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단

1 제1공화국 시대 자유당정치깡패 집단

제1공화국 시절 자유당에 의해 원외에서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

제 2대 국회 총선에서 전체 의원 중 3분의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뤄지자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동원한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가 백골단이었다. 당시 이 깡패집단들은 백골단 말고도 '땃벌떼' 나 '민중자결단'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단체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국회를 포위하기도 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자 이를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강제로 의사당에 연행되는 등의 황당한 일이 일어난 끝에 1952년 7월 4일 심야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의결되었다(이른바 발췌 개헌안).

그러나 백골단 등의 명칭은 제1공화국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아 지금은 보통 2의 의미로 많이 기억한다.

2 군사정권 시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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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킹 클로커! 시민 보호 기동대
1994년 이전 사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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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서울지방경찰국(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5150제대
이 사진은 소드마스터 시리즈에서도 쓴 적이 있다.
어썰트 시작이다, 친구들! 야!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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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방(버클러)과 사제 편곤으로 무장한 사진. 이 사진은 백골단이 아니라 전의경 기동대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전남중대의 모습이나 이렇게 제식복장이 아닌 사제복장을 한 기동대도 당시엔 백골단으로 불렸다.(근데 백골단이 유명해진 이유는 직원으로 이루어진 사복체포조가 아닌 전의경부대 중 사복중대때문에 유명해진것). 실제로 유명한 백골단이라고 불리우는 부대를 보면 서울청 중대 or 전남 중대이다.

2.1 개요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 시절 만들어졌던 특수기동대, 형사기동대, 사복기동대[1]를 통틀어서 일컫는 별칭. 군사정권시절 이들은 당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권력이었다.

2.2 역사

1980~90년대 초까지 있었던 시위진압부대로 기동성을 위해 하얀색 또는 약간 누런색 오토바이 헬멧(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과 청바지(화염병과 유리조각 등으로부터 보호가능), 작은 방패 깨방, 단봉 그리고 운동화 복장을 했으며 일반 전의경이 주로 방어위주(방패)인 반면 백골단은 데모 진압시 아주 공격적으로 주모자 체포 및 시위대 해체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특정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혔을 시 시위대를 반 죽음으로 만들 정도로 공포의 부대였다.

이렇게 실상은 무섭도록 무지막지할지는 몰라도 이들의 정식명칭은 "체포전담부대(중대)"이다. 왜 이런 명칭인고 하니 과거 전의경을 비롯한 경찰들이 착용한 진압복이 꽤나 불편해서 시위대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2] 그래서 일반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를 착용해서 기동성을 높여 시위진압에 투입된 것이다.

초창기 붉은 헬멧을 보급받아 썼으나 언론에서 삼청교육대 죄수들을 풀어서 사면을 조건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깨끗한 순백색인 흰색으로 헬멧을 바꿔 썼으나 백골단이라 불려 관계자들이 허탈해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백골단이 사실상 경찰관들보다는 전의경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경찰 인원은 지금과 비교해 소수였으며 다른 관내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오히려 전의경부대 내 사복체포조가 백골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또한 한 중대에서 어떤 대원들은 사복 차림이고 어떤 대원들은 진압복 차림으로 혼용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악명 높은 백골단이 아닌 그저 복장의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백골단이라고 겁먹지마, 그냥 옷을다르게 입은 거야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로 규모가 크게 줄었다. 2008년 촛불시위 직후엔 경찰관 기동대가 생겼다. 자원자인 직업경찰 1700여명 규모로 창설, 시위진압을 전담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직원중대들은 의경중대보다 시위진압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2009년 촛불 1주기 시위 당시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되었는데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옆에서 전의경 대원들이 시위대에게 고립되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전의경중대 중대장들이 직원중대 대원들에게 "좀 도와주세요..." 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보러 가기 내 관할만 아니면 돼 내 책임만 아니면 돼 현재는 다른 부서와 순환하며 교체가 이뤄지는데 진압능력은 여전히.... 물론 전문 기동대가 전의경보다 진압능력 자체가 떨어질 리는 없고, 마인드의 문제인 듯. 2년만 채우면 나가는 사람과 평생 직장으로 삼아야할 사람의 마인드가 같을 수는 없다.

