 대결을 보면 확연히 이해가 될 것이다. 엘 꼴라시코
2010년 8월 13일 라이언 사도스키가 볼넷으로 만루를 채웠을 때 양상문이 올라왔었는데, 그 후 이종범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았다. 그러자 인터넷에서는 양상문 디버프, 양상문 왜 올라왔냐!면서 까댔다. 사도스키는 결국 퀄리티 스타트를 했으니 까일 여지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연임 지지 광고가 팬들에 의해 올라왔는데, 고작 사흘만에 천만 원을 찍었다. 이에 롯데 프런트는 당혹감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팬들은 '계획이 들통나서 당황했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름아닌 양상문이 로이스터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설이 퍼진 이후였기 때문이다. 2010년 롯데의 성적을 보면 문제는 불펜진인데 롯데의 블론세이브가 2010년 16개인데[18] 이 중 절반만 세이브 했어도 시즌 2, 3, 4위 싸움은 혼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롯데의 엄청난 공격력을 고려해본다면 1위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임을 첫 번째가 감독이 져야 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투수코치다. 그런데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감독을 잘라 놓고 역시 책임을 져야 할 투수코치가 차기 감독이 된다면... 이 광고는 롯데 팬들이 구단을 얼마나 불신하는지 잘 보여주며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많은 팬을 잃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결국 롯데 구단이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년 연속 고배를 마신 제리 로이스터 감독, 박영태 수석코치, 한문연 배터리코치와 함께 세트로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롯데에서의 코치 생활을 마감했다. 로이스터 연임 찬성과 반대를 떠나서 롯데에 관심있는 이들은 대체로 박영태, 양상문 해임에 한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환호하는 모습을 보였다.[19]
2.6 지도 스타일
롯데와 LG시절 모두 코치로서의 평가가 박한 편인데 양상문의 투수 코칭은 한마디로 요약가능하다. 변화구는 슬라이더로 통일하고 스트라이드는 무조건 좁혀서 상체위주의 투구를 한다. 양상문의 투구철학은 스트라이드를 좁혀 각을 날카롭게 한 횡 슬라이더와 포심 패스트 볼의 투 피치.
게다가 이런 투구폼은 당장 급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동양인의 체구적 특성에는 맞지 않는다. 일단 하체 힘의 전달력이 좋지 못하니 상체의, 특히 어깨의 반발력에 기대는 점이 커서 온 몸을 이용해서 던질 때보다 어깨에 충격이 더해져 장기적으로는 부상을 야기시킨다.[20]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양상문의 투구이론은 일단 스트라이드 되는 오른발의 내딛는 위치를 조정해 축이되는 왼발과 스트라이드되어 뻗는 오른발의 위치를 좁게해서 상체의 반발력과 회전반경을 크게 해서 공의 구력을 높이고 적절하게 릴리스 포인트를 조절해 즉시전력으로 만들어 써먹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릴리스 포인트를 전혀 못잡아 탄착군 형성이 불완전한데다 이를 획일적으로 뜯어고치는 방식이다보니 투수들이 제대로 적응을 못한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투수들의 신체적 특성이나 스타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투구폼을 획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나마 상체위주 투구폼이 맞았던 선수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투수들은 해맨다. 롯데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장원준의 투구폼을 제대로 못 가르쳐서 4번이나 폼을 바꿔며 해맨 일화가 있다.
LG 트윈스 투수코치로 있던 시절 봉중근, 이범준, 정찬헌의 투구폼을 전부 똑같이 뜯어고쳤고 2010년 롯데 투수코치로 부임하자마자 송승준, 장원준 등 롯데 투수들의 스트라이드가 전부 좁아졌다. 더구나 2009년 롯데 2군 감독으로 있는 동안 2군 투수진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해 결국 선발 대체 요원들은 로이스터 감독이 직접 찾아낸 이재곤과 김수완.[21]
구질 면에서도 현대 야구에서 중시되는 종으로 떨어지는 구질이나 옆구리 투수에게 필수적인 잠기는 구질을 못 가르친다. 양상문이 자신의 장기인 슬라이더 외의 브레이킹 볼에 대해 얼마나 이해도가 떨어지는지는 메이저리그 해설 중 했던 한 마디로 드러난다. 이 날 클레이튼 커쇼의 커브를 보고 양상문은 커브는 안 좋은데 패스트 볼이 좋아서 커브도 먹힌다 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코치 시절엔 은근히 투수 혹사 논란도 있는데, 2004년 임경완은 한 경기 84구를 던지는 등 시즌내내 혹사당하다 허리가 부러진채로 군에 입대한 뒤 언더핸드 수준으로 스트라이드를 내리고 나서야 간신히 재기할 수 있었고, 신인이었던 조정훈을 고교 시절 혹사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급하게 올렸다가 강병철 감독 2년 내내 2군에 머물게 만들었다.
