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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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Việt Nam Cộng Hò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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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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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 1975년
표어Tổ quốc - Danh dự - Trách nhiệm
(조국, 명예, 책임)(1954 - 1967)
Tổ quốc - Công minh - Liêm chính
(조국, 공정, 청렴)(1967 - 1975)
국가공민(公民)에게 고함[1]
위치오늘날의 베트남 남부.
수도사이공
정치체제공화제
국가원수대통령[2]
언어베트남어
주요사건1955년 건국
1956년~1975년 베트남 전쟁
1975년 사이공 함락+멸망
통화베트남 동
시간대UTC +8 [3]
성립 이전베트남국
멸망 이후남베트남 공화국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1 개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비엣남 꽁 호아, 越南共和). 북베트남이라 불리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립하며 현 베트남의 남부에 존속하던 국가. 간단하게 남베트남(Nam Việt Nam), 남월(南越)이라고도 불린다. 근데 본래 참파 땅이었다.

사실 남베트남 일대가 원래부터 베트남의 영토가 아니었고,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참파라는 나라가 따로 존재했고, 참파의 주 종족을 이루웠더 참인들은 베트남의 주요민족인 킨족과는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이 다른 민족이다 그러나 베트남이 건국 된 이래로 꾸준한 남진 정책을 펴면서 밀려버리며 17세기에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참인들이 보트피플이 되며 언어적으로 비슷했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일대로 이주하였고, 그 자리를 베트남인들이 차지하면서 국가가 찢어지고 종속국으로 전락한 끝에 1832년 베트남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참족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다.. 마찬가지로 수도 사이공이 있는 메콩 강 유역도 원래 프레이 노코르라 불리던 캄보디아 땅이었지만, 18세기에 베트남이 각종 이유를 들며 뜯어갔다(…). 베트남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남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결국 찐(Trịnh, 鄭)씨의 북부와 응우옌(Nguyễn, 阮)씨의 남부로 분열되었고, 최종적으로 1802년이 되어서야 오늘날 베트남의 영토를 완성하고 통일을 이뤘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월남(베트남)의 정통 정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을 월남이나 자유월남이라고 불렀고,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의 정권이라 하여 월맹(베트민, Viet Minh)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 등(특히 국방부에서 발간한 것들)에서 당시 명칭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 통일한 이후부터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쏘련과 마찬가지로 월맹도 여전히 쓰이고는 있다.

지방행정은 44개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통일 후인 현재 구 남베트남 지역에는 31개 성이 있다.

2 역사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현재의 베트남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지금은 호치민 시로 개명된 사이공(Sài Gòn, 柴棍. 중국에서는 西貢이라고도 한다). 국가는 '공민에게 고함'.

1945년 베트남을 점령하던 일본이 항복한 이후 베트남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도 실행하기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엔 중국군이 남쪽엔 영국군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 두 세력이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베트남은 관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때를 노려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남 공산당이 전후 며칠 만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 9월 2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당국은 이를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전쟁기간 동안 일본군은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상태였고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이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북부로 진입한 중국군은 자신들이 완전히 자리잡을 때까지 프랑스인들에 대한 억류조치를 풀지 않으면서 베트남 공산당의 이러한 행동을 사실상 방치하였다. 한편 16도선 이남의 영국군 주둔 지역에선 담당인 영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들어오는 바람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관할은 남베트남에 미치지 못했다.

1946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베트남 내 중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프랑스인들의 억류조치를 풀어주었고 풀려난 프랑스 식민당국은 일단 영국군의 주둔지인 베트남 남부로 가 행정권의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베트남 남부를 재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면서 베트남은 사실상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는 환영받지 못했고 반프랑스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결국 프랑스는 일단 괴뢰국을 세우기로 판단, 사이공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베트남 재정복의 야욕을 감추지 못하는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1946년, 중국의 중재 아래 정전 협정에는 합의했으나 프랑스가 이 협약을 파기, 베트남 남부를 재점령해 괴뢰국인 베트남국을 선포하고 하이퐁[4]에 상륙, 베트남을 재침공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베트남 독립 동맹(통칭 베트민)을 결성,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대항한다.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에게 처절하게 깨지고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5]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빠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중재를 맡아 일단 전쟁은 끝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한 뒤 2년 후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세력이 압승을 거둘 것임이 확실했고 이럴 경우 베트남의 공산화는 불보듯 뻔한 상태였으므로 미국과 베트남 남부는 총선거를 거부한다.[6] 그리고 1954년 10월, 남부 베트남은 미국의 지원 아래 단독으로 베트남국 수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가 황제, 응오딘지엠이 총리 직을 맡는다.

