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 |||||||
36대 | ← | 37대 | → | 38대 | |||
린든 B. 존슨 | ← | 리처드 닉슨 | → | 제럴드 포드 |
공식 초상화 | |
풀네임 | Richard Milhous Nixon |
출신 정당 | 공화당 |
생몰년 | 1913년 1월 9일 ~ 1994년 4월 22일 |
재임기간 | 1969년 1월 20일 ~ 1974년 8월 9일 |
서명 | |
키 | 182cm |
< 1971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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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빌리 브란트 | → | 리처드 닉슨 | → | 1972 -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
< 197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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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리처드 닉슨 | → |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 → | 1973 - 존 시리카[1] |
나대지 마라. 네가 말한 의원 패키지로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다
1초 킬러조
리즈시절인 1970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자를 지정하는 장면이다. 닉슨의 언론기피증은 유명했으며, 이런식으로 즉석질문을 받는 기자회견을 가진 적은 많지 않았다. 특이할 만한 것은 이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럼즈펠드를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했음을 밝혔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 부시도 언급되었다.[2]
1970년 12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1994년,마지막 해.
"I'm not a crook!"[3](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목차
1 개요
정말로 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부패 혐의로 모든걸 날리고 미국 역사상 임기중 스스로 사임한 유일한 대통령. 당적은 공화당. 풀네임은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신기하게 길쭉한 코 때문에 어디서 캐리커처로 그려지면 코를 강조하는 게 대부분이다.피노키오
2 성장
캘리포니아의 별로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렸을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도 공부를 꽤 잘했던지 하버드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포기하고, 집 근처의 지잡대 휘티어 칼리지(Whittier College)에 입학했다. 이런 경험때문에 공부를 못하면서 집안 후광으로 하버드에 들어간 존 F. 케네디[4]를 엄청 경멸, 혐오했다고 한다. [5]
분명히 닉슨은 정정당당하게 하버드에 합격했던 자신이 집안발로 입학했던 케네디보다 낫다고 확신했을 것이고 케네디를 엄청나게 경멸했을 것이 당연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케네디는 특권층 자녀로 태어나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데 반해, 닉슨은 하류층 자녀로 태어나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점이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입학이나 정계이력까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 정치계의 전설로 남았고, 닉슨은 미국 정치사의 흑역사가 되었다. 결국 정치적 유산도 대조적
이후 눈물을 머금고 들어간 휘티어 대학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여 전액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 로스쿨로 갔다. 졸업후 FBI에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 해군 장교로 지원, 보급 병과 장교로 임관해 일명 솔로몬 제도의 햄버거 가게라는 PX 항공대 소속 창고 담당 보급 장교로 복무했고, 소령으로 전역했다. 닉슨 스스로는 전투에만 참가하지 않았지 정당하게 군 복무를 마쳤지만, PT-109 격침 사건으로 인해서 전쟁 영웅으로 인식된 케네디에 비해 창고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밀린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저도 군생활을 했습니다가 닉슨의 선거 모토. 전쟁 영웅만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 실제로 케네디가 은근히 "내가 어뢰정 타고 죽다 사는 동안 쟤는 PX보급창에서 꿀 빨고 있었다."는 식의 언플을 했다.
해군 소령 시절의 닉슨. 수장 위의 잎사귀 세 개가 해군 보급병과장이다. 저 계급에 약장이 하나도 없다. 꿀쟁이 맞네.
닉슨은 포커의 대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현역 보급장교였던 시절에 태평양의 그린 아일랜드라는 섬에 "닉스"라는 작은 맥주집을 차려놓고 주로 파일럿들을 상대로 판이 큰 포커 게임을 벌이기도 했다. 닉슨의 포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46년에 닉슨의 하원의원 선거 운동 비용 중 대부분을 닉슨이 전쟁 중에 포커로 딴 돈으로 충당했을 정도다.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50년엔 일약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상대는 전직 브로드웨이 스타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였으며, 최초의 여성 부통령 러닝메이트로까지 거론되었던 민주당 여성 후보 헬렌 더글러스. 그는 더글러스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매카시즘 흑색선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6] 훗날 데탕트 정책을 생각하면 그의 강경한 반공드립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이 짙은 것으로 해석된다. 철저한 정치꾼이었던 셈이다. 여하간 "교활한 딕"이란 별명은 이때 더글러스에게서 얻었다. 1952년, 고작 39세의 나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같이 출마해 1961년까지 미국의 부통령을 맡는다.
사실 이 때도 닉슨이 늘 승승장구만은 아니었다. 그를 당선 직전에서 좌절시킬 뻔한 것이 이른바 "체커스 사건"이었는데, 대선 러닝메이트가 되기 직전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부통령 후보에서 교체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이례적인 전국 TV연설에서 "텍사스에서 온 남자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내 딸들을 위한 체커스(Checkers)라는 코카 스파니엘 애완견 강아지뿐이다. 알다시피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나. 우리는 어쨌든 우리 가족인 체커스와 함께 살고 싶다."[7]라고 말함으로서 인간미를 살리고 문제의 쟁점을 뒤집어버렸다. 뒤의 TV 토론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장면. #
하지만 당선 뒤에는 확실한 승승장구, 1959년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주방 논쟁(부엌 논쟁)"# 등 쇼맨십에서도 인기를 끄는데 성공했다.
