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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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崇禧(백숭희), Bái Chóngxǐ, (1893년 3월 18일 - 1966년 3월 18일)

1 소개

베충씨
리쭝런과 더불어 중화민국의 광시 파벌의 군벌이며 군벌들 중에서 군사적 능력이 매우 뛰어나 까다로운 조지프 스틸웰 등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일전쟁 중에 크게 활약했다. 별명이 작은 제갈량이었으며 무슬림이었던 것이 특징이다. 바이충시가 아니라 보충시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2 일생

2.1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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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바이충시.

광시 성의 구이린에서 이란에서 중국으로 귀화해 온 회족 집안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성인 백은 원래 성인 바이두르루덴을 음차한 것이다. 이란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페르시아인이 원주민으로 원래 백인종이지만 그는 황인인데 아마도 투르크 혈통으로 보인다. 아명은 쟝셍(健生)이며 이슬람식 이름은 오마르였다. 바이충시는 14세인 1907년에 훗날 광시의 군벌이 되는 차이어가 운영하던 구이린의 광서육군소학당에 들어가 신식 교리를 배웠다. 그의 교우 중 한명이 리쭝런으로 그와의 인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머지 않아 무비학교를 중퇴하고 사범학교에 들어가서 법과 정치를 잠시 배웠지만 했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바이충시는 광서무비학교의 동기인 황샤오훙(황소횡 黃紹竑)의 지휘 아래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혁명에 동참했다. 신해혁명을 계기로 그는 다시 군문에 들었으며 우한의 우창 예비군관학교을 1914년에 졸업했고 다시 1915년 6월에 바오딩 무관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바오딩 무관학교 졸업 이후 그는 광시 1사단에 배속되어 광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바이충시는 황샤오훙, 리쭝런 등이 이끄는 광시 파벌에 합류했으며 한때 광시왕이라 불리던 군벌 루룽팅(육영정 陸榮廷)의 휘하에 있었으나 루룽팅이 광둥의 군벌 천중밍과 싸웠다가 개발살이 나고 상하이로 달아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했다. 루룽팅은 1923년 11월 광시를 재장악하려고 시도했으나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은 루룽팅을 1924년에 완전히 몰아냈고 윈난 군벌 탕지야오(당계요 唐繼堯)의 침략도 격퇴했다. 한편 광시의 옆동네인 광둥엔 쑨원의 국민당 정부가 있었는데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일찍부터 국민당을 지지하던 군벌들이었고[1] 1923년 쑨원이 천중밍을 공격하여 광저우를 탈환하는 것을 도왔으며 천중밍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광저우를 쳤다가 장제스에게 개발살나는 꼴을 본 다음인 1924년 국민당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리쭝런은 광서독판 겸 광서 1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2 장제스의 북벌

쑨원은 평생 북벌을 꿈꿨으나 쑨원 살아 생전에 북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고 쑨원은 1925년 사망했다. 하지만 북벌의 뜻은 사라지자 않아 1926년 장제스가 북벌을 선포하고 중원의 패자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던 군벌들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바이충시도 이때 주요 참모 중 한명으로 장제스의 북벌에 참가, 리쭝런이 지휘하는 7군에 배속되었다. 바이충시는 자신의 능력을 여지없이 발휘, 장시 성의 쑨촨팡 부대를 격파하고 저장 성으로 진군하여 항저우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했다. 1927년 3월 18일 상하이 남부 방어선을 돌파한 바이충시는 공산당원들과 노조의 봉기 및 위아래 할 것 없이 전의를 상실하고 와해된 상하이 수비군의 상태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던 상하이를 3월 22일에 거의 무혈점령하듯이 함락시켰다.

그런데 바이충시가 점령한 상하이는 혼란 그 자체였고 상하이 노동조합 총연합회(총공회)는 총파업과 폭동을 저지르면서 상하이의 혼란를 가중시켰다. 바이충시는 자신의 이름으로 상하이에 계엄령을 내리고 공산당원과 무장 노조들의 상하이 소비에트 정권 시도를 전복시켰다. 하지만 바이충시도 상하이의 공산당 자경단과 무장노조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고 상하이의 무정부 상태는 심화되었다. 3월 31일엔 바이충시를 저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3월 26일에 상하이에 입성한 장제스는 보로딘과 왕징웨이의 정치적 공세 때문에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 있었다. 상하이를 점령한 바이충시의 병사들은 3천명에 불과했는데 자칫했다간 장제스와 바이충시 모두 공산당에 압도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청방의 지도자들이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국민당의 반장 세력들은 상하이의 혼란상을 보고 장제스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었다. 이틈을 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의 공산당 조직을 제압하고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에 대한 칼을 뽑았다. 이때 바이충시도 가담, 공산당 조직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서방언론은 바이충시를 공산당원 참수꾼이라고 불렀으며 저우언라이도 바이충시에게 잡혀서 참수당할 뻔 했으나 장제스의 지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