그런데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선거 쿠데타로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공화정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3 부패의 역사

초반에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와 풍부한 쌀 수확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7] 군인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특히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의 병맛 정치 때문에 더 환장할 상황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에서 무리하게 토지 개혁을 추진하는 바람에 80만에 달하는 탈북민이 정착하여[8] 그럭저럭 잘 출발하는 것 같았는데, 이후 부정부패 척결에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곧바로 막장으로 치달았다.(...) 극에 달한 부정부패에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인가'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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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큐 애호가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2011)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인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이 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소신공양에 대해 매스컴에다가 이런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중놈들이 한 게 뭐가 있소? 기껏해야 한 사람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 재활용도 어려울 역대급 고인드립에 그 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다.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 장군을 위시한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여 그 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9][10] 그러나 이번에는 장군들 간에 권력 다툼이 시작되어 하라는 전쟁은 안하고 쿠데타가 줄을 잇다가 1965년에 응우옌반티에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소 아주 약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 적자, 무역 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그 앞선다는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 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로 병역기피도 만연하였다. 휴가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가족에게 가야 할 전사자 보상금을 장교가 빼돌린다던지…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수도인 사이공과 메콩 델타 일대만 하더라도 남북 베트남 분단 이전에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 단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던 사이공 소비에트와 이를 지지한 빈농들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때문에 월맹이 1950년대의 토지 개혁을 둘러 싼 혼란을 극복하고 1960년에 본격적인 해방 전쟁을 선포하자 순식간에 수도권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아예 나라 전체가 베트콩에게 넘어갈 뻔하다가 미국이 이제까지 해 왔던 간접 지원에서 아예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하면서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이 무능했고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미움을 사긴 했지만, 남베트남 역대 지도자 가운데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국정을 추구할 만큼 그릇과 세력이 있었던 인물 또한 응오딘지엠 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응오딘지엠이 그나마 가장 유능했다면 다른 월남 정치인들은 얼마나 무능했던 말인가! 그리하여 그나마 미국에게 받아 먹을 건 다 받아 먹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책을 시도하던 응오딘지엠 시절과 달리,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베트남의 선전 문구 그대로, 아예 1969년 파리 평화 회담 같은 전쟁의 경과에 직결되는 중요한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식으로 무시를 당하는 등 허울뿐인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애당초 남베트남은 존립 시기 내내 정상적이고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세우고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1970년 총선에서 불교세력이 대거 진출하는 결과가 나올정도로 일단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치러졌고 그나마 정통성을 세울기회였지만 1971년 대선에서 부정선거가 펼쳐지며 안그래도 없던 정통성마저도 완전히 아작이 나버리고 말았다.

4 베트남 전쟁

5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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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궁(현 통일궁) 정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베트콩군(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사이공)

결국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1975년 봄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안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역설적이게도 18사단은 원래는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4위, 총 병력수 1백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것은 잘 알고보면 빈 껍데기였다. 공군력도 숫자로만 4위, 실제 전력은 북폭을 할 능력도 없고 거의 다 지원기 수송기 위주였다. 1백만 병력이란 것도 정규군은 45만 수준이고 나머지는 민병대와 지방대이다, 민병대와 지방대는 실제 전투전력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겉은 그나마 번드르르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도 일부러 안 준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해서 주려고 해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경제난이 있었지만 이는 부차적인 이유고 미행정부가 지원을 위해 예산을 편성해 미의회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미의회에서 삭감시켰다. 미의회는 더이상 부패 정권에게 지원은 없을 것이며 여론도 이미 남베트남 지원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탄약 아껴쓰라는 명령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공군! 미군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데 익숙해져버렸으니.