3 1960년 대통령 선거
대선 당시 광고(1960년).[8]
현직 부통령이던 1960년 11월, 미국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와 선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표차로는 고작 10 ~ 40만표(0.2 ~ 0.6%) 차이의 석패였다. 하지만 선거인단의 결과는 훨씬 차이가 컸다.
이는 남부 텍사스 출신이었던 케네디의 러닝메이트 린든 B. 존슨의 위력 탓도 있고, 닉슨이 50주를 모두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지키느라 전략적이지 못한 선거에 체력을 소모한 점도 있지만, 그 유명한 TV 토론에서 케네디에게 기세가 밀린 탓이 가장 컸다.
실제로 TV토론 당시 그는 무릎 수술과 포도상구균 감염으로 체력이 극도로 저하되어있었다. 체중도 9kg 감량되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화장이나 조명조정을 거부했다. 수염을 가리기 위해서 한 분칠은 치명적이었다. #
흥미로운 사실은 라디오로 들은 이들은 닉슨이 부분 우세했다고 보았다 카더라. 하지만 TV 토론에서는 닉슨의 식은땀과 중언부언 불안한 태도를 그대로 보았다. 정말 TV 토론이었기에 케네디가 이긴 것이다. 여하간 당시 부통령이었던 그로서는 상대당의 경선 통과 조차 예상되지 못한 인물에게 패한 셈이었다. 뭔가 02년이 겹친다
재밌는건 정작 케네디와 닉슨, 둘의 정치 경력은 1946년 데뷔로 같았고, 닉슨과 케네디의 나이 차는 고작 네 살에 불과했다. 이미지와 얼굴관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하긴. 그는 이미 8년간 익숙해진 부통령이었지만 케네디는 신선한 상원의원이었으니까.
여담으로 일리노이에서 민주당 쪽에서 부정투표- 사망자 수천명의 이름 명의로 대리 투표를 하는 사태 등-가 있었지만 고소까지 가서라도 당선되어도 반쯤 죽은게 될거 같아서 안하고 그냥 수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 만약 26명의 선거인단을 가진 일리노이 등이 뒤집혔으면 닉슨이 가까스로 이길 수는 있었다. (물론 일리노이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1961년 케네디가 취임한 직후 케네디의 취임연설문 작성자이자 비서관이었던 테드 소런슨을 시카고에서 만났다. 닉슨은 대뜸 "그 취임 연설 중 일부는 제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런슨이 "어느 부분 말씀이신지요.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그 부분 말씀이신가요?"하자 닉슨 왈, "아니오. '나는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시작하는 그 부분 있잖습니까?"
심지어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서도 낙선하면서 그는 한방에 "황태자 부통령"에서 "한물간 정치인" 취급을 받았고 은퇴선언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닉슨의 끝은 아니었다.
4 1968년 대통령 선거
절치부심한 그는 다시 6년 후 대선에 출마했고, 당시 린든 B. 존슨의 어설픈 베트남 전쟁 처리 덕분에 사회 안정과 종전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를 등에 업고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된다. 석패할 때와 비슷하게 0.42%의 간발의 차였다.
이 과정에서 닉슨은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중 앞에 등장할 때는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를 위해 구보로 연단 위에 뛰어 오르지를 않나, 밀짚모자에 "NIXO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른바 "닉슨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시대를 앞서간 오빠부대전략 대략 그 이미지는 데뷔 시절의 모자쓴 소녀시대들을 생각하면 된다. OME 선거구호도 "닉슨이 바로 그!(Nixon's the One!)"으로 일관적이고 긍정적이었다.
닉슨의 대선 당시 광고(1968년).
반면 민주당의 후보였던 험프리(Hubert Horatio Humphrey, Jr.)는 "베트남전 폭격 중지"라는 훌륭한 정치적 수완으로 잠시 닉슨을 앞서갔지만 선거의 초점과 선거 구호를 자주 바꾸면서 일관성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네거티브에만 일관한 전략이 문제였다. 이런 선거광고는 tv광고에서 정점에 달했다. 일부 포지티브 광고도 있었지만 대개 닉슨의 말바꾸기(이리저리 도는 풍향계 광고), 닉슨이 당신에게 해준건 없다라는 광고, 애그"뉴"(AgNew) 부-'통령'(New President의 말장난) 조롱, 거품이 터지면서 공약을 까는 광고 등등.. 개별 아이디어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대체 자신이 뭘 하겠다라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험프리가 시종일관 닉슨만 강조하며 까는 광고도 있었다. 이건 뭐 광고비 대신 내주기도 아니고[10] 최종 슬로건 역시 "험프리, 다른 대안은 없다(There's No Altenative)"라는 네거티브한 표현이었다-대안을 생각하는 순간 닉슨이 생각날 것 아닌가!
험프리의 대선 당시 광고(1968년).