LG 감독 부임 후 임정우에게 스플리터를 가르쳤는데, 과연 양상문이 그간의 오해와 달리 종 변화구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인가의 평가 척도가 될 확률이 높았다.
2.7 퇴진 이후
퇴진이 발표된 후인 2010년 10월 6일, 롯데 자이언츠 사이트의 팬 게시판인 갈매기 마당에 #작별 편지(?)를 올렸다. 투수코치에서 물러남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한 마디로 간추리면 자기는 다 잘했고 실패는 전부 다 제리 로이스터 때문이라는 자기변명이다...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일개 코치가 공개적으로 상관인 감독을 비판한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사례로 이 당시 야구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고, 언론으로부터도 적절치 못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같이 짤린 박영태 前 수석코치가 그나마 허심탄회하게 소감을 밝히고 쿨하게 물러나는 인터뷰를 한 것과 대비되어 더더욱 까였다.[22]
이후 롯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물러난 양승호 감독의 빈 자리를 찾고 있는 고려대학교와 접촉 중이라고 전해졌으나, 고려대에서는 일단 길홍규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킨 채 대학리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창원시를 연고로 한 제9구단 엔씨소프트의 감독 선호도 조사에서 선동열, 제리 로이스터 다음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가을의 전설 최동원보다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기사 롯데 감독 시절 4년 연속 꼴찌였던 막장팀을 일으켜 세워 리빌딩을 하면서 동시에 성적도 어느정도 냈던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크게 반영된 듯 하다. 반면 최동원 감독은 한화 2군 감독 시절의 성적 때문에 감독으로써의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김성근 SK 감독은 양상문의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했으나, 3월 17일 시범경기에서 놀라운 양상문 매직의 힘, 월미도 바이킹 제구! 고효준 그는 좋은 투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임팩트가 엄청나서 그렇지, 막상 정규 시즌에 들어왔을 때는 고효준은 전년에 비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탈삼진과 승수가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좌완 롱맨 보직도 꾸준히 등판했고, 전지훈련을 못 간 것치고는 준수한 시즌을 보낸 편이었다.
2.8 해설위원 2기
왼쪽부터 손혁, 양상문, 허구연, 차명석 그렇지만 허구연만 남았다
해설위원 양상문의 능력 자체는 자신의 대학원 석사 과정 동안 접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미 2006년에 해설위원을 하면서 그 탁월함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평가가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양상문의 지나치게 편협하고 노골적인 편파해설은 늘 항의를 받았다. 같은 방송국의 이순철 해설위원이나 축구의 박성화 감독과 비슷하다.[23] 그러나 지나치게 롯데 위주로 해설을 한다는 롯데 출신 해설위원들의 단점을 그대로 장착했다.(…) 그래서 다른 구단 팬들에게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었다.
거기에 SK 팬들에게는 SK가 치르는 경기의 해설로 배정될 때마다 상대 팀을 일방적으로 띄워주는 새로운 편파해설의 거성으로 떠오르면서 눈엣가시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고롤코 보내버린 주제에 정식 코치로 안받아줬다고 이러기냐?
게다가 한화 이글스가 LG 트윈스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치자 "이 장면은 정말, 사실은 나와서는 안되는 장면입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넥센 히어로즈에는 호의적이다. 넥센에 호의적인 해설가를 손가락에 꼽을만 했던 시절에[24] 양준혁과 함께 거의 유이하게 넥센 편을 들며 혀갤러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마 구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에서 활약했던 것 때문에 팀이 해체 후 재창단하였어도 애정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스포츠동아에 이런 것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뭐? 누가? 누구를? 그래서 지금까지 그러셨어요?