이후 바이충시는 4월 14일 쑤저우를 공격하여 장악했으며 이후 후난 성을 공격, 쑨촨팡을 완전히 격파했고 국민당 좌파의 공격에 장제스가 잠시 하야했을 때는 리쭝런 등과 함께 장제스를 지원, 장제스의 총사령관 재추대를 도왔다. 1928년 펑위샹, 옌시산까지도 합세한 2차 북벌에서 바이충시는 다시 활약하여 장쭝창의 군대를 박살내고 베이징까지 진격했으며 제4 집단군 총사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장쭤린의 사망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전문을 보내는 등 동북역치에도 나름 기여를 했다.[3] 이 시기까지만 해도 바이충시는 장제스를 지지했는데...[4]

2.3 반장전쟁과 양광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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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이후 리쭝런, 장제스와 함께, 하지만 이들의 사이는 곧 틀어지니...

하지만 장제스와 바이충시의 사이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제스가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하자 군벌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장제스로부터 자신의 세력권이라 믿은 호남을 받지 못한 바이충시의 맹우인 리쭝런은 장제스에 대해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고 광시와 광둥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바이충시와 리쭝런은 1929년 봄에 반란을 일으켰고 우한을 쳐서 점령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신속하게 광둥 군벌 천지탕, 위한머우 등을 포섭하여 리쭝런 세력을 꺾었으며 1929년 3월 21일 리쭝런과 바이충시의 해임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리쭝런이 펑위샹과 옌시산과 손잡을 가능성을 차단한 다음에 바이충시 휘하의 지휘관들을 대거 매수하여 반격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곧 패하여 4월에 우한을 도로 내주어야 했고 이에 궁여지책으로 호당구국군을 창설, 광둥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베트남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후 1930년 3월,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이 터졌고 장제스는 여기서 승리했다. 펑위샹 세력은 와해되었으나 광서파나 옌시산은 그런대로 건재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도 광시로 돌아와서 세력을 재건했다.

하지만 당시 군벌들이 다 그렇듯이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1931년 5월 27일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맞섰다. 이들 때문에 장제스는 3차 초공작전을 중단해야 했고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이들은 다시 장제스와 화해했다. 이후 5차 초공작전의 여파로 홍군이 대장정 길에 오르자 홍군 토벌에 협조하였다.[5] 하지만 그들은 근성 넘치게도 1936년 겨울 후한민이 사망하자 이를 구실로 광둥 군벌 천지탕과 연합,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천지탕을 토벌한 다음에 리쭝런과 바이충시에겐 관용을 베풀어 수정 주임 자리와 더불어 바이충시에게 저장 성장 자리를 주어 근거지인 광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버리려 했으나 리쭝런과 바이충시 모두 거부하여 항일구국군을 조직, 일본에 무른 장제스 대신에 항일을 하겠다고 8월에 항전을 선포했다. 이에 장제스는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실시하는 한편 그들을 회유했는데 결국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장제스에게 굴복하여 자신들이 광시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는 조건으로 장제스 밑으로 다시 들어갔다.