무엇보다, 닉슨은 자신의 약점인 TV 공개 토론을 거부했다! 결국 험프리는 대세를 뒤집지 못했고, 닉슨은 대중선거전의 승자로 거듭났다. 당시 선거에 대한 분석. 제3당인 미국 독립당 후보로 나선 조지 월레스가 험프리의 표를 상당부분 갉아먹은 것 또한 닉슨의 당선에 한 몫 했다.
생각해보면, 1968년 경선에서 슈퍼 화요일을 캘리포니아 등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며 승승장구하던 로버트 케네디가 다음날 암살당하지만 않았어도 닉슨은 또 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살아남았으면 케네디에 이어 동생과의 리턴매치. 그라쿠스 형제도 아니고.. 그렇게 그는 (보수성이 옅었던 아이젠하워를 포함하면) 오랜 민주당 정권을 종식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68혁명 등으로 뜨겁던 1968년이 기존 질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평이 있다.
이 선거는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만년 떡밥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당시 벌어진 이 대선의 TV 토론을 입당 사유라고 회고했던게 문제. "나는 당시 자유시장과 자유기업, 그리고 작은정부를 주장했던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라며 "나는 그때부터 주욱 공화당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앞 주석에서 보았듯이, TV 토론은 없었다. 이 사실이 드디어 2003년 뽀록이 났지만, 슈워제네거는 별말 없이 묻어버렸다.
5 72년 재선, 그리고...
대선 당시 광고(1972년).[11]
이후 닉슨은 1972년 선거에 재출마하며 1964년 존슨의 승리에 맞먹는, 아니 민주당 절대 텃밭인 워싱턴 D.C와 매사추세츠만을 내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맥거번을 제치고 연임에 성공한다. 닉슨은 49개주에서 승리하며 득표율 60.7%을 올렸다. # 더블스코어로 발라버리는 M도 없는 개표영상 대한민국에서도 2007년에 이 때와 비슷한 선거가 나왔다 이명박 : 정동영 더블스코어 크리 이로서 32년 이후 근 40년을 지배한 남부 텃밭 + 북부 서민과 소수인종 + 서부의 농민과 지식인 + 중산층을 포괄하는 민주당의 뉴딜연합은 박살이 나고(사실 이미 케네디 때부터 박살이 났지만), 남부의 백인 보수층 + 북부의 중상류층 + 발전하는 서부의 텃밭[12]을 바탕으로 한 공화당의 "남진전략"의 시대가 또 40년간 (조지 W. 부시까지!) 도래한다. 이에 닉슨은 삼선 이상이 점쳐지기도 했지만(헌법을 개정할 만큼 지지받았다는 소리다!)...
1972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에 그가 개입되었음이. 정확히는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1974년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증거는 속속들이 나왔고, 결정적으로 1973년 6월 23일,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FBI는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육성이 공개되었다. 닉슨은 대통령 권한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은밀히 녹음된 테이프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지만 연방대법원에선 만장일치로 [13] "대통령이라도 그건 아니되지!"라고 해서 역관광. (심리에 참여한 8명의 대법관 중 3명은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들이었다. 삼권분립을 느낄 수 있는 부분) 결국 탄핵을 당하기 전에 조건부 자진 사임하게 된다. 정확히는 하원에서 탄핵 소추가 의결되었고 이제 상원에 의한 탄핵 결정만 남은 상황이었고, 상원의 탄핵 결정이 거의 확정적인 상황에서 후임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알아서 사퇴한 것이다. 대신 사건에 대한 면책특권과 더불어 테이프 내용의 영구 비공개를 요구했고, 의회가 이를 받아들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떠나게 됐다. 그리고 이후 포드가 아예 특별사면을 함으로써 그는 대통령 임기 수행 시절 벌인 모든 법률 위반 행위에 대해 완벽한 면책을 받게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만약 자신이 탄핵 당하면 자신이 폭주해서 해병대[14]를 출동시켜 의회를 점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국방장관에게 이에 대한 대비책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 후 뉴욕과 뉴저지 근교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는데 이 때 낸 책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1977년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 대통령이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정신줄 놓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웬일로 클린턴은 부시는 물론 밥 로스에게도 패배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다가 보기좋게 빗나가는 꼴을 보았다.(...) 1994년 뇌졸증으로 사망해 캘리포니아에 묻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Help"였다고(...).
6 평가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수단이 구리면 망한다는 민주주의 정치원칙의 표본. 사실 본인도 사임했으니 결과도 구린걸지도...