넥타이를 놀린 죄로 장성우에게 고자킥(?)을 날린게 사진에 잡혔다.
양상문 : 감히 내 넥타이를! 장성우 : 고자라니! 그리고 양상문의 행동은 재평가를 받았다 카더라
(...)
2011년 에이스급 좌완투수들의 집단 부진에 대해 진단을 했다. 나의 혜안 쥐기지?
메이저리그 해설도 가끔 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점으로, 할 때마다 어이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발언과 틀린 정보를 많이 퍼뜨린다. 대표적인 예가 클레이튼 커쇼를 두고 커브는 그다지 쓸만하지 않은데 속구가 좋아서 선수들이 커브에 당한다고 한 것.[25] 그것 외에도 맷 하비를 두고 놀란 라이언 이후 강속구 투수가 등장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강속구 투수가 다시 나타났다 라면서 하비의 95마일 패스트볼을 두고 '정말 빠른 공이죠' 라고 말했다. 정작 95마일은 하비의 패스트볼 평균 속도. 하비의 패스트볼은 가장 빠를 때 100마일을 넘어간다. 거기에 당연하지만 성공 여부가 아닌 강속구만 놓고 본다면 놀란 라이언과 맷 하비 사이에는 마이너리그만 쳐도 세 자리수를 넘어가는 투수들이 등장했다. 그냥 '저 놀란 라이언 이후 미국 야구 안 봤어요 헤헤헤' 라는 소리로 알아들으면 편하다.[26]
또, 새벽 중계에서는 메이저리그 포수들의 플레이밍을 보며 "포수 플레이밍 능력은 한국 포수들이 세계 최고죠? 허허허"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거기다 시도때도 없이 동양야구 예찬을 자주 하는데, 부진에 빠진 히스 벨을 두고는 '투구폼이 살짝 안 좋은데, 한국 투수 코치들에게 코칭을 받으면 더 좋아질 수 있다. 분명한 건 메이저와 한국 투수 코치들 사이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라는 발언과 미국 포수보다 한국 포수들의 미트질이 더 좋다."는 발언까지 했다. 2013년에는 국저스 LA 다저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자 양상문이 보스턴 레드삭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를 현지중계하러 가는 참사가 발생하며 뭇 야구팬들의 고막을 고문했다.[27] 월드시리즈에서도 주옥같은 헛소리 명언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도루 시도가 2013년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28위였던 세인트루이스를 기동성이 무기라고 하지를 않나, 우에하라의 1루 견제구 끝내기(...)를 두고 '동양야구가 미국야구에 비해 저런 게 좋죠' 라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28], 존 래키가 불펜 등판한 것을 두고 동양 야구의 영향이라고 하질 않나[29] , 2013년 행크 애런 상을 미겔 카브레라가 탔다는 말을 캐스터가 하자 '홈런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라는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결여된 소리를 작렬하지 않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행크 애런 상은 홈런왕이 아닌 가장 훌륭한 타자에게 주는 상이며, 애초에 2013년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카브레라가 아니라 크리스 데이비스다. 이렇듯 메이저리그 해설로서 받는 평도 좋지 못한 편이다.
2.9 LG 트윈스 감독 시절
2.9.1 2014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30]
"야구 지도자" 양상문의 역량이 재평가된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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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감독 취임식에서. 머리 크기가 은근히 비슷하다? 그러나 1년 6개월 뒤 내쳐지는데
2014년에도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해설위원으로 계속 활동하던 중 5월 11일 김기태 전 감독의 사퇴로 공석이 된 LG 트윈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9.2 2015년
그의 역량이 1년만에 안좋은 의미로 재평가된 시즌.
2015년 시즌 후에는 이진영과 이병규가 40인에서 제외되었고, 이진영의 40인 제외가 양상문의 강력한 의중이라는 카더라가 돌면서 일부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이진영은 kt wiz의 지명을 받고 이적하게 되었다.[31]
2.9.3 2016년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상문코스터
7월 26일까지 5할에서 -14까지 멀어졌었지만 기적을 만들어내며 2년만에 정규시즌 4위를 결정지었다.