2.4 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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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13일 쓰촨에서 장제스와 함께 201사단을 사열하는 바이충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는 국민당군 부참모총장 겸 군훈부장(軍訓部長)에 임명되었다. 바이충시는 루산 회의에 참석, 일본에 맞서 온 중국이 결연히 떨쳐 일어나 맞설 것을 천명하는 루산 담화의 발표에 일조했다. 베이핑, 톈진, 상하이, 항저우가 함락된 이후 일본군은 만주국을 승인하고 화북을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해왔다. 일본군의 강력함을 목도한 국민당의 모든 파벌들이 일본에게 굴복하는 것 말고 도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고 바이충시도 그 중 하나였지만 장제스는 이를 결연히 거부, 일본과의 결전을 선포했다. 이에 일본군은 장제스의 반성을 끌어내겠답시고 더 이상 진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 수도 난징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탕성즈가 사령관이 되어 난징을 수비하려 했지만 난징도 곧 함락되었고 수십만의 중국군 패잔병, 난징 시민, 피난민들이 일본군에게 도륙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리쭝런이 수비하던 산둥과 장쑤의 5전구를 점령하기 위해 쉬저우를 쳤다. 이에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5전구 참모장으로 급파했다. 바이충시와 리쭝런을 위무하기 위해 장제스가 직접 그들을 찾아와 격려했다. 바이충시의 부하들이 장제스가 탄 비행기를 적기로 오해하고 격추시킬 뻔 한 해프닝이 있었고 장제스는 이에 격노하여 병사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바이충시가 총사령관을 위한 특별한 환영식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자 그들을 용서해주었다. 장제스는 리쭝런과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우한으로 돌아갔고 바이충시는 장제스가 붙여준 지원군들까지 합쳐 총 60만 대군을 지휘, 타이얼좡에서 일본군 2만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너무도 강력했고 중국군의 준비는 너무 부족했다. 타이얼좡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을 공격했고 중국군은 일본군 6만명을 사살하는 치열한 저항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우한도 내주어야 했다. 얼마 후 최후의 대도시인 광저우까지 잃음으로 중국의 대도시들은 일본군에게 모두 빼앗겼다. 1938년 11월 25일 난웨 회의가 열리자 바이충시도 참석했다. 장제스는 여기서 게릴라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고 바이충시는 일본군은 러시아를 침략했던 나폴레옹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외쳤다. 바이충시는 구이린 행영(임시병영)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후난, 광시, 광둥 지역을 관할했다. 또한 바이충시는 중국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중일전쟁을 이교도 일본에 맞선 지하드로 선포함으로 이슬람 교도들과 화교들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 서북부의 마씨 군벌들과 연계하는 임무도 맡았다.

1939년 1월 22일 바이충시는 국방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9년 9월 일본군 11군이 쉐웨가 지키던 후난 성의 9전구를 노리고 쳐들어오자 쉐웨를 도와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11월 6일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직접 바이충시와 그 어머니를 만나 치하하기도 했다. 1939년 11월 일본군이 중불 국경의 요충지인 난닝을 점령하자 바이충시는 난닝 탈환 작전을 총지휘하였고 22개 사단 15만 대군과 100여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작전에 나섰다. 바이충시는 쿤룬관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일본군 1만명을 사살했으나 일본군 5사단장 이마무라 히토시가 퇴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 막대한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난닝을 탈환하진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후 난닝은 1940년 11월에 중국군에게 탈환된다. 이후 바이충시는 군훈부장까지 승진했으며 충칭과 구이린을 오가며 전쟁을 지휘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쑹메이링과 같이 케이크를 먹으며 승전을 축하했다고 한다.

2.5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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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장제스와 함께 린뱌오의 군세를 치기 전에 병사들을 둘러보는 총참모장 바이충시.

전쟁이 끝난 이후 한동안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에서 국공 양당이 공존하는 평화체제를 구성하려는 협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공산당은 중일전쟁 동안 불린 군세를 바탕으로 최소 화북 5개 성의 지배와 자체적인 군대의 보유를 원했고 이는 군사적 통일의 완전성을 원했던 장제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마오쩌둥은 마오쩌둥대로 협상에 아쉬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장제스가 협상조건을 받아들이면 그 협상조건을 그대로 올려버리는 등 무리한 요구로 장제스를 화나게 했고 헌법 제정 문제에 대해서 미뤄도 되지 않겠냐는 태도를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대륙의 지배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합의를 본 쌍십협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담은 사실상의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중국 대륙을 차지하려는 양자 간의 다툼은 국공내전이라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대전으로 번졌다.