베트남전 개입 중지와 냉전 완화와 데탕트 등 한국전쟁 후 가장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사임을 했기에 닉슨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낮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다. 그래도 1990년대 들어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고 중국과의 수교 등으로 냉전에 해빙기(데탕트)를 가져오게 한 외교적 성과 덕택에 조금씩 평가가 올라가는 듯도 보이지만 여전히 닉슨하면 워터게이트요 워터게이트하면 닉슨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를 "닉슨 쇼크"로 무력화시킨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금본위제도 망했어요 즉 1971년 8월 15일을 기해 미국 달러의 금태환을 거부하고 USD 자체를 본위화폐(기축통화)로 만들어 버린 것.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아폴로 계획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미 금본위제를 무시하고 달러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감지한 서유럽에서 국채 변제를 달러 대신 금괴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던 미국은 결국 금본위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금본위제 폐지의 원인이 닉슨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닉슨의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치적 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했을 때 잠깐 동아시아 탐사를 돈 적이 있었다. 그 때 박정희는 그를 '끝난 사람' 취급하고 오찬 대신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쫓아내 버렸는데, 닉슨이 대통령이 된 후 주한미군 철수 등 역풍을 제대로 맞는다. 박정희가 미국 방문했을 때, 백악관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야 했다고...이래서 망한 사람(?)도 다시 봐야 한다. 존슨 때의 화기애애했던 한미관계를 생각하면.. 안습.[15]
그의 가장 큰 치적은 베트남 전쟁 개입을 중단하여 더 이상의 인명과 재산손실을 막았다는 점과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과의 평화외교를 지속해 냉전을 완화시킨 업적 정도가 있다. 북베트남은 개전 내내 유리한 전략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소극적이었다. [16] 당시 미국의 국력은 더이상 베트남전을 지속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냥 발빼면 패배를 자인하는 셈이 되니 자신의 재선도 위험. 그리하여 닉슨은 전략폭격기부대를 24시간 내내 소련 영공 근처에서 비행시키고 ICBM을 상시 발사 대기시키는 등의 소련을 위협하는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하여 소련이 북베트남을 설득하여 협상장으로 나오게 했다. 말하자면 김정일과 김정은의 스승은 닉슨인 셈.
하지만 이렇게 미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지만, 그가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후 미국의 리더쉽에 공백이 일어나자, 북베트남은 휴전협정을 파기하고[17] 바로 공세를 폈고,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캄보디아가 무너지면서 생긴 폴 포트의 킬링필드도 그렇고... 사회주의 확산을 막는다며 살바도르 아옌데를 쫓아내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다는 큰 흑역사도 있다.
1972년 2월 중국 방문에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모습. 이 사진은 1970년대 데탕트 시대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당시 닉슨의 중국 방문은 골수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공산진영 지도자와 회동, 관계개선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말은 특정 정치지도자가 그동안의 이념적 선호도와 상반되는 뜻밖의 정책적 선택을 하는 경우, 특히 오랜 적대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 문구가 되었다.[18]
민주당 행정부에서 시작한 아폴로 계획의 결실도 그의 집권 직후인 1969년 7월에 이루어졌다. 이때 "천지창조 이래 최고의 업적"이라고 말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빼먹었다는 이유로(...)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한마디로, 운발 하나는 끝내주는 사나이. 마지막 순간 빼고
1929년 시작 되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5년 본격 도입한 노인의료보험(메디케어), 주정부의 빈민부조(메디케이드) 의료보험 제도를 완전 폐지했다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19],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보험은 멀쩡히 잘 남아있으며, 도리어 닉슨은 "1973년 12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만들어낸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Act of 1973)를 서명을 함으로써 양당통합을 이끌어낸 성과가 있다." # 링크 닉슨은 "모두 3억 7천만 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HMO 가입 확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하고 선불정액제 보험을 금지하는 주들의 법률들을 무효화하였으며, 25명 이상 노동자를 고요하고 있는 기업 중 의료보험 급여를 하고자 하는 기업은 반드시 HMO를 선택사항 중 하나로 포함하도록 하였다." # 출처
HMO의 특징은 일반의 네트워크 내에서 저렴한 보험을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대신 전문의를 사용할 경우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20] 이는 개인이 가입을 선택하는 보험으로, 뒤를 이은 지미 카터는 1976년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주장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사실 닉슨은 레이건 이후의 공화당과는 많은 정책적 차이를 드러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의외의 면모랄까. 사실 닉슨은 대통령으로 모셨던 아이젠하워,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포드, 그리고 그 부통령으로 재임한 넬슨 록펠러로 이어지는 공화당 온건파 라인의 대표주자였고, 레이건은 64년 대선 후보로 나온 배리 골드워터부터 시작된 공화당 과격파 라인이라서 둘은 차이가 꽤 크다.[21] 물론 한때 공화당 주류라고 불리던 저 온건파 라인은 닉슨 본인의 병크 덕분에 풍비박산 나서 이젠 흔적도 없다.[22]
예를 들어, 닉슨은 환경주의자이자 총기 소지 제제론자였다. 총기 소지 제제가 로널드 레이건 이전 공화당의 오랜 당론이었다는 거야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고, 더 압권은 환경주의다.
닉슨의 환경주의는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부를만큼 뚜렷했으니, '환경보호', '환경의식', '생태학'이란 단어를 미국 정치계에 들여논 초기 인물 중 하나가 닉슨이었다.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Natinal Environmental Policy Act: NEPA)을 제정, 1970년에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과 환경개선위원회(Council of Environmental Quality)를 창설했으며, 같은 해 대기정화법(Clean Air Act: CAA)을 확장했고, 1972년에는 수질오염방지법(Federal Water Pollution Act: FWPC)을 대폭 개정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임기 후반의 에너지 위기(오일 쇼크)로 빛이 바래게 된다.[23]
물론 비판도 있다. 취임 직후인 1969년 1월 28일의 산타 바버라 오일 유출 사전 이후 1970년대 미국 전체가 환경이슈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자[24] 닉슨이 이에 발맞춰 재선목적으로 환경정책을 진행시켰다는 평가다. 하지만 적어도 닉슨이 그런 시대의 흐름에 기민하게 앞장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정책에서는 케인즈주의에 가까워[25] (보수적인) 통화론자와 재정균형론자들에게 닉슨은 정부재정지출을 늘렸다고 까이는 인물이다(...) 공공 의료보험은 폐지했으나, 재선을 위해 한 부모 가정의 부모(즉, 미망인 등)에 대한 연금수혜 비율을 100%로 확대했고, 고령자와 장애인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보조제도도 도입했던 것. 의료보험 제도의 개혁과 베트남 철군에도 불구하고 닉슨의 재정확대 정책은 아이젠하워 이래 최대였다.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 정책의 폐혜는 항목 참조.