리빌딩과 가을야구라는 두개의 토끼를 잡은 시즌 양상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재재재평가된 시즌
비난과 압박 극복해낸 양상문의 뚝심
2.10 평가
내용이 길어져서 양상문/평가로 분리한다. 한번 참고하시길.
3 기타
- 선수 시절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아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석사 출신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두뇌파, 학구적이란 이미지에 비해 실제 지도력은 너무나 형편없다는 혹평을 받으며 학벌로 생명을 이어가는 불사조라고 코치 시절 내내 까였다.
- 이래저래 욕 많이 먹은 지도자였지만 롯데에 대한 애정만큼은 확실했다. 2011년 해설위원으로 컴백했을때 롯데팬들의 반응은 "이제 마이크 잡았다고 과거 이야기하면서 롯데 무진장 까겠군." 이라며 견제했지만 오히려 해설내용은 친 롯데. 그 때문에 롯데팬들은 타팀 출신의 마음에 안드는 스태프가 있을 경우 양상문은 롯데를 사랑하기라도 했지라며 깐다(…).
게다가 2012년 시즌 예상에서 롯데를 4강 후보로 꼽았던 몇 안되는 인물이며 유일하게 4강 진출팀을 모두 맞췄다. 그래서 의리의 양상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13년 시즌 예상에서도 유일하게(!) 롯데를 4강후보로 꼽았다. 다만 이 예상은 이번에는 빗나갔다.
- 태평양 돌핀스에서 한솥밥 먹었던 김성근은 양상문을 높게 평가한다. 김성근의 책 중 하나인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를 보면 양상문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하며 양상문을 믿으며 제대로 된 리더로 키우고 싶었다는 말까지 한다.
- 2014 시즌 후 과열된 FA 시장의 거품 논란을 잠재우려면 FA 선수를 공개입찰을 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비웃음을 들었다. 이는 FA 제도 목적이 뭔지 모르는 발언인데 FA 자격을 얻은 선수가 자유롭게 팀을 골라 선택할 자격을 주지 않으면 FA의 근본적인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지극히 선수에게 불리한 방법이다. 자유계약선수(Free Agent)가 아니라 자유경매(Free Auction)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양상문 감독과 비슷한 생각으로 실행했다가 비웃음을 들으며 꼬리를 만 경우가 있는데, KESPA가 예전 E-스포츠에서 이런 식의 FA를 했다가 질타만 들었다.
- 2014 시즌 후 FA를 선언한 차일목이 2년 4억 5천만 원에 계약하자 44년 4억에 계약해도 안 데려올 거라고 고유라 기자에게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다른 팀 선수[33]에게 쓸데없이 비난을 했다는 평. 물론 차일목의 기량, FA 계약 후 발언 등으로 차일목이 어그로를 끌었지만 굳이 저런 발언을 할 건 있냐 싶은 내용.
사실 맞는 말이라 카더라
- 2015 시즌 프로야구 감독 10명 중 4명이 고려대 출신이다. 그 주인공은 양상문 자신을 포함해서 넥센 히어로즈의 염경엽, NC 다이노스의 김경문, SK 와이번스의 김용희 감독. 그리고 2016년에는 한분늘었다 프로야구 감독중 반이 고려대 출신이다.
- 김경문 감독과 막역하다. 김경문을 따라 공주고에 진학할 뻔 했다. 결국 김경문이 먼저 있던(경영학과 78학번)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입학 동기로는 양승호(사회교육학과 79학번), 대학에서 같이 뛰었던 후배들은 김광림(무역학과 80학번), 정삼흠(경제학과 81학번), 선동렬(경영학과 81학번), 박노준(경영학과 82학번)이 있다. 대학시절 활약상
- 염경엽 감독과도 사이가 좋은 편. 웹에서 검색하면 대개 서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34]이 눈에 띄는데, 대학(고려대) 선후배 사이에다 태평양 선후배 사이인 것이 크다 .2016년 준플레이오프 4차전 후, 염경엽 감독이 갑작스런 사퇴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가 끝난 후, 직접 염 감독에게 찾아가 포옹하며 위로해 주는 모습이 팬들에게 포착되었다.