조짐은 일본이 항복할 때부터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과의 교전을 회피하며 힘을 비축한 공산당은 신나게 세력을 확장하며 일본군에 대한 항복을 자신들이 받아내려 했다. 장제스는 공산군에게 가만 있을 것을 명령하는 한편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국민당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했고 미국이 거들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장제스의 명령에 복종, 전군 지휘관에게 국민당에 항복할 것이며 공산당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해 방어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지나파견군이 점령한 곳이야 어찌저찌 되었는데 문제는 관동군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였다. 만주는 콩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작물을 생산했고 장쭤린-장쉐량 부자가 다스리던 시절과 이후 만주국 시절에 공업화가 이루어져서 엄청난 수준의 공업화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 이곳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레이스가 벌어졌다. 하지만 중국 서남부에 몰려있던 국민당은 만주 진출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공산당이 무려 40만이나 되는 당원들을 파견해 만주에 세력을 구축하는 동안 8월에야 겨우 만주에 행영을 설치할 수 있었고 10월이 되어서야 미군의 도움으로 만주에 진출함으로 사실상 만주 선점에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산해관 이남의 베이핑과 톈진은 손쉽게 장제스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소련의 스탈린은 장제스를 지지하는 입장이라 공산군의 만주 점령을 전적으로 돕진 않았지만 그는 국공의 내전이 오래가길 원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소련군 철수를 통보하자 장제스는 만주가 공산당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수 연기를 부탁하여 1946년 초에 남만주 일대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은 만주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무기를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한 후였다.

1946년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초기 국민당은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공산당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하얼빈 함락을 코 앞에 두었으며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공산당은 큰 위기에 몰렸다. 이에 공산당은 마셜에게 장제스가 정전협정을 깼다고 호소하여 국민당의 공격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고 매우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되었다. 당시 바이충시는 동북 초비사령관으로 만주 전역을 지휘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정전 명령에 장제스에게 지금이야 말로 공산당의 씨를 말릴 절호의 기회라고 난징으로 날아와 장제스에게 공격 재개를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미국의 눈치를 살펴 이를 거부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산군을 너무도 얕잡아 본 장제스가 룽윈을 비롯한 군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장제스에게 남아있을 미련을 느끼지 못한 군벌군들이 장제스를 떠나 마오쩌둥에게 붙기 시작하면서 양측의 전력차는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동북 지역의 인심을 얻은 공산당은 무려 40만 명을 징병하고 20만 명의 지원 병력을 얻는 등 철두철미한 반면 장제스는 만주에서 100명도 징병하지 못했다. 장제스가 공격을 재개했을 때는 이미 결딴이 난 후였다. 이후 바이충시는 중화민국의 초대 국방부장에 임명되어 만주를 떠났다.

만주에서 장제스는 전략적 우위를 잃었고 100만에 달하는 최정예 부대도 잃었으며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절호의 기회도 잃어버렸다. 엄청나게 전력을 강화한 공산당이 자신을 인민해방군으로 선포하고 남하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게다가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영토와 부대에 집착이 강한 장제스는 각 부대들에게 무리한 사수 명령을 남발하고 일선 지휘관들을 무시한 직접 개입을 일삼아서 현장의 유연한 지휘를 방해함으로 패배에 일조했다. 국민당은 만주를 완전히 잃었고 우한 근처에 대별산 해방구가 생김으로 난징도 위험해졌다. 바이충시는 33개 사단으로 대별산을 점령하고 했으나 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의 47년 하반기 공세로 장제스는 다시 80만 대군을 잃었다. 국민당군의 사기는 땅을 쳤고 국민당군은 앞을 다퉈서 공산당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장제스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경제가 붕괴되면서 국민당은 더욱 나락으로 치달았다. 그래도 국민당이 잘만 했으면 중국의 반은 건졌겠지만 장제스는 동북 지역을 포기하고 화중을 비롯한 남중국만이라도 지키자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영토에 집착했고 공산군의 명장 린뱌오가 요심회전에서 웨이리황의 군세를 개발살내고 장제스가 보낸 정예부대와 기갑사단을 잇달아 조졌다. 그들이 가진 미제 최신 무기들이 공산군을 강화시킨 것은 물론이었다. 이후 회해전역까지 박살나면서 장제스는 총통에서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이 대리총통이 되어 공산당과 협상했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공산당은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거기에 푸쭤이가 지키던 화북지구가 함락되고 푸쭤이가 투항함으로 장제스는 순식간에 몇백만 대군을 잃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전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바이충시와 후쭝난 두 사람 뿐이었지만 이미 장제스의 오판으로 잃은 것이 너무 많아 이 두 사람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공산군은 400만으로 늘었고 장제스가 사실상의 백기투항을 거부하자 장강을 넘어 도하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서방의 지원에 목을 매기 시작했고 윈스턴 처칠은 애미시스트 호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쳐야 한다고 했으나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이 거부함으로 서방의 개입은 물건너갔고 미국은 이미 장제스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결국 바이충시는 장강 수비에 실패했다. 이후 바이충시는 우한 수비를 맡다. 마오쩌둥은 바이충시에게 항복한다면 광서파벌 소속 군대 30만 명을 그대로 거느리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바이충시는 거부했다.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바이충시는 포위 섬멸의 위기를 직감하고 창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창사에서 반란이 일어나 다시 헝양으로 후퇴했다. 바이충시는 타이완을 지원을 받아가며 자신의 기반인 광시를 바탕으로 장기전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린뱌오가 헝양을 공격하자 바이충시는 린뱌오 군대를 크게 무찔러서 국공내전에서 보기 드물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쑹시리옌 등은 장제스의 총애를 믿고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했으며 광둥을 지키던 위한머우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광둥도 함락되고 임시수도 광저우도 함락되어 수도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갔다. 결국 바이충시도 구이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데 쑹시리옌이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충칭으로 달아남으로 큰 구멍이 생겼고 린뱌오가 기습을 가해왔다. 바이충시는 4개 사단을 잃었고 구이린도 내주어야 했다. 바이충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결국 부하들을 나누어 일부는 난닝으로 일부는 하이난으로 달아났는데 2만명만 탈출에 성공했다. 산시를 지키던 옌시산도 무너졌고 탕성즈는 후난을 들어 마오쩌둥에게 바쳤다. 이후 쓰촨과 윈난의 군벌들이 기의를 일으켜 마오쩌둥에게 항복했고 대륙에서의 최후의 수도인 청두까지 함락됨으로 장제스는 다시는 대륙을 밟아보지 못했다.