아내인 팻 닉슨과는 동갑. 1938년에 만나 1940년 6월에 결혼했다. 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애편지가 공개되었다. #
7 대중매체에서의 닉슨
7.1 퓨처라마
퓨처라마에선 유리병 안의 대가리로 등장해서 온갖 악행을 다 펼친다. 닉슨 본인도 생전에는 '교활한 딕(Tricky Dick. 딕(Dick)은 Richard의 애칭)'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
퓨처라마에서는 필립 J. 프라이의 팔을 물어뜯고, 플래닛 익스프레스 앞에서 경찰을 불러 레이저 쑈도 해주시고 하다가 벤더의 몸통을 사서 대통령 선거에 나간적이 있다. 벤더는 몸통을 찾기 위해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고 있는 닉슨에게 가고, 닉슨은 그들에게 망언을 해버린다. 망언 테이프와 몸통을 교환하는 협정이 체결되었고, 몸통빨로 가던 닉슨이 떨어질줄 알았는데,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얻어 3표차이로 선거에서 이겨 지구 대통령이 되었다.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이후 에피소드에선 보이지 않는다. 부통령으로 스피로 에그뉴의 몸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후 릴라일행에게 끔살당해 이후 애그뉴 몸통의 클론을 데리고 다닌다.
3000년도에 지구 대통령 자리에 오른후 3012년까지 대통령 직을 먹었으며,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돈까지 뿌린 정황까지 있다. Dicision 3012에선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 벤더를 고용하고, 외계인 배척을 위해 다이슨 펜스를 설치하여 모 로봇이 주도한 로봇의 지구 지배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이걸 막기 위해 인류는 구원자를 보내 리처드 닉슨을 내쫓으려고 지원자 한 명을 과거로 보내게 되는데...
이외에도 지구를 저항도 없이 오미크로니안에게 바친다든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별을 정ㅋ벅ㅋ 해버리는등 여러가지 뻘짓들을 하고 있다. 직속 부하론 잽 브래니건이 있다(...)
심슨 가족의 대표 찌질캐 밀하우스는 이름이 아예 이 닉슨 대통령의 미들 네임을 따고 있다...
7.2 24
미드 24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찰스 로건은 닉슨으로부터 모티브를 딴 캐릭터다. 다만 외모와 윤리관(?)만 빌려왔을 뿐이며, 닉슨과 달리 로건은 민주당원인데다 굉장히 무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7.3 그 외 작품
닉슨을 다룬 영화로는 <뷰티풀 마인드>, <천사와 악마>의 감독인 론 하워드의 작품인 <프로스트 vs 닉슨>이 있다. 사임 후에도 자신이 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은 닉슨에게 1977년 tv 인터뷰로 도전장을 던진 데이빗 프로스트란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며, 본래 연극으로 제작된 적도 있었다.[26] 하지만 미국 정치를 다룬 작품이고, 말초적인 재미를 주는 영화는 아니라서 한국에선 그렇게 흥행하진 못했다. 그래도 이듬해인 2009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등 나름대로 좋은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구하긴 힘들지만 1995년판 "닉슨(Nixon)"이란 영화도 있다. "JFK" 등의 감독인 올리버 스톤의 작품. 자그만치 3시간 12분의 대작이지만, 그만큼 볼 만한 영화. 여기서 그는 그리스식 비극 연극의 주인공처럼, 한 명의 나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으로서 그려진다. 예컨대 주립대의 캄보디아 폭격 반대 시위에서 4명의 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자 "철 모르는 애새끼들! 뭣도 모르고 까불더니 꼴 좋다!"라고 측근들 앞에서는 큰소리 뻥뻥 쳐놓고는, 혼자 있을 때는 "내 형이 죽을 때 그 애들하고 나이가 같았는데..."하면서 매우 울적해하는 식이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의 닉슨을 강조한 영화이기에, 그의 약점을 숨기지 않음에도 (스톤 자체가 닉슨에게 호의적일 건덕지가 없다.) 그 자체로 지나치게 우호적이란 시각도 있다. 안소니 홉킨스의 사실적인 연기가 돋보인다고. 평은 # 여기 참조.