- 고려대 재학 시절,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자는데 혼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점을 높이 사서 구타로 유명한 최남수 감독이 집합에서 양상문만 열외시켰을 정도.
- 선수들과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 2013년 스프링캠프에서 이동현 선수가 양상문 당시 MBC+ 해설위원의 패션 등을 두고 놀리면서 "아저씨, 전화하면 씹지 말고 좀 받으세요"라고 디스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는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만큼 선수들과 관계가 좋다는 뜻.
설마하니 감독으로 만날줄은 몰랐겠지그 외에도 2016년 포스트시즌에서 덕아웃에 붙어있는 선수 명단에 누군가가 "양상문 짱"이라고 낙서한 모습이 캡쳐되었는데, 팬들은 양석환이나 임찬규 아니냐며 의심(?)을 하는 중. 2016년에 LG 트윈스의 덕아웃 분위기가 바뀐데에는 주장 류제국의 공이 컸지만, 그만큼 양상문 감독이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 프로야구 선수 시절에는 구단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혼자서 철도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열악한 철도환경을 생각하면 흠좀무.
4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4 | 롯데 자이언츠 | 133 | 50 | 72 | 11 | 8위 | - |
2005 | 126 | 58 | 67 | 1 | 5위 | - | |
통산 | 259 | 108 | 139 | 12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4 | LG 트윈스 | 95 | 52 | 42 | 1 | 4위 | 4위[35] |
2015 | 144 | 64 | 78 | 2 | 9위 | - | |
2016 | 144 | 71 | 71 | 2 | 4위 | 4위[36] | |
통산 | 383 | 187 | 191 | 5 | | ||
총계 | 642 | 295 | 330 | 17 | |
- ↑ 그런데 실제 나이보다 학교를 1년 빨리 들어가서(음력으론 1961년 2월 8일), 1960년 생들과 동기가 된다.
- ↑ 출생 당시엔 직할시 승격 이전이자 자치구가 아닌 일반구였기에 경상남도 부산시 부산진구 출신이다.
- ↑ 석사과정 포함.
- ↑ 2003 시즌 도중 해임.
- ↑ 2014 시즌 도중 자진
도망사퇴 - ↑ 사실 재임기간동안 여러가지로 말이 많았지만 재임 전인 지난 10년가까이 4강진출을 못할정도로 이전 감독들이 말이 많고, 전력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2016년에 정상호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영입도 없이 성적과 리빌딩 동시에 이루는 것을 보면 칭찬할 부분이다.
- ↑ 초창기에는 박지철, 큰 승호를 잠시나마 리그에서 손꼽히는 에이스로 각성시키는 등 나름대로 유능한 투수코치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 보통은 코치로서는 인정받지만 감독으로서 불명예를 안는 경우가 많다는걸 생각하면 특이한 케이스.
- ↑ 7월 14일 하루 제외(...)
- ↑ 2011년 SK 와이번스 스프링 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잠시 영입되어 고효준의 폼을 봐주다 시범경기에서 고효준이 3연속 폭투를 저지르며 무너지는 장면이 나오자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당시 상하이 한국 영사 섹스 스캔들의 스파이 덩신밍에 빗대어 '양신밍'이라고 깠다.
- ↑ 확실히 전임 김기태감독에 비해서는 말이 많은 편이다. 다만 선수들 개별에 대한 인터뷰를 줄이고 감독에게 인터뷰를 몰리게 했다는 말도 있어서 평가는 유보.
- ↑ 이 때문인지 김성근 감독은 의외로 양상문의 코칭 능력을 준수하게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훗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아직 병역을 필하지 못해 해외 전지훈련에 가지 못한 고효준의 전담 인스트럭터로 양상문을 붙여준 적도 있다.
- ↑ 당시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는 팀을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해서 우승을 내부목표로 정하고 순조롭게 리빌딩을 진행중이던 양상문을 짜르고 우승경험이 있는 강병철을 영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팀에서 시즌 MVP가 나온 것은 2005년의 손민한과 2012년의 박병호 단 두 명뿐이다.