2.3 활동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 or 추격을 시도했고(이것은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기병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혹은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이상 다가서지 못했다할 정도.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기 퍼슛 캅?, 집안에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3], 출발하려는 지하철을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물론 군사독재시절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진압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4]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이 있고 출신대원들의 주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 2000년대 초반까지만하더라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의 경우 방독면 구보라고 하여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시위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쓰는 것...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

직업경찰과는 다르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으로 자율성있는 진압은 없었다고 한다. 구성원은 지원자를 모았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전사 부대원이 차출 혹은 특채됐고 해병대 출신도 많았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기에는 신병들을 체력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

또한 이런 백골단 등의 폭력 진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최루탄을 쏘면 시위대가 도망가고, 도망가는 시위대를 백골단이 쫓아가 뼈가 부러지도록 두드려 패고 잡아들이는 것이 경찰의 전술이었는데,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녹두대나 오월대등 사수대가 전면에 나서서 백골단과 맞선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은 인과 관계가 확실히 입증된것이 아니며 백골단 이전에도 사수대는 있었으며 그로 인해 백골단 등 사복체포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사실 80년대의 시위현장은 처음부터[5] 시위대와 군경간의 준 전쟁이나 다름없었으니 선후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게 다 전두환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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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

2.4 사고 사례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특히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던 강경대를 이들이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더욱 악명을 떨쳤다. 강경대는 연락조로 가장 늦게 학교담을 넘어서 탈출을 시도 중(사실상 시위대 본대에서 낙오된 상황이었다) 백골단 5~7명에게 끌어내려져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집중가격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또한 경찰에게 집단구타 당해 사망한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 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그 외에도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와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노수석의 경우는 부검결과 선천성 심장이상이 그 사인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유족이 노수석의 머리에 부상의 흔적이 있다고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임을 주장했지만 1999년의 민·형사소송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노수석의 사망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유족 측이 패소하였다.

당시 시위상황이 얼마나 위헙한 상황이었는지를 당시 형사기동대 대원의 표현으로 설명해보자면 "하늘에서 돌비가 내리는 걸 본 적 있어?" 또한 당시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학내진압으로 들어간 전의경 대원들을 강의실에 몰아놓고 책걸상으로 막은 다음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는 무시무시한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이는 아마도 부산 동의대 기동대원 순직 사건이 와전된 듯하다. 계속된 군사독재로 고조된 시민들의 분노가 그 당시의 시위대나 진압경찰관이나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보여준다. 다만 실제로 학내 화장실에 학생을 가장하고 숨어들어가 있는 대원들을 상대로 화장실에 불을 질러 대응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하기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년대 당시에는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뉴스에도 안 나왔다. 다른건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심지어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들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6]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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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2.5 기타

  • 2014년 10월 10일 공개된 서태지 버전의 소격동 뮤직비디오에도 이 백골단이 등장했다.
  1. 형사기동대는 무도1단 이상으로 의무근무 3년. 사복기동대는 무도2단 이상과 전의경 출신자들(데모진압 경험자) 중심으로 2년 조건부로 각각 채용한다.
  2. 실제 이 진압복엔 대나무도 들어가있다.
  3. 이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다!
  4. 이때 절대로 정화통을 빼고 달린 것이 아니다. 최루가스가 만개해 정화통을 끼고 뛰었던 것이다!
  5.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부터
  6. 1981년부터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일하다가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3년간 노조 내 회계감사로 일하다가 1990년에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이듬해에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처우 개선에 전력투구하면서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지원 연대회의에 참석하다 경찰에 의해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수감 와중에도 안기부에 의해 무수한 고문과 협박을 받다가 그해 4월에 있었던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의문의 부상을 당해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가 5월 6일에 안양병원 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검찰은 단순 비관자살로 처리했으나 유족들은 반발했었고, 13년 뒤인 2004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안기부가 개입한 것이 밝혀지긴 했으나 국정원이 관련 자료를 내주지 않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나게 되었다. 그나마 당국의 노조탄압 속에 의문사를 당한 점을 인정하여 2014년에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