로버트 올트먼 감독이 제작, 연출한 은밀한 영광(Secret Honor, 1984)이라는 영화도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매그놀리아로 잘 알려진 필립 베이커 홀이 닉슨을 연기하며, 영화는 1인극이다. 시작부터 픽션임을 강조하며 심상치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약 90분 동안 혼자서 닉슨의 살아왔던 삶과 여러 정치적 행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변명들을 마치 광인같은 모습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홀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인 영화이며, 국내에는 잘 알려지진 않았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나온 DVD가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중국과의 친선 탁구시합을 한 검프를 초대했다. 검프에게 어디에 묵냐고 묻자 검프는 "에봇인지 뭔지 하는 호텔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닉슨은 자기가 더 시설 좋은 호텔을 안다며 그 호텔에 검프를 묵게 했다. 그런데 그 호텔이 워터게이트 호텔. 그날 밤 검프가 묵고 있던 호텔 건너편에서 플래시 불빛이 비치는 바람에 잠을 못 자던 검프가 관리인실에 전화해서 "건너편 건물에서 두꺼비집을 찾는지 잠을 못 자겠어요. 그 방에 관리인 좀 보내주세요."라고 전화해버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닉슨은 사임. 닉슨 딴에는 검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쫓아버린 셈이다.[27] 비슷한 예로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에서는 궁전 욕탕이 고장나 "배관공[28]을 보내달라"라는 팬윅 공국의 요청으로 호의를 베풀다가...
왓치맨에서는 닥터 맨하탄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헌법을 개정하면서 무려 5선[29]을 성공한 1985년을 그리고 있다. 본격 미국판 10월 유신 작품 속의 미국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장치. 영화 백투더퓨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사진 참조). 배우는 로버트 위스든으로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영국의 SF 드라마(영드) 닥터후에서는 11대 닥터, 에이미 폰드, 로리 윌리엄스, 리버송 일행의 도움을 받아 사일런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때 아폴로 계획이 사일런스 퇴치에 활용되었는데, 타디스를 타고 닥터와 함께 51구역, 나사에 동행해 닥터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극중에선 닥터에게 협력을 아끼지않으며 타디스에 같이 타기까지하며 꽤 좋은 이미지로 내내 나왔는데 나중에 헤어질떄 닥터에게 자기는 역사에 기억될것인지를 물어본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해리 터틀도브의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카메오로 출연한다. 대부분 정직한 딕(...)이나 정직한 리처드로 나온 사람이 이 사람의 패러디.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는 나치 좀비 맵인 'FIVE'[30]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상당히 겁많고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슈퍼맨 레드선에서는 직접 나오진 않지만 1963년에 대통령으로 있다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기껏 케네디 이기고는 대신 죽었나보다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이 이전 같지 않다고 한다.
버틀러에선 존 큐잭이 연기하는데 딱 세번 등장한다. 케네디를 그 벼락출세한 부잣집 애새끼라고 욕하면서 주인공에게 "날 찍으면 당신네 흑인들 삶도 훨씬 나아질 거요"라고 뱃지를 나눠주면서 투표를 구걸 권유하는 장면과 대통령이 된 후에 블랙 팬더 당을 개발살낼 것을 지시하는 장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려서 괴로워하는 장면을 끝으로 퇴장한다. 거기서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31]이 영화에 등장한 다른 대통령들은 모두 크든 작든 흑인 인권 개선에 한 발자국씩 나가는 일을 했으나 닉슨만은 그런 게 없다. 처음 나올 때 흑인 직원도 백인과 동일합 급여를 주겠다는 약속도 그가 아닌 레이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니, 위선으로 묘사된 셈. 한국판 성우는 장민혁. 장민혁의 중년 연기를 들을 수 있는 부분.
각종 영화에 나오는 리처드 닉슨의 모습을 분석한 한국일보의 기사다.#
본격 정치풍자 개드립 독재 시뮬레이션 트로피코4에서는 닉 리처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모습도 기자회견에게 질문하는. 본 항목 맨 위에서부터 두 번째 사진의 캐리커처 판이며, 그가 시도때도없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I'm not a crook!'. 처음에는 네브래스카 주의 주 의원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에게 이것저것 지원을 해주다가 부통령이 되더니, 마침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마자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는 엘 프레지덴테를 케네디 대통령의 살해범으로 지목한다. 이 양반과 더불어 몇몇 국제 인사들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가카는 결국 세계를 뒤엎을 계획을 세워 끝에는 이 양반이 케네디의 살인범이라는 증거를 소련에게서 입수해 전 세계에 방송하고 성난 FBI들이 잡아간다.(...) 물론 엘 프레지덴테를 내내 괴롭히고 방해하며, 심지어는 핵 미사일을 트로피코에 떨구기까지 한다.[32] 하여간 그동안 개드립과 가카를 괴롭혀온 대가로 죽은 듯 싶다.