게다가 남베트남은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키는 잘못을 저질렀고,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11].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티우의 전략은 현재 병력으로는 모든 곳을 지킬 수 없으니 해안 주요도시 등 지킬 곳만 지키는 식으로 병력 재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군단 몰락을 가져와 전체적인 남베트남 육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부패하고 친서방주의의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백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데 3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달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매판 정권이 망하니 이번엔 괴뢰 정권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그리고 썩어빠진 정부는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6 숙청

같은 해 같은 달에 들어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악질 공산주의자들이 설쳐서 진짜 200만명이 처형되거나 굶어죽은 것에 비한다면 규모는 작은 편이나 숙청 자체는 엄연히 이루어졌다. 즉 반공 단체 등에서 이야기하는 학살 자체는 좀 과장되긴 했어도 분명 있었다는 이야기.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 다수가 처형되거나 혹은 수용소에 간 것도 사실이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그다지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주기도 했다.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다만, 명심해야할 것은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다.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화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고, 남베트남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은 19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조치 되었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 단,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 남베트남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10만),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캄보디아나 북한 정도는 아니지만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다. 호찌민은 통일후 대량숙청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는지 베트남전 종전 몇년 전에 죽을 때 남베트남 사람을 탄압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적백내전은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진 걸 감안하면 그나마 덜한 정도.

7 왜 망했는가

베트남 공화국/패망 원인

8 통일 이후

북베트남이 비록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침공하긴 했지만, 정작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남부 통치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 개조 작업은 자영농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협동농장화가 완료된 북부 농촌과 사회주의 개조가 지지부진한 남부 농촌의 공존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협동농장화되지 않은 자영농들의 농산물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공무원들조차 배급이나 정부공급가가 아닌 암시장에 의존해 식량을 수급해야 했다.

특히 '풍요로운' 사이공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출신의 당·정·군 간부들을 빠르게 '타락'시켰다. 남부인들은 사이공 등의 도시에서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해가면서 암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며 베트남 정부가 꿈꿨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교란시켰다. 이러한 경제 운용의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베트남 공산당 내 개혁파들의 노력이 1980년대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결국 도이머이로 불리는 대대적인 시장화 개혁으로 이어졌으니, 결국 남베트남은 정치 체제로서는 멸망했지만 경제 체제로서는 오히려 승리자가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내륙에서 몰아냈지만 결국엔 개혁개방정책을 펴서 경제발전을 이록한 중국의 모습과 비슷하다. 결국 현재 베트남호찌민이나 북베트남이 꿈꾸던 노동자, 농민, 인민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들이 현재 다 그렇듯이 남베트남이 꿈꾸던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말았다.[12]

지금도 구 북베트남 지역보다 구 남베트남 지역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해서, GDP도 옛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사이공)이 북부의 수도 하노이보다 두 배나 높다. 정작 분단 시기에는 남베트남이 다소 앞서다가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해졌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

9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

프랑스의 경우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지금도 베트남계 혼혈들이 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 서유럽 국가들, 호주-뉴질랜드, 미국캐나다북미나 그 이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13][14] 베트남계 주민이 보인다면 대다수가 남베트남 시절 넘어왔거나[15], 남베트남 패망 이후 도망쳐 어떻게든 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본국과의 교류는 자유로워졌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외국으로 도망가게 만든 1등 공신인지라 아직도 공산 베트남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에 남아있는 남베트남 시절에 넘어온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몇명은 네오콘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16] 흠좀무. 반대로 당시 동맹국이자 파병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넷상 월남참전동지회 페이지에도 미국, 대한민국, 중화민국, 호주, 태국 등등의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거나 월남군 출신들도 심심치 않게 활동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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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웨스트민스터 리틀 사이공,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황저삼선기를 들고 행진하고있다. 원출처의 설명 " A colorful procession of South Vietnamese flags (now a symbol of the Vietnamese-American community) leads the Tet parade in “Little Saigon.”"

남베트남의 국기인 황저삼선기는 현재 베트남계 미국인의 기로서 여러 주에서 공인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미국에 건너온 베트남계 이주민과 베트남 공화국 패망기에 건너온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도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이 가게에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를 걸면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뭐라 하고,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현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를 걸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들이 비난하는 등(...) 다만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숫자도 많고 베트남계 미국인들 사이 권위도 더 강하다. 1990년도에 반 호치민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이니(...)

