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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The rape of Belg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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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강간을 묘사하는 삽화 |
1914년 9월, 영국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 벨기에 강간은 영국의 참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훗날 미국의 참전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통행 금지
파괴된 루뱅 대학교와 루뱅 도서관
관련 영상.
관련 영상2. 0:38부터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있으므로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
넓게 보면 1914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독일 제국이 벨기에를 가혹하게 수탈하였던 식민 통치 방식을 일컫는 말이지만, 좁게 보면 1914년 8월 당시,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사건들을 통틀어서 말하는 사건이다. 아르메니아 학살과 함께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 저지른 대표적인 전쟁범죄였다.
2 원인
1914년 6월 28일 터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한테 선전포고하므로써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당시 독일 제국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같은 게르만 민족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 및 상호 방위조약을 이행하고자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속내는 독일 역시 동유럽과 서유럽을 독일의 지배 하에 두고,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광활한 식민지를 빼앗고 세계 제국이 되고자 하는 야심에 흠뻑 젖어 1차 대전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독일 제국은 일찍히 알프레드 폰 슐리펜이 세워둔 슐리펜 계획 하에, 대다수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보내 프랑스를 6주 안에 항복시키고 곧장 그 병력들을 동부전선으로 보내 러시아 제국을 항복시킬 생각이였다. 따라서 프랑스를 빠르게 항복시키기 위해 파리를 어떻게해서든 빠른 시일 내에 손에 넣고자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쳐들어가기보단 차라리 중립국이였던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쳐서 손에 넣고 프랑스 동북쪽 방면으로 병력을 몰빵하여 파리로 들이치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개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벨기에군을 초콜릿 군인(chocolate soldier)이라 격하하며, "며칠이면 금방 무너질 나라" 라고 생각하여 벨기에군의 저항 자체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생각 외로 벨기에군은 매우 강렬하게 저항을 하였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벨기에군의 예상 못한 항전에 제국군은 크게 놀라고 격노하게 되었다. 제국군은 프랑스군의 항전이 거셌으면 거셌지 설마 벨기에 같은 콩알만한 나라가 저항을 하면 얼마나 할까 하고 아예 무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설상가상으로 루뱅(Leuven)이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 병사 하나가 어디서 온지 모를 총알 하나에 제데로 헤드샷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작스럽게 병사 하나가 즉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제대로 공황상태가 온 루뱅 주둔 제국군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고,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범인은 바로 벨기에인 빨치산이라고 확신을 하게 된다. 날이 밝자 제국군은 루뱅 시에 살고 있었던 모든 민간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총이나 쇠붙이를 만진 흔적이 있거나, 군복을 입은 경험이 있는 자들을 죄다 끌어내 축출하였다. 그리고 딱히 뾰족하다 할 증거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총살한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간밤에 제국군 병사를 쏴죽인 사람이 벨기에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학계에 따르면 밤에 피아식별을 잘못하여 벌어진 오인사격일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한다. 즉, 명백한 증거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상황을 판단하여 애꿎은 목숨들을 빼앗았다는 얘기.
아무튼 루뱅에서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제국군은 벨기에의 도시들을 점령한 이후에 벨기에 민간인들 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활동했었던 유명 저격수 "프랑 티에르" 라는 자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하면서, 심지어 가톨릭 성직자들까지 인질로 삼아 죽이고, 논밭을 짓밟고, 마을마저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론 이 사건의 명칭 그대로 민간인 여성에 대한 강간도 일삼았다.
여하튼 이 끔찍한 사건으로 사건의 최초 시발점이 일어난 루뱅에서는 380여명이 살해당했고, 유서깊은 벨기에의 전통 대학교였던 루뱅대학교가 파괴되었고 그 학생들도 학살당했으며, 도서관까지 방화시켜 버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디낭(Dinant)에서는 676여 명의 무고한 인명이 살상당함은 물론 민가 750여채가 파괴 및 방화당했다. 그리고 벨기에 전역에서 1914년 한 해에만 1000여 명의 벨기에인들이 죽임과 강간을 당했다. 벨기에 인구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고, 당시의 벨기에 인구는 지금보다 더 적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한 해에 천 명 이상이 죽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1918년 11월 11일. 패망하는 그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벨기에를 수탈하였으며,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막판에는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기 위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최대한 벨기에라는 그 작은 나라를 쥐어짜냈다.
3 뒷이야기
- 벨기에도 뭐 이 학살이 벌어지기 겨우 몇 해전까지도 콩고나 르완다에서 더 악랄하게 쥐어짜고 국왕인 레오폴드 2세부터가 아프리카에서 벌이던 짓이나 봐라, 그리고 그 레오폴드 2세를 찬양하고 그의 악랄한 학살과 약탈을 잊어버리고 아직도 해당 피해국가에게 국가적인 사과도 생략하는 벨기에가 당한 거 치고 별거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 학살에 대하여 벨기에에게 학살당한 피해를 입은 콩고나 르완다에서는 역시 같은 백인이 학살당하자 유럽 놈들이 저렇게 흥분하고 이렇게 거론한다며 이를 갈고 분통해한다라고 극도로 부정적이며 이런 명칭에 대하여 아프리카 강간이나 대학살이니 명칭조차도 없고 모른척한다면서 당시 유럽 및 백인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벨기에 민간인이 죽은게 샘통이라고 볼 수도 없다.
- 2001년 5월, 당시 독일의 국방차관이였던 "발터 콜보브(Walter Kolbow)" 는 이 학살 사건에 대해 벨기에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하였고, 유족들과 그 후손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관련기사. 독일의 과거사 반성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
- 이 사건으로 인해 아직도 벨기에의 루뱅과 디낭 등 다수 지역에서는 하켄크로이츠는 물론,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 또한 엄격히 게양이 금지되고 있고, 게양할 시,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 1914년 당시, 벨기에 강간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자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 사건을 프로파간다로 사용한다. 즉, "이런 야만적이고 미개한 기본적인 인권조차 모르는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너희들의 임무다."라는 취지의 모병 포스터로. 다만 영프군은 "독일군이 이 때 벨기에에서 아기를 잡아먹었다"라는 상당히 과장된 거짓말로 이 사건을 포장시켰는데, 물론 당시 연합국 병사들과 민간인들도 그 말을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이미 독일군이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는 외부에 알려진지 오래였고 그것만으로도 연합군이 제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는 데는 충분했다. 참전을 망설이던 영국이 이 사건을 알게 된 이후로 망설이지 않고 참전했던 사실과 미국조차 1917년에 벨기에의 강간을 들먹이며 "훈족들을 쳐부수러 가자!" 라고 했었던 사실을 보면, 얼마나 이 사건에 대해 연합국이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다.