그런데 확장팩 모던 타임즈에서는 다시 살아나서 플레이어와 협력하자고 50000$라는 거금을 달라고 한다. 이것을 던져주면 사라지는데 나중에 플레이어의 조력자가 나타나서 그는 원래 죽은거 맞다라고 확인사살을 해준다. 과연 예토전생당한 뒤에도 사기꾼은 사기꾼이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에서 나오는 미국 대통령 마이클 듀건이 이사람을 모델로 했다. 다만 시기를 잘만나서 워터게이트 까진 안일어났고 임기는 무사히 마친듯. 근데 포스가 좀 찌질하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매그니토와 레이븐의 깽판을 저지른 소식을 듣고 뮤턴트에 위협을 느끼고는 센티널 프로그램의 예산지원을 승인한다. 그리고 센티널 시범식때 참석했다가 매그니토에게 조종당하는 센티널에게 죽다가 살아나서 백악관 벙커로 피신했으나 매그니토는 벙커를 통채로 뜯어서 앞마당에 내놓는다. 그리고 매그니토가 경호원들의 권총을 빼앗아서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을 겨누자 닉슨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서 자신을 죽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위의 이미지와 아주 많이 다르군 그러나 사실 나온 사람은 닉슨으로 변신한 레이븐이었고 진짜 닉슨은 이 상황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심지어 닉슨이 나오는 오페라(!)도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 존 애덤스의 1987년 오페라 데뷔작인 <중국에 간 닉슨>(Nixon in China)에 주연으로 등장한다. 1972년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소재로 했으며, 당연히 영부인 팻 닉슨, 헨리 키신저, 마오쩌둥, 장칭, 저우언라이도 함께 등장한다. 정치적인 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분위기는 가벼운 편이다.
워치맨이나 퓨처라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파시스트", "독재자" 등등의 비판을 많이 듣던 인물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이자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의 원작 소설가로 유명한 헌터 S. 톰슨은 닉슨이 죽자 추모기사를 썼는데, 말이 추모기사지... 제목부터가 He Was a Crook (그는 사기꾼이었다).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하게 시체를 바다 저 멀리에 수장시켜야 한다 고 이야기할 정도.
8 일화
우왕 님 부럽 중국 방문 중 저우언라이와 함께. 닉슨이 저러고 있는 이유는 저 식사 도중 저우언라이에게 처음으로 젓가락질을 배웠기 때문이다. 젓가락질을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 이때 건배주가 마오타이주였는데 마시고 눈물을 찔끔짰다고 알려진다. 대륙의 맛 설마 이 자식들이 날 독살하려고? 라고 생각했을지도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을 대단히 존경해서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윌슨이 사용한 책상을 백악관으로 가져 왔는데 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항상 닉슨의 팔꿈치에는 책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너무 낡은 책상이라서 그랬는지 백악관 직원이 마호가니로 새롭게 꾸몄는데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그 직원을 갈궜다.
"빌어먹을.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했나? 난 다른 대통령들처럼 바로 이 자리에 나의 흔적이 남기를 원한단 말일세!"
물론 흔적을 크게 남기기는 했다. 워터게이트로.
음모론 쪽에서는 케네디의 암살 배후로 지목하기도 한다.[33] 근데 텍사스 석유회사 출신이라 그런지 존슨도 지목된다;; 그냥 개나소나 암살로 이득봤으면 지목되는 분위기..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에 시비를 걸었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발전소를 끊기면서 미국판 잠가라 밸브에 굴욕을 당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65년의 일이다. 항목 참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손자가 이 사람의 사위다. 본격 외척정치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아이비리그 전반에 매우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닉슨에선 모두 잘난 하버드 놈들을 운운하며 이게 다 하버드 출신들 때문이다 라고 까고 왓치맨에선 하버드 대학이 핵공격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 두고보자고 라고 킬킬거린다.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1974년 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려는 계획으로. 무직자였던 새뮤얼 빅(Samuel Byck)은 닉슨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34] 여객기를 납치하려 했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암살(기도)범들 중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뮤지컬 어쌔신에서는 꽤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9 여담
KBS의 前 기상 캐스터인 이익선은 1968년에 태어났을 적에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닉슨의 "슨"을 본따서 "선"으로 이름 끝글자를 정했다고 한다.
10 관련항목
- ↑ 워터게이트 사건의 담당판사.
- ↑ 원문: “I will announce tonight however, two I think important additions to the Administration. The first, Mister Rumsfeld is coming into the White House as a Counselor to the President on a full time basis and Mister Frank Carlucci will take over as the Director of OEO. He is his deputy and has done an outstanding job in that particular position and I believe in promoting a man who has done such a job to the top spot. Mister George Bush, the Congressman who was defeated in his bid for the United States Senate, I talked to yesterday and I’m very happy to report that he has agreed to take a top position in the Administration. That will be announced tomorrow at Mister Ziegler’s eleven o’clock conference. Mister Bush will be there.”
- ↑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부인하며 한 말. 지금도 닉슨을 상징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구글 검색창에 이 말을 쳐 보면 바로 리처드 닉슨이 뜰 정도.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저서에서, 이 말을 한 순간 닉슨은 전국민에게 "사기꾼"으로 남게 되었다면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 ↑ 케네디는 고등학교(홍정욱 前의원이 나온 초트 스쿨) 졸업성적이 하위권이었다. 아무리 특권층만 다니는 엘리트 사립학교라고 해도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조지 부시나 이런저런 이들을 보면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은 특권층의 입학이 아주 쉽다. 교육이 출세의 유일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 불공정은 미국에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 ↑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자기보다 공부 못하던 친구가 운좋게 집안 빽으로 명문대를 입학했는데, 자기는 그학교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서 장학금 주는 지잡대로 갔다고 치면 그 사람이 느낄수 있는 컴플렉스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 ↑ 이건 알저 히스 사건에서도 재반복된다.