바이충시는 하이난으로 퇴각했으나 리쭝런이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바이충시는 옛 동지인 리쭝런의 말을 거부하고 장제스 곁으로 갔으나 장제스는 자신을 상대로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바이충시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다른 군벌들이 다 그랬듯이 총통 전략고문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만 가진 채 완전히 찬밥 신세로 전락한다. 바이충시는 살기 위해 장제스에게 철저히 영합하며 장제스의 입맛에 맞는 일부 선전활동에 동원되고 연금 속에서 살아야 했다.

2.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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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충시의 70회 생일. 옛 동지 천청도 함께 했다.

이후 국민당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타이완에서 국민당을 개편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중국 이슬람교 협회 이사장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맞선 이슬람의 지하드를 선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54년 리쭝런의 부총통 직위 해제에 양손을 들고 찬성했다고 한다.

1962년 12월 4일 아내와 사별했고 아들 바이센융(백선용)은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1964년 3월에 리쭝런이 망명을 권유하자 전보를 보내 거절했다. 이후 196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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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사건 발생 이후 타이완을 찾아 민심을 수습하는 바이충시

1947년 2.28사건이 발생했을 때 타이완 지역의 군정장관의 자격으로 수습을 맡았던 것이 바이충시였다.

아내와 10자녀를 두었다. 저명한 작가인 바이셴융(白先勇)은 그의 아들이다. 또한 아내의 사후 젊은 간호사와 내연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광시를 다스릴 때나 북벌 때 훼불 행위를 자주 저질르고 승려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다 한다. 이건 펑위샹도 했던 일.

이슬람교도지만 돼지고기와 포도주를 좋아하였다 한다.

대만 시절 바이충시의 모습

무슨 원인인지 공산당 치하의 대륙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팬카페까지 있을 정도이며 전신(戦神), 소제갈 등으로 칭송하며 이에 대해 의심하는 순간 처참한 키배틀이 일어날 정도.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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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서의 바이충시. 어찌 대머리가 아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이들이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단 이유로 단순히 돈 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제스 평전을 쓴 조너선 펜비가 그러하지만 이들을 단순한 용병으로 보는 것을 옳지 못하다.
  2. 단 저우언라이가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주장하는 소스들도 확인되고 있으니 이 부분은 주의를 해야 한다.
  3. 하지만 바이충시 본인은 봉천군벌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4. 하지만 광서파 자체는 이미 1928년 초부터 반장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5. 하지만 장제스가 대장정 중인 공산당을 잡겠답시고 지방 군벌들을 너무 약화시켜 룽윈을 비롯한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개입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산당과 비밀리에 협상했고 바이충시도 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