대한민국 웹 사이트에서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라고 잘못 알려진 Heart2Exist의 Who i am/25 Years(Tôi Là Ai/25 Năm, 2002)가 바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 패망 후 도망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계 미국인은 정치적으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달리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77%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뽑았지만 베트남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공화당 롬니(54%) 후보의 득표율이 오바마(44%) 후보를 앞섰다. 참조 이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화당 득표율이 70%대가 나오던 거에 비하면 내려간 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나라도 없고, 거주하는 나라에 배경도 전혀 없는 관계로 잃을 게 없다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계 갱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거나, 잔인하기로 유명한데는 이런 뒷이야기도 약간 있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블랙 라군의 배경이 되는 도시 로아나프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난온 군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는(...)

10 관련항목

  1. Tiếng Gọi Công Dân. 원곡은 르우흐우프억(Lưu Hữu Phước)이 작곡 및 작사한 〈청년행진곡(Thanh Niên Hành Khúc)〉이었는데,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1955년에 가사를 수정하면서 곡 이름 또한 바뀌어 멸망 때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프억은 친공 성향 인물로, 남베트남 공화국 국가가 되는 베트콩의 〈남부 해방(Giải phóng miền Nam)〉도 작곡 작사했었다.
  2. 정확한 명칭은 중화민국과 같은 총통(Tổng Thóng)이었다.
  3. 북베트남 및 현 베트남에서는 UTC +7 시간대.
  4. 수도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00㎞에 위치한 항구로, 최단진격거리에 상륙한 셈이다
  5. 더불어 이 회담에선 한국 전쟁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논의도 벌어졌다.
  6. 미국과 남베트남이 총선거를 거부한 이 시점에서 정통성은 사실상 북베트남으로 넘어갔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소련과 북측에서 총선거를 거부했다.
  7.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베트남의 경제수준이 선진국에 도달했거나 한 수준은 아니며 중공업은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동차나 전자체품같은건 수입해야했다.
  8. 사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장 지금의 한국만 봐도 탈북자 재정착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니던가? 당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잘 살긴 했는데 그래봐야 흔한 개도국 수준밖에 안 되었으니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
  9.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10.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 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Dragon Lady. 동양의 용과 달리 서양의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같은 악랄한 여자라는 비아냥만 쏟아졌으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11. 뭐 사실 이건 다른게 아니라 바로 이런 상황을 만들라고 북베트남 하노이 당국에서 베트콩을 그렇게 물심양면 지원해 준 것이니 북베트남의 전략적 우위를 칭찬해도 딱히 남베트남, 그것도 아예 구조적으로 나라 자체가 생송장 상태인 70년대의 남베트남만의 병크로 딱히 탓할 건 못된다
  12. 후술하겠지만 이런 흐름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해외 거주 남베트남 이주자들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13. 보트피플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 식민정부는 1979년 베트남계 난민을 정식 수용하고 이들을 구룡성채 내의 난민촌으로 보낸다. 물론 구룡성채도 상태가 안 좋은 곳이었지만 최소 굶어죽진 않았고, 성채 해체 후에는 밖으로 나와 2세 이상은 홍콩화되었다. 태국에는 캄보디아를 거쳐 육로로 도망간 피난민도 많이 건너가 파타야나 라용 주 등에 정착했다. 월남전 당시 독립한 싱가포르는 인구 부족 해결 목적으로 베트남 난민을 정식으로 받아 들이며 이 인연으로 현재도 싱가포르는 베트남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
  14. 물론 비단 홍콩이나 마카오로만 온건 아니고 중국으로 온 보트피플도 상당수 있었기는 했고 육로로 추방된 사람도 있다. 물론 이들중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화교들인데 베트남의 화교탄압정책과 중월전쟁으로 인해 추방된 케이스다.
  15. 단, 동유럽(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국가였던 유럽국가들)이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동유럽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주민 대다수가 북베트남에서 동유럽으로 돈좀 벌려 일하러 들어왔다가 정착한 이들이 대다수라 현 베트남 정부와는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기 때문이다. 한편 냉전시기에 공산권이었던 곳에는 동독이 포함되며, 그래서 독일 통일후에 서독의 베트남계 거주민과 동독의 베트남계 거주민과의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
  16. 예를 들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해야한다는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