- ↑ 후에 체커스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닉슨 사후 부부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 ↑ 미드 매드맨에서 이 광고와 케네디의 광고를 비교해서 보는 장면이 있는데 어휴 ㅉㅉ 당장 꺼버려 이런 반응이 튀어나와버린다 이유는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 진부한 내용이라서
- ↑ 같은 일이 2000년 조지 워커 부시 대 앨 고어에서 터졌지만 고어와 부시의 당선을 인정하고 넘어간 것과 똑같은 원리.
- ↑ 2007년 17대 대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모 후보가 되선 안되는 이유만 신나게 네거티브 전략만 쓰다가 사상최악의 대패를 당한 한국의 집권여당 후보에 겹친다.
당내 경선에서 더 많은 전력을 소모했다는 것까지 동일. - ↑ 45초부터 나오는 음악은 미 대통령 찬가(Hail to the Chief)다. 한국에서 대통령 입장때 사용하는 빰빠라빰빠라 빰~ 빰빠밤!의 원조격 음악.
- ↑ 닉슨과 레이건 모두 서부 켈리포니아에 지역구를 두었다.
- ↑ 8-0.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은 닉슨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 심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 ↑ 미국 해병대는 대통령이 의회 승인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군대로, 이를테면 대통령 친위대인 셈이다. 백악관이나 외국 주재 미 대사관의 경비를 해병이 담당하는 것도 이 때문. 대통령 전용 헬기의 호출 부호가 마린 원(Marine One)인 것도 이 때문.
- ↑ 사실 링크에도 나와 있듯 한 나라의 부통령이었던 사람을 아무리 정치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푸대접하는 건 엄연한 외교적 결례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제쳐두더라도 아주 제대로 병크를 터트린 것.
- ↑ 현재 탈레반이 미국의 협상요청에 일체 응하지 않으면서 "너희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하는것과 유사했다.
- ↑ 사실 휴전협정은 조인후에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국경지역에서는 계속 남북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휴전협정을 파기했다고 보기도 힘든 그런 상황이었다.
- ↑ 1980년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후반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핵 군비감축에 합의하는 등, 화해 모드로 돌아섰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 ↑ "백악관 자문 존 에릭먼이 의료서비스를 적게 제공하는 만큼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면 알아서 적게 공급할 것이라며 이 제도를 제안했고, 닉슨이 좋다고 해서 통과됐다"는 견해다. #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주장
- ↑ 비슷한 경우로 PPO(주치의 중심)이 있다. HMO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성장하다가 이후 PPO, CDHP(소비자 주도 건강플랜), EPO(전속의 플랜) 등이 등장하면서 비율이 줄어들었다. # 건강보험의 진화와 미래, 보건미래포럼 HMO는 초기엔 비영리였지만 이후로 영리 HMO가 늘어나면서 우리가 아는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닉슨이 후대의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
- ↑ 넬슨 록펠러는 십수년 동안 뉴욕 주지사를 지낸 인물로 바로 그 록펠러 가문 출신이다.
- ↑ 대표적인 일화로 넬슨 록펠러가 1980년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주저하고 있을때, 기자가 "그 잘난 주류의 도움 좀 받으면 쉬울텐데 뭘 고민하십니까?"라고 비아냥 거리자 자신을 가리키며 "이게 그 전부라네"라고 대답했다고(...)
- ↑ 닉슨 이후 카터는 대단히 환경 문제에 적극적이었으나 지나쳤다는 평가를 받고, 레이건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두드러지는 반反 환경 대통령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 ↑ 1970년 4월 22일의 지구의 날 행사가 대표적이다.
소일렌트 그린! - ↑ 오히려 지미 카터가 경제정책에서 더 보수적이었다
- ↑ 프로스트는 월터 크롱카이트, 마이크 월리스(60분)같은 시사 보도 언론인이 아니라 주로 토크쇼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손석희가 아닌 김구라가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특집 인터뷰를 한 셈.
- ↑ 물론 사실과 뒤섞은 영화적 허구.
- ↑ plumbers; 실제론 특별 도청팀의 별명이었다.
- ↑ 영화판에서는 3선 대통령이다.
이거나 그거나종신 대통령인가 - ↑ 펜타곤을 배경으로 한 맵이다.
- ↑ 이 때 시중드는 주인공과 대화를 원하는 눈치였으나 주인공은 무미건조하게 더 필요한 거 없냐고 업무상 할 말만 하여 은근히 반감을 드러낸다.
- ↑ 여기에 대한 트로피코측의 대책이라는 게 참 대단한데, 풍력발전기 10개를 세워 그 동력으로 트로피코의 위치를 바꾸는 방법으로 핵 미사일을 피한다!
- ↑ 왓치맨에서는 코미디언을 사주해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선 오프닝에서 코미디언이 숨어서 케네디를 저격한 진범이라는 장면이 나온다.
- ↑ 이전에도 시크릿 서비스에 협박편지를 보내거나 조너스 솔크나 레너드 번스타인 등에게 녹음 테이프를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