- ↑ 당시 롯데의 베스트 라인업 가운데 2할 5푼 이상을 치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음에도, 타격감 유지가 힘든 대타 포지션에서도 출루율이 5할을 넘을 정도로 감이 좋았던 박정태를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한 점에서 어떻게 보면 선동열이 양준혁에게 했던 짓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 ↑ 두명도 아니고 로페즈, 윤성환과 3인 공동 다승왕이었다.
- ↑ 김수완은 인터뷰 때 유독 양상문에게는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단이 그 건 이후 언론플레이까지 했으니...
- ↑ 주자가 루상에 있는 상태에서 블론세이브되는 터브블론세이브는 절반인 8개.
- ↑ 다만 한문연 코치해임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렸다. 그래도 박영태,양상문이 잘린 것에 대해 대부분 기뻐한 것은 사실이다.
- ↑ 실제 김시진은 2000년대 들어서 매년 즉시전력감 수준급 우완불펜을 찍어내서 명성을 얻었지만, 이 선수들은 하나같이 짦은 전성기 뒤에 부상으로 사라졌다.
- ↑ 특히 김수완의 경우 케이블로 롯데의 퓨처스 리그 경기를 본 로이스터 감독이 왜 이런 투수가 있다는 것을 여태 보고 안했냐고 심하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제리 로이스터 항목 참조.
- ↑ 하지만 로이스터 안티 성향인 갈매기 마당의 일부 팬들은 글 내용에서 보다시피 투수코치 말도 안 듣는 로이스터야말로 막장 감독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양상문을 무능한 감독 덕에 함께 휩쓸린 희생양으로 몰았다.
- ↑ 참고로 양상문처럼 이론은 잘 아는데 실전에서 망했었고 편파해설을 자주하는 해설위원이 하나 더 있다. 허구연 참조.
- ↑ 2013년 현재는 구 현대 시절 해설가들이 많이 생겼다. 이숭용, 박재홍, 조용준 등등
- ↑ 아예 두고두고 까려는 모양인지 포스트시즌에서 탬파베이 경기를 중계 하다가도 깐다.
- ↑ 하비 이전에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만 봐도 너도나도 괴물이라 이야기하던 마당에.... 박찬호만 해도 전성기 LA 다저스 시절 95~6마일 포심을 잘만 뿌렸고, 저스틴 벌랜더는 선발투수임에도 경기 후반에 100마일 공을 뿌릴 정도로 강속구 투수로 유명하다. 구원 쪽에서는 아롤디스 채프먼이 100마일을 우습게 찍는다.
- ↑ 다저스가 진출했다면 그나마 나은 허구연이 해설할 가능성이 높았다.
- ↑ 한국 프로야구가 2008년 봉중근이 견제사 6개로 1위, 2개의 호세 리마가 2위를 차지하는 동안 메이저리그는 그렉 스미스가 15개로 1위, 앤디 페티트가 9개로 2위였다. 그 밑에 자잘한 선수들이 수십 명씩 3~4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봉중근도 호세 리마도 메이저리그 출신 - ↑ 어차피 오늘 이기지 못하면 내일이 없는 단기전에서 선발을 불펜 등판시키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한 일이다. 당장 한국에도 잘 알려진 2001 월드 시리즈 7차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구원투수는 전날 선발투수였던 랜디 존슨이었다. 게다 앞서 등판한 미겔 바티스타도 선발이었다.
- ↑ 취임 직후 선수단에게 이 메시지를 강조하며 덕아웃에 플랜카드를 붙여놓기까지 했다.
- ↑ 그러나 세대교체 측면에선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분위기.
- ↑ [1]
- ↑ 44년 4억이라는 말을 양상문이 언급한 시점은 FA 협상 기간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공식적으로는 무적이긴 했다.
무적선수라고 막말해도 되는 건 아니지만고유라 기자가 LG가 아닌 넥센 담당 기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식적인 인터뷰가 아닌 사석에서 던진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 - ↑ 양상문 감독이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면도 많이 보인다. 대개 선배에게 후배가 먼저 인사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예의를 갖추는 면이 양상문 감독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
- ↑ 준플레이오프에서 NC에게 승리하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넥센에게 패배하여 3위가 아니라 4위
- ↑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에게 승리하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NC에게 패배하여 3위가 아니라 4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